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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이사야 25장 6 ~ 9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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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관점  

 본문은 하나님의 승리와 그분의 통치가 온 땅에 가득할 것이라는 약속에 관한 것이다. 이런 종말론적 희망은 부활절과 고난 주간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기독론적인 접근을 하기 전에 본문의 문학적 배경을 살펴보며 더 넓은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본문은 열방에 내릴 심판의 선언 속에 포함된 찬양의 한 부분이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 내릴 심판에 관한 예언 후 24장은 이들 나라의 땅과 백성에 내릴 심판에 관한 묵시적 묘사를 하고 있다. 주님의 날은 무엇보다 심판의 날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들이 제거되고 정화된다. 그 날 하나님은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신다.(24:21) 정화하는 심판이 있고 난 뒤에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24:23) 이와 같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영광(고난와 죽음의 종말, 평화와 정의의 통치)이 아무 값을 치름 없이 (우리,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이 치러야 할 값)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을 하지 않고 시온 산에서 다스리기를 원한다. 기독론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고난과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한다.

 오늘의 본문이 9절에서 끝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비성서적 기대의 표시가 아닐까? 그러나 다음 절을 보라.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모압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 실제적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압이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의 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슬픔과 죽음의 세계이다. 본문에 나오는 죽음은 개인의 삶의 종결을 뜻할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7, 8) 눈물을 나게 한 세력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바로 이 세력을 삼켜버리시고, 슬퍼하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위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위로, 이 승리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값을 치르고야 온다. 하나님의 통치라는 영광의 선물도 마찬가지이다. 분명 성경에는 <온 세상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거역하는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개인, 제도 등> 사이의 긴장이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이런 긴장 속에서 고난(하나님의 고난,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과 교회의 고난, 세상의 고난)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죄와 죽음을 참는 값은 모든 피조물에 의해서뿐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도 치러진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제일 좋은 음식과 잘 익은 포도주가 가득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이 잔치는 이 땅에서 모든 존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메시아적 축제를 표현하는 적절한 상징이다. 그리고 예언자는 이 축복이 “모든 백성”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말한다.(7) 구원은 보편적이다. 그렇지만 이 선물을 모두 받는 것은 아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긴장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세상의 이런 악, 억압, 죄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의 부활을 통해 그런 승리를 미리 맛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던 희망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희망은 긴장과 역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성서 속의 구원과 심판 사이의 긴장은 <종말론적 희망이 고통, 죽음, 억압이 있는 이 땅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희망을 품고 살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8)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나서 이루어졌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이 세상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날에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라는 약속은 눈물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의 삶을 지속하게 해준다.

 성찬 시에도 우리는 그 날에 하나님이 베풀 잔치에 참여한다. 앞에서 설명한 긴장은 성례전에서도 구현되고 재연된다. 성찬의 물과 포도주는 희생과 죽음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와, 세상 끝날에 있을 천국 잔치를 가리킨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부활절의 성찬을 통해 믿는 자들은 평화의 왕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완전하게 세울 때까지 이 땅에서 믿음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주석적 관점

이 본문과 부활의 복음과의 연관은 이 본문을 처음 읽는 이에게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덮고 있는 가리개를 부수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7-8a)"는 언약 속에서 우리는 "사망을 멸하고 이겨",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전15:54-57)는 바울의 말씀을 듣는다. 우리는 "주 하나님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8)"는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눈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망은 더 이상 없는"(21:1. 4, cf 7:17)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요한의 비전을 떠올린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절의 약속이 "옛적부터 정하신 계획들(25:1)"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변치않는 고백에서부터 연관된다고 믿고 생각한다.

"옛적부터 정하신 계획들"에 대한 언급은 오늘 본문의 첫 도입부를 형성한다. 이사야 24-27장은 25장의 문학적 배경을 형성하는데, 이사야의 묵시라 불리운다. 이런 명칭은 역사가 악한 이들을 벌하시고, 의로운 자들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이룩하실 종말론적 심판의 날을 향하여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관념을 나타내는 다수의 종말론적 모티프들의 존재에 근거한다. 24장은 시작 절에서 심판에 대해 "이제 주님이 땅을 공허하게 하시고 황폐하게 하실 것"이라 소개한다. 27장은 나팔이 울리고 모든 이스라엘이 "나와 예루살렘 성산에서 주님께 예배(27:13)" 하게 될 "그 날의" 약속된 회복에 대해서 알려준다. 심판이나 회복의 날짜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약속과 성취 사이에 축하의 예식을 시작할 만큼 확실한 것이다. 이사야 25장은 먼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로(1-5), 그리고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베풀어주시는 시온 산의 연회로 이 축하에 대하여 서술한다.

이사야 24-27장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어느 시기 즉 이사야서가 완성되기 직전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현재의 본문의 위치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론 이사야 24-27장의 시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특정한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의  어떤 특정 순간에 제한되지 않고 초월적이다. 반면에 책 속에서 이 장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현재의 세계를 규정하는 가혹한 현실 상황 속에서 다가올 세계 회복의 비전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한다. 이런 관념에서, 이 고대의 본문에 대한 다음의 시각은 오늘날 부활절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하나님의 시온 산의 공동식사는 "모든 민족들"에게로 확대된다( 6, cf 3, 5, 7, 8). 식사로의 초대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때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축하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먹고 마셨던(24:9-11)" 식사예식과 이어서 "모든 열방들"이 예루살렘에 나아와 "야곱의 하나님이...그 분의 길을 가르치고 그 길을 걷게 하실 것이다(2:1-4; 4:1-3)."는 예언자들의 선포를 모두 떠올리게 한다. 인종, 종교, 또는 문화에 상관없이 진실을 나누는 모든 이들과 교제하는 비전은, "참 좋은(1:31)"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기대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동시에 오늘 본문에 대해 면밀하게 읽어보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주의깊게 보게된다(cf 25:10b-12 15:1-16:4의 모압사람들에 대한 심판).  

죽음은 모두에게 닥치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슬픔 속에도, 그 슬픔에 매이지 않는 삶을 소망한다(7-8). 포로 생활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리던 슬픔을 옮기시고 눈물을 닦으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다."는 약속은 이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망을 의인화 시켜, 전투에서 싸워 다른 신들을 물리치는 신(, 바알)에 대하여 말하는 고대 근동의 문헌들을 이용한다. 이런 장면은 언젠가 하나님의 역사의 계획들이 완성되었을 때 죽은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이런 류의 소망에 관해서는 사26:19, 37, 12:1-3을 예로 살펴보라.)을 주는 구약의 서술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런 변치않는, 그러나 아직 실현되지 않은 비전 속에서 오늘의 본문은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에게, 깨어짐과 상실을 가져오는 비통함과 같이 삶의 생명력과 약속을 약화시키는 세력들은 끝장날 것이라는 약속을 보여준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신실한 기다림을 요구한다(9). 본문의 마지막 절은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이 "그 날에" 그들의 긴 기다림이 끝나는 것을 감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시대와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8:17; 33:2; 40:31; 49:23; 59:9; 60:9; 64:4). 기다림의 끝을 상상하지만 한편으론 기다림의 명령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정이 끝나기 전에 승리를 선포하며 믿음을 지탱하는 축하 의식들(rituals)은 계속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실하시고 진실하시다"(1) 그러나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성취된다. "그날에", 이 본문의 고대의 청중들과 뒤이은 청자들 모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참된 믿음의 기준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주님. 우리의 하나님; 그를 기다렸더니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9)

 "옛적부터 정하신 계획들" 안에서 부활절의 복음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약속으로 우리의 미래를 공고히 해준다. 현재의 삶 속의 신실함에 대한 명령은 여전히 절박하고, "모든 민족들의" 교제는 아직 미완성이며, 슬픔과 비통함은 여전히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지만,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의 "지금"과 하나님의 "" 사이의 순간 속에서 삶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목회적 관점

 

클레르보의 버나드 Bernard of Clairvaux 에게 헌정된 찬가에서,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의 죽음의 슬픔에 대해, 끝이 없는 동정심에 대해, 어떤 언어를 빌릴 것인가?” 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면 언제나 언어를 빌려와야 한다. 우리가 창조와 구속의 신비, 십자가의 힘, 또는 (이번 주처럼) 부활의 영광을 표현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지와 은유, 시와 노래를 빌려오기 위해 팔을 뻗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를 만난 그들의 경험을 전할 말을 찾기 위해 애썼음에 틀림없다. 말을 무시하는 사건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배신당하고 조롱당하고 처형당한 사람이 이제 살아서 우리와 다시 함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부활의 빛 속에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가 삶을 보는 방식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어떤 의미일까? 초대 교회가 부활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그들의 신앙의 시적 언어로 다시 팔을 뻗었다.

부활절에 이사야 25장과 같은 구약 성서 본문을 사용하는 것(그리고 성 금요일에 종의 노래를 사용하는 것)은 이 놀라운 경험에 목소리를 주기 위한 친숙한 언어를 새롭게 전용하여 제자들이 예수님과 경험한 것에 대한 “증거-본문 proof-text”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아니다. 이 경우 부활은 이사야가 말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해석된다. 하나님은 언젠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고 회복하고 변호하실 것이다.

본문의 비전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6)는 하나님이 “이 산”(시온이나 예루살렘)에서 정성껏 잔치를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풍부한 음식과 잘 숙성된 와인을 먹을 것이다. 이것은 부유층, 왕족 혹은 통치자들의 음식이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복음서에서 많은 사람을 먹게 하는 이야기의 다양한 변형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잔치를 통해 개입하시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은 평소에 잘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음식을 매일 먹는 것이 힘든 사람들, 잘 먹고 싶다고 잘 먹을 수 없는 사람들, 먹는 것 자체가 이야깃거리인 사람들을 위한 비전이다. 우리 중 일부는 이 말씀을 이런 배고픔을 아는 사람들에게 하신 것으로 읽겠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읽지 않을 것이다. 그 장면을 영적인 굶주림을 만족시켜 주시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비전이 모든 사람들과 모든 민족, 특히 매일 현실 속에서 배고픔과 친구로 지내야 하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죽음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룬다(7-8). 어떤 설교자가 부활주일에 죽음과 성 금요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심하게 불평했다. 사람들은 너무 우울하다고 말했다. 오늘은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하지만 오늘이 죽음을 다루기에 적합한 날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말한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다면, 부활은 없다.

부활의 희망은 우리가 죽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부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선포된다. 한 가지 관점은,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우리가 유한하다는 현실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 우리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다. 사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지구에서 생명이 계속되는 유일한 방법은 거의 모든 형태의 생명이 다른 생물에게 양분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지구는 오래 전에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죽음은 창조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좋은 선물 가운데 하나다. 태어날 때가 있는 것처럼, 죽을 때가 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죽음은 인간이 특히 맞서 싸우는 제한 혹은 한계다. 에른스트 베커는 그의 획기적인 저서 죽음의 부정 The Denial of Death 에서 인간의 창의성과 문화 건설은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고 자연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욕망의 결과라는 생각에 대해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창조의 파괴의 일부 혹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신호로 간주된다. 죽음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죽음은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의 결과거나 혹은 죽음의 고통이 죄에 의해 강화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삶에서 죽음이란 악과 파괴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세상에서 죽음의 힘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신호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부활에 대해 말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끝내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힘찬 그림으로 그린다. 죽음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죽음을 분리와 상실로 경험한다. 이 본문이 주는 약속은 언젠가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 그 자체가 파괴될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 약속을 이스라엘이 확인하면서(9) 결론을 맺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온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구원 받았다. 이사야는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사실주의” 안에서 사는지에 대해 성찰하도록 권유한다. 희망적인 사실주의란,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에 대하여 현실적이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깊은 확신을 가지고 소망하는 것이다. 장로교 신앙 선언문 Brief Statement of Faith of the Presbyterian Church 은 “삶과 죽음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단언한다. 이것보다 더 나은 부활절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설교적 관점

 

부활절로 인한 전환

부활절 철야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부활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의 전환(transition)을 잘 보여주는 시인 앤 윔스(Ann Weems)의 시와 더불어 이 말씀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영광/침묵은 아침을 향하고/별 하나가 세상을 비추고/생명으로 피어나는 백합...솔로몬도 못했던.../노래를 계속하라/결코 쉬지말고!/오 천사들이여 슬퍼울지말라!/오 순례자들이여 눈물의 기도를 멈추고/마음을 다하여 달려가라!/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이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은/존재하지 않던 그 분이/영원히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에.1)  

-“두려워 하지 말라!” 여하튼 이 말은 부활절 첫 아침에 빈 무덤에 왔던 여인들이 들었던 말로, 두려움과 절망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늘 성서정과 이사야 25:6-9은 부활절로 인한 전환을 세 가지 관점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골짜기에서 산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고난에서 구원으로이다. 설교자는 이 중에 하나 혹은 모두를 선택하여 사순절의 어두음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부활절의 빛으로 회중들을 인도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골짜기에서 산으로

-분명한 희망을 가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만군의 주님께서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 ( 24:23b)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 25:6a). 이사야가 지녔던 비전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골짜기에서의 고통스러운 싸움을 끝내고 산 위에서 기쁨에 찬 잔치를 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the Temple Mount)으로 불리워지는 모리아 산 (Mount Moriah)은 예배와 축하의 중심이었지만,  동시에 지난 2,500년간 유대인, 기독교인 그리고 무슬림간의 갈등과 파괴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부활절에 설교자는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감람산을 향해 가신 것( 26:30,  14:26, 22:39) 그리고 산꼭대기에서 부활과 승천을 하신 예수의 여정을 기억하면서, 만군의 주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열게 될 그 산을 향하여 가면서 희망과 도움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비전을 선포할 기회를 얻게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사야 25장 본문은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7)라는 약속과 더불어 부활절 두 번째 전환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사야의 예언과 십자가-부활이야기 사이의 병행구조는 모든 공관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 23:44-45a)에서 그리고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 27:51,  15:38, 23:45b)에서이다. 게다가 사도바울도 죽음을 “승리를 얻기 위해 삼키워진 것” (고전 15:54b)이라고 표현하였다.  

-부활절 설교는 이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transition)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낼 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존 클레이풀(John Claypool)이 표현했듯 그것을 강력한 말로 나타내는 것이다: “최악의 일은 마지막 일이 아니다. 역사의 마지막 소리는 소등나팔이 아니고 기상나팔이다”2)  이러한 말들이 우리가 부활절에 선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고난에서 구원으로

-이사야의 예언인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부활절 축하에서 마지막 전환을 가져다 주는데 그것은 고난에서 구원으로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 25:8-9)

-이사야는 이 고대백성들에게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희망으로 인도해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우리 설교자들이 우리 회중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같은 약속과 희망이다.  

-요한은 초대교회 시기 심한 고난과 박해의 때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같은 비전을 보았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21:12a; 35a)

-그래서 우리가 부활절에 선포할 말씀도 하나님께서 고난을 바꾸어 구원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고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선언이다: 고난,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곧 부활하신 주님이자 구원자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용서와 구원, 치유의 능력 그리고 “하늘에 있는 것처럼 동일하게 땅에서도” 희망을 주셨다.

-그래서 부활절 강단이 우리가 발견한 이 복음이 사실임을 다시 울리게 하자!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가정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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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1장 31 ~ 34절  (0) 2023.03.21
민수기 21장 4 ~ 9절  (0) 2023.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