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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이사야 50장 4 ~ 9a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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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관점 

 이 땅에서 신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질문과 하나님의 답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의 본문이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b절에서 하나님이 던지신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손이 짧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약하지 않다는 담대한 주장이다. 신실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지금은 그들이 학대당하고 멸시받고 있지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과 인간의 확신 사이에는 매우 진지한 신학적 고민이 있고, 고난의 종 예언자(Servant Prophet)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증언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신학적, 혹은 문화적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신학적 관점에 의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사에서 모든 것은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말하고 듣는 과정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들음은 말한 바를 접수했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말하는 자의 의도도 확인된다.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것은 그들을 불러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또한 하나님의 예언자의 음성을 따르는 것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했다. 고난의 종 예언자는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믿음의 공동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능한 한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실제로, 본문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우리에게 온 것을 매우 웅변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신다"고 말하고 "내 귀를 깨우치신다"고 말한다.(4)  

  고난의 종 예언자는 하나님의 본성, -인 관계의 본질, 신자들이 살아야 할 신실한 삶에 관해 중요한 내용을 전달한다. 본문이 환희에 찬 절정에 도달하기까지 중요한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provision: 모든 것을 공급하심), 그런 섭리에 대한 고난의 종 예언자의 응답, 믿음의 공동체를 "같이 나서기"(8)로 초대함.

  본문 전체는 하나님이 <사람이 중대한 행동을 하기 위한 역량과 능력>을 제공하시는 분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특별히 생생한 이미지를 동원하면서 예언자가 선생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혀를 공급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이 예언자의 청각 능력을 새롭게 하여 (4:"내 귀를 깨우치시어")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공급은 사람이 신실한 반응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러한 반응은 훈련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구현된다. 이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적절한 반응이다. 이것으로 왜 고난의 종 예언자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는지"(6) 설명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 때문에 고난의 종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었다: 예언자는 비웃는 자들과 악의에 찬 사람들을 대적하는 데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훈육을 받은 후, 예언자는 이제 백성들을 위로할 자리에 서게 된다. 예언자의 말씀을 들은 신실한 사람들은 그들이 삶의 도전에 직면할 때 필요한 용기를 발휘하도록 암묵적인 요청을 받는다. 따라서 신실한 사람들은 고난의 종 예언자가 분명하게 나타낸 것과 같은 웅변적 삶을 구현하게 된다. 그 절정은 어떤 역경이 온다고 해도 "얼굴"을 들어 그것을 담대하게 맞설 수 있게 된다.

  신실한 삶은 본질적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육체 전체가 특별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삶이다. 말하기, 듣기,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해 취하는 몸의 자세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사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늘 귀 기울인다. , 신실한 사람들은 본문에서 예언자가 보여 주었던 존재 양식을 따르게 된다.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며, 가장 모욕적인 사람들과 대면할 때조차도 평정심과 완전한 평안, 확실한 자신감을 갖도록 최선을 다한다.

  또한 우리는 본문에 내포된 교회론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 모이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행동의 이야기에 공감하였기 때문에 모인 것이다. Stanley Hauerwas의 해석에 따르면 교회는 "이야기로 형성된 공동체(story-formed community)"이다. 신자들의 역동적인 삶은 교회라는 특수한 공동체를 형성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필연적으로 드러낸다. 교회는 (고대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신실한 반응을 구현하도록 부름 받았다.

  또 다른 교회론적 교훈이 있다. 앞에서 예언자의 몸의 다양한 지체가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신자의 응답을 구현하는 데 사용된다고 지적했다. 그러한 태도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의 다양한 차원을 규율하는 토대가 된다. 교회라는 몸에 속한 지체에도 그것이 적용된다. 신실하고 훈련된 성도의 삶이 구현되는 장은 신자 공동체의 몸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몸) 안이다. 그러한 훈련된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은 것이다. 더 나아가, 고난의 종 예언자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은 서로를 격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지체가 고통당하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당하기"(고전 1:26) 때문이다.  

 주석적 관점

고난받는 종의 노래? 이사야 40-55장은 책의 앞부분을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지 두 세기가 지난 주전 550-530년 경 바벨론에서 활동한 예언자의 저작이라는 사실을 반영하여 제 2 이사야서로 불린다.  2 이사야서는 몇몇 학자들이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부르는 몇 개의 단편들을 담고 있다. 이 시들은 (42:1, 19; 43:10; 44:1-2, 21, 26; 45:4; 49:3, 5, 6; 50:10; 52:13; 53:11에 여러형태로 쓰이며) 열방들에 정의를 가져다 주지만(특히, 42:1, 44:1-5), 고통과 질병, 억압과 소외(특히 52:13-53:12)를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의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유대전통에서는 이 종을 종종 이스라엘 백성과 연관시키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식한다. 본문 자체에서는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를 가리킨다(44:28; 45:1, 13).

해석자로서 우리는 이사야서 40-55장의 본문이 그 자체로는 종의 정체에 대해 분명한 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해석자들은 종종 하나의 신비(mystery)처럼 다루며 본문의 흩어진 여러 단서들을 종에 대한 완결된 그림에 끼워맞추려 한다. 그러나 마치 (금주의 독서로 단지 이 한 부분만 주어지는) 성서정과가 그렇듯 본문은 계획한 바되로 맞춰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많은 이미지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누가 종인가?"가 아니라 "내가 종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을까?"라는 다른 질문을 하도록 아마도 이끌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사야서의 이 본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공한다.

하나님을 위한 교사가 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주는 교사들이 되어야 한다(50:4). 그런 가르침은 단지 정보를 나누는 것보다 더 큰 것으로서 "지친 사람들이 말씀을 가지고 지탱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종들이 주는 가르침은 단지 교육이 아니라  생명과 힘을 주는 행동의 방식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삶에 부분적으로만 소망과 치유를 주는 그런 말씀들은 너무나 지겹고, 지치게 하며, 낙망시키고 용기를 잃게 한다. 좋은 가르침은 삶이라는 투쟁현장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로 계속 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힘을 발견하게 하여, 정면으로 맞서 버티도록 한다. 종의 가르침은 힘을 주는 행위이다.

종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한다(50:4-5). 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먼저 종은 하나님께 귀 기울여 배우는 것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듣는 다는 것은 사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종의 귀를 열어 많은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신다. 훌륭한 가르침은 확실히 배우는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을 요구한다. 이사야는 종이 단지 교사일 뿐 아니라 먼저 배우는 이가 되야 한다고 언급한다("배우는 이처럼 듣게" 50:4). -교사는 배우는 이들과 동일시하면서, 배우는 이들의 관심사와 세계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배우는 이들 삶 속의 문제들에 개입한다.

종은 다른 이들의 비판이나 거절로부터 무감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자신이 가르치는 이들의 목숨 때문에 선생은 매맞고, 수염이 뽑히고, 모욕당하고 침뱉음을 당하는(50:6) 거절과 학대를 경험한다.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약해지는 길로 이끈다. 이사야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치 않는다고 그의 책에서 분명히 말했다. 사실 예언자의 일은 때로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을 택하게 하는 것이다(6:9-13).

하나님의 종들로서 선생들은 거절과 학대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세상이 먼저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말하는 이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15:18-19) 말한 예수의 주장이 아마 바로 생각날 것이다. 또한 마5:39-41 "누구든지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쪽을 또한 돌려대라."고 말한 예수의 전략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겠다.

예수는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지 말라(12:17)고 한 바울의 금지명령을 연상하듯, 악행을 하는 이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으로 이(5:39-41) 부분을 시작한다. 이 모든 말씀 속에서, 세상의 악은 신자들의 폭력이나 악한 행동으로 인해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은 세상이 악하게 행동하리란 것과 하나님의 종들을 거절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하지만 종들은 다른 방법으로 응수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부싯돌같은 얼굴들. 이사야에게 거절에 대한 종의 적절한 답변은 얼굴을 "부싯돌 같이(50:7)"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세상의 거절과 박해에 대하여 묵묵히 인내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대신에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변호하시고 도우실 것이다라고 말한다(50:7, 9). 종에게 맞서는 이들과 고발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고발자들은 영원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종들은 반대자보다 더 오래 남을 것이다(50:9; 성서정과에 들어가지 않은 9b절에서 보다 다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게다가 하나님이 도우시는 날을 기다리는 종들이 반대에 직면하여 해야할 역할은 인내와 끈기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조언들은 종들이 따르기 어렵지만, 이것이 종을 둘러싸고 있는 악에 대하여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방법이다.

사순절 상황. 부활절 직전 주일의 상황 속에서 예수와 연관하여 이사야서의 이 본문을 읽는 의도는 매우 명확하다. 그러나 사순절은 여전히 이 말씀들에 대해 특별한 의미로 다가가게 한다. 사순절은 고백, 회개, 겸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그리고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다시 헌신하는 마음을 강조해왔다. 말씀을 대하는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종이 되고, 선생이 되라는 부르심을, 아직도 배워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면서 다른 이들을 격려하라는 부르심을, 우리 자신의 약함을 가지고 살아내라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할 때에 반드시 나타나게될 세상의 박해와 거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부름을, 그리고 커져가는 반대를 직면하면서 섬기고 가르치는 일을 끈기있게 감당할 때에야 오직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것을 알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부름을 이해한다.

 

 목회적 관점

 

고난주일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의 두 가지 차원, 즉 고통으로서의 고난과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열정으로서의 고난에 대해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그의 고난의 두 번째 차원은 첫 번째로 연결되며, 이사야의 성서정과 본문은 두 차원 모두를 밝혀 준다.

성서정과는 50:4부터 시작하지만, 1절부터 3절까지는 그 맥락을 명확하게 해준다. 1절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닥친 심판이 그들의 죄의 결과임을 기억하게 된다. 사람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의 고통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2절 하반절과 3절은 하느님의 두렵고 무서운 권능을 나타낸다: “내 손이 짧아서 너희를 속죄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힘이 없어서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2a절이다. 주님은 “내가 왔을 때에 왜 아무도 없었으며, 내가 불렀을 때에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느냐?”고 하신다.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당황하시는 놀라운 순간에, 우리는 의로운 심판으로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가? 그렇다.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할 의로운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것은 구속으로 인도되지 않았다.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폭력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 하늘이 흑암을 입고 굵은 베가 모든 것을 뒤덮었다(3). 하나님의 심판의 권세가 구속보다는 파멸로 이어진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4-9절은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주님의 종을 통해 하나님은 다른 종류의 힘, 즉 가르칠 수 있는 힘, 지친 사람을 지탱하게 하는 힘, 듣는 힘, 견딜 힘을 불러일으킨다.

국제 관계 이론에서는 하드 파워( : 군사적 행동이나 경제 제재)와 비폭력적 수단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설득하려는 소프트 파워를 구분한다. 이 구분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2b 3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드 파워와는 달리, 주님의 종은 소프트 파워를 실천한다. 그는 명령하는 대신 가르친다. 그는 악한 자들을 궤멸시키는 대신 지친 사람들을 지탱한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는 대신 듣는다. 순종의 고통을 피해 숨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그는 등과 뺨을 맡겼다. 그는 소망하고, 신뢰하고, 기다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습에서 예수를 보았다. 아마 예수도 자신을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 대안적인 방법, 즉 소프트 파워의 길을 걸으셨다. 그리고 그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악하며 자립적인 왕국의 꿈과 광야 방랑 생활에서 배운 매일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이 두 힘 사이에서 위태로운 길을 걸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우리의 맥락에서 다룰 때, 우리는 종의 임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에 의해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다른 종들,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들을 비울 수 있는 사람들, 지친 사람들을 지탱해 주고 힘센 사람들의 박해를 참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디서든 이런 종들을 찾으면, 세상이 바뀐다.

부드럽게 말했던 Mohandas Gandhi 라는 사람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대영 제국의 인도 지배를 전복시켰다. Nelson Mandela 라는 죄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 정권을 뒤집어엎었다. Rosa Parks 라는 겸손한 여인이 버스 뒤쪽으로 자리를 옮기기를 거부하면서 흑백분리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Martin Luther King Jr. 라는 침례교 흑인 목사는 그의 자녀들이 모든 어린이에게 약속된 자유와 기회를 갖게 될 날을 꿈꾸었고, 그의 영감과 용기는 미국의 마음과 법을 바꾸었다.

이들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소프트 파워, 즉 강압적인 힘이 아니라 고난 받는 사랑의 힘을 의지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을 보았다. 그 희망의 비전은 투쟁과 실패를 견디고, 비워지고, 부어져서, 열방에 빛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를 수 있게 해주었다.

예수, 간디, 만델라, 로자 팍스, 마틴 루터 킹, 이들 신실한 사람들은 영감을 주는 것만큼이나 위협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종으로 부름 받았다. 우리 역시 자신을 이용 가능하게 하고,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하고, 망가지고 고통 받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즉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랑이라는 응답으로 부름 받았다.

고통 받는 사랑의 길은 종이 선택한 것이거나 적어도 기꺼이 견뎌야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본문은 그들이 학대가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이나 학대의 상황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치유와 온전함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때로는 남을 대신하여 기꺼이 참아내는 고통이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내키지 않는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위험한 길을 걷는다. 우리는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이 종의 노래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이름은 여섯 절에서 네 번 사용되어 깊은 친밀감을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신성한 친밀감에 자신을 열어주고, 망가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즉 하드 파워, 폭력 또는 파괴의 길이 아니라 소프트 파워, 비폭력의 길로 우리 자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1-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은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일 수 있다.

결국, 이 성경은 또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으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그것은 확신의 노래이고, 피곤한 자를 위한 말이다; 당신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 바깥에 있지 않다; 당신은 옳다고 인정받을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여기 고난 주일에 그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을 것이다.

 

 설교적 관점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이사야는 4개의 종의 노래(Servant Songs)를 들려준다. 이 노래들은 사순절 마지막 날들 동안에 예수의 마지막 시간들을 떠올리도록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구약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사야는 백성들의 불신앙의 결과가 이스라엘의 파괴와 바벨론 포로로 귀결되었다고 설명했다. 2이사야서 (이사야 40-55)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전의 사악함을 용서할 것이고 그들을 구원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킬 것이고 그곳에서 그들은 의와 신실함 가운데 살게 될 것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이 본문에서 곧 세 번째 종의 노래에서 그 종은 자신이 “학자의 혀” (tongue of a teacher)를 받았으며 아울러  “학자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에 필수적인 의로움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 저자는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간구한다. 그는 그들이 불신앙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백성들을 향한 이러한 깊은 사랑으로 가득한 제2이사야 저자는 그들을 향한 강력한 비전을 본다. 그들이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있는 이들을 위한 두 번째 출애굽이고 새로운 창조이며 생명의 회복이다. 하지만 그 백성들은 이 종의 말씀을 거부한다. 그들은 그를 경멸하고 모욕을 주겠다고 위협한다. 그는 그들의 손에 고통을 당한다.

-이 백성들은 계속해서 포로로 남아있으려는가? 그들은 성전을 회복하고 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택하는 대신 이교도의 땅에 남아있으려 할 것인가? 그들은 오히려 불신앙으로 남아있으려는가? 그들은 바벨론에 너무 편안해져서 그들이 지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꿈을 포기하려는 것인가?

-이 고난받는 종은 이스라엘을 향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나 거부당하고 그가 지닌 비전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순교자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고 거부당하였으며 그들이 전한 사랑의 메시지로 인하여 모욕을 당했다. 1세기 제자들, 그리고 로마제국에서의 성인들로부터 마틴 루터 킹같은 현대 예언자들은 모두 이러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러한 종류의 고난을 받는 이유는 사랑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른 것 같은 “오랜 고난을 받은”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고난을 찾고 그것을 영광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나 고난받는 종이 당하는 고난은 그가 사랑의 마음으로 진리를 말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듣기를 원하지 않거나 듣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 고난은 그 종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말하기 때문에 오고, 또 그는 자신의 사랑의 얼굴로 그들의 모든 미움을 흡수하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미움을 흡수하려고] 부싯돌처럼 내어놓을 때 바로 그 때 주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신다.    

-[하나님의] 돌봄은 [그 종의]신실함 곧 사랑에서 시작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곳에 [사랑으로] 자신의 얼굴을 갖다대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일부러 고난을 추구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위한 고난은 자살에 가까운 행위다. 하나님의 돌봄은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과 같은 사랑을 계속해서 우리가 나타내는 가운데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종을 오래 전에 도와주었듯이 오늘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사랑으로 주는 비전을 보고 돌이키는 일] 오늘날 억압가운데 있거나 자유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죄수들도 있고 가난과 인종차별의 굴레에서 그리고 많은 형태의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또 감정이나 환경에 의해 갇혀사는 사람들도 있다.  환경이나 감정의 포로가 되어서 거기서 나오기를 두려워하며 조용히 절망의 삶을 살 수가 있다. 이 사람들이 자신들을 묶어두고 있는 벽을 넘어서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듣고 도전을 받을 수가 있다. 때로는 그들이 기쁨으로 그 자유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있는 익숙함을 선호하며 그 감옥을 넘어선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에 적대적으로 반응한다. 

-사랑으로 인해 받는 고난은 개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와 같은 공동체도 옳은 것을 주장하거나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길을 제시할 때 고난을 당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 구성원들을 분열시키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될 때 이것을 경험하게 된다. 현상유지에 안전하게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라는 결정을 해야되는 상황에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는 매우 필요하다. 한 주제에 대해 각각 다른 신앙을 지닌 그룹사이에서 깊은 갈등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의 두 번째 취임연설을 기억하는데 거기서 그는 남북전쟁에 관해서 반대편에 서서 서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었던 남과 북 양측에 대해 말했다.

-이 본문은 수행해야 할 특별한 과제를 두고있는 어떤 교회에 격려가 될 수 있다. 또 특별한 논쟁가운데 결정을 앞두고 팽팽히 맞서있는 상황에 있는 교회를 돕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혹은 단순하게 “당신의 적들을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라고 회중에게 말하는데 쓸 수도 있다. 이 적들은 단순히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부터 회중을 매우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할 수 있다.  

-고난받는 종 본문은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이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의 사역,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고난과 죽음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 용서 그리고 의로움을 위해 그가 취한 행동과 그가 말한 말씀들로 인해 고난과 죽음에 처해졌다. 그는 부싯돌처럼 자신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그로인해 고난을 받았다. 고향 나사렛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얼마나 쉬웠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신실하게 남아있었고 위대한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은[부활] 세상을 바꾸어놓았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이 완고하고 거부하는 세상에 희망의 말로 격려하라고 요청한다.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삶을 향하여 가는 이 기간을 향해 본문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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