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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사도행전 3장 12 ~ 19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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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관점

 

 사도행전은 3 12-19절 본문을 베드로의 설교로 제시한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설교는 당대 유대인들에게 매우 도전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3~4세기를 지나면서 이 본문이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매도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근거로 이용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드로의 청중과 사도행전의 청중이 누구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청중에게 설교를 한다. 예수 운동은 하나의 유대교 운동이었다. 첫 두 세기 동안의 교회 성장은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강력한 반유대적 내용을 담은 문서는 2~3세기에 등장하는데, 그래도 이때까지는 교회가 다인종, 다문화적 특성을 유지했었다. 예수 운동은 이집트,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는 물론 터키와 다양한 근동 문명권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4세기와 5세기에 이르러서야 서방의 로마-그리스도교 국가 종교와 동방의 그리스 정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Clark Williamson이라는 신학자는 과거와 현재의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사실 이스라엘의 집에 초대된 손님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와는 대조되게 반유대적 정서를 베드로의 설교에 포함한다. 주석가들은 사도행전의 집필 시기를 1세기 후반이나 2세기로 추정한다. 반유대적 표현은 베드로의 것이라기보다는 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예수 운동의 성장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부 유대인들에게 매우 웅변적으로 설교를 했다.

 우리가 사도행전 뒷부분의 바울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 설교하는 사람들을 핍박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핍박했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 앞장섰다. 베드로가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여러분”의 대표적인 모습은 바울과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도 청중처럼 유대인에게 가해진 로마 당국의 억압을 체험했다. 그들은 가이사를 신으로 인정하라는 로마의 법을 따르기를 강요당하는 수모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우리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예수 공동체에 대한 베드로의 애정과는 상반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베드로는 반유대적이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그가 3~4세기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그의 설교를 곡해해서 그의 후손을 핍박할 것을 알았더라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아들인 유대인이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요청한다. 생명의 근원인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서로에 대해 폭력과 파괴적인 행동을 행사하며 사는 방식을 멈추고, 평화와 이해의 삶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우신다. 예수가 유대인과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매우 중대한 신학적,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관련 맺게 하는 확실한 연결고리이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는 동일한 하나님, 즉 생명의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하나님을 계시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생명의 하나님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성육하셨다. 이 생명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고, 체험할 수 있다. 구원은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끊임없는 변혁을 통해 생명을 완성해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 구원의 선물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뿐 아니라 재창조하신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따라서, 기독교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보고 놀라서는 안 된다. 치유를 가능케 하는 분은 설교자나 우리가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성육이신 그리스도이다. 생명을 살리는 현장에 생명의 하나님이 계신다. 사도행전 3:12-19는 로마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 것을 우리 모두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우리를 앞서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지로 인해 악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3:17) 우리와 세상의 통치자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무지를 극복해야 한다. 무지를 극복함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 생명을 해치는 악행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기독교인이나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동일하게 구원과 생명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살아계신 하나님은 무지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도우신다.

 

  주석적관점 

 

예수는 누구인가? 두 가지를 고르라.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누가는 스토리텔링의 달인이다. 그는 절제된 언어로 기독교 공동체의 초창기 30년을 말하면서 이천년 후의 우리에게도 그 때의 장면을 연상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누가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극적인 장면으로 그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을 시작한다. 직전 두 장에서 누가는 다음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한다.

-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위임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다.

- 예수를 가장 가까이 따르던 적은 수의 무리들이 사명을 갖고 모이다.

- 성령의 갑작스런 선물이 이 경건한 무리 위에 내려온다.

- 베드로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에 관한 설교로 이 경험을 설명할 기회를 갖는다.

- 베드로의 회개요청은 (3000명이나!) 폭발적으로 늘어나 강력해진 공동체로 이어져 자유롭게 집에서 물품을 나누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평소의 관습대로 성전에 가던 길에서 시작된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돈을 구걸했을 때, 베드로는 은과 금이 그들에게 없다고 선포한다(결과적으로 공동체는 활동비의 필요성을 간과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주어야 했던 것은 훨씬 더 강력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었다. 이 이름으로 인하여 이 사람은 다리의 힘이 회복되었고, 위 아래로 뛰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 읽는 본문이다.

이 치유를 목격한 이는 "엄청나게 놀랐으며" 이 일로 베드로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에 대해 설교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최고의 이야기꾼인 누가는 또한 훌륭한 교육자였다. 노련한 선생은 한 번의 강의로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잘하는 학생들도 배운 것을 내면화 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너무 많은 정보의 무게로 곯아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누가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권고로 돌아간다.

베드로의 첫 설교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주님이며 메시아"가 되게 하셨다는 확장된 신앙 고백으로 끝이 난다(2:22-36).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는 청중들(그리고 독자들)을 초대 교회가 직면해야 했던 더 깊고 어려운 문제에 도달하게 한다. 하나님이 예수를 주님이자 메시아가 되게하셨다는 개인적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좋았지만,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많이 부딪혔던 문제가 여기에 있었다. 베드로는 이 치유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감춰졌던 더 깊은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의 이 남자에게 통치권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이 사람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셨는가? ?

권능과 경건(12). 베드로는 그의 청중들을 그의 형제와 자매들을 명예롭게 하려고 하나님께 받은 이름인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른다. 그는 저는 이가 고침 받은 사건으로 놀란 대중들을 의식하며 발언을 시작한다. 베드로는 이 사람을 치유한 것이 그(그리고 요한) 자신의 "권능"(뒤나미스) "경건"(에우세베이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에는 베드로는 그의 전인적인(wholeness)면의 근원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지만, 먼저 그는 청중(그리고 독자)이 이 치유하는 힘의 근원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도록 이끈다.

예수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13-16). 초기 형태의 이 기독론 설교에서 베드로는 예수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점을 둔다. 그는 그의 설교를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 기반하여 시작한다. 이 유명한 선조들의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께서 또한 "그의 종(servant)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예수를 설명하는데 사용된 단어 "(파이스)"는 그리스어에서 "" 또는 "자녀"의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이 호칭은 확실히 종(둘로스) 그리고 아들(휘오스)이라는 기독교 기독론이 발전해가는 두 방향을 규정했다.

베드로의 청중과 누가의 독자들은 갈릴리에서 온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십자가형은 극단적으로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방식일 뿐 아니라 명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죽음이었다(21:22-23).

그 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통은 예수와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의 몇몇 지도자들이 그의 죽음에 관여 했다고 전한다. 베드로는 그의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절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돌린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그를 의롭다 하셨고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다. 저는 이가 치유되는 사건은 하나님이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예수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부가적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치유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제자들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라 예수 "이름 그 자체"이다. 저는 이가 치유받는 것은 하나님이 이전에도 일하셨고, 지금도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회개와 돌이킴(17-19).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다루면서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그 책임을 모면하게 한다. 첫째로 그는 "네가 알지 못해서 그리하였고, 너희 관리들도 그랬다."고 말한다. 둘째로-이것이 누가 자신의 신학으로 가는 열쇠이다-근래의 사건들이 이 사실을 잘못 보게 만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 것이다. 과장을 조금 더해서, 베드로는 "모든 예언자들"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로서 메시아가 고난 받으셨다고 가리킨다.

여기 인용된 내용에 기독론적 용어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자. 인간의 무지와 불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주의 종, 거룩하고 의로운 이, 생명의 주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셨다. 갈릴리에서 온 십자가를 진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메시야였으며,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제자들의 치유의 권능 속에 살아계신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연상시키는 발언가운데 베드로는 그의 청중들이 "회개"(메타노이아)-엄밀하게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하도록 간절히 청한다. 아마도 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돌이키도록"(에피스트레포) 도전받았으며, 마치 탕자와 같이, 기쁨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었을 것이다.

 

 목회적 관점

 

Melissa Fay Greene은 그녀의 저서 The Temple Bombing에서, 1958년에 애틀란타에서 가장 오래된 회당을 폭파한 증오 범죄를 둘러싼 사건을 이야기한다. 폭파사건 일어난 다음 금요일 저녁, 즉 폭파 사건 이후 첫 안식일에, 회당은 창문이 여전히 부서진 채로 판자로 막아놓았고, 문은 경첩에 매달려 있었지만, 사람들로 가득 차고 넘쳐서, 마치 유대교의 대축제일인 것 같았다. 힘 있는 설교자이자 사회 지도자인 Jacob Rothschild 라는 랍비가 일어서서 말했다. 그는 가득 찬 회중들을 쳐다보고는 잠시 말없이 서서 모여 있는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살피고 나서 말했다. “자, 이 일이 바로 여러분을 성전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구절과 비슷한 장면이 실연實演되었다. 사도행전의 경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많은 군중을 성전으로 이끈 “폭발”은 비극적인 범죄가 아니라 충격적인 뉴스였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언제나 앉아 있던 지체장애인 거지가 극적으로 그리고 예기치 않게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다(3:1~11). 그에 대한 반응으로, 놀라고 당황한 군중들이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압박한다.

우리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거룩한 장소와 신적인 권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이끌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서 걸었을 때, 1930년대의 큰 가뭄 끝에 마침내 비가 내렸을 때,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동정녀 마리아가 남부의 작은 마을에 나타났다는 뜬소문이 퍼졌을 때, 그리고 9/11의 비극적인 사건이 있은 후에, 이런 일들과 비슷한 사건들이 여러 해에 걸쳐서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놀라움, 두려움, 호기심, 경악으로 예배하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문’에서의 치유 소식이 퍼지자 베드로와 요한 주위로 군중이 모였다.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영적인 힘? 그들을 위한 치유? 더 많은 기적? 그들이 이미 본 그 광경에 대한 설명?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는 것은 뭔가 놀라운 일이나 예기치 못한 일이 그들의 평범한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이 거룩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일이 바로 여러분을 성전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날 군중들을 솔로몬 행각으로, 또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오게 한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들이 그곳에 왔을 때 그들은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솔로몬 행각으로 와서, 치유의 신비에 매혹되었으며,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설교였다. 그들은 기적이라는 자외선에 나방처럼 끌려왔고, 그들이 얻은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설교의 빛이었다.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이야기의 중심은 치유가 아니라 설교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왜 그럴까? 놀랍게도 치유 자체는 말이 없고, 애매하고, 결정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진리 전체를 말하는 데는 말로 선포하는 것이 필요했다. 치유는 강력했지만 설교가 선포될 때까지 그 진정한 의미는 숨겨져 있었다. 설교가 사건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목회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주목하라. 첫째, 그들은 치유의 근원을 오해해서,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들이 미개척지의 부흥 집회의 신앙 치료사든 텔레비전의 교활한 자기계발 상담가든 간에, 우주의 치유력을 활용해 왔고, 그 힘을 우리도 이용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고 싶은 끊임없는 갈망이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올바른 접촉을 가지고 있고, 올바른 기도 공식을 말할 수 있고, 올바른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삶에 온전함을 가져올 올바른 지혜를 발견했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CD를 주문하고, 집회에 가고, 프로그램을 보고, 책을 읽고, 외투의 단을 만지고, 우리도 그들이 가진 권능과 지식과 성공을 추구한다. “그게 잘못된 겁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통해 선포한다. “정말로 이 사람을 치유한 것이 우리의 권능, 우리의 영성, 우리의 경건, 우리의 지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유일하고 참된 치유자입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오해했다. 그들은 망가지는 것이 당연하고 치유가 놀라운 예외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만연한 일종의 기능적 무신론이 있다. 삶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말하거나 행동해야 한다면, 그것은 기준에서 아주 벗어난 예외가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 군중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치유 사역은 평소와 같이 지루한 일상 속에서 놀라운 중단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베드로는 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치유와 용서의 능력이 햇빛과 비처럼 널리 퍼져 있는 부활절 세상을 말하는 설교를 통해 군중에게 묻는다.

셋째, 그들은 치유가 단지 놀라운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것, 회개를 촉구한다.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표징, 예를 들면, 암이 치유되고, 깨진 관계가 회복되고, 배고픈 아이들이 먹게 되고, 나라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향해 일하고, 절망이 희망을 낳는 것을 볼 때마다, 선량한 사람들은 경이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는 그러한 일들이 자기반성이라는 더 깊은 반응을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 작업은 부패하는 문화의 잔해 속에서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현실, 또 다른 주권을 드러낸다.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행위를 볼 때 우리는 단순히 “얼마나 멋진가!”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돌아 서서 회개하고, 우리의 시민권을 바꾸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신실한 부분이 되라고 부름 받았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을 보는 설교자는 설교를 가지고 설교를 구성하는 흥미로운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음악세계에서는 일반적인 일이다.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모두 파가니니의 주제에 대해 같은 변주곡 (variations)을 썼다. 이들 작곡가들처럼, “베드로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을 쓰기로 결정한 설교자들은[오늘 성서정과본문으로 설교하려는 설교자] 오늘날 새로운 세대에 자신들이 해석한 것을 보여줄 때 얼마나 원래의 본문에 충실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설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인데 첫 번째는 오순절 당일 그가 했던 것으로 바로 앞 장에 나와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설교가 있는 2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간단히 말하면 각각의 설교 앞에는 놀라운 일들이 먼저 있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제자들이 모여있는 방을 성령의 불로 가득 채웠다.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고쳐줌으로써 예수라는 이름이 지닌 능력을 보여준다. 이 두 이야기에서 베드로는 이 두 사건을 목격했던 군중들에게 바울이 갖고 있지 못했던 말솜씨로 (고후 10:10)설명을 해준다. 그의 성공은 놀라왔다. 첫 번째 설교 후에는 3천명이 세례를 받았고 ( 2:41), 두 번째 설교에서는 5천명을 감동시켰다 (4:4). 대형교회가 단지 오늘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설교에서 베드로는 청중들이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게하려고 애를 쓴다. 그들이 십자가에 달리도록 했던 예수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고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 보냄을 받았으며 만물의 회복으로 우리를 인도할 분이었다. 베드로는 그들이 이것을 분별하지 못한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무지했단 말인가? 그들은 시대의 징조들을 분별할 수 없었는가? 모세를 포함한 수많은 예언자가 그의 오심을 예언했는데(3:22-23)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이 두 번째 설교에서 베드로가 사용하는 언어는 첫 번째의 그것보다 더 청중들의 마음을 찢어놓고 있다. 가장 유대적인 사도 베드로는 동족들에게 같은 유대인인 예수에 관하여 설교를 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이 며칠 지난 후에 성전의 동쪽 벽을 따라있는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있는 유대인 군중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인들에게 그 날 그 곳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면서 설교를 들으라고 말하려면, 먼저 교인들에게 그들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기독교 선교사가 아니다. 그는 유대인 중 하나이며 그들과 유대인들이 지닌 성경과 전통에 대해 논쟁하고, 그들이 예수를 로마에 넘겨준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계속해서 사용하는 용어 “거절했다”는 자신이 예수를 부인할 때 사용한 헬라어와 같은 것이다). 그의 설교는 내부자로서의 설교이고 그 설교를 통해 진정으로 유대인이 되는 것,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것에 관해 신실한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있다. 오늘 성서정과 본문에는 없지만, 베드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물인 메시아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상속권을 거절하게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다 아직 그들이 회개할 시간 곧 하나님께로 돌아설 시간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할지 모른다 (3:26).  

-이와같은 설교를 기독교 회중에게 하려면 설교자는 신앙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면 안된다. 그 대신 베드로가 했던 것과 같이 내부자로서 성경과 전통에 대해 그리고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 참된 교회가 되는 것에 대해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베드로처럼 청중들의 마음을 열게하고 그것을 찢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명사에 유의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베드로는 개인들을 지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앞에 있는 군중들에게 선포할 때 복수 대명사 “여러분”(you)을 사용하여 공동체적 삶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예수를 죽여서 메시아라는 선물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거절한 것이 아니라 빌라도 앞에서 공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베드로가 설교시 청중들을 알고 있었듯이 교인들을 알고있는 설교자는 교인들을 위한 베드로의 변주곡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 이후 2주가 지나면서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여전히 부활을 거부하고 있는가?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 애쓰는 일보다는 죄와 옛 삶에 익숙해있는 것을 더 좋아하면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적 죄에 여전히 머물러있는가? 자신들이 자라났던 신앙이 도전을 받는 것을 못견뎌하고 심지어 이러한 도전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로부터 왔을 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는가? 일이 잘못될 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이 보낸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없다고  애써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에 얼마나 있는가?    

-그들 가운데는 아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조차 알지 못하여 목차에서 모세를 혹은 색인에서 사무엘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 중 아마 옛 예언자들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보내는 새로운 예언자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극소수일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현재 있는 대로의 교회가 너무 좋아서 새로운 신자들 (새 목회자들을 포함하여)을 기존 신앙공동체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 좀 부드러운 방식을 선호하는 설교자는 이 마음을 찢는 질문들을 던지기 보다는 그가 이 설교를 한 이후 2천년간을 지나오면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는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이다: 베드로의 성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덤에서 태어났고 그 아기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 이후 일어났던 이 모든 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부활절 백성이 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베드로의 설교는 우리 신앙의 선조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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