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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사도행전 4장 5 ~ 12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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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청중은 그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에 관해 매우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다. 베드로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회의를 했었고, 예수가 로마 군인에게 잡혀간 이후 예수를 세 번 부인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베드로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로마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상황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청중들에게 도전적인 설교를 하면서도 그들과 자신의 동질성을 강조한다. 베드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압제를 체험했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를 부인한 것에 관해 회개해야 했던 것처럼, 청중들도 그들이 예수를 부인한 것에 관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예수의 생전에 가장 가까이서 예수를 따라다녔던 사도로서, 베드로는 그런 메시지를 선포할 자격이 충분하다.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이다. 베드로는 공포와 부정으로 모는 억압의 사회 정치적 상황에 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그리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통치하심에 관한 깨달음이 얼마나 강력한 자유를 주는지 체험적으로 이해했다.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억압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그중 일원이었다는 것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정부가 우리가 속한 지역교회나 교단이 정부가 못마땅해하는 종교 지도자(현대적인 예: Harriet Tubman, Sojourner Truth, Fyodor Dostoevsky, Rosa Parks,Martin Luther King, Jr., Fannie Lou Hamer, William Stringfellow, Dorothy Day)를 박해하는 것을 용인해주면 우리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베드로는 어떤 점에서는 Rosa Parks, Martin Luther King Jr. Mamie Till Mobley와 같은 인권 운동가들을 비판했다가, 나중에야 그들을 추앙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지금 마르틴 루터 킹을 추앙하는 많은 사람들이 –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유럽계 미국인 성직자를 포함하여 –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를 지지하기를 거부했었다. 그들이 지지로 바뀐 것은 킹의 죽음 이후 일어난 사회 개혁을 통해서였다.

 예수는 예언자 이상이었다. 베드로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아들”로 명명했다. 베드로는 우리가 무지하고,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제국의 힘을 두려워할 때 우리 자신이 압제에 기여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인간의 삶의 덧없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에 근거해서 설교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악, 고통, 죽음을 정복하신다는 지식>으로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충격적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는 어렵게 배운 이 기쁜 소식을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과 나눈다. 오늘의 목회자나 설교자처럼, 베드로는 남이 아니고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믿음과 지식의 향상>을 권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행 4:5-12를 읽은 우리는 왜 우리가 진리나 진리를 선포하는 자들을 지원하지 못했는지, 그것이 두려움과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그들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순진한 확신이나 잘못된 차별에 근거해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베드로는 청중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무지를 이해했다. 그들의 의문과 행동의 동기를 알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대제사장 가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모든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2세기의 신학자 이레니우스 이래로 사도행전은 정경이 확정되기 이전까지 매우 존중받는 성구집으로 활용되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이 신자가 신실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교회의 설립과 발전을 위한 성령의 중요성에 관해 강조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랆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를 탄압하는 사회 정치적 권력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그들의 자리에 놓아 보자. 우리는 오늘의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그 밖의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고, 도덕적으로 도전하고, 이 세상의 어떤 권력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위에 있다고 외치는 일에 너무 열심을 내면 지배 권력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지 두려워하지 않는가? 우리가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 대제사장등처럼- 의문을 제기할 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악에 협력하고 있지 않은가?

 1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신약성서가 유대인들을 구원에서 제외한다고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변치 않는다고 말한다. 역사신학자 Bruce D. Marshall은 기독교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Thomas Aquins,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석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베드로가 유대인이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죄 없다 할 수 없다. 오늘 어느 교회가 예수나 베드로와 같은 과격한 설교자를 자신의 교회에 초청할 수 있을까? 베드로는 행 4:5-12에서 모든 두려움의 근원인 무지에서 깨어나라고 말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교인들은 무지와 무력케 하는 공포의 영향권 하에 있어왔다. 우리는 이 땅에 사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예언자적 부름을 매일의 상기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권력행사(powerplay). 이 작은 단편이야기는 보다 더 큰 문학적 틀을 필요로 한다. 사도행전 3장에 시작하는 누가 이야기의 이 부분은 날 때부터 저는 사람의 치유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구경하던 이들은 엄청나게 놀랐고, 베드로에게 예수 이름을 믿는 것에서부터 이 치유가 가능했다는 설교를 듣게 되었다(3:16).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누가의 이 이야기의 전형적인 구조는 행동과 반응에 관련하여 때때로 충돌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치유와 뒤이은 예수에 대한 설교로 예루살렘의 종교권력들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고 선포했다는 이유로"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였다(4:2). 또 다른 체포사유는 공동체의 경이적인 성장세 때문이었다.  몇 주 안되는 시간에 120명의 보잘 것 없는 예수 추종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3000명으로 성장했고(2:41) 이제 5천명이 "말씀을 듣고 믿었다(4:4)!" 예루살렘에서의 종교 활동을 감시하던 이들은 이 현상에 대해서 더욱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밤새 구속되었다가,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과 안나스, 가야바, 요한과 알렉산더를 포함한 대제사장 일가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요직들 앞에서 말하게 되었을 수 있다(4:5-6). 로마사회에는 여러 가지 기능(정치, 군사, 무역, 종교와 사법기관)의 산헤드린(그리스어로 시네드리온) 위원회가 있었을 것이고 누가는 예루살렘의 장로와 제사장들이 모인 이 위원회를 최고 법정이자 종교기관(당시엔 이 둘을 나누기 어려웠을 것이다.) 으로 이해했다. 그들이 궁금해 한 질문들은 이 글의 본론에 적합한 대화의 주제인 능력(power)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사제들과 죄수들(5-7). 누가가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의 가르침과 설교(그리고 그로 인한 놀라운 결과 4:1-4) 때문에 체포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동안 적대자들은 그들의 관심사를 저는 사람을 고친 사건으로 옮긴다. "무슨 능력(뒤나미스 dynamis)이나 이름(오노마 onoma)으로 이 일을 했느냐?" 이 두 명사를 같이 들이대는 것만으로 그들은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십계명 제 2계명을 떠올리게 된다: "너희 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20:7 RSV). 하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언급하는데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공허하거나 경솔하게 쓰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산헤드린에 서게 되었을 때 그들이 신학적인 시험대에 섰음을  분명히 알았다(그리고 독자들도 알았을 것이다). 독자는 몇 주 전에 예수 그 분이 직접 이 자리에 섰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8-11). 주요한 화자 역할을 하는 베드로는 발언에서 단지 변호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는 성령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의 능력 가운데 발언한다. 이 장면은 이런 "교육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13)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진정한 힘의 원천에 대하여 권력자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누가의 전형적인 모순을 떠올리게 한다. 베드로는 곧바로 어떻게 이 저는 사람이 고침(소조sozo라는 단어로 12절의 소테리아soteria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을 받았는지를 언급한다. 베드로는 이 능력의 원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담대하게 확언한다. 만약 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불과 두 달전 여기 있었던 일을 기억하면서 불편해 한다면, 베드로가 대답한 내용은 전부 긴장을 고조시키는 말들이다.

베드로는 위원회 참석자들에게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책임이 있다고 상기시킨다. 이 대화는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자들처럼 우리도 불편하게 한다. 누군가 누가(베드로를 통한)가 거기서 멈추길 바랬을 지 모르겠지만, 베드로는 시편을 (틀리게)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당신들,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118:22). 누군가가(베드로? 누가?) "당신들"이라는 말을 여기 삽입했다. 이 유명한 기독론적 증언의 기록이 누가복음을 포함하여 신약성경  다른 곳(12:10; 20:17; 벧전2:7)에서도 수정되지 않은 형태로 발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행히 베드로가 인용한 이 시편은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뒷받침한다. 이 부분은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셔서-운명을 바꾸시는-하나님께 감사하는 시편찬송의 마지막 찬송시이다. 전형적인 초기 기독교 성서해석에 따르면, 이 찬송시는 예수를 향해서도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리더들은 예수를 거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활시켜 새롭게 확장된 이스라엘의 집의 모퉁이돌이 되게 하셨다.

다른 이름은 없다(12). 베드로는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대화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다른 이에는 구원(소테리아 soteria)이 없다. 왜냐면 하늘 아래 다른 어떤 생명체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소조 sozo)받게될 것(데이 dei)이라 주어지지(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를 주목하라.) 않았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단어(그리고 같은 어원을 지닌 "구원받다")(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물리적 치유, 포로생활에서의 탈출, 영적인 완전함을 포함한 광대한 의미를 가진다.베드로와 초대교회에게 "예수"라는 사람의 이름은 말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이름을 능가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었다. 이 이름으로 우리가 "틀림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선포함으로 베드로는 이 이름 뒤에 있는 진정한 능력에 대하여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된다"(dei)는 하나님의 의지에 관해 말할 때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신학적 언어이다. 이 작은 동사는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요구를 말한다. 누가가 예수의 이름과 "구원"의 어원적인 유사성을 (1:21처럼) 언어유희처럼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모순적 용법을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가 말한 것을 다른 말로 요약하자면, 우리가 평범한 인간의 이름-예수를 통하여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 할 수 있다.

 

 목회적 관점

 

왜 선한 일이 그렇게 많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일까? 물론 여기서 선한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지체장애인 거지를 치료한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은 성전 바깥의 먼지 속에 가련하게 누워 있는 거지로 하루를 시작해서, 마치 새로운 사람처럼 걷고, 껑충 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3:1-10). 결국 이 작은 복음은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놀라운 치유는 오해, 저항 그리고 반대라는 연쇄 반응을 가져왔다. 먼저, 치유를 목격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해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마술 치료자처럼 능력이 있어서 베드로가 병을 고쳤다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놀란 무리들에게 그들의 신학을 설명했다. “이 치유는 우리의 능력이 전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의 능력입니다.(3:12-16)

베드로는 계속해서 죽은 사람의 부활을 선포하였고, 그것이 더욱 큰 문제를 일으켜서, 성전 관리들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해 질 녘에, 베드로와 요한은 가택 연금을 당했고(4:1-4),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그 다음날 다시 소환되어서, 사실상 대제사장의 가문 전체에게 심문을 당했다(4:5-7). 절망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치유하면 마을 전체에서 할렐루야를 외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대신 신학적인 혼란과 의혹의 확산 그리고 당국의 거친 탄압이 있었다.

이러한 반발의 이유는 “무슨 권세로…이런 일을 했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서 분명해 진다. 쟁점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주목하라. 원래는 치유와 부활과 하나님의 자비가 쟁점이었다. 심문하는 자들은 “이런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그 일들이 일어났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일을 할 능력을 얻었는가? 누가 당신들에게 이런 일을 하고 이런 말을 할 권한을 주었는가?”라고 물었다.

이 방정식에 갑자기 권세가 끼어들게 된 데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통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종교 당국이 종교에 대한 그들의 독점권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고 소개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신실하기를 바랐지만, 성전과 성전이 움직이는 작동방식의 독점적인 깃발 아래에서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 운동은 들불처럼 순식간에 확산되는 성령의 폭발이었다. 일반적인 경로에 포함될 수 없었고 규칙과 조직에 의해 통제될 수 없었다.

사도행전이 종교적 권위와 조직을 바라보는 미묘한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행전을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는 노선을 옹호하는 “반 제도적”인 입장으로 보고 싶겠지만, 그건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전을 지지하고 종교 제도를 지지한다. 그는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을 “성전에 열심히 모였다”(2:46)고 설명한다. 지체장애인의 논쟁적인 치유가 일어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실제로 성전에 기도하러 갔을 때였다(3:1). 또한 기독교 운동은 성경 공부, 친교, 공동체 식사, 기도, 재정적 책임, 전도, 그리고 더 큰 사회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가진, 일하는 조직으로 묘사된다(2:41-47).

사도행전의 핵심주제는 이것이다: 조직은 성령에 반응하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영향을 받는가? 정치나 종교 권력이 자기 자신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그 권위를 옹호하는 유일한 합법적인 중개자로 스스로를 내세울 때마다, 불가피하게 성령은 이런 구조들을 무너뜨리신다. 로마 제국이 노예의 결혼을 금지했을 때 기독교회는, 성령의 뜻에 따라, 결혼을 장려하고 칭송해서 구조를 전복시켰다. 짐 크로 법[1880년대 만들어진 미국의 인종차별법]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공공 생활에 완전하게 참여하지 못하도록 배제시켰던 때가 있었지만, 성령은 이런 구조에 도전하는 시민운동 지도자들을 부르셨다. 성전 권력은 성령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을 위한 성전 권력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했는지” 물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종교 사업을 하려면, 성전 권력 중개인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예수의 이름의 권세로” 라고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는 종종 사람들을 두 진영으로 나누는 데 사용된다: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예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사도행전의 저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단호하고 그리고 특별하게 행동했다고 믿지만, 오늘 본문의 기능은 분열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 말씀의 목적은 그게 아니라, 어떤 사람도, 어떤 권위도 종교적인 장막-성전이나 교회나 운동-을 세울 수 없고, “우리 진영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 인류를 대신해서 행동하신다. 거기 “다른 이름”은 없다. 사람의 방식으로 배타적인 종교권력을 만들어서, 지배하거나, 유일한 신학을 주장하거나, 종파를 만들거나, 성령의 능력을 독점할 수 없다.

통제 외에도, 종교 당국이 권세를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성을 보호하려는 그들의 관심 때문이었다. 성전과 교회와 종교 제도의 합법적인 기능 중 하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가까이 오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하고 순수한 빛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종교 제도는 우리가 바늘구멍으로 일식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한다. 우리는 다치지 않고 그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 33:20). 이런 점에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한 일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말한 대로, 우리를 강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강하신 이 하나님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와 구원을 주려고 오셨다.

 

 설교적 관점

 

-어떤 성서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 설교자는 먼저 그 본문에 “맞추어” 할 것인지(to preach with a text, 본문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설교), 그 본문을 “따라가면서” 할 것인지 (to preach alongside a text, 본문내용 흐름의 변화를 설교) 혹은 그 본문에 “반해서” 할 것인지 (to preach against a text, 다른 성경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오히려 본문 가르침에 도전이 되는 것을 설교)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심한 성서주석이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특히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교회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선포하려는 설교자는 그것을 1세기 청중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들으면서 또한 오늘날 교인들의 입장에서 들을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4:12은 요한복음 14:6["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더불어 기독교의 배타성을 옹호하는데 종종 인용되고 있으므로, 지금 베드로는 세계종교회의[the World Parliament of Religions, 1893년 설립된 평화를 위한 범세계종교회의, 대략 5년주기로 세계대회를 개최]가 아닌 산헤드린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힌두교인, 불교인 혹은 무슬림교인에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종교간 대화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는 심지어 헬라 철학자들이나 로마 이교도들에게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대제사장들 가문에 속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속한 종교전통에서 권한을 지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매우 화가 난” 사두개인들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사두개인들이 믿지 않는 죽은 자의 부활이 예수에게서 일어났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을 치유하였고 (3:6) 이 일로 인해 5천명이 예수에 관해 듣고 믿게 되었다 (4:4). 사두개인들은 로마가 [두 사람으로 인해]동요하게 된 5천명의 군중을 모른 체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사실상 군중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로마가 책임을 맡긴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단지 종교적 가르침으로만 경계선을 벗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예루살렘의 평화에 위험스런 인물들이었고 나아가 로마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인 “로마의 평화” (Pax Romana)에도 위협이 되고 있다.      

-베드로가 변론하기 위해 일어났을 때 그가 한 가장 지혜로운 일은 자신이 받은 고발에 대해 다시 설명한 것이었다. 그는 아픈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었다고 했다. 그와 요한은 유대교의 가르침 (미츠바, mitzvah)중 하나인 친절을 베풀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이 일은 베드로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고 말했듯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는 그가 “성령이 충만했으며” (8)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눅 12:11에서 말했던 것[“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에,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대답할까',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염려하지 말아라”]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고 서술한다.  

 -베드로가 행한 간략한 변론은 같은 오순절에 그리고 솔로몬 행각에서 이미 말했던 것을 포함하면 세 번째 것이된다. 처음에 그는 예언자 요엘을 인용했다 ( 2:28-32): 두 번째에는 토라를 ( 18:15-20,  22:18), 그리고 지금은 시편 118:22을 인용했다. 세 가지 언급에서 그는 자신의 적대자들이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 같은 성서에서 많은 부분을 취하여 변호에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의 태도는 매우 위험한 종교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종교지도자들 앞에 서서 그는 그들의 성서읽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이들의 신학적 교리보다 더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렇게 성서본문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난 후 세 가지 방향 중 하나를 선택한다]

-이 본문을 “맞추어” 설교하기로(to preach with this text) 결정한 설교자는 선택할 수 있는 주제가 많이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다른 모든 이름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의 이름을 명명하는데[예수 그리스도라 부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베드로에 의하면 이 두 행위는[십자가와 부활] 예수자신이 한 것이 아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 이 특별한 모퉁이 돌이 중요하면서도 표현은 이상하게도 수동적이다. 건축자들이 그것을 버린 후에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누군가 그것을 거기에 갖다 두었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부여되어 있는 능력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본문과 “반해서” 설교하기로(to preach against this text) 한 설교자는 베드로의 사례 곧 그가 한 성령충만한 설교, 선한 행위를 한 증거, 그리고 수 많은 성경적 근거들을 사용한 것들에 주목하는게 좋다.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흔히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의 대화를 거부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대화를 이루려고 애쓰는 기독교인들은 이 본문을 21세기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을 도움받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본문에서 베드로의 선언은 행10:34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에서 행한 그의 선포와 어떻게 부합하는가?

-이 본문을 “따라가면서” 설교하기로 (to preach alongside this text) 결정한 설교자는 베드로가 말한 내용보다는 그의 대응전략에 주목하는게 좋은데 그 이유는 그의 대응 방식이 그가 말하는 내용만큼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의 비난에 직면하여 죄수로서 소환을 받고 공적으로 변호하라는 요청을 받은 베드로는 변호석에 자기만 홀로 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있다. 여기서 사용한 동사는 수동태이고 (i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모퉁이 돌이 된 것도 수동태로 표현되었고 베드로의 태도도 수동적이다.

-그 다음에 베드로가 한 일은 자신에 대한 혐의를 새롭게 설명한 일이다. 비록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권한이 여기서는 매우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주도권을 잡는다. 즉 그는 종교재판관들에게 그들이 던지는 질문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답변한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에게 답하면서 베드로는 결코 “나” 혹은 “우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모든 동사는 수동태이다. 선한 행동은 “이루어졌고” (done)  그 사람은 “치유되었다” (has been healed).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것을 행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이 일을 했다.    

-마침내 베드로는 성경을 이해한다. 광야에서의 예수처럼 그는 종교재판관들이 하였듯이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이렇게 행할 수 있는 베드로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부터 온다. 이렇게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진실한 제자는 특히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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