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삶과 속된 삶 히브리서 12:14-17
여러분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저에게는, 만날 때마다, "너,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니?"라는 질문을 던지는 친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받아 넘겼는데, 그 질문을 반복하여 들으면서,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의 삶의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이 그의 생각에 반영되고, 그 생각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냐는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의 목표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각하게 된 후로부터, 저는 그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곤 합니다. "네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제 자신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저를 자주 깨워 일으킵니다. 어느 사이엔가, 헛되고 가치 없는 생각들에 붙들려 있는 자신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를 목격할 때마다, 저는 다시금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생각의 머리를 돌리곤 합니다.
저는 오늘 읽어드린 히브리서 12장 14절부터 17절을 읽으면서, 그리고 거룩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다른 말씀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의 문제가 곧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혹은 속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거룩한 삶에 이르도록 권고하면서, 에서처럼 "속된 사람"이 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개역성경에는 "망령된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표준새번역은 "속된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거룩"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기 때문에, 표준새번역처럼 "속된 사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독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추구하도록 요청하면서, 속된 삶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삶은 무엇이고, 속된 삶은 무엇입니까? 이 말을 들을 때, 아마도 여러분 대부분은 거룩한 삶의 어떤 모델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생각 속에서 거룩한 사람은 어느 정도 신앙 생활에 익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교회에서 속되다고 가르치는 일들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술, 담배, 도박 등--이런 것들을 멀리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경건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에 할 수 있는 한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고, 교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도 충실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는 더 거룩해 보이기 위해서, 애써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하고, 걸음걸이도 조심스럽게 하며, 목소리까지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속된 사람은 거룩한 사람과는 반대되는 사람을 가리킬 것입니다. 교회도 나가지 않고, 경건의 노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 혹은 경건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을 속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거룩성"이라는 말은 왠지 부담이 가는 말입니다.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틀에 갇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그렇기 때문에 별로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어쩐지 어느 정도의 빈정거림을 가지고 있는 말로 쓰입니다. 성서가 거룩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으니 외면을 할수는 없으나, 왠지 끌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거룩한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실인가?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거룩성에 이르는 것이 나를 어떤 틀에 집어넣는, 그런 부자유하고 불편하고 어색한 삶을 말하는 것일까?
저는 거룩성에 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들을 살펴보면서, 이것은 매우 큰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거룩성을 생각할 때, 외적인 행동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 사람의 외적인 행동은 그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게 해 주는 하나의 창문으로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런 외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거룩해지는 것은 그런 외적인 틀 속에 나를 집어넣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혹은 속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누가복음 저자에 의하면,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에게 초청을 받아서 음식을 드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손을 씻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무시하고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생각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11:39).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은 외적인 거룩을 충분히 이루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겉이 말끔히 씻겨진 잔과 접시처럼, 겉으로 흠잡을 데 없는 거룩성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탐욕과 악독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겉만을 보고 바리새인들을 거룩하다고 판단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보시고, 그들을 속되다고 판단을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의 행동이 어떤가에 있기보다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냐가 그 사람의 거룩성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평토장한 무덤"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44절). 즉,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는데, 내적으로는 썩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비판을 통하여 우리는, 외적으로 아무리 많은 경건의 모습을 쌓았다 하더라도, 내면은 온통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속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영원한 관심에 사로잡혀, 참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속된 사람은 덧없고 허망한 것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관심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있지, 외적으로 어떤 거룩의 모양을 하고 있느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속된 사람의 전형을 구약성서의 인물인 에서에게서 봅니다. 왜 에서가 속된 사람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음식물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저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부터 에서에게 동정심을 가지기 시작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에서가 더 남자답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야곱은 너무나 자신의 삶에 대하여 치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치열함이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에서의 여유에 비교해 볼 때, 야곱은 너무 각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손을 들어 주셨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서는 분명히 삶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남자다움을 가지고 있던 통 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인간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저자가 볼 때,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관심 속에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음식물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넘겨 준 것은 그의 생각을 무엇이 사로잡고 있었는지를 암시해주는 단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무엇이 참된 것이며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 무엇이 영원한 것이며 무엇이 덧없는 것인지, 무엇을 참으로 얻어야 하고 무엇을 버려도 되는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그의 삶의 태도가 그로 하여금 맏아들의 권리를 음식물 한 그릇에 넘겨 버리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에서의 행동에서, 그의 생각이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덧없는 것에 붙들려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정말로 에서가 이런 생각 속에서 살았던 속된 사람이었는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에서가 속된 사람이었다고 증명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속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속된 사람은 영원한 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현세적인 관심에만 몰두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속된 사람은 진정으로 참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덧없는 일에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이 속된 사람입니다.
속된 사람은 인간의 본래적인 삶의 차원에 대하여 고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그대로 삶을 맡기고 즐기는 사람이 속된 사람입니다. 속된 사람의 생각은 현세적이고 덧없고 쾌락적인 것에 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해 집니다. 거룩한 사람은 영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원에 대한 관심으로써 현세를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보는 눈으로써 현세를 바라보고, 새로운 눈으로 이 현세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진정으로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덧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해 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것을 추구하고 소유했기에, 이 세상의 모든 물질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인간이 본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묻고, 그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결코 흘러가는 대로 가게 내버려두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참된 삶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사로운 욕심에 이끌리지 않고, 초연하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 삶을 결정해 줍니다. 속된 사람은 그 생각 때문에 자연히 헛된 것, 물질적인 것, 덧없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때문에 그의 삶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욕망 때문에 그의 삶은 언제나 출렁거립니다. 그의 눈동자는 쉴 사이 없이 움직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손가락 셈을 하기에 바쁩니다.
반면, 거룩한 사람은 영원한 것, 참된 것,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삶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깊은 바다 속 같이, 그의 삶은 든든한 평화를 누립니다. 세속적인, 사소한 이익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이익과 감정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평화의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넓은 가슴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면서, 안정된 항해를 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의 인생은 매력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듯이 그렇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한없는 자유 안으로 인도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바 있던 부흥운동가 조나단 에드워드는, 거룩한 삶이 "달콤하고, 즐겁고, 매력적이고, 평화스럽고, 고요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말할 수 없이 정결하고, 밝고, 평화롭고 환희에 넘치는 삶으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거룩한 삶이란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는 하나님의 정원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실로 거룩성의 본질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거룩한 삶이란 어떤 종교적인 행위들을 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정원이 되는 삶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거룩성과 세속성에 대한 판단 기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거룩성과 세속성을 판단해 왔다는 뜻이며, 우리 스스로 잘못된 목표를 추구해 왔다는 뜻입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신앙의 외적 행동을 놓고서 그 사람의 거룩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매우 충실한 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속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교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기도의 목적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다면, 그는 분명 속된 사람입니다. 열정적으로 목회에 전념하는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목적이 더 큰 교회, 더 많은 신도들을 얻어 유명해지는 데 있다면, 그는 분명히 속된 목회자입니다. 이들은 마음속에 품은 그 거대한 속된 야심 때문에, 그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외적인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그 야심을 이루는 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야심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혹시 신앙을 버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야심은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 질책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의 탈을 쓴 욕망을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도와 온갖 신앙의 행위는 그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반면, 거룩한 사람들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다른 신앙적인 행동들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화시키고, 그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노력을 합니다. 신앙적인 활동들이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의 정원으로 만드는 통로가 됩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하여 거룩한 사람은 더욱 맑고 청정한 생각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생각은 그 사람의 삶을 더욱 깨끗하고 투명한 것이 되게 합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표현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정원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거룩한 삶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혼돈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모양만 가지고 있는 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외형적으로 교인이 해야 할 행동들을 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거룩해 진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착각 속에서 우리는 거룩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하나님 보시기에 끔찍한 이기적 야망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것 같으나, 실은 지극히 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외형이 아니라 내면입니다. 잔의 겉을 닦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을 닦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신앙의 행위들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들을 통하여 나의 생각이 얼마나 거룩한 것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동안도 어려웠지만,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을 합니다. 이렇게 어려워지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간다고들 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하지 못했던 신앙 생활을,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맞아,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물질적인 궁핍함 혹은 물질적인 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속된 것에 붙들려 사는 사람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사회는 "경제 이데올로기"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잘 살게 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정부도, 개인도 그런 목적을 위해서 전전긍긍하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인 고난을 과소평가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저의 형제 중 하나도 회사가 부도가 남으로 인하여 형제들이 생활비의 일부를 쪼개어 돕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저도 이 시대의 어려움을 피부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도 모르면서 안이하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우리가 잊지 말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다시 일깨워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우리 모든 신자들이, 다시금 세상 물질에 대한 속된 야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러한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우리가 구해야 할 것, 참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도록 부르십니다. 그 동안 속된 야심에 사로잡혀 속되게 살고 있던 우리를, 거룩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여러분,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이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참된 비결은, 물질에 대한 속된 야망을 접어 두고, 거룩한 열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데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이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한 삶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 거룩한 삶으로써 이 험한 풍랑을 건너 뛸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제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셔서, 참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삶을, 여기 이 땅에서부터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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