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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나서 1장 1 ~ 3절 하나님의 말씀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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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1:1-3 하나님의 말씀

4월 4일 동부교회 수요 설교 내용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기능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써 인격을 드러내기도 하고, 말의 영향력으로 책임을 지게도 하며, 생명력이 있어 오랜 시간 후에도 짧은 말 한 마디가 희망을, 또는 절망을 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의 한마디는 우리를 한없이 행복하게도 하고, 한없는 불행으로 삶 전체를 방황의 늪으로 몰아놓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대구 서부교회 김창제집사의 말에 관한 일화는 우리를 진정으로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가 지하철 참사의 상황에서 부인에게 남긴 전화메시지가 인터넷에 소개되었는데
“여보, 나는 이제 하늘나라로 가야겠소, 할렐루야, 아멘”
이 음성을 남겼고 사고 소식을 접한 식구들이 현장에 달려가 김집사님의 모습을 보니 시신 어느곳 하나 상하지 않고 성경책을 가슴에 꼭 안고 주님 품에 안겼답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이 좋던 나쁘던 힘이 있습니다.

본문의 요나를 보십시오.
그의 삶이 무엇인가에 엄청난 영향을 받아서 도저히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요나는 엄청난 변화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갑자기 자신의 사재를 정리해서 돈을 모았고, 짐을 꾸려서 배를 타고 스페인의 다시스 땅으로 향합니다.
가면서도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배 밑창에 들어가서 잠을 자다가 바닷속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니느웨로 걸어가는 요나의 모습...

무엇이 요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습니까 ?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침에 주워 읽은 신문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말씀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기에,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무시하거나 벗어날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그 마음을 빼앗아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우리가 점령당해서 그의 말대로 행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매어버리십니다.
바울이 환난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의 심령이 매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영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영감으로 도저히 머리로 이해하는 문자와는 달르기에 감동이 있고, 정서가 있으며 생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살아있어 반드시 이루어지며,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은 오늘도 창조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말씀으로 요나에게 말씀하셨고, 바울에게,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아밋대가 누굽니까? 잘 모릅니다. 그는 알려진 자도 아니요, 위대한 자가 아닙니다.
왕족도 귀족도 아니며 천사는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하시는 동안 말도 걸고 대화도 하신 자들은 이름도 없는 자들이며, 가문의 대략을 말할 수 없는 그냥 촌 동네, 나사렛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임합니까 ? 아무에게나, 모두에게 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이 가난한 자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샘이 있어도 갈증이 없으면 물을 먹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어도 말씀을 듣고자하는 정직한 심령이 없기에 헐벗고 굶주리는 것입니다.
아모스 8:11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나가 가야할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큰 성읍, 도시입니다.
죄악이 가득찬 성읍으로 전체가 부패한 도시입니다.
당시의 인구가 거의 백만 정도인 그곳에 요나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일어나 그리로 가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패역한 성을 향한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 입에 말씀을 가진 한 사람에게 제국의 한 수도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해내셨습니다.
로마 상대로 하나님은 바울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로마를 점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고, 그 말씀을 붙들때 저 큰 성읍을 상대로 승부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승부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크게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의 현 주소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이요, 전사요, 일당백입니다. 아니 천천이요 만만입니다.
세상을 거꾸러뜨리는 용사들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런 사람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다 모여 겁에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한 사람에게 도시 하나씩 붙여놨는데 스스로를 너무 작게 보고 너무 작게 살고 있는 것이 현 실정아닌가요?
다윗처럼 당당하게 골리앗도 개처럼 여기고, 요셉. 다니엘처럼 한 제국을 호령하고, 여호수아 갈렙처럼 저들을 밥으로 여기고, 바울처럼 감옥에서도 로마를 상대로 승부수를 띄우며 세계를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신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지 사람의 종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릴 때, 세상에 나가 담대하게 외칠수 있습니다.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자가 말씀에 순종해서 나갈 때 거기에 영감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약한 우리의 현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요나는 소명자로 부름받고 회피하고자 도망칩니다.
핑계 있는 소명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소명의 핸디캡을 갖고 사는 어리석은 자가 돼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부르심 앞에 우리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나에게 주어진 도성이 니느웨라는데에 흥미가 있습니다.
니느웨는 요나의 고향에서 무려 800㎞가 떨어진 곳으로서 창세기의 10장에 느므롯이 건설한 역사적인 도시며(창10:11-12), BC 8c경 앗수르의 산헤립이 수도로 삼았던 장소입니다.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하나님을 모독한 것처럼 니느웨 역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니느웨는 거리 상으로 멀지만, 그 거리보다도 마음은 더 먼 곳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개요, 전혀 쓸모가, 가치가 없는 인생들이 있는 곳에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한다는 것이 실로 힘이 듭니다.
더욱이 요나는 이미 이스라엘과 유다에서는 자리잡은 선지자로(왕하4:25), 인기있는 민족적 영웅이었습니다.
편안히 잘 나가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갑자기 니느웨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재미있게도 핑계와 이유를 댈 것이 많은 도성입니다.
사실 니느웨는 멸망해도 마땅한데 구태여 가서 외칠 필요가 뭐며,
그래서 회개하여 잘살면 이스라엘이 위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느웨는 가기가 쉽지 않은 도성입니다.
인간적인 문제, 자존심, 민족적 감정이 뒤섞인 아주 묘한 곳입니다.
편안하게 사명감만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먼저 해결해야할 인간적 조건들이 결부되어 있는 곳입니다.
사명감만 있으면 어디든 갈 것 같지만 거기엔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해야만 갈 수 있고, 우리가 사명자로 서려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질 수 있는 유혹들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시험을 이기지 못해 사명자의 길이 아니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니느웨 앞에서 요나가 도망했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니느웨 앞에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요나가 도망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명분이 있습니다.
사람은 명분만 있으면 용감해집니다.
그러나 이 명분이 분명치 못하면 감히 실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듯이 명분, 이유 없는 불순종이 없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그 명분을 포기하기 전에는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복종, 절대 순종의 자세를 가지기 전에는 결코 순종의 길로 나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명분과 이유가지고 주를 쫓는 자는 결국 그것 때문에 주를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십자가 앞에서 도망했나요? 겁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칼을 뽑아서 말고의 귀를 떨어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난 앞에 무력한 주님의 모습을 볼 때 민족주의적 대의명분, 국가적 이상이 사라졌고, 더 이상 예수는 그들이 따를 존재가 아니라 판단하여 그들은 비겁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명분이 있다면 능히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그들이 주님 때문에 주를 쫓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따라갔다는 사실이 바로 니느웨 앞에 설 때 밝혀지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철저하게 고기 뱃속에 들어가 자아가 죽기 전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유가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입니다.

명분이 가는 길은 욕심이 가는 길이요 그 길은 다시스로 가는 길입니다.

과연 내가 움직이는 동기가 무엇인가요?
타당한 이유와 논리와 정의와 명분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리스도 때문인가?
그것은 결국 나로 하여금 주의 얼굴을 피하도록 촉구하는 핑계의 도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적 이유 때문에 니느웨를 피하는 요나가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다시스입니다.
겔27:12절에 보면 “각종 보화가 풍부하여 은과 철과 상납과 납을 가지고 물품을 무역하던 곳으로" 니느웨와는 정반대의 서쪽이요,
육지가 아닌 바다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왜 하필 다시스인가요?
거기는 거리가 멀기에 배 삯도 비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그리로 도망하는 것은 거기에 뭔가 끌리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탈주 행각은 너무나 치밀하고 자동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행동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늘 다시스를 그리워했지만 선지자 체면상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니느웨의 소명이 임하자 그의 마음속의 다시스는 아름답게, 매혹적으로 그를 유혹합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바라보는 눈처럼 말입니다.

사명의 길로 들어서면 이 세상의 환락은 영원히 끝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니느웨 앞에서 다시스는 더 매력적으로 크게 보입니다.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은 한번 빠져보고 싶은 환락의 장소입니다.
단지 기회가 없던 것이지요. 그러나 니느웨 앞에서는 본색을 드러내고 맙니다.

진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나가 가는 탈주로는 환락의 길입니까? 아니면 민족주의라는 명분과 철학의 길입니까?
이상하게도 그 길은 같은 길이요, 같은 방향입니다.

"내가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내 욕심인가? 아니면 명분이 있는 것인가?" 이것이 우릴 헛갈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 자신이 정당하게 판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인도하는 원리는 명분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사람들은 무엇이 선하고 의로운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기에,그럴싸한 이유와 명분으로 다시스를 보기 좋게 포장해 줄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죄악 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뿐이십니다.
주님의 얼굴을 피하는 인생에게 의로운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주 앞에 무릎꿇지 않는 자들에게서 선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기를 당하는 것과 같다 할수 있죠.
주의 말씀을 구하는 가난한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 인간적 기준으로 먼저 원칙을 삼는 그 삶은 분명 다시스로 가는 인생입니다.
그 인생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듯이 그의 환경을 하나님이 도우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셨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비록 순탄해 보여도 그 인생의 목적은 결국 말씀에서 도망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인생이 아니라 피하는 인생으로 결국은 멸망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말씀에 비추어볼 때 비로소 얼마나 멀리 도망 왔는가,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먼가를 알게 되어 후회하게 되지요.

그럴싸한 명분으로 탐욕을 포장하는 일을 그만하십시오.
냄새를 맡지 못하십니까?
이미 냄새가 진동하고 코를 찌르고 있습니다.
마치 꿩이 얼굴만 가리고 꽁지를 드러내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울 뿐입니다.

여러분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말에, 여러분의 생각에 하나님의 정서가, 하나님의 마음이 묻어 나옵니까?
여러분의 사상과 주장과 그 행동 속에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까?
세상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신비로운 거룩함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매임이, 성령의 불붙는 마음이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샘처럼 솟아나고 있습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인생, 하나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인생이 능력있는 영감의 말씀을 듣는 인생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기도
우리의 인생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부르신 말씀을 잘 알지 못하면서 그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려 하지도 않은 잘못된 우리의 심령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보다 세상의 부귀가, 말씀보다 세상의 환락이 좋아 그곳으로 따라다니며 살아왔던 어리석은 심령들을 일깨워주시사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그리워하며 순종하는 사명자로 삼아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는 심령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우리의 명분과 이유로 주님의 말씀을 가리우는 죄를 범치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진정한 주의 백성의 삶을 영위하는 심령으로 삼아주시고 영광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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