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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한복음 21장 1 ~ 19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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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석양녘에 디베랴 바닷가에 모여 있을 때 일어났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이 작은 집단의 지도자로 묘사된다.

  제자들이 밤새 노력했으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3), 동틀 무렵에 예수가 등장한다.(4) 밤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예수가 제자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예수를 못 알아 봤다. 예수는 그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것을 알고, 제자들은 그것을 확인해 주었다. 예수는 배의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했다. 그물이 잡힌 고기의 무게로 찢어지기 시작하자, 제자들은 처음으로 예수를 인식했다.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먼저 “저분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즉시 벗었던 몸에다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7)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몇 가지 사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고대 학자들과 교부들은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와 베드로를 기독교 신앙의 두 가지 대립되는 유형으로 해석했다. 크리소스톰은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았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또 다시 그들의 상이한 성격을 드러낸다. 한 사람은 열정적이고, 다른 사람은 명상적이다. 전자는 즉시 뛰어갈 준비가 되어 있고, 후자는 좀 더 끈질기다. 요한이 먼저 예수를 알아보았지만, 베드로가 먼저 그에게 달려갔다.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주님을 먼저 이해하고, 인식하고,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 신앙을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일들- 그런 인식은 아직 행동으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만일 베드로가 먼저 행동했다면 – 고전적 해석에 의하면 헌신적 신앙에서 나온 인간의 반응으로 해석되는 – 그런 행동은 진정한 인식에 근거해 있음에 틀림없다. 인식이나 행동 어느 하나만으로 진정한 신앙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가장 좋은 부분을 결합해야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을 규정할 수 있다.

  위의 고전적인 해석에서 조금 방향을 바꾼 새로운 신학적 관점도 있다. 각 인물의 반응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 이해 대 행동 식으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식의 접근을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역 교회의 차원이나 더 넓은 차원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은사, 관점, 신학이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신앙이 충실해지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본문을 ‘부활 후 공동체’ 내의 두 대립되는 노선으로 해석한다면, 이를 통해, 교인들은 각각 자신의 이익을 접어두고 인내와, 용납과 예수에 대한 헌신을 통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관심을 베드로 자체, 그리고 그가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주님을 인식한 것에 대한> 반응한 방식(7)으로 돌리면서 세 번째 신학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많은 주석가들이 베드로가 완전 나체가 아니고 속옷은 입었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하지만, 그가 벗었다는 묘사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1장에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보려고 시도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숨는 장면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요한은 (혹은 21장을 첨가한 편집자는) 부활을 <아담의 수치의 무효화>로 해석하는 셈이다. 겉옷을 두르는 베드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안다. 아담과는 달리, 베드로는 부끄러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숨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접근한다.

  오늘 본문을 갖고 부활을 기념하는 설교를 할 때 다음의 두 가지 주제가 중요하다: (1) 수치심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고 성장을 방해하는가. (2)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과거의 수치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존재로의 치유와 회복의은총의 바다로 뛰어드는 결단을 하는 해방의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본문 후반부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다. 흔히 이 부분은 예수가 베드로를 회복시켜주는 의미로 (3번의 부인과 연관), 혹은 베드로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의미로 ( 16:18-19과 연관), 혹은 이 두 가지 의미 모두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삼중의 질문은 베드로의 삼중 부인과 관련이 있지만, 그 내용은 예수의 마지막 담화에 나오는 사랑의 당부( 14:1-16:33)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더 나아가,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 양 떼를 먹여라”라고 당부한 것은 요한복음 앞부분에 예수가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된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 관한 분석에서 밝혀진 것처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하나이다. 베드로가 이 단락에서 지도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라면, 그는 그 순간 그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것에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주석적 관점

 

- 설교를 듣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이 구절에서 독자들은 일련의 주석적 역사적 질문들로 인해 쉽게 방향을 잃어버린다. 물고기를 잡고 아침을 먹기 위해 바닷가에 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묘사한 첫 번째 이야기는 2000년 동안 독자들을 혼동 시켜 왔다. 비교적 사랑에 대한 예수와 베드로의 담화가 담긴 두 번째 이야기는 좀더 평이한 이야기이다. 그 의도가 직접적으로 보인다.  

- 요한복음 21장을 읽게 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가 많다. 수사의 스타일과 신학적 묘사에서 분명한 변화는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들과 저자와 저작시기가 같은가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가져왔다.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같은 저자에 의해 같은 시기에 쓴 것이 아니라 많은 저자들이 여러 해에 걸쳐서 쓴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은 설교자들에게 이 본문을 복음서 전체적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역사와 목적을 가진 분리된 조각으로 읽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 첫 번째 장면은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가 배경이다. 갈릴리라는 배경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부활이야기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이야기와 갈릴리 중심의 이야기 사이에 긴장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요한은 바닷가에 모인 제자들의 흥미로운 명단을 보여 주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사랑하는 제자였다. 이점에서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5:4-11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병행하는데, 두 이야기 각각의 출처와 관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된다. 누가에서는 기적적인 물고기잡이가 제자됨으로 인도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인식(recognition)으로 이끈다. 베드로는 물에 뛰어들어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로 나간다.  

- 바닷가에서 만남에 대한 설명도 대단히 흥미롭다그것은 예상되는 축하가 없는 억제된 그리고 어색한 만남이다예수는 빵을 준비하고 숯불을 피워 생선을 놓아두었다예수는 생선을 더 달라고 했다. 153마리의 물고기가 있었고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다고 한다예수는 다른 사람들도 식사에 초대했다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예수는 물고기와 빵을 아무 말도 않은 채 나누어준다이 장면은 죽음에서 살아난 뒤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함으로 끝난다.

- 독자들은 오랫동안 이 수수께끼 같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왔다. 누가의 이야기가 전형적인 최초의 열쇠를 제공한다. 물고기, 적어도 디베랴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는 누가복음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처음의 장면은 선교의 초대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는 물고기가 사람을 상징하는 것인지 또한 이것이 선교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힌트가 전혀 없다. 오직 단 하나의 힌트라면 물고기의 숫자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숫자의 상징을 설명하려는 무수한 시도는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숫자는 단순하게 얼마나 잡았는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시하는 것이 첫 번째 장면의 포인트는 기적적 성격이다. 요한복음의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중심적 목적은 예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기적에서 예수는 주님으로서 계시되었고 인식되었다.  

- 만약 그렇다면, 바닷가에서의 장면은 더욱 중요해 진다. 예수와 제자들 간의 어색한 만남의 흥미로운 이야기 가운데,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비하고 제공한 식사는 이 만남의 초점이다. 이 식사의 상징과 목적은 이야기 안에서 명백하지 않다. 초기 기독교에서 물고기와 빵을 제공하는 다소 특징적인 식사규례가 있다. 종말의 잔치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 물고기가 주된 음식이다. 더 나아가 초대기독교의 성찬식 성화에서 컵과 빵이 아니라 물고기와 빵의 이미지를 주로 그리고 있다. 무엇을 정확하게 상징하는 것이든지,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먹이는 거룩한 식사이다.

- 대단히 어색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읽는 것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고전적이다. 우리의 노동 가운데 예수는 부르시고 먹이신다. 음식은 성찬이고, 식사는 하나님의 왕국의 잔치이다. 우리가 먹는 물고기는 우리의 노동으로 거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 두 번째 이야기도 약간의 수수께끼를 갖고 있지만, 기본적인 뜻은 명확하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를 불러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고 먹이시라는 것이다. 베드로를 세 번 반복해서 부르시는 것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상기시킨다. 거의 모든 독자들이 이 이야기에서 베드로의 명예회복과 공동체의 지도자로서의 임명을 함께 읽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의 사랑의 정의 위에 세워졌는데,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어떤 학자들은 헬라어의 “사랑”이란 단어의 변화(우정에서 절대적 사랑으로)나 “양”이란 단어의 표현의 변화(단지 양을 가리키는 말에서 일반적 가축을 가리키는 말로)가 의미를 미묘하게 강화시킨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이나 초기 기독교는 이 두 단어를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교환해서 사용해 왔다. 용어의 변화는 아마도 스타일이나 표시의 문제이지 신학적으로는 상관없을 것이다. 다른 수수께끼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이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을 비교하는 것은 의도적 기능이지 사랑에 등급을 매기려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예수가 베드로의 장래에 대해 예언하는 것인데,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그를 묶어서 그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를 끌고 가는 사람이 로마의 박해자인지 예수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폭력적 죽음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 예수는 베드로에게 그를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라고 부르시고, 그 다음에 그의 폭력적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사랑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목회적 관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과부하 상태에 있다. 증가하고 있는 섹스와 폭력에 관한 이미지들이 인쇄된 매체나 인터넷과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를 환영하고 있고, 라디오 광고와 거리의 소음 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어떤 사람들이 직장에서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나 지하철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와 맞먹는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큰 소리와 충격적인 경험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좋지 않은 진단을 받게 되거나 이혼을 하게 되면서 정서적인 과부하를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아이가 갑자기 섭식장애가 되거나, 상사가 해고 통지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명을 잃는 비극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런 경험들은 인간의 영혼을 압도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겪을 때,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한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위로를 찾는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정원을 가꾸고, 어떤 사람은 초콜릿을 먹거나 쇼핑을 한다.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에 빠져서 자신을 잊어버리거나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있음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술이나 약물에 의존한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에 걸친 삶의 일반적인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긴장으로 가득 차고 정서적으로 고양된 그들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전에서의 특별한 사건들로 이어졌고, 유월절 식사는 다른 것과 달랐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강렬한 경험, 예상하지 못했던 배신,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일련의 부인, 조롱, 야유하는 군중, 그리고 피의 처형. 확실히 예수의 죽음 이후의 시간에, 제자들은 좌절하고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정서적인 과부하를 가져오는 또 다른 종류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보아야만 믿을 수 있는 빈 무덤과 부활하신 모습에 대한 소식들. 이 사건들은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이 사건들은 세계 전체를 영원히 바꾸어 놓을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의 즉각적인 여파로, 제자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을 흡수할 시간과 정서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베드로의 인도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로 돌아갔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베드로가 말하자, 다른 제자들이 자기들도 가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독특하고 기발한 복음의 세부적인 내용이다. 이것은 어떻게 인간이 정서적인 과부하에 응답하는지, 그리고 이전의 삶과 직업으로 돌아가려는 제자들의 결정이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설정되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 주님은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평범하고 반복되는 것들은 더 이상 평범하고 규칙적인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매우 신랄하게 묻는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139:7) 우리가 사무실이나 쇼핑몰이나 정원으로 후퇴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직업으로 후퇴했을 때, 그들이 궁극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예수가 거기 계시고, 그의 제자들을 섬기고 먹이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보는 눈을 가져야만 하는데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바닷가에서 예수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보았다그러나 그들 가운데 오직 사랑하시는 제자만 주님을 알아보았다그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사람이다이것의 목회적 의미는 잠재적으로 엄청날 수 있을 것이다“예수에게 기대어 있는 것”이 기도하면서 주님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고우리의 마음을 예수의 마음과 가슴에서 휴식하는 것이 아닐까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 자신에게 조용하게 몰두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평소에 되풀이해서 하는 일들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변화산에 세 개의 초막을 지으려고 한다든지계속 바쁘기 위해 고기를 잡으러 가려고 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충동적인 경향이우리가 계속 움직이고 생산적이 되도록 요구해서우리 삶 속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낭비”하며 기도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충동적이고 활동적인 제자에게 세 번 그의 양을 먹이라고 하심으로, 우리들 각자의 안에 있는 베드로에게 날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만나는 다른 길을 제공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만남을 통해 구속되었다. 우리 각자 안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와 과장된 베드로가 있고,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를 압도하는 위협적인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그리고 정복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한다. 기도하면서 예수의 가슴에 기대고, 때때로 주님의 마음에서 휴식하는 것이, 지나치게 바쁜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가장 일상적이고 익숙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영적인 비전을 선명하게 하고 주님이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은 주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며, 주님께 “입술로만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설교적 관점

 

-우리가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구절을 읽기를 끝냈을 때 이 책의 마지막인 것처럼 들린다. 20장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20:31)로 끝난다. 얼마나 훌륭한 마무리인가? 그런데 마지막인줄 알았던 그 때 아직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이것은 마치 연극에서 커튼이 내려오고 한 배우가 무대 앞으로 나와 에필로그를 들려주는 것과 같다. 요한이 아닌 누군가가 이 에필로그를 썼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이것이 지닌 통찰력이나 생동감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누가 이 에필로그를 첨가했던 간에 그 누군가는 요한의 작품을 읽고 충분히 소화하였다. 우리는 이 익명의 편집자가 의도했던 바를 정확하게 규명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필로그를 세심하게 읽어보면 앞서 있었던 일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이야기의 주제, 관점, 장면들이 에필로그와 대응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디베랴 해변에 나타나 제자들을 생선과 빵으로 먹이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요한복음 6:1-14의 이야기 곧 예수께서 같은 해변에서 오천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자비는 지나간 이야기이지 현재는 아니야라고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이 에필로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먹이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대로 제자들이 배 오른 편으로 그물을 던졌다는 사실을 들을 때 우리는 복음서 어디에도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놀랄 수 있다. 이 기억이 요한복음 밖에도 있고 적어도 한 학자는 눅 5:6-7에서 “같은 장면이지만 다른 말로 도움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Garden City, NY: Doubleday & Co., 1970), 1071.]  요한복음과 에필로그 당대의 독자들과 청중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도와줄 때 까지는 그들의 수고가 아무 결과물도 없었다는 전통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에필로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네게 맡겨진 선교를 수행하려면( 20:21), 너를 인도하고 먹이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해변에 나타나 그들을 불렀을 때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20:15)를 기억한다. 만일 우리가 “자 그것은 마리아의 문제야-그녀가 너무 슬퍼서 분간을 못했으니까”라고 결론지으려 한다면 이 에필로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닫혀진 문 뒤에 있던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인사한 이후에도 (20:19-23) 또 의심하는 도마에게(doubting Thomas) 다시 나타난 이후에도 (20:24-29) 알아보지 못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아침식사에 초대하고 빵과 생선으로 그들을 먹인 일은 고별담화에서 (Farewell Discourses)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식탁에서 함께 있던 이전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해변에서의 이른 아침식사는 마지막 만찬이 제자들과 그리스도가 함께 했던 마지막 식사였다는 것을 바로잡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식탁공동체에서 나눔을 계속하고 있고 우리의 삶과 일에 필요한 능력과 힘을 계속해서 공급해 주시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은 것을 들을 때 우리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한 일(13:38) 그리고 그 예언이 실현된 슬픈 장면들(18:15-17, 25-27)을 기억하게 된다. 만일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에 관한 마지막 일이 그의 신실하지 못함(unfaithfulness)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에필로그는 베드로의 부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기억하게 한다.

-한 마디로 이 에필로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과거의 일로 여기지 않게 또 복음을 오래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위해 우리에게 드라마틱하게 접근하고 있다. 이 에필로그는(epilogue) 요한복음 서곡에(prologue) 나타난 하나님 말씀의 살아있음과 활기참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있다. 또 디베랴 해변에 나타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하여 서곡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첫 사역을 확증하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1:5) 에필로그는 우리 가운데 있는 어둠의 기억들 즉 우리가 겪은 굶주림이라는 어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어둠,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어둠을 일깨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어둠 가운데 어느 것도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고 먹이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심지어 의심하고 부인하는 자들에게도). 에필로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요한의 이야기에서 커튼이 내려왔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이야기는 계속 진행 중이라고. 요한이 여러분에게 보여준 모든 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또 그것을 넘어서 계속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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