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예수를 직접 만나서 신앙을 갖게 된 제자들이 그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예수가 최초의 제자들을 위한 고별기도를 하면서 앞으로 이 제자단이 큰 무리로 성장할 것을 예견하였다. 예수는 이 제자들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 즉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도 하였다. 예수를 직접 만났던 제자들이 아닌 후대의 기독교인들도 제자들이 체험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할 수 있을까? 예수는 세대를 초월하여 믿는 자 가운데 완전한 영적 경험과 교제가 있게 되기를 원했다.
22-23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최초의 제자들뿐 아니라 후세의 제자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의 기도는 하나됨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보냄 받은 분의 진정성에 대한 증언을 위한 것이다. 이런 기도는 예수 이후 1세기의 교회 뿐 아니라 나눠지고 파편화된 21세기의 기독교에도 필요한 것이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 주교 크리소스톰은 예수의 기도를 풀어서 이렇게 설명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배운 평화를 그들 스스로 지킬 수 있다면, 주위의 사람들이 제자들을 통해 선생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그들 안에 다툼이 있다면 그들이 평화의 하나님의 제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도 부정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일치와 제자들 간의 일치에 관한 기도는 역설적으로 많은 분열을 만들어 내었다. 핵심에는 하나님과의 연합과 사람들 간의 연합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신적인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이견들이 있어왔다. 이 논쟁은 때로는 유혈사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신성과 일치하는가, 인성과 일치하는가에 관한 논쟁)
대립되는 입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간의 깊은 일치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3세기 경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여, 교회의 일치는 미래의 인류의 일치의 예시라고 주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들 간의 일치는 모든 인류의 일치의 실제적 회복의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은 그 일치를 통해 평화의 주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치는 장래에 하나가 될 인류로 인도하는 길의 역할을 할 수 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인류의 화해와 일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치와 함께 인류를 위한 화해, 정의, 평화를 추구해 왔다. 이것은 예수의 기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예수의 일치를 위한 기도는 큰 값을 치루는 기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광과 사랑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는 당신의 영광을 제자들과 같이 나누겠다고 한다. 우리는 본문의 맥락을 통하여 예수의 영광은 예수의 고난, 십자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짐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일치는 제자들이 져야할 십자가도 포함하고 있다. 예수와 하나됨은 역사 속에서 사랑과 공의를 추구하다가 불의한 권력에 의해 핍박받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과는 다르다.
주석적 관점
-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고별담화(13:1-17:26)의 정점이다.
담화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1)13:1-16:33 교회에 한 말씀 2)17:1-26 천국에 대한 말씀
둘째 부분을 더 세분하면 17:1-19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17:20-26 장래 세대에 한 말씀
오늘 본문은 고별담화의 적절한 결론이다. 과거를 요약해서 볼 뿐만 아니라 회당에서 추방당한 가정교회로서의 요한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본다.
- 담화는 현재의 갈등을 세상(kosmos)과 공동체에 준 말씀(words)과의 대립으로 묘사한다. 요한복음의 어법으로 ‘세상’은 지리적 용어일 뿐만 아니라, 아들을 통해 하시는 아버지의 일에 대항하기 위하여 정렬된 영적 역사적인 모든 힘들을 묘사하는 신학적 용어로서도 사용된다. 세상은, 로마제국의 세상이든, 신전으로 가득한 에베소같은 도시의 세상이든, 회당의 세상이든 아버지의 일에 적대적으로 대항한다. 이것이 예수가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17:25)라고 말한 이유이다. 이것은 또한 가정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맞아야 할 중심적 갈등이다.
- 세상에 포위된 상황에서 공동체가 좀 더 응집이 되거나 분열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공동체의 하나됨에 그렇게 관심한 이유이다. 오늘 본문에 전반적으로 예수의 연설은 헬라어의 “안”(en)과 “하나”(hen)라는 단어놀이 를 하고 있다. 하나됨은 21절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에서 시작되는데,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수의 말씀을 개인적 신비주의나 영적 형성으로 곡해하기 쉽지만, 예수의 말씀은 공동체에 주신 것이다. 만약에 요한복음에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 지향의 신비주의이지 개별 신앙인의 신비주의가 아니다.
- 요한은 공동체의 영적 형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요한공동체의 특징은 공동체 자체의 본질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예수의 내재는 공동체에 필요한 하나됨의 모델인데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2)라고 한다. 공동체의 결속은 신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21)라고 했다. 만약에 공동체가 분열된다면 그러한 혼란으로 공동체의 세상에 대한 사명을 약화시킬 것이다.
- 요한복음은 영광의 신학을 말하는 영광의 복음서이다. 그래서 예수가 “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22)라는 말이 사실로 들린다. 자세히 보면 예수의 영광은 가장 생생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다.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통합하고 있으며, 그둘은 요한복음에서 나눌 수 없다. 이것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고별담화의 정점이 세상의 장래에 대한 선언을 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요17:20-26은 제자도와 증언의 축약된 매뉴얼로 볼 수 있다. 영광으로 가득한 승리한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것은 말씀으로 영광의 신학(예수의 특이한 영광)과 십자가의 신학(예수의 특별한 영광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이 하나되는 곳이다.
- 요한복음과 고별담화는 교회공동체들에게 심각한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요한이 했던 것처럼 복음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공동체의 비전과 복음의 풍성함에 충실한가? 그리고 요한이 했던 것처럼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가?
- 미래 세대에 대한 관심이 본문이 고별담화일 뿐만 아니라 전환적 담론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데, 그것은 임박한 변화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모세의 고별로 여호수아가 출현했고, 엘리야의 사라짐이 엘리사의 출현을 가져왔던 것처럼 예수의 떠남이 성령의 오심으로 이어졌다. 요한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내재의 경험이 공동체에게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요한공동체의 하나됨은 교리가 아닌 예수와 아버지의 하나됨과 같은 내재의 공동경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동체가 세상에 대해 증언해야 할 내용이다. 그들의 사명은 이 믿음의 경험을 공동체에 살아있도록 지켜서, 갈라지고 조각난 세상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2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요14:1-7이나 십자가의 암시이다. 어느 경우이든, 제자들이 살 곳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와 아버지가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 것이다(14:23). 이것은 담화가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요한의 독특한 내재를 초월한 종말론이다.
-담론은 사랑으로 끝난다(26). 아버지의 내재의 목적은 제자들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사랑의 경험을 공동체로 가져 오는데, 이 사랑은 이 세상을 다시 만드는데 충분히 강한 힘이다.
목회적 관점
예수는 그의 대제사장의 기도를, 앞에서(11절) 언급한 그의 제자들의 일치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오면서 마친다. 분열이 요한 공동체를 위협했는지 아니면 그런 분열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예수가 현재와 미래(부활절 이후) 사이, 갈릴리에서 그와 함께 있던 제자들과 나중에 그들의 선포를 통해 믿게 된 사람들(20절) 사이의 일치와 연속성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예수가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현재와 미래의 제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연합과 연속성을 교회가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창조 안에서 예수의 역사적 현실은 창조주와의 연합과 연속성 안에 있고, 후기 제자들의 선포는 부활절 이전에 예수와 동행했던 제자들의 선포의 연속성 속에 있다.
몇 가지 이미지들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과 고전적인 신조 안에 있는 교회의 고백은 동일한 연합이다. 시간과 장소는 창조의 일부이다. 창조주는 창조된 질서를 초월하고,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시간 밖에 있다. 역사 안의 모든 순간은 즉시 혹은 “눈 깜빡할 사이에”(고전 15:51-52) 하나님께 접속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죽은 후에 알게 될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지금 때때로 맛보는 처음 열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시간의 밖에 계신다는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존재했던, 존재하고 있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들과의 연속성 안에 있다는) 인식을 T.S.Eliot의 “네 개의 사중주”보다 더 잘 파악한 사람은 거의 없다.[“A people without history/ Is not redeemed from time, for history is a pattern/ Of timeless moments.”(“역사 없는 민족은 / 시간에서 구원받을 수 없다. 역사는 영원한 / 순간들의 패턴인 고로.”) From Little Gidding, in T. S. Eliot, Four Quartets (New York: Harcourt, Brace & World, 1943), 58.] 이런 사상들은 예수의 대제사장의 기도 안에 내재된 것인데, 죽음에 관한, 이전에 죽은 사람들과의 연속성에 관한, 그리고 우리 예배에서의 성도의 교제에 관한 성찰이 이것들에게 빚졌다.
예수가 기도한 하나됨(21절)은 예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자기를 주는 사랑의 일종인 상호적인 사랑(23, 26절)에 기초하고 있다. 상호적인 사랑은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랑이다. 명령할 수 있는 사랑이고(13:34, 15:12,17), 때로는 쉽고 은혜로운 사랑이고, 선물이라는 성격을 가지며, 다른 시간에는 결단과 선택을 통해 우리의 약속에 충실하게 된다. 기독교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서로 가시적인 연합을 유지하기 힘든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맹세를 서로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예수의 기도에서 계시된 사랑의 핵심적인 상호주의와 자기를 주는 사랑 안에 스스로 참여하려고 하는 도전에 관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춤에 관한 이미지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커플이 춤을 출 때, 어떤 때는 함께 춤을 추고, 어떤 때는 따로 춘다. 연합 안에서 사는 일에 실패하는 것은 보통 상호주의에 실패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그런 실패로 이끄는 것들에 대해 점검하고 그런 일들이 얼마나 자주 권력이나 통제에 관한 쟁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지를 검사해 보아야 한다. 커플에게는 이것이 돈을 관리하는 살림살이 이상의 차이를 포함할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적 순결에 대한 인식과 교회의 권징으로부터 온다. “만약 모든 사람이 내가 정한 규칙을 따른다면, 모든 사람이 상호적인 사랑과 연합 안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영광을 구성하는 하나됨(22절)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됨이다. 그것을 바울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묶는 띠(골 3:14)”라고 표현한다. 불화, 관계의 파괴,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하여 자각하는 것은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받아들이게 한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됨 안에서 사는 것이 어려우면 상실과 회복, 추방과 귀향, 광야와 약속의 땅, 회개와 용서 같은 주제들에 대한 목회적 성찰을 해야 한다.
설교적 관점
-예수의 말씀을 붉은 색으로 인쇄한 성경에서 (red-letter edition of the Bible) 오늘의 본문은 4장에 걸쳐 거의 붉은색으로 표시된 장의 마지막에 해당된다. 예수는 섬기는 자로서의 지도자를 말했고 (13:1-20) 앞으로 있을 배신에 대해 말했다 (13:21-30). 14장에서 16장은 죽음을 앞둔 지도자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마지막 교훈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을 기억하라” 그런 다음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기도로 방향을 선회한다. 설교자가 할 질문은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혹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인지이다 (이 질문은 답을 고르는 게 아니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비록 요한복음 기록이 4장 더 계속되지만 이 기도는 주님께서 마지막 바로 전의 말씀을 담고 있다. 다시 한 번 예수는 삶에 있어 가장 심오한 때는 우리 마음과 태도가 다른 사람을 포용하기에 충분히 열려있는 시간이라는 진리의 말씀을 하신다. 요한복음 17장은 “사제의” (priestly)기도인데 그 이유는 이 장에서 예수는 사제가 그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기도에서 3가지 주제들이 나타난다: (1) 믿음 (belief), (2)하나됨 (oneness) 그리고 (3) 사랑 (love). 설교자는 부활절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의 설교에서 이 세 가지중 하나 혹은 모두를 다룰 수 있다.
믿음 (Belief). 예수는 그를 믿었던 사람들(20절), 제자들의 증언으로 그를 믿을 사람들(20절), 그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 (21절). 여기서 지역 신앙공동체의 복음적 과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신앙공동체의 일차적 관심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양육과 성장이다 (26절). 그 다음 말씀과 실천을 통하여 교회공동체가 직접 만나는 사람들을 돕게 된다(26절). 셋째로 세상을 향하여 증인, 섬김, 그리고 선교(witness, service, and mission)를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됨 (Oneness):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는 (unity) 예수께서 말한 바로 그 일치이다 (21절). 예수는 믿는 자들의 일치 그 이상을 위해 기도한다(21절).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향하여 갈 때 여전히 제자들이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느꼈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날 주님께서 교파간의 갈등과 내적인 혼란을 목격할 때 어떻게 느낄까를 상상해볼 수 있는가?
믿는 자들에게서 일치가 중요한 것은 그 하나됨을 통해 세상이 믿게 된다는 것(23절)이다. 역으로 말하면 세상은 예수의 제자들 간에 분쟁으로 인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11제자들과 그 제자들로 인해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이 한 몸이 (20절)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신앙의 사람들 간에 2등시민 (second-class citizenship)은 있을 수 없다. 교회일치운동 (ecumenism)은 그리스도인들이 요청받은 그 일치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다. 교회의 궁극적일치는 인간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하나됨 (21절)에 있다. 일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공동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발견된다. 칸 (Fred Kann)은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accepted) 우리도 서로를 용납하게 도와주소서. 우리 서로가 자매요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가르치소서. 주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셔서 우리들 자신이 받아들여졌고 사랑과 생명으로 살게 된 것을 믿을 수 있게 인도하소서. [Fred Kaan, “Help Us Accept Each Other,” in The United Methodist Hymnal (Nashville: United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89), 560.]
사랑 (Love): 본문에서 5번이나 예수는 “사랑”을 삼위일체 관계의 핵심적 용어로 말하고 있다 (23,24,26절).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의 결속이다 (23-24절). 사랑은 제자들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이다 (23절). 사랑은 마음을 끄는 은혜이고(magnetic grace)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에 다가가기를 원하신다 (25-26절). 사랑은 주님의 제자들 안에 있게 되기를 주님께서 기도하신 요소이다 (26절). 이 기도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지 못한다면 감상적인 말장난처럼 보일지 모른다. 예수께서 기도한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영광이 있으나 (22절) 그 영광은 십자가 죽음과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도록 하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아가(The Songs of Solomon) 8:6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고 말한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는 (24절) 그의 제자들이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24절)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그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령강림절 (Pentecost):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일치에 관한 이 성서정과가 성령강림절 기사가 뒤따를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임할 때 장벽과 경계가 무너지고 일치가 이루어진다(사도행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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