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본문에 “보다,” “만지다” 등의 표현이 자주 나와서, 본문이 “경험적 검증”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인터넷에서 “경험” 과 “검증”을 같이 검색하면 수백만 건의 결과가 나온다. 왜 사람들은 이 두 단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그 답은 쉽다: 오늘과 같은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감각적 경험에 의존해서 검증하는 것을 신뢰하도록 교육받았다. 시각과 촉각은 가장 확실한 증거의 수단이 된다.
우리가 그런 감각에 의존한 검증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본문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예수는 손을 보고, 만지고,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한다. “만지라,” “보라”는 실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그 교훈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당연하게 여긴다고,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마라. 과학은 전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과학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찰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해법을 위해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지고, 보아야 한다. 물론 냄새를 맡는 것도 도움이 된다.
듣고 보는 것은 본문에서 중요한 사안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빈 무덤을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었다. 부활의 날에 예수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평화가 임했다.(요20:19,21). 예수는 그들에게 용서에 관한 가르침을 주었다. 도마는 거기 없어서, 보지도, 만지지도, 냄새를 맡지도,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도마의 이야기는 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서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로 해석하는 접근은 매우 보편적이다. 도마는 종종 비판을 받고, 비난을 받는다: 왜 그는 즉각 깨닫지 못했을까? 그는 불가지론자, 회의주의자, 의심 전문가였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는 예수를 보거나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그 자리에 그 때 없었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성금요일이나 부활절의 이야기가 아니고, 신앙의 새로운 단계와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건 전까지 예수는 육체적 존재를 통해 얼굴과 얼굴을 보는 관계를 제자들과 유지해 왔었다. 오늘 도마에게 하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보는 것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이 사건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다음 모든 제자들이 죽었다. 다시는 예수의 존재를 그의 육체적인 얼굴의 눈, 코, 입을 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졌다. 물론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보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 표현이다. 성만찬을 통해 떡과 포도주를 맛본다. 그러나 이것은 성례전적(sacramental)인 의미이다.
입증을 위한 방법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듣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라고 했다. 도마는 구세대 제자들 가운데서는 가장 마지막에 부활한 예수를 만난 자이지만, 부활한 예수로부터 앞으로는 “들음”에서 믿음이 생길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첫 제자가 되었다. 예수가 도마에게 와서 보고 만지라는 초대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도마가 실제로 가서 예수를 만졌는지 알 수 없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는 장래에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미대륙 등 온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을 알게 한 공이 있는 셈이다.(29절)
예수의 생애 중에 수백 혹은 천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수십억의 신자들은 예수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화가가 그린 그림이나 환상을 제외한다면) 믿게 되었다. 예수가 말하고, 도마가 믿었다. 말씀이 믿음을 낳은 것이다. 더 이상 만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마 만지려는 시도는 불손하고 모욕적일 수도 있다.
도마의 경험 이후, 입증의 방법은 듣는 것(혹은 글을 보는 것, 즉 읽는 것)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우리가 듣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기독교인들은 듣지도 않고, 입증되지 않은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듣고, 검증의 정신을 갖고 상고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증언들을 비교검토 해야 한다.
신학이나 철학에서 수사학이 중요하다. 수사학의 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설득력 있는 말이 수사학의 과제라고 했다. 그의 연구는 설교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설득력있는 말을 하기 위해 중요한 사항으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제시했다. (1) 말하는 자의 신뢰성: 위선자나 거짓말쟁이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다. 말하는 자의 인격 혹은 성격(ethos: 특성, 기풍, 기질, 특성)이 중요하다. (2) 이야기 기법의 중요성: 청자들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동정이나 동일화등과 같은 페이소스(pathos: 동정, 연민, 파토스, 情意)가 중요하다. 설교자는 청중이 그들이 당하는 고난, 상실감, 자괴심 등 때문에 무엇인가 보고 싶어 하고, 부활한 예수와 동일시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언어의 중요성: 말씀은 로고스이다.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예수의 말씀은 도마를 열등한 제자라는 치욕으로부터 구해주는 치유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설교를 하는 신학자나 신학을 하는 설교자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도계나 저울에서 보듯이 경험을 통해 검증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설교자는 이런 세태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신뢰성을 입증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 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과제가 잘 수행될 때, 청중들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반응할 것이다.
그런 반응을 보인 신자들은 이제 자신의 일터나 휴식의 공간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면서,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에 관한 증거들을 “경험적으로,”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 요한복음 20장의 간결한 인물 묘사는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되는 다양한 모습에 대한 예증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는 믿음을 이끌어 내는 도구로 사용된(2:!1) “표적” 또는 기적을 행했다. 십자가 자체도 표적인데, 그것은 예수를 영광되게 한 것이다(17:1). 성금요일 이후에 새로운 종류의 표적이 있었고, 그것은 믿음을 변화시켰는데 부활하신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예수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빈무덤이 , 다른 사람에게는(사랑하는 제자) 수의의 특이한 놓임이 표적이 되었다. 천사가 나타남도 주지 못한 부활의 확신이, 막달라 마리아 경우에서 보듯 이름을 부름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복음서 저자는 이야기 자체의 힘이, 하나로든 합쳐져서든, 육체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조금 떨어져 살던 독자들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키기를 바랐다.
- 예수가 열 제자에게 나타나면서 의도한 “표적”은 전에 한 약속의 성취가 되었다. 어둠이 내린 저녁이었다. 제자들은 격리되어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있었다. 예수가 예견한(15:18-24;16:1-4) 박해가 다가오고 있다. 와서 그들 가운데 서셔서 예수는 고별담화(14-17장)에서 제의한 바로 그 서약을 이루었다: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것(14:18-19,28); 평화를 주겠다는 것(14:33;16:33);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고 완성되리라는 것(16:20-24);성령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것(14:16-17,25-26;15:26;16:13-14); 그리고 그들이 힘을 얻어 예수를 대신하여 시험당하고 증인이 된다는 것들이다.
- 이 성경구절들을 고려할 때에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눅 24:49의 예수의 약속과 행2:4의 성취가 이 장면에 하나로 묘사된다. 16:8의 예수의 고별사와 이곳 21-23을 연결시켜보면, 마태28:19의 대위임과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매고 푸는”권한을 주신(마16:18-20;18:18) 것의 반향을 들을 수 있다. 전통의 상호관계에 관계없이, 요한복음서 저자는 성금요일,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신학적으로 풍부한 하나의 이야기로 요약하고 있다.
- 본문은 또한 구약의 인용도 풍부하다. 예수는 숨을 불어 넣으시고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숨을 불어 넣는다는 동사(emphysao)는 흔한 것이 아니다. 칠십인역의 창세기 2:7과 에스겔 37:9에 나온다.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는 육체에 갇히고, 두려움에 떨고, 앙상한 믿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으로 생기를 준다.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주장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첫 번째 반응은 혼자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예수가 공생애중 행한 표적들은 믿음을 이끌어내고자 한 것이다(1:50;10:38;11:15,40;14:11). 도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표적을 믿음의 전제 조건으로 생각했다(4:48;6:30). 다른 곳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의 메시지에 대해 불신앙으로 응답했다(마28:17;눅24:11,24,38,41). 도마 설화는 어느 복음서에서도 삭제하지 않은 부활 이후 전통의 요점이다. 만약에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연결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하면, 20:26-28을 예수 자신이 제자들을 초청하여 육체를 만지게 하고, 그들이 의심이 많음에 도전하기 위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셨던 눅24:36-43의 말씀을 재작업하고 도마를 주인공으로 개인화한 이야기로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문자적으로도 도마의 요구와 막달라 마리아가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것(20:17)의 명백한 대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도마는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12제자 리스트에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다(마10:3;막3:18;눅6:!5;행1:13). 요한복음에서는 뚜렷한 목소리를 가진 중요한 인물로 취급된다(11:16;14:5;20:24-29;21:2). 도마는 적절한 이름이 아니고, 아람어의 쌍둥이를 의미하는 별명이다. 도마복음서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유다이다. 그래서 요한이 그를 “쌍둥이라 불리는” 사람이라 했을 때, 그리이스어 번역으로 쌍둥이를 말한 것인데 이는 그를 유다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는 누구와 쌍둥이인가?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도마에게 “누구든지 내 안에서 나온 것을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자신도 그 사람이 될 것이다. 신비가 그 사람에게 계시될 것이다”라고 밝힌다(도마복음서 Log. 108). 엘렌 페이겔은 도마복음서에서는 “살아있는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과 예수가, 말하자면, 쌍둥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요한복음은 믿지 않고 믿기 어려운, 도마를 쌍둥이로 말하며 이런 전통에 대항한다. 아마도 도마는 우리와 쌍둥이가 아닐까?
- 도마의 요구와 예수의 응함은 십자가나 부활에 대한 가현설적 읽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수난설화에 처음으로 성취공식(이것은 성경이 말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을 도입했고, 분명하게 구약을 인용했다(19:24,28,36-37). 마태는 이러한 테크닉에 능하다. 요한은 이를 마지막으로 유보했다. 인용구(시22:18;시69:21;슥12:10)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육체적 현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고통과 죽음은 뜻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성경에 미리 예언되었다. 한데 도마의 이야기를 호머의 오딧세이에 나오는 상처난 증거에 의존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것의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빈무덤, 수의, 천사의 출현, 예수와 마리아의 대화, 부활후 첫 번째 날 저녁에 나타나심, 그리고 도마에게 나타나심 모두를 합하여 한 가지 반응을 요청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것은 복음서에서 가장 분명한 것이다(행2:36;딛2:13;히1:8이하와 비교). 요한복음의 서론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그것이 복음서의 절정이자 논리적 결론이다.
목회적 관점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22절)
성육신의 상상력으로 이 문장을 생각해 보자. 그 숨의 냄새는 어땠을까? 그것은 봄의 향기 같았을까? 그것에는 평범한 경험을 넘어서는 하늘의 무언가가 있었을까? 혹은 그가 사흘 전에 그들과 함께 먹었던 포도주와 음식의 향기가 아직 있었을까? 혹은 어쩌면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익숙했던 생선과 올리브와 빵 같은 음식 냄새를 맡았을까? 혹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마시라고 받았던 쓸개즙이나 장례를 위해 부은 향료의 진한 향기였을까? 예수가 놀랍게 다시 살아서 제자들 앞에 서 있는데도,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의 손의 상처와 같이, 지금까지 예수에게 달라붙어 있는, 무덤의 어떤 것이 있었을까?
이러한 가능성들은 각각 이야기를 약간씩 다르게 만들지만, 그러나 어떤 것도 본문이나 교리에 의해 결정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이런 추측들 가운데 어느 것도 복음에 활력을 주지 못한다.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사소하고 헛되며 순진한 문자주의에 잘못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교의 내용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 준비를 위한 묵상으로 설교자가 이런 묵상의 훈련을 하기를 제안한다. 왜냐하면 묵상은 영감이라는 은유를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의 숨결, 즉 프뉴마를 우리에게 주시는 살과 피에 대한 경험 뒤로 보내기 때문이다. 예수는 프뉴마를 종이 위에 쓴 글자로 주시지 않고, 숨을 내쉼으로 주신다. 숨은 부분적으로는 설교의 형태로 내쉬지만, 또한 우리 허파를 위한 공기로, 우리 삶을 위한 생명으로 내쉰다. 하나님이 먼지로 만든 피조물에게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먼저 살아난 것처럼,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생기 있게 하셨다. 이것은 물론 은유이지만, 성령을 영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부활을 성육신에서 분리시키는 위험하고 추상적인 토론이 시작된다. 실제 호흡과 실제 살을 포함하는 복음의 실제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포기하거나 무시하지 말자. 우리가 지금 우리 허파 속으로 들이마시는 호흡이 부활하신 주님의 그것과 섞여 있음을 생각하고 느끼고 믿자.
우리의 호흡이 실제로 예수의 호흡이라면, 또한 우리의 호흡은 생명을 주는 산소를 가지고 우리의 몸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우리의 허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호흡을 내쉬는 것도 마찬가지로, 말을 하는 형태로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설교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 역시 성육신 은유의 일부이다. 예수는 무서워서 문을 잠근 방에 나타나셔서, 평화를 말하신다. 그는 그의 몸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숨을 불어넣으시며 제자들에게 명시적으로 성령을 주신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들을 그가 보내시는 그의 사도가 되게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래서 그의 호흡은 사명을 위한 도구이자 수여식이다. 즉시 예수는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수의 호흡을 가진 그들의 과제를 자세하게 말해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용서와 심판의 말을 할 수 있는 권능을 주고,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신적인 사실에 대해 선언하는 말을 하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호흡을 가졌다는 생각은 매력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두 가지 문제가 이 지점에서 떠오른다. 첫째는 사명에 관한 것인데, 예수가 치안 판사들로 군대를 만들어서 세상으로 보내어 하늘의 권위를 가지고 분주하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죄의 판결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판결을 하라고 하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위임된 사법적 구조로 인하여 성령을 받은 그들의 영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분명하게 공유하신 상처 입은 인간성을 오만하게도 불명예스럽게 여기게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예수가 주신 권위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예리한 도전과 풍성한 용서, 고통을 위한 평안과 편안함을 위한 고난 모두를 의미하는 평화의 말을 하는 것이다. 루터교에서는 결점이 있는 속기 안에 율법과 복음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말해주지 않으면 멸망할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말해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여기서 신적 권위의 원리는 오만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비로운 돌봄과 긴급한 관심 양쪽 모두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관심 때문이 아니라, 선포되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거룩한 책임감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게 되지 않을 수 있고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호흡을 불어넣는 임무가 가지는 두 번째 잠재적 문제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위탁한 사명을 맡아 수행하는 사람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사도들과 그들의 공식적인 계승자들만의 것인가? 아니면 모든 교회와 믿을 가능성이 있는 각각의 사람을 위한 패러다임인가? 이에 대한 논쟁은 고전적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한 열쇠는 누가 가졌나? 우리의 다양한 전통은 이 질문을 동일하게 하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는 그 질문이, 예수께서 하신 일을 오직 성직자와 선생들만을 위한 전형으로 만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목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부활 호흡을 사용하여 자비와 정의의 복음을 말하고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말에 숨을 불어넣어주시기를. 그러나 또한 우리의 청중이 마찬가지로 말하게 되기를. 아마도 우리는 자신의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설교적 관점
-John Irving의 소설 A Prayer for Owen Meany에서 해설자인 John은 믿음의 의미에 관하여 그 친구인 Owen Meany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운동장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 Owen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땅거미 지는 때 회색 대리석으로 된 막달라 마리아 상을 가리키면서 설명하고 있다. 날이 어두워져 마리아 상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웬은 John에게 아직도 조각상이 거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를 묻는다. John은 물론 알고있다고 답한다.
Owen:당신은 마리아가 그 곳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가?
John: 물론! 나는 의심이 없다.
Owen: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
John: 아니,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곳에 있고 나는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
Owen: 당신은 비록 그녀를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John: 그래요 (하고 나는 외쳤다)
Owen: 이제 당신은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있는 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분명히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Owen Meany는 제4복음서가 요한복음 20장 후반부에서 찬양하고 있는 종류의 믿음을 대표하고 있다. Owen은 너무도 온전하고 완벽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어서 그의 확신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는 보지않고 믿는다; 그는 표지(signs)나 기적 (wonders)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믿고 자신의 전 생애를 이 믿음을 중심으로 방향을 정한다. 이런 종류의 신앙을 도마가 예수를 만나는 장면의 중심적인 메시지로 설정한 것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20장에서 실제로 모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는 보았고 며칠 후 닫혀진 문 뒤에 있던 제자들도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마리아가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오후에 예수와 대화를 하였다. 마리아처럼 그들은 섬기라는 위탁을 받는다.
-그러면 왜 우리는 모두가 가졌던 예수를 볼 동일한 기회를 요청했다는 이유로 도마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대하지 못하는가? 도마가 그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지 않겠다고 한다고 한다면 왜 우리는 그를 나무라는가? 이 이야기가 부활절 이후 주일마다 오랫동안 보여질 때 마다 우리는 보지않고 믿는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의심한 도마를 설교했다. 이런 설교에서는 도마를 부족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지만, 그가 누구나 가졌던 경험을 원했다는 내용은 그 설교에는 없다.
-여기에 도마와 관련하여 진짜 문제가 있다. 제자들이 전한 좋은 소식 곧 그들이 본 것을 거절하면서 도마는 그렇게 오랫동안 삶을 나누었던 동료들을 거부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그리고 요한서신들(요한공동체에서 산출된)을 통하여 신앙공동체 안의 사랑과 신뢰는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현이다. 그러나 도마의 말은 특히 헬라어로는 강한 독설을(sting) 품고있다: “내가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도마는 이 의심의 발언으로 공동체 내 그리스도의 사역을[사랑과 신뢰] 무력화시킨다. 제자들의 눈과 손가락은 도마에게 충분하지 않다. 그는 스스로 보고 만져보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복음서를 통하여 견고하게 이루려했던 공동체는 도마의 의심으로 인해 그 시작부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신앙의 동료들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지나친 의심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서도 문제가 된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이런 불신의 목록을 만들 수 있다. 헌금을 계수하는 집사들을 신뢰하지 않고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또 자신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에는 의문이 많다며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전도사가 자신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했다는 어린 여학생들의 말을 덮어 버리려는 냉소적인 위원희 구성원들도 있다. “만일 입증할 증거들을 가지고 내 앞에서 증명할 수 없다면 네가 여기서 말하는 진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이들은 말한다. 그들에게 익숙한 선입견을 재고하도록 하는 것이나 또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이 있을 수 있음을 거부하면서 그들이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도마를 떠올리게 된다.
-요한복음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의심으로 흔들리는 도마공동체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충성스러우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동료들을 불신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우리는 동료들이 어떤 일을 하려는 동기(motives)에 의혹을 품거나 혹은 그들의 헌신을 의심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했을 때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님의 선하심에서 배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함 속에서도 심지어 그들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는 가장 이상한 소식을 가지고 왔을 때도 거기서 배워야 한다.
-결국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진실로 따르는 자들은 보지않고 믿는 자들이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에서 확증된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9절) 요한의 부활이야기에서 이렇게 한 유일한 사람은 사랑하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이고 그는 무덤으로 달려가 아무 것도 보지않고 믿었다. 복음서 마지막에서 이 모든 기록된 말씀이 진실된 것임을 증명하는 사람도 바로 그 제자이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21:24)
Owen은 A Prayer for Owen Meany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의 삶에서 하신 일을 명확한 근거나 증명없이도 믿는다. 그의 오랜 친구인 John은 Owen이 가졌던 그런 분명한 확신이 없다. John이 가지고 있는 것은 친구인 Owen에 대한 신뢰이고 그 신뢰로 인해 그도 의심을 넘어서 새로운 삶으로 향하게 된다.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 21장 15 ~ 17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설교 (0) | 2022.10.27 |
|---|---|
| 요한복음 21장 1 ~ 19절 (1) | 2022.10.27 |
| 요한복음 17장 20 ~ 26절 (0) | 2022.10.27 |
| 요한복음 17장 1 ~ 18절 (0) | 2022.10.27 |
| 요한복음 16장 12 ~ 15절 (0) | 2022.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