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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한복음 17장 1 ~ 18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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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영광이란 무엇인가?

  선거일 밤에 수많은 지지자 앞에 서 있는 후보자를 상상해보자. 후보자와 청중은 선거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라 매우 지쳐있지만, 이 순간은 안도와 기쁨의 감정에 휩싸여 있다. 그때 매우 신중하게 선택된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이 선포되고, 그 후 후보자와 관중은 무아지경에 가까운 열광에 빠지게 된다. 잘 다듬어진 그 문장은 특별한 의미를 전달한다. 먼 훗날 성취 가능한 일에 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이 순간에는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특별한 방식으로 세상이 보이고 미래가 꿈꿔진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매우 평범한 것에 관한 상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순간에 관한 것이기에 평범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영광”의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할 때 우리의 상상력은 한계에 부딪힌다. 성경의 표현과 신학적 해석과 일상적 의미의 삼각관계를 통해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까지 우리는 영광의 참 뜻을 알지 못한다.

  영광(히브리어는 kabod, 그리스어로는 doxa)은 중대함, 평판, 명성을 뜻할 수 있고, 명성은 빛날 수 있다. 따라서 영광은 보여질 수 있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특별한 순간에 빛나는 행동을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기억되기를 원한다. 사회에서 영광은 그것을 지각하고 인정함으로 이루어진다. 군중과 후보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런 영광을 이루기 위해 애썼다. 선행되었던 좋은 이미지들은 더 새롭게 강화된다. 그 순간은 아프리카 마을에서 찬양 챈팅을 할 때와 비슷하다. 찬양단원의 연주의 감동이 충분히 축적된 후에 리더가 등장하여 폭발적인 호소력을 갖고 당면한 도전에 관한 일성을 내뱉는다.

  영광은 일련의 절차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군중과 지도자는 특별한 사건을 만들고 그 안에 빠져든다.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활기차게 하는 영광의 요소가 그들을 감싸고 그들 안으로 스며든다. 이런 것들은 관찰하는 사람이 분별할 수 있는 형태로 (자세, 위용, 연설의 리듬) 일어난다. 그렇다. 영광은 의식, 제복, 상투적인 선언문 등을 통해 표현된다. 사회학자 뒤르겡 (Emile Durkheim)은 이런 현상을 사회적 황홀경(사회적 흥분, 사회적 들썩임, social effervescence)이라고 표현했다.

  예수의 기도에 나오는 영광은 이런 사회적 영광과 유사하기도 하고,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영광의 절차적, 확장적, 참여적 특성은 유사한 점이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1);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6);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10)

  새로운 내용은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을 위한 영광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9) 앞에서 언급했던 영광은 조금 우려되는 요소를 담고 있지 않았나? 허세, 이기심, 공허한 허영심 등의 악덕이 명성과 늘 따라다닌다. 또한, 보통 일반적인 영광은 내용이 없다. 앞의 예의 후보자는 그 사람의 신념이나 됨됨에 상관없이 모든 후보자에게 적용 가능하다. 군중도 선동가에게 환호하는 무지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예수는 허무하고 상대적인 영광을 거부한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고, 또 약속한 보혜사와도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영광은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라는 십자가의 논리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 모든 관계, 행위, 묵상은 2-3절에 함축되어 있는 사랑 안에서만 그 의미가 충분히 파악된다. “권세”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과 관련된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앎인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일반적인 지식과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하나님과 아들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진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이다. 보는 것(seeing)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딸의 영광을 보는 것은 사랑을 통해 사랑을 보는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사랑스럽게 본다.(Love sees love lovingly.) 이 사랑은 추상적 이념이 아니고 사랑의 행동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즉 사랑)으로 제자들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했다.(11)

  주님의 영광그리고 그것과 진리사랑봄의 관계-은 또한 아름다움과 관련이 되어있고신학적 미학의 주제가 된다그러나 아름다움은 영광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보통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인식되며 통합적인 특성을 갖는다미학적 인식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한적 사랑이나 역사 속의 극단적인 고난과 억압의 상황을 이해하는데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사랑의 논리에 따르면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인지하거나 다른 자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아와 타자를 신적인 사랑의 자기비움 안에 바라보는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사랑의 논리 안에서 우리가 아름다움과 영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시당하는 자, 병든 자, 추한 자, 타락한 자, 십자가에 달린 자, 추방당한 자, 감옥에 갇힌 자 등과 백치, 정신병자, 완고한 자, 살인범, 불량배, 독재자, 강간범, 소아 성도착자 등, 그리고 부모, 경찰, 예술가, 연기자, 정치가, 그리고 게이 군인, 레즈비안 연예인 등(그 외 또 누구를 나열해야 할까?)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12절의 “멸망의 자식”은 누구를 말하는가? 유다? 빌라도? 오사마 빈 라덴? 누가 아름다움과 영광에서 배제되었는가? 우리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이 그 사람(혹은 그런 부류)은 부르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이 세상의 영광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 순간에 우리도 잃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주석적 관점

 

 요한17:1-11은 학자들이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확한 이미지는 아니지만 제목은 그가 떠난 이후에 세상에 남아있는 공동체가 직면할 문제에 대해 예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7장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여러 주제들을 계속하며 완성하고 또한 고별담화(13-17장 특히 13:31-35)의 다른 곳에서의 예수의 말씀들을 상기시킨다. 17장은 아버지와 아들간의 기도자로서의 예수의 가르침을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수사적 양식은 고별담화의 대화장면을 바꾸는데, 제자들은 뒷면으로 사라지고, 독자들이 예수의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를 들을 수 있도록 초대된다. 예수의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는 언급은 그의 눈은 천국을 향해 있지만 담화를 사역에서 고난으로 바꾸는 표시이다.

이런 전환은 예수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많이 예고한(2:3;4:21;5:28;7:30;8:20) “때가 왔다”(17:1)는 선언으로  나타난다. 전체 고별담화가 “때가 왔다”(13:1)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곳에서의 ‘때가 왔다’라는 언급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한 것으로, 이후 후속적인 것이 나타난다. 고난설화가 예수의 기도 이후에 즉시 시작된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첫째 단락에서(1-5), 예수는 그의 사역이 완료되었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도록 요청한다둘째 단락에서(6-8). 예수는 그가 진실로 주어진 과업을 완수했다는 증거로서 제자들의 반응을 제시한다셋째 단락에서(9-11), 예수는 하나님께 그가 남기고 떠나는 사람들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대제사장 기도의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첫째 단락에서 예수는 그가 완성한 사명으로 인해 영광을 얻도록 요청한다. 1-5절은 교차대구법의 구조인데, 중간에 영생에 대한 정의를 놓고(3) 예수가 이룩한 것의 요약이 앞뒤에 있고(2,4), 영광에 대한 요청이 반복된다(1,5). 예수는 복음서 다른 곳에서도 모두 발견되는 다양한 이미지로 그의 완성을 말하는데, 하지만 교차대구의 중심은 예수의 역할이 아버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것이다. 3절에서 예수는 영생을 정의하는데 그것은 오직 한분이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영생을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장래의 희망으로 묘사하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19:16-30 등을 보라),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예수와 그를 보낸 이를 (3:15-16, 36; 5:24;6:47) 믿는 사람에게 당장 가능한 현실적 실체이다. 예수는 세상에서의 그의 사역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기회를 만드는 것으로 요약했다. 1절과 5절에서 예수는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했으므로 창세 전 아버지와 함께했던 영광으로 돌아가도록 반복해서 요청한다. 영광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doxa는 헬라어 문헌에서 의견, 명성, 또는 외양이라는 뜻의 명사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그 뉘앙스가 없다. 신약에서는 광채(22:11) 위대함(6:29), 명예(살전2:20)까지 다양하게 사용된다. 70인역에서는 doxa는 보통 kabod 야훼(하나님의 임재, 14:10)로 번역된다. 이 용어의 다양한 사용은 한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없게 한다. 진정한 영광은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이고(5:41-44), 예수께 주어졌으며(8:54),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이 땅에서의 예수의 행동의 핵심적인 요소이다(1:14;3:11). 아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이 예수가 가장 큰 관심이었다(1:14;15:8;21:19). 

6-8절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의 계시에 대한 반응을 하나님의 일을 완성한 증거로 그리고 영광을 위한 요청의 근거로 제시했다. 2절에서 예수는 그의 사명의 보편성을 강조했으며 모든 사람에 대한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하지만 6절에서는 세상에서 택하여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을 구별했으며, 그의 제자들이 예수가 하나님께로 온 것을 알았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복음서에를 통해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비슷하게 묘사되는 용납, 지식, 그리고 믿음과 같은 다양한 용어들로 묘사된다. 예수는 그의 우선적 사명을 1-5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6-8에서는 그의 제자들을 그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9-11절에서 예수의 기도는 탄원으로 바뀌는데 아버지께 그가 남겨놓고 가는,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제자들을 지켜달라는 것이다. 예수의 요청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지킨다는 것은 그에게 주신 사람들을 아버지의 보호아래 돌려준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는 그들을 보호하였지만(12),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며 그들을 계속 지켜달라고 요청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아버지께 보혜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약속과 공명한다(14:16-19;15:26-27;16:7-11). 비록 예수가 없어도 공동체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떠남 뒤의 공동체의 이 관심은 고별담화의 핵심적 주제이고, 또한 이후 기도의 초점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명백한 세상에 대한 부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무시는 복음서 전체와 복음서의 역사적 맥락속에서 초대교인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세상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를 찾으려는 이원론적 사고의 틀에서 읽어야만 한다. 요한은 세상(ho cosmos)을 비록 타락하여 다른 사람의 지배아래 있어(12:31;14:30),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지만(1:9-10;3:19), 구원할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로 묘사했다(3:16-17). 여기에서 예수는 영생을 얻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지만, 나중에는(18-23)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듯이 제자들과 그의 말을 통해 믿는 사람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했다. 예수는 이러한 하나됨이 그의 제자들이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세상이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것(17:21)을 믿게 되는 것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기도했다.

  

목회적 관점

 이 구절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가장 절박한 희망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기도로써 이 모양을 지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 그리고 두 천년이 지난 후에 우리들에게 – 그의 간청을 들으라고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몇 시간동안 예수는 자신의 전체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신다. 마지막 순간에 인생의 중심과 희망의 중심에 있는 것과 소통하려는 욕구는 인간이 항상 경험하는 것이다. 목회자 동료가 해 준 이야기 가운데,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가, 유치원에 다니는 딸들에게 남길 메시지를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서, 나중에 딸들이 큰 다음에 그들의 삶의 길잡이가 되게 하려는 소망으로 삶의 목적과 에너지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록 그녀가 살아서 직접 말해줄 수는 없지만, 딸들이 어머니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머니는 비디오테이프가 그녀의 아이들이 그녀의 기억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지만, 예수는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의 메시지가 살아있게 할 수 있음을 알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관심 가운데 중심은 무엇인가? 예수에게 있어서 예수의 사역의 절정은 우리가 예수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최종적인 희망은 그 자신이 찬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와 사역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목적을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하여 강력하고, 적극적이며, 고백적인 그리고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신자들을 사랑과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만들어 낼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경험이며, 예배는 관계들과 공동체 안에서 지금 실현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요한복음의 고유한 계명인 사랑에 순종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말로하면, 영생은 현재와 깊은 윤리적 관련성을 가진다.

요한공동체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이 언급이, 로마가 영원한 도시가 될 것이라는 주장과 극적으로 대비된다는 것을 깨달았다.1) 요한복음에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과 제국의 주장을 대조시키는 논쟁적인 부분은 슬프게도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적인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예수는 제국의 권위와는 다른 권위를 주장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예수에게 준 것은 하나님이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거짓된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아주 다른 비전을 드러내신다.

그렇지만, 이 기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배타적인 언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요한공동체의 이원론은 우리에게 도전 과제이다. 요한 공동체에서 "세계"라는 용어는 흔히 정의와 사랑과 자비에 대한 하느님의 희망에 반대하는 위험하고 적대적인 장소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예수는 온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고 가르쳐 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적대적인 세계에서 자신과 우리의 보호를 위해 확신에 차서 기도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요한의 신자 공동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넓으신 자비에 대해 말하는 것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뜻에 반대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본문을 보다 관대하게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가장 나쁜 충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적인 보살핌에 대한 신뢰이다.

거대한 분열이 너무나 많은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를 위협할 때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라는 예수의 기도의 신랄함은 충격적인 것이다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깊은 친밀감으로 기도하며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성령 혹은 보혜사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기도한다예수와 아버지와 보혜사는 서로 차이를 허용하는 긍정적인 상호 의존성을 누린다아마 이 초기 삼위일체적 주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상상할 수 있는지를 제안한다물론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실천이 똑같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사람들의 삼위일체는 그들의 역동적인 상호 의존성 안에 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교회의 영역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과 같은 것들로 인하여 심각하게 시험 받게 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전부 포함하는 것; 경제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이 지배 국가와 개발 도상에 있는 국가의 기독교인에게 각각 달랐던 것에 대한 깊은, 그리고 역사적으로 조성된 감정. 하나됨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각 신자 공동체의 특별한 은사, 경험 및 통찰력을 존중하는 길을 찾도록 요구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는 복음에 대한 책임을 통해 서로를 지원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역사는 위험이 교회 밖에만 있다는 요한 공동체의 확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은 또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종교들 사이에서 관계를 회복하고 수립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한다. 특히 기독교, 유대교 및 이슬람교에 대한 종교 근본주의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히브리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특정한 사람들과 장소를 초월하여 상호 책임의 언약으로 연결된 한 인간 공동체를 창조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랍비 조나단 삭스 Jonathan Sacks가 그의 저서 차이의 존엄 Dignity of Difference 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종교 신학이 필요하다. 모든 인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목표이다.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 약속을 실행하라고 요청하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땅에 사는 모든 가족이 축복을 받게 하려고 하신다.

 

설교적 관점

 

-오늘 부활절 마지막 주일에 지난 일들과 또 앞으로의 일을 바라본다.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 그가 영광 중에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고, 보혜사가 오시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다음 주에 우리는 성령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선교로 나아가는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 곧 우리를 위한 기도로 우리가 여기는 예수의 기도를 듣는다.  

-예수의 기도에는 확신과 분명함이 있다예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알게했다그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주었다이제 그는 제자들의 보호를 위해 기도한다조금있다 아버지의 보호가 필요한 이유를 열거할 것이다제자들은 세상이 미워했고 그들은 악과 악한 자들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4-15). 여기서 그는 제자들의 보호를 특별한 목적을 위해 요청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1)이다.   

-이것은 예수가 했던 기도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치를 위한 이 기도는 또한 우리들에게도 확신과 분명함을 준다. 하지만 이 기도는 우리들에게 의문을 가지게 한다. 예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어떤 증거를 우리가 볼 수 있는가? 예수께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요한복음이 처음 시작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첫 구절부터 요한은 예수의 신비를 묘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었고 (he was God) 동시에 하나님과 달랐다 (distinct from God).우리는 예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하나님처럼 보인다“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신비로 들어가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과 혹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신비의 첫 부분은 쉬운 영역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 하나님과 하나됨 속에서 우리들의 것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성장의 기초를 예배를 통해 놓아갈 수 있다. 개별적인 기도를 통한 영적 훈련, 성경공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봉사를 통해 할 수도 있다. 또는 우리자신을 특정상황 곧 정의, 치유, 목회적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 헌신할 수도 있다. 하나님과 하나됨을 향해 어떤 방식을 따르던 간에 성령은 우리 삶 가운데서 우리를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우리들에게 심장박동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알게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눈과 귀를 열고 받아들이고 응답하려는 마음으로 있는 것이다.  

 -예수는 또한 제자들이 서로서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있는 아픔이 또한 있다. 분열(disunity)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많은 교파와 그 교파아래 분열된 또 다른 교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가 안수를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기도할 때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로 다투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또 지역 공동체에서 어느 그룹과 한 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인다. 또 우리 교회가 세속적인 삶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혹은 종교는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에 대해서 설전을 벌인다. 이러한 분열은 아픔의 근원이 된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만]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마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거리를 걸을 때, 그들이 속한 기독교 공동체는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두고 논쟁했다. 그들은 어느 그룹이 “진정한” (the real) 교회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영적인 은사가 없이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다투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의 기도가 결코 응답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놀라게 된다.

-요한이 그리는 예수는 어떤 본질적인 면에서 진정한 모습처럼 보이는가?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과 우리들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했는가를 다시 듣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들으셨다고 신뢰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일치(unity)에 대한 우리의 규정과 관련한 것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 (being one)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언가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11)라고 기도했다“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1:1) 바로 이 구절을 연구했던 몇몇 고대 신학자들은 예수와 아버지의 하나됨을 운동 (movement)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곧 아버지아들성령 사이 관계를 일종의 직물을 짜는 것과 같은 움직임(interweaving) 혹은 심지어 춤을 추는 것으로 말했다만일 예수의 일치를 위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 한 개의 블록으로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상호작용멋진 춤을 의미한다면 어떨까만일 우리가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한다면다른 견해를 갖고있는 우리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아마 우리가 추구하는 관점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신앙이라는 일반적인 춤에서 좀 이질적인 형태의 춤을 추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그리스도인의 일치일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많은 지체가 하나의 몸에 있고, 많은 춤추는 사람들이 하나의 춤을 추고 여러 소리로 부르는 하나의 노래같은 것이다. 이런 다양성에 대한 응답이 우리에게 도전할 때 우리의 답은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 역시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다 이 모든 다양성 속에는 아픔이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 거기에는 갈등이 있지만 또한 영광도 있다.  

-우리는 이 정돈되지 않은 모든 운동, 행동을 보고 있는가?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에 대한 두려움이 무언가 희망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들의 이 기독교 공동체는 거칠고 좌절시키고 말도 안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신뢰를 예수의 기도에 둔다.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들 그리고 그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 기도에 표현된 대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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