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한복음 16장 12 ~ 1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10. 27.
728x90
반응형
SMALL

신학적 관점

 

  이 본문이 왜 삼위일체 주일 본문으로 채택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본문은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에 속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아들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성령 (진리의 성령. 성령은 아들에게 속한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준다.)의 관계를 설명한다.(16:15; 16:13) 교부들은 이 삼위의 상호 관계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다.

  초대 교회는 일찍이 성삼위일체론의 기초를 놓았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이지만 그 안에 세 위(persons)가 있고, 이 세 위는 동일한 본질(substance)를 공유한다. 또한 하나님은 각 위에 해당하는 별도의 이름,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지금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별한 성을 지칭하여 부르는 것에 문제가 없는가? 창조자, 구원자, 성화자(creator, redeemer, sanctifier)라고 호칭하는 것이 덜 성차별적이지 않은가? 신학적인 논란은 이와 같은 기능적 명칭이 삼위의 본질적 관계를 대치하기에 충분한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교회의 기도와 선포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갖고 있다. 삼위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서 저술 이후의 시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 의해 다른 해석이 제기되었다.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proceed, 발출, 유출, 발행) 주장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했다. 서방교회의 입장은 성자가 교회에 성령을 준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방교회의 입장은 유일신론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성자와 성령 모두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나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나온다고 주장했다. 성부가 성자를 낳았고(begets),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proceed).

  아우구스티누스는 요16:13c에 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남겼다.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나오지 않은 분은 성부만이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고, 성령은 성자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성부는 누구로부터 낳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삼위일체의 관계 내에 어떤 불균형이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성자는 그를 낳은 분과 동등하고, 성령은 그를 나오게 한 분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99.s.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17:382.)

   동서방교회의 입장 모두를 지지하는 근거를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16:7는 서방교회에 유리하다.(예수가 보혜사를 보낸다.) 14:16, 26은 동방교회에 유리하다.(성부가 성령을 보낸다.) 최근의 해석의 경향은 동방교회의 입장을 더 지지한다. 16:15는 요한이 최종적으로 성부가 예수와 성령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요한복음 본문의 주된 관심은 삼위일체론의 내재적(immanent) 측면이 아니고 경세적(economic, 경륜적) 측면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이 세상의 창조, 보존, 완성에 대해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관심의 초점이다. 16장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인 것을 제자들이 (또한 교회가) 이해하는데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성령은 세상이 예수를 재판한 것은 잘못이고, 악의 권세는 패했다는 것을 증거 한다. 성령은 그들에게 능력을 주어 세상으로 나가 예수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도록 한다. 이렇게 성령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 이후에도, 예수가 지상에서 하시던 일을 계속 수행한다.

  본문에 또 다른 어려운 문제가 있다“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는 구절이나 성령이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 준다는 구절은 무슨 뜻인가예수가 밝혀주신 것 외에 추가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인가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진리 외에 더 추가적인 계시가 필요한가그러나 본문에는 그런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15:15에서 예수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고 했다같은 취지에서 16:12-13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완전한 의미가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간단하게 말해서삼위일체의 각 위 간의 관계는 <예수가 아버지를 알리고성령이 예수가 아버지에 대해 제자와 교회에 알린 것을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석적 관점

 

- 이 구절은 계속해서 요한복음의 고별담화(Farewell Discourse)에서 성령강림절 본문으로 채택한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성령강림절 본문 주석에서 다루었던 예수와 아버지 그리고 성령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예수와 성령의 기능적 동등관계가 있는데, 왜냐하면 성령도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공동체와 함께 한다는 것과(14:17), 공동체에게 예수의 길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모든 아버지의 일을 하는 예수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러기에 성령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후에 공동체를 위한 예수의 현존으로 기능한 것이다. 하지만 요한이 나중에 삼위일체론과 같은 하나님의 세 인격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토론에 관계했던 것은 아니다. 요한은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가졌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경험을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 오늘 본문은 성령강림절의 본문과는 조금은 다른 용어로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진리의 영”이라고 부름으로써 요한은 성령의 다른 역할을 추가하는데, 말하자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16:13)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서 전반에서 하나님에 대해 사용한 용어와는 다른 것인데, 특히 2:3(“백성들이 오르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30:20-21(“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셔도, 다시는 너의 스승들을 숨기지 않으실 것이니, 네가 너의 스승들을 직접 뵐 것이다. 네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려 하면, 너의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하는 소리가 너의 귀에 들릴 것이다.)에서 볼 수 있다. 나아가 성령은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16:13).  

- 이러한 두 가지 기능은 예언자의 선포나 행동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그들을 또한 일어날 일을 점쟁이들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과 연관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의 일에 알 만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 요한은 이 개념을 성령의 모습을 형용하는데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성령은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의 도관(導管)으로서 일하시고,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며, 미래의 적절한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 다음 두 절은 성령예수아버지간의 관계에 대한 핵심을 보여준다. 14절은 성령이 예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인데“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의 영광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흔치 않는데그는 보통 예수의 영광을 예수의 죽음의 시간과 연관시켜 사용했다요한복음 전반부에서 요한은 예수의 시간이 아직 오직 않았다고 말했다예수의 시간이 왔다는 것은 요한에게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한 영광이었다(12:27-36에서 땅에서 들려 올라간다는 이미지는 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의미했다. 13:31-35에서 유다가 나가서 그를 넘겨주려 하려고 하는 바로 뒤에 예수가 인자가 영광을 받으리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이 예수를 영화롭게 한다는 구절도 있고(8:54;12:43), 나사로의 병과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구절도 있지만(11:4), 예수의 궁극적인 영광은 그의 부활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데거기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114)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요한에게는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써 예수가 아버지의 사랑을 체현하고 있고그러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그의 죽음으로 예수는 영광을 받았는데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셨기 때문이고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호적 관계의 일부이다.

- 14-15절은 성령, 예수, 그리고 아버지의 상호관계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 14절에서 성령은 예수를 영광되게 하시는데, “왜냐하면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다 예수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예수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그래서 성령은 예수의 모든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헬라어로 “가진다”는 뜻을 가진 lambano는 “받는다”는 의미도 또한 지니고 있다. 이 말의 뉘앙스를 취하면 성령, 예수, 그리고 아버지 사이에는 상호간에 주고받음이 있으며, 이것이 그들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15). 더 이상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왜 고별담화에 나중에 삼위일체 정립을 위한 자료들이 그렇게 풍성하게 많은지  알 수 있다.

- 공동체는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가진 모든 것을” 받는 사람들인데, 이는 아버지를 통해서 예수와 성령에게 전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위의 관계는 신적인 관계로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볼 때 도리어 성령의 계속적인 현존을 통해 하나님의 삶을 나누려는 공동체에게 퍼져 나간 것이다. 지난 주 성령강림절 본문에서 요한은 성령이 예수가 말씀하신 모든 것을 공동체에게 가르치실 것이요, 기억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성령은 예수의 일(그것은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다)을 공동체에 선포하실 것이다. 성령은 예수가 함께 있었을 때 공동체에게 가능했던 신적인 삶의 원천이다. 그리고 하나님, 예수, 그리고 성령간의 관계로 인해 아무것도 공동체에게 유보되는 것이 없다. 요한이 볼 때 공동체는 아버지가 가졌던 모든 것과 같은 신적인 삶의 풍성함에 다가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고, 그가 하나님으로 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16:27)

  

 목회적 관점

 

설교자가 삼위일체 주일에 삼위일체 교리를 교육하는 설교를 하려고 하면, 요한복음 16:12-15보다 더 적합한 본문들이 있다. 15절은 성령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는 애매하지만, 예수의 가르치시는 사역에서 성령의 활동에 관한 말씀으로 본다. 특히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의 계시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촉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 계시는 개인에게는 적게 주어지고,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에는 더 많이 주어졌다. 그리고 12-15절에서는 성령의 사역은 공동체 안에 있다.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설교자는 본문의 약속이 성령께서 개인과 예수의 신비한 관계를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활동의 수혜자는 공동체이고, 공동체는 “진리 가운데로”(13) 인도될 것이다.

“진리”라는 단어는 설교자가 설명을 해야 한다. 예배자는 “진리”를 “사실”과 같은 말이거나 혹은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진리”가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는 “진리”이다(14:6). 그래서 “진리”가 인도하는 공동체는 예수 자신과 함께 하며, 예수가 하신 말씀에 대하여 더 분명하게 알게 되고, 예수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더 깊은 확신을 갖게 된다.

예배자들은 12절을 자신들의 경험과 연결시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사례들은 청취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할 말이 더 많은데, 그것은 그들이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이야기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들은 말해 줄 것이 많은데 어린 아이들은 아직 그것을 들어줄 수가 없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에게 할 말이 있는데, 부모를 포함해서 어른들은 감당할 수가 없다. 교사와 학생들, 목회자와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이나 불치병이나 슬픔이나 출산이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것이나 전쟁이나 허리케인, 홍수, 토네이도 같은 자연의 파괴 행위처럼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고는 책임질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본문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있었던 문제와 거의 동일한 일을 두고 씨름하고 있다. 분명히 예수의 죽음 전날 예수와 함께 모인 공동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에서도,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임박한 그의 고난과 죽음을, 그리고 예배로의 부름을 제자들이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미 말했다. 제자들이 오순절이 지나 진리의 성령이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전까지 예수 자신이 계시한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기독교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 그의 사역,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우리는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아직 너무 멀리 있다. 어떤 기독교 공동체는 이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오히려 자기들이 이미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사실을 말해야만 한다.

본문이 가장 하기 원하는 것은 공동체가 예수의 계시를 새롭게 만날 수 있게 자신을 개방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성장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진리”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요한은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의 메시지와 지속적인 해석이 필요한 예수의 의미를 그렸다. 요한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가 그의 시대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하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다. 요한은 변화하고 있는 상황과 새로운 질문의 등장, 예를 들면 줄기세포 연구라든지 인공적인 방법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능력, 성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등과 같은 것들이 참신하게 사고하는 공동체를 요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요한은 “진리의 성령”의 인도에 의지하여공동체가 가야할 곳으로 인도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공동체는 단지 예수의 계시를 지적으로 깊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요한이 만들려고 하는 공동체는 그들이 믿는 것에 관하여 바르게 이해하며 정통일 뿐 아니라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예수와 일치하고예수가 돌보았던 것들을 돌보며예수의 목회를 반영하는 목회를 수행하는 공동체이다.

요한은 이런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의 목회가 하나님의 추종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13). 본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있는 교회 안에 같은 확신을 심으려고 한다. 성령은 새로운 진리나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오지 않고, 예수의 메시지와 의미를 선포하여 공동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성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올 것이다.

공동체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와 직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앞으로 올 일들을…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3). 이 약속은 공동체가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미리 가지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든 신실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성령을 “[공동체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분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예수의 방식과 일치한다. 예수는 설득하려고 애썼고, 강요하거나 강제로 시키기를 거부했으며, 회중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본을 보이며 섬겼다. 특별히 설교자들은 “진리의 성령”과 충돌하면 안 되니까, 교인들을 예수의 의미에 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예수의 삶과 사역에 더 많이 일치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설교적 관점

 

-위대한 스승인 예수는 제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 대해 알고있었다. 듣는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은 여하한 종류의 의사소통에서 중요한 일이고 특히 설교에서 더욱 그렇다. 오늘 본문은 상대적으로 짧지만 다락방에서 제자들을 위한 예(examples)와 교훈을 보여주며 [떠나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연장시키는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설교자의 첫 번째 과제는 본문이나 상황에서 청중들과 관련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소그룹 상황에서의 친밀한 대화) 혹은 부정적일 수도 (21세기 삶과는 관계없는 2천년전의 이야기)있다.

-다음 중요한 질문은 예수는 성령에 관해 여기서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다. 타이틀인 “진리의 영” (Spirit of truth)은 요한복음에 독특한 것으로 히브리 성경에는 이런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위경인 유다의 증언 (Testament of Judah) 20장에서 실수의 영 (spirit of error)과 비교되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예수가 사용하는 것은 독창적인 것 (original)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자신의 유산으로부터 개념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확장시킨다. 삼위일체는 언제나 제자들과 같은 우리에게 어느 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성한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모두는 점차 그러한 배움을 통하여 양육되어야 하므로 어떤 내용이 목사와 그/그녀의 회중들과 공유되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중요하다여기가 바로 설교자의 목회적 감각이 자신의 설교를 발전시키는 지점이다목회경험과 상상을 통하여 설교자는 신적 진리에 관한 질문 (13), 그리스도께서 영광받으심 (14), 삼위일체에 비추어 본 회중들간의 상호관계 또는 예수의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 (15)중에서 어느 것이 필요한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이런 본문에 있어서 설교할 때는 어느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청중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들의 생각과 실천에 있어 무언가 도전을 줄 수 있다.

-이런 주제 중 하나는 ‘진리는 관계적’이라는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사실에 대한 서술이나 명제적 확언으로 정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대문자 T로 시작하는 그런 진리”(capital T truth)는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갈급해하는 것은 관계로부터 나와서 관계를 발전시키고 견고하게 도와주는 그런 진리이다. 여기서 예수는 한 진리를 선포하는 데 그것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라는 관계로부터 나와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와 성령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아가 예수는 이 진리가 예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계라는 측면은 오늘날 개인 중심의 서구문화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이런 개인주의 (individualism)는 거의 모든 경험이나 관계를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면으로만 평가한다. 사람들은 심지어 교회선택에 있어서도 교회 프로그램, 예배, 설교 혹은 교회 재산이 그들의 입맛과 요구에 잘 맞는지를 잣대로 삼는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관계 모델 (relational model)은 진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고 이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결정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기준이 될 것이다. 너무나 흔히 우리 설교에서 간과된 것은 예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소통하여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했다는 점이고, 또 여기서 예수는 우리들에게 성령이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소통하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고 있다. “비이기적인 면”(unselfishness)은 삼위일체의 특성중에서 중요하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omni-”를 붙여서 omniscience(전지), omnipotence (전능), omnipresence (무소부재)등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비이기적인면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다. 이런 설교는 참신할 수있다.  

 -진리가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한 진리와 나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진리는 결코 갑자기 나타난다든지 혹은 저기에 있는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언제나 무언가 소통되는 것(communicated)이다. 이 구절에서 소통(communication)이라는 용어는 유익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할 말이 더 있다. 진리의 영이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이다. 그 영은 자신의 것을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will speak). 그는 앞으로 올 일들을 선포할 것이다(will declare). 그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취해서 (take, 혹은 받아서, receive) 그것을 제자들에게 선포할 것이다. 이 마지막 선언은 14절과 15절 모두에 나타나있다. 이 용어들을 주의깊게 살피고 연구하면 진리를 소통하는 것- 즉 보내고 받는 것-에 대한 설교에 도움이 될 것이고 겸손 (humility)이 설교의 구조와 내용 모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겸손은 비이기적인 것과 연관, 자신의 것을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전달하므로].

-설교자가 모든 진리를 한 상자에 넣어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는 시대는 가고 없다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데 있어 우리 모두가[설교자를 포함하여연관되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의지할 만한 인도자가 있다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모든 것을 없애버릴 위험이 있다 (고전 13:12, 우리는 부분적으로 밖에 알지 못한다를 기억하자)

 

728x90
반응형
LIST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7장 20 ~ 26절  (0) 2022.10.27
요한복음 17장 1 ~ 18절  (0) 2022.10.27
요한복음 14장 8 ~ 17절 (25 ~ 27절)  (0) 2022.10.27
요한복음 14장 15 ~ 21절  (0) 2022.10.27
요한복음 14장 1 ~ 14절  (0) 2022.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