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윤리학에서 “존재(is)”와 “당위(ought)”를 구별하는 것, 서술문과 명령문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서술문은 사물이 어떤 상태인가에 관한 것이다. 명령문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인류학자인 Clifford Geertz는 전자를 문화의 세계관, 후자를 문화의 사조(ethos)와 연관 지었다. 보통 이 둘의 관계는 혼동되기도 한다. “사물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말은 종종 도덕적 자기만족의 욕구와 연결된다. “사물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기득권을 합법화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작은 마을에서는 문을 잠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말이다. 존재를 당위에서 유추하거나, 당위를 존재에서 유추하다 보면 자주 오류에 빠진다.
그러나 Geertz는 종교적 상징이나 의식(ritual)이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1) 문화의 사조와 세계관을 종합하는 기능 (그 근거를 상대의 권위에서 찾음으로) (2) 공동체의 정체성을 이 존재와 당위의 종합으로 포장하는 기능, (3) 이 종합에 사실성의 분위기(an aura of factuality)를 부여하는 기능.(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89-90) 이 아우라 때문에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들은 세계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볼 수밖에 없고, 공동체 밖에 속한 사람들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신념을 이상한 것으로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과학과 역사, 문화적 경험은 신적인 사랑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적 상징의 아우라 밖에 있었던 니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이중적 사랑을 약자와 겁쟁이의 윤리로 해석했고 사실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종교적 상징이나 신적인 사랑으로 포장된 정체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그들은 존재와 당위를 종합하여 세상을 본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존재), 우리는 창조주의 사랑을 모방하여야 한다고(당위) 믿는다.
이 대목에서 파라클레테(Paraclete)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의 영” 혹은 “성령”(14:26)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Paraklētos인데, 이 단어는 보혜사, 모사(조언자), 위로자, 중재자(mediator), 중개자(broker) 등으로 다양하게 의역되어 왔다. 어떻게 번역하든 이것은 종교적인 상징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윤리적 측면과 세계관적 측면의 통합과 관련하여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랑하라는 윤리적 명령은 신적인 사랑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과 결합한다. 요한은 더 나가서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부름으로 사조와 세계관의 종합은 어떤 인류학자 한 사람이 우연히 발견한 임의적이고 이론이 아니고, 모든 존재 안에 깊게 새겨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론은 한계가 있다. Geertz가 제시하는 존재와 당위의 종합에 관한 이론은 모든 종교적 사상과 관습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본문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본문을 살펴보자.
보혜사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종류의 동등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 함께 등장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복종과 사랑은 동일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제자들의 생명과 연결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사랑과 같은 것이고, 아들의 사랑은 제자들의 사랑과 같은 것이다. 이런 동등에 관한 내용은 1:1 보상 시스템에 관한 것인가? “당신이 나를 위해 해 주면, 나도 당신을 위해 해 주겠습니다,” “우리가 아들을 사랑하면, 아들은 우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다.” 그런 조건적 제한은 요한복음의 사랑의 논리에 의해 극복된다. 요한 1서 4:8의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선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은 모든 것의 조건임을 깨닫는다. 사랑이 모든 것의 조건이고, 사랑이 무한하며 실현 가능할 때 (예수의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라는 말 속에 제자들이 많은 한계 때문에 사랑을 실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사랑은 보상의 논리를 초월한다.
사조와 세계관의 융합이 공동체의 특수한 언어를 떠나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신학적 보편주의의 주장은 한계가 있다. 한 가지 가능한 해결책은, 우리가 절대적인 포용성을 신의 속성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잃은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22절의 제자가 아직은 사랑의 논리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보혜사가 드러내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의 비극- 이상적인 생명과 현실적인 생명의 상태의 비극적 대조-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이 사랑은 우리 가운데,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거하며, 이 세상을 무한하게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다.
주석적 관점
비록 마지막 만찬이 친구들 간의 조용한 식사로 가끔 그려지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가 제자들의 혼란과 혼동 그리고 걱정에 위안을 주는 것으로 제시한다. 장면은 화자의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하지만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의 임박한 떠남을 알려 주면서 더 불길해지고(13:33), 유다가 그를 배반하도록 나가게 하셨고(13:21-30),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했다(13:36-38). 제자들이 예수에게 계속해서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공황상태가 되었음이 명확하다(13:36;14:5,8). 고별담화(요13장-17장)는 예수의 떠남을 선언하지만 남아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16-17절에서 예수는 그가 떠난 뒤 보혜사가 공동체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비록 이 요한의 성령이란 용어(14:26;15:26;16:7;요1 2:1)가 문자적으로는 법적 대리인이나 도우미를 언급한 것인데,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보혜사와 예수에 관한 복음서 용어의 유사성이다. 독자들은 예수가 약속한 “다른 보혜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보혜사를 그의 계속되는 현존으로 묘사한다. 예수와 보혜사 모두 하나님이 보내셨고, 세상이 그를 맞아들이지 않고, 제자들은 알며, 진리의 영이시다. 16장에서 예수는 보혜사가 자신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한다고 언급했다(16:13). 보혜사는 또한 예수를 증언한다(15:26;16:14). 첫 번째로 하나님께 변호하시는 분은 예수이다(요1 2:1). 한데 예수가 곧 떠나더라도 보혜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14:16).
15절에서 예수는 보혜사의 오심이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는데,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표시된다. 예수가 단순히 도덕적 훈계를 주려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적절한 반응을 믿음, 사랑, 함께함, 계명을 지키는 것 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한다. 이 모든 길에서 예수는 믿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 아버지의 정체성을 온전히 가지도록 요구했다(8:31-59참조). 이러한 총체적 헌신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행동과 일치함을 확실히 하는데, 그 사랑의 행동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13:1-20) 보여준다. 뒤에서 그는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복음서 마지막에 베드로에게 적극적인 사랑을 명령했다(21:15-17).
18절의 다른 면은 예수가 그의 계속되는 현존과 제자들이 처한 걱정되는 상황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다. 19절에서 예수는 그가 곧 떠날 것이지만, 제자들은 계속 그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예수는 그가 돌아올 먼 미래에 희망을 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가 육체적으로 세상에 없지만 사람들이 그를 아는 당장의 희망을 주장했다. 이 능력이 세상에서는 예수 안에서 가능한(1:4;10:10)생명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19절 마지막 부분은 그들이 보는 것과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표시한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진정한 삶은 공동체로 하여금 예수가 떠난 뒤에도 그를 보도록 한다. 예수를 보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그와 함께 있고 예수는 그들 안에 있게 된다는 것과 동일시된다.
예수는 15-21을 15절에서 얘기한 것을 반복함으로 끝맺는다. 예수가 세상에서 존재함과 그가 안 계실 때의 연속성은 그를 사랑하는 것에 달려있고 그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21절에서 예수는 다시 반복한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바꾸어 말하는 것에서, 마지막 만찬의 청중들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복음서의 독자들이 등장한다. 예수가 이 땅에 없어 당면하게 되는 걱정은 방안의 제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의 병행구적 구조는 뒤에도 나온다. 22절에서 예수는 다시 그를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강조한다. 15, 21, 그리고 23-24의 반복은 예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가 세상에 있지 않다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적 침착함을 준다.
목회적 관점
오늘 말씀은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언가 명백한 것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가슴 아픈 순간으로 시작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은 그들 가운데서 예수가 살면서 보여 준 사랑을 그들의 삶의 목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이 임박했을 때, 그는 사랑의 말만을 할 수 있고, 그의 친밀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진실한 것임을 알게 해주는 그들의 변호인이 될 보혜사를 통해 계속 그들과 동행하실 것이라는 확신만을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제국의 시대에, 황제의 대리인들, 그들을 점령한 나라가 강요하는 우상들과, 제국의 힘을 집행하기 위한 무기들에 포위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사랑이 생명과 관계를 가져다주는 권력과 질서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주장을 발견한다. 세상이 바뀌는 방식과 권력의 정의에 대해 제국이 이해하는 것과 정반대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예수는 이 사랑과 진리의 연계성을 드러내기 위한 객관적인 교훈으로 주로 자신에게 의지한다. 예수가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사랑이 형성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제국의 한 가운데서 사랑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실을 보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 어려움은 요한 공동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도전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제국이 형성한 것이 아니라 서방 세계가 형성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들 대부분은 그 도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를 가리키는 예수의 사역을 이어받은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이 약속은 1세기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중요하다.
예수가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품기 원하시는 사랑은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그들처럼 보고,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나사렛 사람의 삶과 관계들과 행동들에서 나타나는 살아있는 현실이었다. 그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고, 병든 사람을 고치고,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존중하면서 말하고 행동했다. 사랑은 섬김과 연민으로 그의 삶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각 사람의 가치에 대한 비전과 상호 존중과 돌봄의 윤리의 중요성을 악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난다. 지배하는 권력 대신 예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행복을 목표로 삼는 권력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예수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영혼과 희망이 얼마나 메말랐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난하고, 세계 역사의 중심 서술에서 확실하게 밀려난 사람들, 게다가 제국주의의 통치라는 모욕까지 당해야 했던 사람들, 예수가 그 이름을 부르신 사람들은 그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현존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강력해진다. 점차적으로 희망의 공동체가 탄생했다. 예수가 구현한 사랑의 힘이 로마의 통치에 대한 굴종과 굴욕보다 더 실제적이고 진실한 것인지 궁금해 하도록 상상력이 촉진된다. 그런 다음 그가 제공하는 사랑이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놀라운 확신을 갖게 된다.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다. 제자들의 생각에 하나님이 또 다시 포기했다고 여긴 속죄와 해방의 약속은 신뢰할 수 있고, 유용하고, 진실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랑은 우리 삶의 원천이자 우리 삶의 목표이다. Alan Paton은 그의 소설 <아, 그러나 당신의 땅은 아름답다>에서 생명을 주는 사랑의 힘의 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이 가장 진실한 것인지를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paton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들이 백인과 섞이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졌던 인종분리정책(apartheid) 동안의 남아프리카 상황을 설명한다. 체제 안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일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백인 관리가 사망했을 때, 관리의 가족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장례식에서 외면당했다. 그것은 끔찍한 모욕이었다. 흑인 목사인 Isaiah Buti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친구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인 백인 법원장을 방문했다. 그는 그 판사에게 예수가 제자의 발을 씻었던 성 금요일 예배 세족식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목사는 법원장에게 그 판사의 집 하인이었고 그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을 했던 한 교인의 발을 씻어 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장은 자기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사전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흔쾌히 참석하기로 동의했다.
판사가 Martha Fortuin의 발을 씻을 때가 되었을 때, 판사는 앞으로 나와서 그녀의 발을 씻고 닦아 주었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나기 전에 그는 그녀의 두 발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것은 치유가 이루어지게 하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 단순한 보살핌의 표현에서, 그는 신실함과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한 행동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재판관으로서의 경력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또한 우리가 서로를 이웃으로 인식하는 것을 돕는, 생명을 주는 사랑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설교적 관점
-“안에”(in)라는 말은 아주 짧은 말이다. 그래서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의 계명을지키는 사람들 “안에” 있겠다고 그의 처음 제자들에게 약속하고 또 이 제자들은 그 “안에” (“in” him)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제자들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우리들도 역시 “안에”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는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더라도 잠시동안만 보혜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에 관해 생각해보자. 보혜사 (Advocate)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테(paraclete)인데 법정에서 우리 편에 서기 위해, 우리를 변호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변호사를 생각해보라. 보혜사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힘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른다. 이보다 앞서있는 보혜사는 예수 자신이고 (요한일서 2:1은 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가장 분명하게 활동하고 있는 힘이었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했던 장면을 생각해보라. 성전에 있던 환전상들을[뒤엎던 일들을] 생각해보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치유사역과 말씀선포를 생각해보라. 예수의 이야기는 개별적인 느낌이나 위안이 아닌 행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약속하는 보혜사는 “너희 안에...너희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예수 자신이 그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제자들이 그 “안에”(“in” him)있는 것처럼, 제자들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떤 신비한 연합을 상상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리스도 혹은 진리의 영의 내주(indwelling)가 따뜻함이나 확신의 느낌같은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추상적 관념이나 은혜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빌라도 법정에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 있는 예수를 기억해보라.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예수는 그 곳에 침묵하며 서 있다. 왜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있는가? 그 답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는 빌라도를 바라보고 있다. 진리는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를 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진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을 볼 수 없으나 예수를 볼 수는 있다. 우리는 그가 치유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신실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을 알 수있다. 예수께서 활동한 것들을 포함하는 외곽선을 그려보면 우리는 빌라도가 묻고있는 진리를 이해하는 틀을 갖게 된다. 우리 역시 보혜사, 진리의 영 곧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자신을 인식하는 틀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의 기록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공동체 안에서 그의 제자들과 또 그가 섬긴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예수의 이야기는 (다른 전통에서 예언자나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처럼) 예수와 한 명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 곧 생존하기 위해 애쓰고 또 어느 때는 그들의 성공, 희망, 문제등을 함께 나누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며 또 일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 “안에” 있고 제자들이 그 안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할 때, 그는 단지 개별적 인간과 신비한 연합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우리가 예수에 관해 알고있는 모든 것은 그가 공동체적 상황에서 역동적으로 존재하며 일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유명한 평생의 갈등을 남겨두었는데 그것은 반평생이 넘도록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인해 그녀를 괴롭혔던 어둠과의 갈등이었다. 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크리스찬 사이에서 근대의 성인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왔다.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그 어둠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살았다는 이유로 더욱 위대한 성인으로 여긴다. 영적 확신을 갖추진 못했지만 그녀는 꾸준히 자신이 받았다고 믿었던 소명에 근거한 선교를 수행하였고, 기독교 공동체는 그 선교를 인정하고 승인하였다.
-예수는 분명히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그의 현존과 성령의 함께 함을 약속하고 있다. 예수께서 명령하는 사랑은 어떤 감정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신하는데서 나오는 감정도 아니다). 예수께서 명령하는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스승과 연관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활동한 어떤 장면들을 모두 포함시킨 외곽선을 그릴 수 있는데 그 선 안에서 진리의 영을 우리의 삶과 실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예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현존한다고 인식하면 어떨까? 여러분 공동체 내에서(당신이 살고있고 일하는 공동체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까지도) 주변을 둘러보라 그리고 예수께서 활동했던 것과 같은 일들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라. 여러분에게 익숙한 공동체의 삶 가운데서 진리의 영이 현존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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