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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한복음 14장 1 ~ 14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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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부활절 이후 주일들의 성서정과 본문에는 예수의 육체적 부재 속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살 것인가에 관한 교훈이 많이 나온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고별담화 중 한 부분인데,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여정>을 위한 준비를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여정을 위한 준비도 할 수 있도록 가르치신다.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 등장한다: 1.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 2.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희망, 3. 구세주인 예수, 4. 예수와 “보낸 분”인 “아바”의 관계, 5. 기도의 신학.

 1.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 유다의 배신 이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과 잠시만 함께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베드로는 이에 대해 예수에게 어디로 가시냐고 묻는다. 본문은 제자들이 지금은 예수를 따라갈 수 없지만, 그분과 <죽음도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계속 맺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자신(예수)를 믿으라고 훈계한다. (복음서 저자는 이를 예수가 신적인 존재임과 예배의 대상이 됨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들은 이미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부활과 생명의 능력을 목격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이 보지 못하는 미래로 먼저 가시더라도 - 예수를 끝까지 따를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예수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도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2.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희망: 본문은 사후 생명에 관한 희망과 제자들이 예수를 만날 것이라는 약속 등 종말론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부활신학은(이것이 이 장의 주요 주제는 아니지만)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논쟁과 함께 그 둘을 초월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요한복음은 바울의 부활신학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요소 등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마카비 혁명(180-161 BCE) 기간 동안 부활신학은 의로운 목적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질문과 씨름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부활의 소망의 핵심은 순교를 당하는 한 형제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너는 우리를 죽여서 이 세상에 살지 못하게 하지만 이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마카베오하 7:9) 1세기 말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다루는 부활 신학은 그보다 더 심오하다. 그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고 살아난다는 것이다.(12:23-25)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 가서 어떤 준비를 하는지, 그가 어떻게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오는지 등의 어려운 질문들을 다루다 보면 큰 그림보다는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는 세부적인 사항에 정신을 빼앗길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품고 질문을 도마가 대표로 물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5) 죽은 자가 거하는 영역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늘 신비로 남아있다. 그곳은 하나님께 속한 공간이고, 우리는 결코 미리 가볼 수 없다. 그곳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모든 사람들이 가게 될 공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공유적(perichoretic, 상호침투적, 윤무적) 본질과 연관된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 일을 수행하신다고 증거한다.

 3. 구세주인 예수: 예수가 제자들보다 먼저 갈 뿐 아니라, 시간과 영원의 경계도 넘어서신다. 예수는 그들이 예수와 함께 머물 공간을 준비하여, 그들의 생명에 지속적인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음의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을 가지려면 예수가 필수적인가? 14:6은 행4:12(“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와 짝이 되어 구원에 관한 배타적 이론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승리주의(triumphalism)에 근거한 배타적 구원론을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본문에서 기독교적 희망의 근거를 찾을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해석할 때 요한이 신자들을 위하여 내부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예수와 “보낸 분”인 “아바”의 관계본문의 중심 주제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이다. 4세기에 아리우스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오늘 본문은 그에 대한 반론의 근거로즉 성자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근거로 인용되었다예수는 보낸 분을 완전하게 계시한다예수를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그들은 육신이 되어우리 가운데 거하고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을 만난 것이다그를 통해 사람들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이 주제를 깊이 이해하는 데에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8)라는 빌립의 요청이 중요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 관계는 상호 내주(mutual indwelling)의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데, 이것도 청자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였다. 그 이름을 그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만 말할 수 있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복음서에서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높은 고()기독론적 주장(the highest Christological claims) 중의 하나이다. 예수가 자기의 말을 하지 않음은 물론, 그 자신의 일을 하지도 않는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완전하게 내주하기 때문에 예수의 말과 행동은 하늘에 계신 생명의 하나님을 계시한다. 다음 장에 가서야 상호 내주의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만, 독자들은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5. 기도의 신학: 끝으로 살펴볼 본문의 신학적 주제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언어의 간결성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의 깊이와 넓이를 놓치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한다: (1) 예수가 하나님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고, 탄원해 주시기 때문이다. (2) 이 일들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들은 예수의 사명과도 연결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13)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13) 한편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바램을 주님의 바램에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께 드렸던 동일한 신뢰와 희망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다. 거기로부터 성숙한 기도가 흘러나온다.

 

주석적 관점

이 본문은 이별담화(Farewell Discourse)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위대한 지도자가 슬픈 이별을 고한 예는 그리이스 로마 문헌에서도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풀라톤이 설명하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한 이별사이다. 아마도 요한복음서에 더 영향을 끼친 예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한 이별사일 것이다. 신약에서의 다른 예는 예수가 마지막 만찬(병행구 눅22:14-38 간단하게는 막14:17-31과 마26:20-35)에서 하신 말이나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이별사이다(20:17-38). 이 본문의 역할은 이 장면에서의 다른 많은 것들과 유사하다; 예수가 그의 임박한 떠남을 예고하고, 그의 제자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장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과 다시 함께할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마가복음13장에 있는 소위 묵시론적 담화(병행구 마24:1-44;21:5-38) 또한 이 본문의 중요한 병행구이다그가 고난 받기 전 날 제자들을 모아놓고예수는 공동체에서 그의 부재가 가져 올 영향과 마지막 승리의 재림을 약속하며 말하고 있다.

(14:1-7) 앞에서 베드로는 복음서의 아주 흥미로운 계속되는 질문을 한다.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13:36).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이 가는 곳으로 베드로가 따라올 수 없다고 대답했을 때 그의 대답은 애처롭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13:37). 이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고 위로한다. 예수와 하나님간의 긴밀한 관계는 전체 담화의 강한 모티브이다(14:8-11 참조).

예수는 더 직접적으로 그의 떠남과 목적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데(2-3), 그의 임박한 죽음과 영광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멋진 집과 주거단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넘어 그와 함께할 장소를 마련하려 간다고 한다. 영생에 대한 약속은 요한복음서의 중요한 주장이다(10:10). 죽음이 가져올 분리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그를 믿는 사람들 간의 사랑과 신뢰의 결합은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에서 15:1-17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모티브, 17장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서의 대단한 약속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나타나셨던 것(20-21)과 같은 복음서의 말씀을 예고한다.

예수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 그 길”에 대한 언급은 담화를 진전시킨다(4).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일어났듯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예수로 하여금 더 정교하게 일하도록 한다. 도마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그 길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나는...이다”라는 선언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신의 이름과 인간의 바람을 융합한 진술이다. 이 선언은 세 가지 핵심적 비유를 포함한다. “길”(hodos)이라는 개념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을 포함하여 성경이야기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에서 길은 제자들도 같이 걸었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예수의 여정을 말한다 (9:51-62참조). 사도행전에서(9:2;19:9,23;22:4;24:14,22) 누가는 기독교운동이 예수가 걸었던 길을 따르며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1:8) “길”로서 명명되었다고 말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길을 구현했고, 그럼으로써 제자들의 길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또한 “진리”인데, 이것은 처음에 서론에서 보여주듯이(1:14,17) 예수의 사명의 본질을 떠올려주고, 8장에서(8:21-47) 예수의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확증하고, 그리고 “진리의 성령”의 선물(15:26-27;14:17)에 의한 완전한 실현을 가져온다. 예수의 사명의 전체적인 목적은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다(1:4;10:10).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인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10:28;17:2-3).

(14:8-14) 다른 질문이 담화를 진전시킨다. 빌립이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빌립은 예수께 처음에 왔던 제자 중 하나이지만(1:43;6:7;12:21), 복음서의 근본적인 그리스도론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자로 묘사했는데, 그가 말하고 행동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몸 그 자체로 구현한다는 점에서이다(1:14-18).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말한다(8:26;17:8). 그의 치유의 손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4:46-54;9:4;11:1-44). 무엇보다도 그의 친구의 사랑의 행동으로서의 죽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을 보여준다(3:16-17;15:13;13:1-2). 예수가 빌립에게 한 말은 이러한 관점을 뚜렷이 표현한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14:9).

요한의 강력한 기독론은 14:6의 배타적인 주장을 보장한다“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가는 모든 다른 길 심지어 구약의 모세나 아브라함의 길도 가린다요한복음의 목적은 가능한 한 강하게 기독교인의 신앙과 세상의 운명에서 예수의 깊은 의미를 선언하는 것이다하지만 복음의 이 말을 기독교 외에는 하나님께 가는 다른 길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결정적 선언으로 해석하지는 말아야 한다.    

본문은 미래의 방향을 바꿈으로 끝을 맺는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12). 이것은 17:18 20:21의 선교적 독려를 예고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듯이, 제자들 또한 그러하다. “더 큰 일”의 의미는 논쟁중인데, 아마도 이방인에 대한 교회의 선교의 폭넓은 참여를 가리키거나, 또는 이것이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으로 보내신 성령을 통해 제자들이 권능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그들이 들은 것에 자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권고와(11:24;7:7-11;21:22;11:9-10) 공명하는 확신을 지닌다.    

 

목회적 관점

 

요한복음의 고별설교(요한복음 14-16)의 도입부는 나의 첫 설교 본문이었다. 그 때 나는 열네 살이었고 우리 교회 목사님 부임 11주년을 기념하는 “청소년 예배”였다. 우리 가족은 그날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두려움에 가득 찼지만 대담하고 풋내 나는 설교 제목을 기억하고 있다: “마음의 병의 치료.” 십대 시절에, “고난”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연구가 예수의 제자들의 고민을 명확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흥분했다: 그날 밤에 그들의 마음이 불안하여 예수님의 마지막 지시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내 제목은 실제로는 미성숙한 설교를 하면서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열네 살 때, 마음의 작용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설교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는가?

고별 식사를 위해 예수와 함께 모인 제자들은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예수가 오랜 이별의 인사를 하는 것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고 불안했다. 그들은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한 이래로 예수를 따라 왔지만, 예수의 메시지와 비전과 사명을 이해하기에는 미숙했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 온 신학이 근본적인 변화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찾아왔으며, 찾았다고 믿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불멸의 존재라고 믿었는데, 그러나 그는 사형을 당할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점령에서 해방시킬 메시아적 영웅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는 압제자에 의해 패배당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영원한 평화의 왕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지만,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를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실망과 패배의 연회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 이 본문은 장례식과 추도식에서 가족과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지지의 말씀으로 사용되지만, 본문의 제자들은 이 말씀에서 위로받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은 예수가 아니다. 그들이 메시아의 메시지와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의미할 것이다. 그들이 살면서 바라 온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이다. 메시야가 불멸의 존재는 아닐지라도 메시아의 메시지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죽음은 마지막도 아니고 영원한 단어도 아닐 것이다.

부활절 이후의 시각으로 보면제일 마지막에 정경이 된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건너뛰어서예수가 하신 말씀 가운데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닌 부분을 우회하는 것은 쉽다그러나 제자들은 모르는 사이에 호스피스병동의 원목과 출산병동의 조산사로 동시에 파견 될 예정이다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의 도화선이다정의롭고 평화로운 메시아 왕국에 대한 그들의 희망적인 전망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도가니에서 녹을 때제자들의 마음은 병들게 될 것이며 그들은 불안해서 분별력을 잃게 될 것이다무엇보다 예수의 몸이 사라질 것이다예수의 선교와 제자들 자신의 선교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가 사라질 때호스피스 병동 원목이 필요하다.

출산 병동 조산사와 호스피스 병동 원목의 상황은 놀랍게 비슷하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무언가가 죽고, 영원한 것은 죽음에서만 완전한 탄생을 발견할 수 있다. 분만실과 호스피스 병실 모두에서 가족구성이 변한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출생과 죽음은 변화의 이야기로 가득 찬 선반의 책꽂이다. 출생과 죽음은 우리 삶의 서사에서 반복되는 사이클이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은 우리 자신에 대해 전에 가졌던 감각이 죽을 때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도, 우리는 종종 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는지 묻는다. 빌립은 우리가 아버지를 볼 수만 있다면 만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삶의 이야기에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해도 조산사와 호스피스병동 원목의 역할은 충분히 알려져야 한다.

제자들은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야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그곳에 가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위치는 가까운 관계에서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된다. 양들은 목자와 가까이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다. 그들이 고별 식사를 나누는 방에 앉아있을 때, 예수는 그들에게 그들을 위한 방이 많이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려고 한다. 관계가 변하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고별담화는 명령으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정서적 명령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의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포기할 때에도 확고하게 서있는 명령이다. 메시아 군대의 영웅을 기대하는 신학은 동정심만이 가져올 수 있는 혁명으로 대체될 것이다. 출생과 죽음은 변화의 고통과 잠재력으로 가득 차 있다.

동요하는 십대들은 사실 자신의 몸과 영혼 안에 믿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청소년기는 더 이상 어린 시절만큼 안전하지는 않지만, 아직 성인으로서 자급자족하지는 않는, 경계에 있는 시기, 즉 사이에 있는 시기이다. 십대들은 산파와 원목의 역할을 하는 동반자, 유아기를 떠나도록 안내하고 성인기의 지형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도와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청소년인 제자들에게 성령이 바로 그런 분일 것이다. 보혜사는 병든 마음을 치료하고 다가올 변화에 확고하게 서도록 도와줄 것이다.

 

설교적 관점

 

요한복음 14장 도입부의 예수의 말은 (장례식 중) 새로 판 묘지 주변에 모여선 회중들에게 수없이 들려졌던 말씀이다. 자신의 무덤가에서(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그 길"의 시작이라는 것과 그 목적지는 하나님 안에서 그가 만드는 새로운 공간이라는 것으로 안심시키려 하신다. 제자들은 믿지 못한다.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도 그렇다.

일요일 마다 회중들은 삶이라는 선물이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시작한 곳에서 시작하라.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가 가졌던 힘들었던, 그리고 깊은 슬픔에서 회복되었던 그의 마음에서 시작하라(11:33). 예수의 답변을 예상하면서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무엇이 곤경에 빠진 인간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가? 세상은 무수한 답들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오직 하나의 답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믿어라, 나를 믿어라.(1) 요한은 믿음이란 그 무엇보다 마음으로만 동의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한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말하며, 그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다. 여기서 대요리문답에서 루터의 말이 떠오른다.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에 대한 응답으로, 루터는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이 매여 있는 곳이라고 대답한다. 곤경에 처한 심령이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세상이 마음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주는 다른 모든 것들에 매달리는 마음이다.  예수는 불확실한 때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겨라, 나에게 너의 마음을 맡겨라.

다음으로 예수는 새로운 종류의 삶 즉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맡으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한다.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은 관계의 측면에서 공간의 개념이 아닌 우리를 위한 시간을 하나님이 가지셨다는 것으로 공간에 대해 설명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의 생명 속에서 창조된 시간은 공간이다. 만약 창조가 하나님 안에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넉넉함(roomy)을 가지고 계신다…하나님의 이 넉넉함(roominess)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원성은 하나님이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모든 시간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성으로서 하나님의 넉넉함에 대한 유비가 주일 아침에 (선포되어지기에) 가치가 있는 의미이다.

제자들의 마음이 힘들었던 것은 이제 예수와 함께 했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시간과 맺고 있는 관계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허무하게 뺏긴다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필요로 하시는 시간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고, 그런 하나님께 마음을 맡기는 이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해보라. 예수가 하나님 자신의 생명 안에서 준비한 공간이 영원한 생명이고 그것은 로버트 젠슨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오셨다는 요한복음서의 시작처럼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이라는 약속에 담겨진 기독교의 소망을 들여다보라.

이쯤에서 회중들은 오늘 본문 속에서 사실상 길을 잃은 도마를 기억해낼 것이다. 빌립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질문은 둘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얼마나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솔직히 우리는 어둠을 더 선호한다. 기독교에서는 도마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여서 소위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전하는 문구로 사용하였다. 확실히 예수와 함께 3년을 보낸 제자들은 이 말과 또한 (적극적으로 헌신한다는 요한식의 믿음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빌립에게 말씀하신 것 모두를 믿지 못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9) 우리 중 누가 그를 아는가?  

그 분을 안다는 것이 교회의 교리나 신조를 내면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까지 예수가 행한 이적이나 또는 행적들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그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고 말했을 때 예수가 의도했던 것과 일치하는가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증언하지만그의 이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심지어 종교에선 아니라 하여도(종교적 기준으로 그가 신자로 보이지 않더라도), 예수께서는 공간을 준비해두시는 다른 이들이 있을까?

요한복음 14장의 기독교적 주장의 배타적인 면을 듣는 대신에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획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가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고자 한 예수의 고통을 생각하라. 우리는 여기서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연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젠슨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인지능력을 그분에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이끌어 그는 우리가 절대 다다를 수 없고, 우리가 닿을 수 있거나 심지어 닿아야 한다는 것 조차도 몰랐던 것을 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신다." 무엇이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가? 육신이 된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기 지식은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비우는 사랑에서 드러나며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요한은 서두에서 적었다. "아버지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간 이는 바로 외아들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려주셨다."(1 1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없이는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요한일서 4:10), 그 사랑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일 아침에 가치있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맺는 계약과는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공간을 마련해주시고, 우리를 아시며,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약속은 끝나지 않는다.(고전 13:8)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힘들어하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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