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이번 주 본문의 핵심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다. 이 부자는 하나님의 영역보다는 잉여 재산의 보관에 더 관심을 두었던 사람이다. 이 비유는 부를 그 자체를 위해 추구하는 것의 위험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탐욕의 죄를 질 위험이 크다. “이젠 충분해” 라는 말은 “더 많이”라는 말 속에 묻혀버리고, “나, 나를, 내 것”을 반복적으로 언급함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탐욕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에 관한 관심의 집중 때문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부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향한 인간의 습성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강하게 대립한다. 또한, 이것은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소유에 관한 청지기 의식과도 상반된다.
그의 곳간이 이미 꽉 차서 빈 공간이 없는데, 이 부자는 또 큰 수확을 거두었다. 이것을 자기 혼자 누리려고 그는 기존의 곳간을 허물고 새로 큰 곳간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거기에 그의 수확을 저장한 후 편하게 앉아 넘쳐나는 부를 갖고 인생을 즐길 요량이었다. 이 농부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피해야 할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제자처럼 살지 않기 원한다면 이 사람을 따라 하여라.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남는 수확을 보관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절약하여 여분의 분량을 농산물 저장탑이나 저장소나 지하실 선반에 쌓아 두는 것은 검약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들이 해온 일이다. 굳은 날이 올 것을 대비해 절약하고 아껴 쓰면서 저축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 아닌가?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의 교훈] 바로의 꿈을 해석했던 요셉도 풍요로운 7년 동안 여분의 식량을 비축하여 7년의 흉년을 대비하지 않았는가? (창 41:17-36) 그리고 큰 행운을 당한 이 농부는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할 자격이 있지 않은가? 성경에도 큰 수확을 기뻐하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잔치를 하는 예가 많이 나오지 않는가?
물론, 장래의 필요에 대비해 지금 무엇인가를 비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의무에 속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준비는 균형이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이웃을 보살피는 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일, 세계적 풍요의 혜택에서 빠진 사람들과 생존을 위한 기본적 조건도 갖추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을 돕는 일들은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비유 속의 농부는 관심을 자신에게만 집중함으로 그에게 풍성한 수확을 준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농부의 말 속에 “I, me, my”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지 이웃에게는 무관심하다. 자신의 땅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나,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와 같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나, 최소한의 생필품도 구하지 못해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누가복음이나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성스러운 삶의 핵심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비유 속의 부자는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어서 그의 수확과 그의 곳간과 그의 생명 외에는 관심에 없었다.
오늘의 본문에는 우리가 다뤄야 할 두 가지의 중요한 주제가 더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시고 땅에 사는 자들에 식량을 제공하는 분이기도 하지만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학적 용어를 쓰자면,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비유의 주인공은 그의 행운에 관여한 하나님의 손길을 무시했고, 그에게 돌아오는 이득에만 심취해 있었다. 어디서도 이 농부는 그의 땅에서 풍성한 소출이 나온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 둘째로, 이 농부는 재산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창조된 모든 생물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진리를 잊고 있었다. 결국은, 조만간 죽음이 그를 그의 재산과 갈라놓을 것이다. 죽으면 재산을 갖고 갈 수 없다. 하늘나라에는 창고시설이 없다. 곳간은 차고 넘치지만, 그의 남은 날은 하루씩 줄고 있다. 그는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면서 이 중요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잉여 재산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그는 우상숭배의 덫에 걸려들었다.
이 비유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극심한 가난에 처해 생필품조차 구하기 힘든 삶을 사는 사람에게 부의 문제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이제는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해 많은 것을 쌓아 두려는 욕망>에 근거해 있나,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의 본질과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관한 이해>에 근거해 있나? 우리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욕구하도록 권유하는 미디아가 정한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풍요로운 자가 되라는 복음에 따라 우리의 삶을 평가할 것인가?
주석적 관점
- 누가의 신학적 관점에서 부(재산, 소유물과 엘리트적 경제적 지위 등)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본래 부정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여 부자가 된다. 사람들은 부를 그들의 지위를 높이는 것과 (14:7-14), 사치스럽게 그들의 지위를 즐기는데(16:19-31) 사용한다. 마리아는 처음으로 부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 태도를 밝힌다(1:51-53). 예수 또한 그러한 부정적 태도를 가진다(6:20-26). 이 본문은 이러한 관점들을 생명을 위협하는 부의 본질을 묘사함으로써 상기시키고 확장 시킨다.
-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수 천명의 군중들 가운데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12:1),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질문하였다(13). 그는 그의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유대의 유산관례에 따르면 형은 재산의 2/3을, 동생을 1/3을 받게 되어있다(신21:16-17). 이 사람은 (아마도 동생으로 외부의 중재가 필요한 힘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정당한 유산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원했다.
- 예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예수의 역할이 가족 유산 다툼의 중재인의 역할이 아님을 보여준다(14). 대신 예수는 무리들에게 온갖 탐욕을 멀리하라는 강한 경고를 주는데, 이는 사람의 삶의 의미와 가치가 차고 넘치는 재산 축적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15). 1세기의 경제적 현실 속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은 공공적 의미를 지닌다. 만약에 한 사람이 점점 더 부를 모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점점 가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경제는 제로섬게임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과 연관되어져 있다.
- 그런데 이 부자는 시대를 지혜롭게 분별하고 필요한 사람들을 이익을 위해 적절하게 행동했던 요셉이 아니다. 그는 차라리 자신에게만 초점을 두고,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만한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했다. 그의 풍요의 딜렘마에 대한 해결책은 역시 공공적 의미도 지닌다. 장래에 곡식이 모자랄 때, 그는 더욱 부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정해놓은 곡식 값에 의존해야만 한다.
- 19절 끝의 자신에게 말한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는 지침은 심각한 아이로니가 있는데, 이는 비슷한 이사야22:13에서 그렇게 흥청망청 즐기는 이유를 달아놓았는데 그것은 “내일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만 도취하여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이나 하나님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20). 부자의 자기인식과 하나님의 자기인식에 대한 대조는 대단히 뚜렷하다. 부자는 여러 해 동안 쓸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비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영혼으로 여기고 오늘밤에 그의 영혼을 찾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편안하고 풍족한 미래를 보장하는 세심한 준비는 했지만, 그러나 다가올 죽을 운명은 준비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질문(20b)이 그냥 공중에 남아 있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9:25에서 요구한 것을 지금 정확하게 경험하고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 예수의 결론(21)은 15절의 온갖 탐욕에 대한 그의 말을 완성시킨다. 여기에 가진 것이 풍족한 사람의 삶의 최종적이고 치명적인 결과가 있다. 여기에 자신을 위해 소출을 쌓고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지 못한 사람의 운명이 있다. 이 본문은 전후에 누가가 분명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하나님께 부요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사람에 행했듯이(10:25-37) 필요한 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부요한 것은 마리아가 했듯이(10:38-42) 의도적으로 예수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용양식을 제공한다는 기도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11:1-13;12:22-31). 하나님께 부요한 것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자신을 베풀고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다(12:32-34).
- 비유의 부자나 그의 삶의 패턴을 흉내내는 사람은 고립되고 자기도취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바,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삶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과 소유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돌봄과 사랑의 하나님의 과제를 위해 사용되기 위해 미리 준 것인데, 특히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목회적 관점
오늘 복음서 본문의 힘은 누가복음 11장 끝에서 예수에게 몰래 다가가는 비판자들처럼 회중에게 몰래 접근할 수 있다. 한여름은 가족 여행을 하고 한가하게 커피 한잔 하는 시간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에 반드시 휴식과 휴양과 여행이라는 과정이 자리 잡아서 긴장을 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솔깃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주의 복음서 본문을 그대로 두는 사람은 뒷마당에 있는 바베큐 불판처럼 지글거리면서 꼬치를 굽는다.
오늘 말씀은 회중을 더 깊은 영성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부른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하는 설교가 무더운 주말에 적당해 보이지만, 예수는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염려를 드러내고 믿음이 깊은 삶이 번영과 성공이라는 미국의 이상과 동일하다는 환상을 훼손시키는 우화를 사용한 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도록 초청한다.
돈 문제와 회중의 삶이 어디서 교차하는가? 어디에서나 그렇다. 눅 12:13-14에서, 예수에게 해결해달라고 하는 가정불화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 볼 수 있다. 유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돈은 교회 자체에서 걱정과 통제를 위한 일종의 자동온도조절기의 역할을 한다.
Edwin Friedman과 Peter Steinke가 가족제도에 대하여 연구한 바에 의하면 돈 문제가 우리 개인 가정에서처럼 교회 조직에서 실제로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돈은 언제나 돈 이상이다. 우리의 지출과 우리의 저축과 물질적인 부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는 우리의 감정과 기억에 기인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분량은 다른 문제들이 우리의 삶을 장악하는 것이 줄어들수록 깊어질 수 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교회 앞에 놓인 현실에 대하여 가장 엄격한 용어로 말하고 있다.
설교자들에게 오늘 본문은 목회자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고 있는 문화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평가하기 위한 건강한 목록을 제공한다. 교회를 향해 그들의 종합적인 가치와 재정적인 헌신에 대해 도전하기 전에, 돈과 대중적인 평가에 대한 자신만의 관계를 점검해 보는 것이 좋은 목회 훈련이 될 것이다.
자기의 삶에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오는 예배자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솔직함이 당황스러울 수 있다. 여름에는 신앙과 돈의 교차점에 대하여 돌아볼 기회가 거의 없다. 설교자와 사람들 양쪽 다 국가 경제의 변화라는 위기가 돈과 번영과 인생의 목표들과 같은 주제들을 훨씬 자연스럽게 토의하게 해준다고 느낄 수 있다. 가을에 있는 청지기직 캠페인 때문에 서둘러야 하지 않는다면, 한여름의 예배는 교인들이 걱정을 덜하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미국교회는 가을에 다음해의 헌금을 미리 약정을 한다. 즉 다음해 일년 예산이 어느정도이고 교인들은 거기에 맞추어 약간의 긴장과 더불어 약정헌금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청지기직 캠페인이라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이번 주의 복음서 성서정과를 들으려고 하는 회중들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설교자는 개인적인 재산 관리, 금전적인 가치, 인생의 목표들에 관하여 정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아이들, 청년, 빈 둥지 세대, 은퇴자들을 위해 금전 문제를 교육하는 웍샵을 준비하는 설교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는 부동산 구입을 위한 상담 시리즈를 준비하거나 지역 주택 시작과 소비재의 비용을 관리하는 경제학을 파헤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돈을 기독교인의 생활의 한 부분(중심이 아니라)으로 보는 능력이 있는 곳에서, 교회는 재정 현실을 복음적 신앙과 화해시킬 유용한 지식과 토론을 중개할 수 있다.
한여름은 또한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투자에 관하여 이야기할 시간을 제공한다. 무엇을 위하여 교회가 수고하고 절약하는가? 교회에서 금전 문제의 역사는 좀 더 생각하기 위한 영역을 제안하는가? 교회를 설립한 세대가 금전에 대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가? 금전을 제공하는 것은 선교에 의해 추진되는가, 혹은 선교가 그것 때문에 제한되는가?
여러 세대에 걸친 그룹을 모아서, 3-4 팀으로 나누고, 한 가지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설교를 이런 토론과 연결하는 것이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교회의 공동체적 현실에 적절하다고 말해 준다.
결국 누가복음 12:13-21은 세계 경제의 불안한 동요보다 좀 더 지속되는 어떤 것을 신뢰하라고 설교자와 회중을 똑같이 초대한다. 좀 더 많고 좀 더 큰 창고에 채우는 대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라는 영원한 경제로 초대한다. 그것은 한 해의 모든 계절에 복음이다.
설교적 관점
-“어리석은 사람아” 이 말은 주로 이성적인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사용되는 심한 말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사용한 이런 표현들은 보다 경멸적으로 들린다. 부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훌륭한 실천인” 경영전략에 대해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갑자기 하나님은 “네 영혼의 영업결산표를 보니 파산직전이다. 폐업이 임박했다, 너는 끝났다!” 라는 절망스러운 말을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잃어버린 양, 탕자이야기등과 같은(부자와 나사로, 열 므나비유 그리고 악한 소작인비유도 놀랄만큼 유사하다) 누가의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이 비유는 마지막에 구원되거나 잘못된 방향을 교정할 여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누가의 예수는 풍성한 소유를 한 사람들에게는 완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보인다. 몇몇 설교자들도 이와같이 한다. 이 본문에 관한 많은 설교가 “네 재산을 혼자 소유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과 특히 교회와 네 재산을 공유하는 관대한 사람이 되어라”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 이야기가 이런 점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21절)?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이야기는 우리를 벼랑 끝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내려놓는다.
-누가에 나타난 예수에 있어서 돈 문제는 (money matters) 명백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투자나 분배가 아니라 집중하지 못하는 것(distraction)이다. 2주전에 읽은 누가복음 성서정과에서 예수는 마리아와 마르다로부터 환대를 받고 있다 (마르다가 분명히 더 힘든 일을 하였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공정하게 일을 나누어 하지 않는 것을 불평한다. 예수는 마르다에게 “많은 일로 염려하여 들떠있다(distracted)” 라고 말한다. 여러 중압감으로 인해 마르다는 자기 입장을 잃어버렸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마르다는 의무감에 마음이 흔들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놓쳤다. 아직 받지도 않은 유산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이나(얻기를 원하고) 가진 재산에 마음이 가있는 부자(늘리기를 원하고)나 모두 마르다처럼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를 가진 “동전의 양면”이다. 불만에 가득찬 형제나 부자는 마르다처럼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한 가지 일로 인해 마음이 분주한데 그것은 재산을 더 모으는 일이다 (“내 형제가 재산을 나눈다면” “내 창고가 더 크다면”)
-예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 것”을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권면할 때 그는 철저하게 프란시스코 수도승같은 삶을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늘 우리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풍성한 인간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12장32절)
-문제는 (마르다, 불만에 가득찬 형제, 부자 그리고 우리들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한 사려깊은 분별(discernment)이다. 이 분별은 특히 돈이 개입될 때 문제가 된다. 현존하는 문제가 자본과 노동의 “공정한” (fair) 분배와 관련될 때 보다 어렵게 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아!”라는 말을 누가의 예수는 경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인 상황에서 생생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집중하지 못하는 것(마음을 빼앗기는 것)은(distraction) 명료한 분별을(discernment) 가리우게 하고 종종 바보같은 비극적 선택과 실천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느 누구도 멍청한 선택을 원하지 않는다. 결정과 관련한 정보가 미비하거나 정확하지 못할 때 뒤따르는 오해는 상대적으로 고치기가 쉽다. 다시 검토하고 “아 이제 알았다”라면서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을 빼앗기는 습관적인 성향이 있다면 (너무 많은 것이나 한 가지 큰 것) 나의 관점으로 문제들을 바라보는 것이 어렵다. 이 비유에서 날카롭게 경고하는 충격요법은 구원에 대한 마지막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누가가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무엇과 씨름하기를 원하는지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분별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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