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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0장 38 ~ 42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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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읽은 잡지의 글이 생각난다. 그 글은 선교에 관한 것이었는데 성 프란시스코의 다음과 같은 말이 소개되어 있었다: “항상 복음을 선포하여라- 만일 필요하다면 말을 사용하라.” 오늘의 본문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에 관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만일 필요하다면 말을 사용하라”라는 표현>과 <앉아서 예수의 “말”을 듣고 있었던 마리아를 “더 좋은 것을 택했다”라고 하신 예수의 칭찬>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대부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오늘 세계는 말로 가득 차 있다: 자신들의 정책의 정당성을 우리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인들의 말, 1930년대 히틀러의 인종정책에 대해 중립적인 견해를 밝힌 독일 학자들의 말,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강매하려고 반복해서 쏟아내는 광고 문구. 진솔하게 말하려면 텔레비전 설교자들, 성직자들, 교단 지도자들, 신학자의 말들도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도 합리화, 자기 자랑, 말장난의 혐의를 벗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과대소통사회에서 말은 중요성을 상실하여 값어치 없는 것이 되었다. 말이 의미를 갖는데 요구되는 침묵이 화자나 청자에게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전통에 따르면, 말씀하시는 하나님 – Deus loquens- 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계약의 파트너로 삼으신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는 것보다 “말하는 동물”이라고 함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말로 명령함으로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없고, 우리의 말은 그 자체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창조의 세계 안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부여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그 말씀을 세상과 소통하는 데 필요한 말을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들을 수 있으랴?

 우리는 말에 대해 신중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을 뿐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소통할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신학자나 설교자나 교회학교의 교사가 말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엄청난 신비 앞에서의 겸손의 결과인지, 개인적인 한계 때문인지, 혹은 심지어 나태함 때문인지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말과 행동, 말하는 자와 행하는 자, 명상가와 활동가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쪽에 속한 사람이 다른 쪽에 속한 사람을 비난하는 일도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자기 자매가 예수와 함께 신학적 토론에 빠져 희열에 차 있는 동안 귀찮은 일을 해야 하는 마르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마리아도 예수가 이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마르다에게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왜 일의 본질과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바쁘게 움직이는가?

 예수는 이 가정과 매우 가까웠는데, 다른 경우에 마르다가 열심히 일하여 칭찬을 받고, 마리아가 나태함과 수다 때문에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강조점도 달라진다. 또한, 이 두 태도는 극단적인 형태를 띨 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명상 없는 활동은 방향성 없는 수많은 일만을 벌려 놓아 때로는 상황을 악화시킨다. WCC의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대회는 오늘날 인류의 위기의 원인으로 삼중적 불안정을 꼽았다. 활동가들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방안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상황에 관한 문제들이 충분히 깊이 있게 탐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삼중적 불안정의 복잡한 상호 관련성에 대해). 반면에 수많은 이론이 – 성서적, 신학적, 혹은 기타 학문적 – 사실은 참여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논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고와 행위의 대립에서 나오는 문제를 통해 우리는 기독인으로서 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볼 줄 아는 민감성이고,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태도의 문제이다.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의무가 주어진다. 끊임없이 말을 생산하는 데 주력했던 개인이나 교회는 – 그것이 고도의 학문적인 신학이던, 전도의 문구이던 – 지난주 본문에서 (눅 10:25-37) 예수가 “말의 전문가”였던 율법교사에게 주었던 충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가서... 하여라.”

  오늘 본문이 <주의하여 듣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할 말을 생각해 내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열심히 행하는 것의 위험>을 너무 강조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북미의 자유주의와 중도 개신교의 상황에서, 예수가 마리아를 칭찬하신 말, 즉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공동번역) 이라는 말은 경청해야 하는 중요한 충고이다. 지금 마리아는 활동에 몰두하고 있지 않고 꼭 필요한 일, 즉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주석적 관점

 
- 이 이야기는 흥미를 끄는데 왜냐하면 다방면의 제자됨에 여성이 참여하는 해방적 이해를 명백히 허용하는 몇안되는 본문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예수님 앞에 앉아서 배우는 것은 아마도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인데 예수는 이를 허용하고 있고, 이는 그의 모든 사역에 있어 여성이 남성과 같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해석은 마치 본문에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마르다의 행동을 폄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본문읽기는 당장에 반대를 받는데 그중에서도 존 칼빈은 이 본문으로 실제적 봉사보다 명상적 삶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다. 현대의 여성신학에서도 마르다가 그녀에게 주어진 실제적 봉사의 역할을 맡음으로 실패했고, 반면에 마리아가 남자들같이 배움으로 성공했다는 해석을 거부한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러한 주석들에서 얘기된 이슈들을 조명해주고 잘못된 해석을 낳을 단순한 가정들을 피하게 한다.  

- 두 자매에 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은데, 누가의 본문은 공관복음서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유일한 곳이다. 요한11:1-12:8에는 예수가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와 말씀을 나눈다. 하지만 누가나 요한은 각자 묘사한 장면에 대해서 서로 알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누가에게 이 자매가 중요한 것은 마르다의 대접이나 마리아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흥미 그리고 마르다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보는 자매들의 명확한 예수께 대한 헌신 때문이다.  

- 식사를 준비하는 마르다는 그에게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다. 마리아는 선생의 발 곁에 앉은 학생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문화적으로 금지된 장벽에 도전한다. 39절에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누가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한다(5:1;6:47;8:11-15,21;11:28). 그러기에 예수가 자신에 대한 헌신으로서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옹호하며 말하는 것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시대에 드물게 남성 종교지도자의 학생이 되는 처음의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언니가 말한 것을 보면 이 상황에서 다른 역할을 하도록 예상되어 있었다. 장면은 40절에서 마르다가 말에서 전환된다. 마르다는 동생이 혼자 일하게 놔둔다고 불평하면서 자신의 환대를 깨Em린다. 사실 마리아에게 얘기하지 않고 손님에게 말한 것이다.

- 누가는 diakoneo(4:39;8:3;10:40)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 예수를 섬기는 사람들을 칭찬한다. 이 용어는 명사diakonia와 더불어 누가-사도행전에서는 이 본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식 준비나 식탁 봉사를 의미한다. 하지만, 누가나 다른 신약에서는 좀더 넓게 섬김과 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수는 자신을 22:26-27에서 “섬기는 자”로 말하고, 그러기에 많은 일 중에서 손님이나 식솔들에게 해야 될 봉사하는 일을 선택한 마르다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도 자체로서 제자됨의 표현이다. 여기서 마르다의 문제는 그러한 일을 하는데 염려하며 들떠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혼자 놓아둔다고 마리아를 비판하면서(은근히 예수를 비판했는데) 마르다는 자매가 하려고 선택한 다른 활동들에 대한 가치 판단을 넌지시 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환대하는 일이 목적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염려하며 들떠있는” 환대는 누가 주님이고 손님인지 초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 영국 성서학자 러브데이 알렉산더는 이 본문의 오독을 여러 가지로 열거한다. 첫째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양극단으로 몰아 독자들로 하여금 자매의 행동을 대립적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그들의 행동과 함께 일차원적으로 성격화 시켜 마치 이 이야기의 자매가 각각 어떤 페러다임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세 번째 경향은 이 본문이 마치 젠더 문제가 중심 주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우선적으로 여성과 그들의 역할을 지정하는 것이다.  

- 설교자들과 교사들은 본문이 지지하지 않는 이러한 가정들을 막아야만 한다. 첫째, 화자나 예수 그 누구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행동을 반대로 설정하지 않는다. 예수가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42)라고 칭찬했을 때도 예수에게 집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주님의 일은 하나 뿐이다”(42)라고 한 것도 한 가지 형태의 헌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헌신의 대상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제자도의 진실한 행동은-그것이 명상적이든 행동적이든 그밖의 다른 것이든-초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다의 문제는 올바른 헌신의 대상인 주 예수께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진 것이다. 둘째로, 이 여인들의 행동들이 어떤 삶의 형태를 대표한다거나, 예수의 최종 선언이 어떤 특정한 제자도의 표현이 다른 것에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어떤 종류의 예수에 대한 헌신이 다른 것에 우월하다고 주장하려고 이용한다면 마르다가 염려하며 들떠있었던 것과 같이 같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셋째로, 마르다와 마리아가 여인이라는 것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고, 분명히 예수가 마리아를 용인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됨은 남녀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우선적으로 여인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며, 또한 예수가 마르다의 심란함에 대한 친절한 비판이  여인들에게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마리아는 제자가 되어서 예수의 발밑에 앉아, 넋을 잃고 그의 말을 듣기를 갈망한 것이 분명하다. 마르다가 인내의 한계에 달해서 예수에게 그가 있음으로 인해서 생긴 불의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는지 물을 때까지 마리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장면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파송된 70명이 방문한 수많은 집에서 있었을 장면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하여 모여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식탁에서 봉사하기 위해 바빴을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가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정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제자로 살아가도록 예정되어 있다: 음식을 준비하고, 돈을 세고,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계획한다. 다른 사람들은 말씀으로 섬긴다: 연구와 기도, 예배와 설교, 전도와 교육.

누가가 곧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것처럼(행 6;1~6), 양쪽 다 필요하지만, 이 두 장면에서 누가는 후자에게 특권을 준다. “오직 하나의 일만 필요하다. 마리아는 더 좋은 쪽을 택했다”라고 예수는 말한다(41~42절). 이것이 오늘 교회의 예식과 예배를 향한 우리 삶의 질서에 관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가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올 때 어떻게 환대를 보여줄 것인가?

조엘 그린이 “예수가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신 것은 예수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메신저들, 즉 하나님의 통치를 가까이 끌어오는 일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가 추구한 환대의 본질을 선포한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호의적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공동체라고 쓴 것은 옳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들떠 있는(41절)” 교회는 필연적으로 정신 나간 잔치와 근심어린 청지기직 캠페인과 단지 단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고안 된 행사들의 모래톱에 머물게 될 것이다. 결정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는 회의에서 내려질 될 것이다. 빵을 나눌 때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는 인식 없이 상 위에 음식과 음료만 놓게 될 것이다. 사회적 쟁점들은 다루어지겠지만, 늘 그렇듯이 복음은 실종되고 정치적인 참여만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종종 교회를 아주 고집스럽게 만든다. 밤마다 교인들은 기계적으로 집에서 나와서 교회로 가서는 왔다 갔다는 흔적도 없고 공허하게, 마치 문밖에서 걸어 다닌 것처럼 돌아간다. 교회의 사업들은 그들이 섬기기로 동의한 하나님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진행되기 때문에, 끝이 없는 회의들은 유쾌해야 할 기독교인들을 분노하게 한다. 마르다를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가 한 가지 필요한 일을 놓친다면(42절),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유일한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그러면 우리는 지명 위원회가 우리의 연구실 문 앞에서 아무 계획 없이 돌아서도 놀라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자신의 위치를 그리스도의 발 앞에 두고, 함께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질문하고, 현실에 관한 설교를 듣고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씨름하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공부하고 양육하면, 일상생활의 세밀한 부분에도 복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위한 누가의 간단한 설정은 집이다. 집은 모든 목회적인 요청이 잠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하나님의 통치를 가까워지게 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임을 기억나게 하는 곳이다. 목회에 있어서 더 심오한 순간은 우리가 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즉흥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는 만찬 모임에 참여할 때 시작된다. 혹은 우리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의 신체적인 취약함이 신앙의 위기에 관한 고백으로 이어질 때나, 혹은 우리가 모임에 늦어서, 일상적인 토론을 삶의 신비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는 쪽으로 가까스로 돌려놓았을 때 시작된다.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다가올 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문제가 있다. 누가는 파송된 70인을 위하여 부엌에서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할 뿐 아니라, 식탁에서 기다리는 사명을 부여받은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행 6:3)으로 구성된 직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가 마르다를 꾸짖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Green은 “예수가 추구한 환대의 본질은 누군가의 손님이 될 때 실현된다. 그러나 마르다의 말은 ‘내’ 이야기(3회)에 집중된다. 그녀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그녀의 계획에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그에게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잘 해야 한다는 염려가 환대의 척도가 되면, 교회는 교회가 섬겨야 하는 분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프로그램을 위한 수단이 되면, 교회는 교회를 존재하게 한 말씀에 참여하기를 중단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잊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 이런 섬김은,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보통 은밀하게 행해져서, 그 자신의 본성대로 어떤 영광도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하려는 우발적인 시도에 의해 방해받거나 전적으로 오염되기 쉬운, 순수하고 사심없으며 겸손한 봉사로 착수되고 실행된다.”  겸손은 말씀과 성례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올 때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직 한 가지만 생각난다. 그날 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마침내 저녁식사가 제공되었을 때, 빵을 떼는 중에, 그들의 손님이 바로 그들의 친절하고 겸손하며 숨은 주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설교적 관점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자매 마리아의 집에 들르기로 결정했을 때 마르다의 첫 반응은 부엌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조상 아브라함이 3명의 손님을 장막에서 접대하면서(창 18:1-10) 시작되었던 오랜 환대의(hospitality) 전통에 충실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환대의 의무를 다하도록 했던 것처럼 마르다는 마리아가 같은 일을 할 것을 기대하였다. 마르다의 기대와는 달리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앉아있었고 마르다가 모든 일을 해야만 했다. 마르다가 요리책을 넘기며 물을 끓이고 야채를 썰며 3명을 위한 식탁을 준비하는 동안 마리아는 친구이자 손님[예수를 지칭]의 발 앞에 앉아 그가 말하는 것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실상 예수의 발에 앉아 있었다. 마리아는 제자의 자세를 취했다. 그릇 몇 개를 옮기고 투박한 손으로 접시를 식탁위에 놓으면서 소리를 낸다고 해서 누가 마르다를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예수는 부산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를 그리고 얼마후에 불평어린 중얼거림을 들었던 것 같다. 마르다는 자기의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일을 예리하게 바라보는 예수였기에 그는 마르다가 불만을 표출하기 오래전에 그 투덜거림의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마르다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주님”하고 마르다가 입을 열고 “당신은 왜 그냥 두십니까...”라고 말하여 불만의 대상이 마리아 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결국 그 불만은 자매인 마리아에게 귀결되어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였다. 사실 예수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생각한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여기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순간이다. 예수는 ‘바쁜 마르다’가 아니라 ‘염려하며 들떠있는’ 마르다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친구인 마르다에게 말하는 데 마르다는 대접해 드리기를 원하는 예수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데 불안정한 상태에서 하고 있다. 그녀는 불만의 초점을 여동생에게뿐만 아니라 이제 친구이자 손님에게도 두었고 소중히 여기며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을 잠시 잊게 되었다. 예수는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며 다시 자기자리를 찾도록 한다. 음식을 대접하는 환대 그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초점)이다.

 -오랫동안 이 이야기는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실천을 하는 삶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졌다. “보다 나은(better)” 삶은 기도와 묵상의 삶이다; “고요한” 삶은 분주히 움직이는 것보다 “더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에 이 이야기에 대해 도전을 주는 해석들이 제기되어왔다. 몇몇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교회의 활동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을 제거하기 위한 초기 공동체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제시한다. 이 해석은 오늘날 몇몇 교회 안에서 사역에 있어 여성들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동일한 추세를 생각나게 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여성들의 역할을 제한) 누가는 마르다를 섬김/사역에서 손을 떼게 하고 마리아처럼 “보다 나은 것”을 곧 보다 수동적인 자세로 조용히 주님 앞에 앉아 몰입해 듣는 것을 택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누가복음이 여성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며 여성들을 남성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한다. 마리아의 “보다 좋은 쪽 (better part)”은 수동적으로 주님의 발 앞에 앉아있는 것이고 예수는 마르다는 불안함과 걱정에 사로잡혀 봉사하는 것을 나무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르게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반드시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실천을 하는 삶보다 우위에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또 사역에 있어 여성들의 은사와 소명을 부인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신학자 John Shea는 영어성경에서 마리아가 “보다 좋은 쪽(the better part)”을 택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헬라어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좋은(good)”으로 번역되어있음을 지적한다. 마리아가 좋은 쪽을 택했다라는 것은 “선하시고 실질적인 행동의 기반이자 에너지가 되는 하나님과 연결”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마르다-마리아 이분법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보지않고 하나님은 안과 밖에서[묵상과 실천] 우리를 일하도록 부르시고 우리의 섬김을 통하여 세상의 정의, 자비, 그리고 평화를 가져오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메시지(either/or message)가 아니라 둘 다 함께 메시지(both/and message)이다.
  
-몇 년전 Tom Friedman이 뉴욕타임즈지에 “택시 기사”라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에서 그는 파리 드골공항에서 만난 한 택시 기사를 말했다. 한 시간 걸리는 여정에 그와 그 기사는 6가지 일을 하였다: 그 기사는 택시를 운전했고 휴대폰으로 말을 했으며 비디오를 시청하였다. 반면에 그는 택시를 타고 있었고 자신의 랩탑으로 작업을 했으며 iPod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Friedman은 계속해서 과학기술 전문가인 Linda Stone을 인용하여 인터넷 시대의 병은 “지속적인 집중력 결여(continuous partial attention)”라고 하였다. 아마 이것은 인터넷 시대의 병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늘 우리와 함께 있어왔고 단지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이 바뀌어왔다.

-이 두 자매의 이야기가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부탁하는 일 곧 주님께 초점을 두고 “소중한 시간”을 드리고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하듯 지속적으로 온전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러한 일은 친한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이다. 동일한 주님께서 주일 예배로 모일 때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여러가지 일들로 염려하고 들떠있는” 우리 자리로부터 빼앗기지 않을 좋은 쪽을 택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거기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것에 평화와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근원과 연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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