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누가복음 서두에서는 예수가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선언하고(1:79) 끝나는 부분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의 축도를 베푼다.(24:36) 이런 맥락에서 예수가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12:49) 예수는 평화가 아니고 분열을 갖고 오는가? 부자간 화해의 비유를 말했던 분이 부모와 자녀가 맞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병자를 고치면서 평화를 기원하지 않았나?(7:50; 8:48) 그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하면서 평화로 인사하라고 하지 않았나? (10“5-6)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관점에서 볼 때 분열을 강조하는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많은 설교자들은 성서정과에 이 본문이 나타나는 것에 불편을 느낀다. 예수의 <회개와 화해의 가르침>을 <상처받고 분열된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처방>으로 사용했던 목회자는 <소외와 분열을 조장하는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수 세기 동안 신학자들은 이 본문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다. 어떤 신학자는 이 땅에서 실제로 많이 경험되는 충돌의 상황에서 예수가 “정당전쟁론”(just war theory)의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다른 이들은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력한 복음의 빛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신자와 불신자의 분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이해한다. 이 두 입장은 줄리아 워드 하우 (Julia W. Howe)가 1861년에 작사한 “공화국 전투찬가” (Battle Hymn of the Republic)에 잘 담겨있다. 이 찬가는 영광스럽게 재림하는 그리스도가 공포의 검을 휘둘러 운명의 번개를 내리고... 심판의 자리에서 사내들의 영혼을 걸러내고... 그의 진리는 힘차게 행진할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고대 희랍적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나 근대적 개인주의의 이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본문을 해석하여 부자간의 갈등은 개인의 내면의 이성과 격정의 분열을 의미하고, 이성적 사고가 죄의 충동을 극복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제시하듯이 <평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누가복음 전체의 맥락>과 <분열을 선포하는 본문>의 명백한 모순은 설교자들을 딜레마 속에 빠져들게 한다.
본문의 중심적 신학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본문의 “불”은 <오순절에 많은 신자들의 가슴 속과 머리 위에 내려와 그들이 능력있는 믿음의 행동을 하게 했던 성령>과 유사한 “불 세례”를 의미하는가?(3:16 참고)? 아니면 죄의 쭉정이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태워 버리는 불과 같은 것인가?( 17:28–33 참고)?
예수의 가르침에 담겨있는 딜레마와 긴장은 완전히 해소될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신, 본문의 의미는 <복음서 이야기 전체의 관점>과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의 역사>를 통해서 조명해볼 때 파악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본문이 규정적(prescriptive)이라기보다는 기술적(descriptive)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자녀와 부모가 맞서는 것이 예수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분열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 생길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본문을 포함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아들과 아버지가 결국 화해했지만(15:11-32), 그 화해는 분열의 씨를 품고 있었다. 새로 형성된 이 관계는 큰아들과 아버지 사이를 갈라놓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의 본문은 이와 같은 현실을 반영한다. 오랫동안 원수지간에 있던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사역은 장기적인 현상유지에 의존하고 있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또한 혈연에 의한 가족이 아니고 예수의 보혈의 언약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22:20). “요셉의 아들”(4:22)로 알려진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밝혔을 때 그의 가족으로부터도 국외자가 되었다. 그의 모친과 형제가 예수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8:21)라고 함으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다. 신자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혈족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관계성을 형성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보혈의 언약이다.
수 세기 동안 미술과 시에서 예수는 양들을 잠잠케 하는 선한 목자로 묘사되었었다. “공화국 승전찬가”에서도 “공포의 검을 휘둘러 운명의 번개를 내리시는” 분이 동시에 “나리꽃의 아름다움 속에서” 나신 그리스도라고 표현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자비와 심판을 상징한다. 자비와 심판은 악과 죄를 멸하려는 하나님의 화해의 능력에서 나온다. 오늘 본문은 분열이 시작될 때 – 그것이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면 - 복음이 우리에게 침입했다는 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석적 관점
- 본문에서의 예수의 말씀은 강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한편으로 불, 세례, 분열의 이미지는 예수의 설교보다는 세례요한의 설교와 가까워 보인다(3:7-9,15-17).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들은 예수께서 인간의 기관이나 그것들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적인(radical) 뜻을 시작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 지난주 성서정과는 제자들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하게 오실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주의깊게 준비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12:35-28). 오늘 본문은 초점을 바꾸어 예수의 선교가 사회의 기존질서(status quo)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다.
- 49-40절의 영어 번역은 생생한 말과 강조점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49절의 강조적인 여는 말은 “불”인데, 50절은 “세례”이다. 그러기에 본문은 예수의 선교적 강림(missonal advent)의 예상되는 결과를 강조하고 있다. 비슷하게 49절의 “내가 바랄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how I wish)라는 널리 퍼져있는 영어번역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예수의 열렬한 헌신을 표현하는데 부족하다. 50절의 “괴로움”(stress 또는 distress)이란 전형적인 번역도 예수의 불안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헬라어 번역은 예수가 완수하고자 하는 선교에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헬라어 성서를 자세히 봐야할 것 같음)
- 12:51-53의 분열에 대한 예수의 강조는 1세기 세계의 핵심적 사회적 현실과 연관하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유대세계든 이방인 세계든 당시에는 가정이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였다. 그래서 가정은 사회적 실체의 소우주로 여겨졌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가져 온다고 주장하면서(51), 가정에서의 분열을 묘사하고 있는데(52-53), 본문은 예수의 선교적 오심이 현존 사회질서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해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리아(1:51-55)와 스가랴(1:68-79)에 의해 처음 선언되었고, 예수가 더 강하게 말한(4:16-27; 6:20-26; 7:28-30,36-50; 8:19-21; 9:46-48) 근본적인 사회적 역전의 연장이다.
- 가정이 분열한 이미지(미7:6참고)는 11:17-18에 나와있는 현재의 사회구조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생각을 전하고 있다. 12:52-53에 묘사된 분열을 또한 주목해 보면 이는 세대간 분열이어서 더 이상 한 사람의 정체성, 직업, 신의, 그리고 지위가 혈연으로 자동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신에, 이러한 것들은 첫 번째로 시몬에게 선언되었던 것과 같이(2:34-35; 또한 가족의 대변동과 재편성에 관한 9:57-62; 11:27-28; 14:26; 18:28-30; 21:16-17의 묘사를 보라) 한 사람의 적극적인 또는 소극적인 예수에 대한 자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예수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에 대한 강조적 부정(51) 또한 스가랴(1:79), 천사들(2:14) 예수 자신(7:50;8:48; 10:5-6;19:42), 그리고 제자들(19:38)에 의해 선언되었듯이 그의 강림을 통해서 시작될 하나님의 평화와 관련하여 고려될 필요가 있다. 예수가 시작하고 주신 하나님이 만든 평화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자비, 사랑, 그리고 정의의 올바른 관계의 수립을 가져온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평화의 계획을 원하거나 환영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예수가 평화 의제를 시작하는 것이 모든 사회에서의 대립적 분열과 균열을 가져오는데, 바로 사회의 핵심조직인 가정에도 그러하다. 그러한 분열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있다는 것은 누가가 예수의 선교에서 시작되고 제자들의 선교로 확장된 하나님의 의제에 대해 남녀 공히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반응한다는 이해를 강화한다. 그러기에 결정적인 종교적 결정이 더 이상 남자들의 배타적인 특권은 아니라는 것이다.
- 눅11:16, 29-32에서 예수는 표적을 구하고 그의 사역의 유효성을 시험하려는 군중들을 책망한다. 12:54-56에서는 그들 가운데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완전히 무능력한 군중들을 책망한다. 그들의 해석적 실패는 그들이 비록 날씨의 패턴의 전조들을 해석할 줄은 알면서도(54-55), 예수의 사역에 의해 발생한 사회적 전복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이러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전조에 대해서는 해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의해 배가된다.
목회적 관점
입법 회의에서, 가정이 갈라지는 일에 대해서는 그 일에 대한 양쪽 편에 투표해서 표결하게 된다. 만약 목회자가 대담하게 회중에게 오늘 본문이나 좀 더 부드러운 본문 어느 쪽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선호하는지 묻는다면, 많은 사람이 예수에 관하여 좀 덜 도전적인 이야기를 원할 것이다.
성서정과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가장 거친 여덟 절로 구성되어 있다. 평화보다는 분열의 언어가, 귀에 거슬리는 어조의 정죄가, 그리고 군중들 속에 위선자들이 있다는 예수의 고발이 방문자들과 교회 장로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수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주님이다. 이 문장의 혼란스러움을 회중들과 함께 걷는 용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실체와 권능과 씨름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카린 뒤로 이동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교회에서 이 예수를 말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 부분적으로 누가복음 12:49-56에 그려진 예수는 좀 더 익숙한 본문들의 캐릭터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누가복음 8:26-39에서 많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 누가복음 10:38-42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식사하시려고 멈추신 친절한 목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성서정과를 따르는 교회라면 누가복음 9:51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8월 중순이 성주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늘 본문에 적절한 배경은 성금요일로 이끄는 어두침침한 마지막 날에 머물러 있다. 오늘 본문을 위해 선택된 성만찬과 찬양을 통해 회중들이 연관성을 이해하도록 도우면, 설교자가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설교를 이해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
목회자가 오늘 본문 같이 강한 말을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 수 있다. 그들이 과거에 교인들에게 정죄를 당한 경험이 있거나 불친절한 취급을 당한 적이 있으면 그럴 수 있다. 한 주간 회중들이 살아 온 경험으로부터 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얇은 벽일 뿐이다. 예배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개인적인 경험, 심리적인 복잡함, 그리고 때로는 다른 교회에서 경험했던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같은 일상 속에서 예배하려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져 온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포함한다.
이번 주는 새로운 시작을 소개할 시간은 아니지만, 여름철은 회중들의 신앙 실천을 위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누가 공동체에서 환영을 받고, 환영의 말이 어떻게 말과 함께 행동으로 옮겨지는가? 가정들의 어떤 다양성이 회중들 안에서 표현되는가? 독신 성인들이 교회 생활의 모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가? 아이가 없는 가정들이 아이가 있는 가정들과 같이 환영받는가? 이혼한 사람, 홀로된 사람, 동성애 커플, 가족들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환영받고 그들의 은사에 따라 지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타진되는가?
가정생활의 역동성을 포함해서, 개인 간의 관계가 소규모 그룹과 연구 기회들에게 어떻게 소개되는가? 교회는 종종 가정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쟁점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술과 인내를 습득했는가? 교회 생활에서 뜨거운 주제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분쟁을 일으킬 만한 모든 주제들이 회피되는가? 대단히 도전적인 주제들에 대하여 서로 들어주는 능력을 세우는 데는 시간과 기술이 필요하다: 한번 세워지면, 그것은 보기 드물고 귀중한 선물이다.
어디서 그리고 언제 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갈 용기를 찾을 것인가? 오늘 복음서 본문을 그들의 삶에 대한 정확한 고발로 듣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는가? 형식적인 예배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할 다른 기회가 있을까?
믿음이 실천이 뿌리내린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는 오늘의 복음서 본문 차례가 되었을 때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투쟁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예수의 한결같은 결정은 우리가 인식하고 종종 감탄하는 열정이다. 그것은 마치 달리는 자동차에서 총을 쏘는 바람에 아이가 죽은 곳에 청소를 하려고 가는 이웃의 활동가와도 같다. 그것은 노인들에게 필요한 처방약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주 의회에 단독으로 도전하는 노인의 열정과 유사하다. 그것은 교회에게 친환경적이 되어야 한다고 도전하면서, 교회의 발표에 대하여 가차 없는 초등학생의 열정과 유사하다. 어떤 일들은 단지 집중된 관심과 강한 발언이 예언자의 메시지만큼 중요하다.
우리와 창조세계를 위해 죽으려고 하는 신은 이들 특별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순례와 그곳에서의 사명과 그의 필생의 사역의 긴급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이 오늘 복음서 본문의 핵심이다. 목사의 과제는 회중들이 이 말씀을,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메시지로 들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은 올해 언제라도 가치 있는 일이다.
설교적 관점
-Eugene Lowry가 말했듯이 만일 설교자가 성서본문을 무언가 문제해결을 위한 것으로 접근하려 한다면 오늘 본문은 너무도 당황스럽게 한다. 지난 주 성서정과이후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목소리 톤은 거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주 성서정과에서 생략된 중간자료에서도[41-48절] 그는 예기치 않은 시점에 돌아와 맡긴 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주인을 말하면서, 그 주인에 의해 자신의 잘못으로 심하게 매를 맞은 (심지어 “동강 난”-cut in piece, 공동번역 46절) 종들에 대해 주목한다. [오늘 본문에서] 최근에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을 내려주기를 청했던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었던 예수가 갑자기 불을 지르러 왔다고 선언한다. (야고보와 요한이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린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12:32)고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더욱이 “땅에는 평화”라고 천사들이 합창하며 그의 탄생을 알린 바로 그 예수가 평화가 아닌 분열을, 그리고 가족 구성원간의 불화를 선포한다 (52-53절). 마침내 예수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여”라는 말 대신에 이번에는 “위선자들아!”라고 부른다. “어리석은 자여”는 지난 성서본문에서 논의했듯이 그런 사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 “위선자들”이라는 분명한 욕설은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날씨를 바로 분별하는 것이 “시대를 해석하는 능력”을 결여한 것과 결합하여 어떻게 해서 “위선적”이 되는 것인가? 아마도 각각의 구절이 지닌 난제들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이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처벌받은 혹은 “몸을 절단당한” 하인들의 외침
심하게 처벌을 받은 행동은 다른 종들을 못살게 굴고 무절제하게 이기적으로 먹고 마시며 논 것이다. 예수께서 신랄하게 말한 내용에서 놓치기 쉬운 것은 바로 42절의 “신실하지 않아서 받는” 처벌이라는 것이다. 모두를 위해 주어진 한 나라의 선물을 올바르게 관리하는 데 실패하는 일은 바로 그 일로 인해 그 나라 밖에 놓이게 된다 (그것을 남용하고 적합하지 못하게 사용한 신실하지 못한 종은 본질적으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핵심에 있는 “분열” (division)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2. 예수가 이 땅에 가져 온 불
정화시키는 불과 그냥 태워버리는 불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후자를 생각하고 있었고 (태우는 것, 9:52-56) 반면에 예수는 전자 (12:49)를 뜻한다. 더욱이 예수께서 가져올 불은 그 자신이 취할 불인데 그것은 “불로 인한 세례” (a baptism by fire)이고 또 그것은 자신이 받아야 할 고난 (12:50)이며 스스로 견뎌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나라를 주려는 아버지의 기쁨”(12:32)이지만 그 선물은 예수자신이 스스로를 내어주어야 하는 괴로움이기도 하다.
3. 평화대신 가족 간의 분열
만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급진적 공동체라면 (radical commonwealth), “가족 내에서” (within the family, 혈연) 유산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예수의 철저한 사랑의 불로 융합된 넓은 의미의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일부 사람을 소외시키면서 평화(그리고 번영)를 요청하는 것은 평화가 없을 때 “평화, 평화”하며 외치는 것이다 (렘 8:11). “오늘날의 평화”를 개별집단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기까지는 천사들이 선포했던 땅의 평화가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빌 4:7) 평화로 남게 될 것이다.
전통적 도덕신학에서는 “극복가능한” (vincible ignorance)무지와 “극복할 수 없는”(invincible)무지를 구분한다. 전자는 (극복가능한 무지) 근절시켜야 할 도덕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비난받을 만한 태만”(culpable negligence)이 된다. 후자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우리 책임이 없다. 만일 예수께서 말하고 있는 군중들이 그냥(involuntarily) 무지하다면(“invincibly”), 그들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말한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한 종과 같아서 최소한의 처벌만 받게 될 것이다. (그의 태만이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경감되는 것이다). 예수의 군중들은 (아마도) 그냥 무지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vincibly ignorant). 그들은 부자로부터 배우고 율법과 예언자 전통을 쉽게 접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재산을 잘못 관리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경제관념에서 보았을 때 부정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나는 당신이 오고 있는 것과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지를 몰랐습니다”라고 외친 종들과 같다.
-물론 그러한 외침은 위선적인 것이고 그는 (그리고 의미상으로 군중들) 모르는 체 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만일 예수께서 이 군중들을 (vincible ignorance) 향해 책임을 묻고 있다면, 그들은 “시대를 분별하는 법”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다. “어찌 할 바를 몰랐다”라고 말하는 것은 카트리나 허리케인이 가져온 재해와 관련하여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라며 손을 내 저었던 정부관료의 변명과 유사한 것이다. 그들은 알아야만 했고 자신들의 무지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 기상의 패턴과 징조들에 관련해서는 알면서 하나님 나라/공동체의 약속과 관련한 분명한 패턴, 은혜가운데 제시됨 그리고 경고의 징조들에 대해서 무지한 것은 용서받아야 한다는 이 태도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부자농부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고 이 무지한 군중들에 대해 “위선자들아”라고 하면서 예수는 더 이상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는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필연적이지만 놀랍지는 않게 분열을 불러 일으킨다. 도전을 주기 위해 때로는 거친 표현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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