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많이 있다: 테러, 전쟁, 경제, 지구온난화, 실업, 기아, 가난, 노숙 상태, 질병, 죽음. 동네를 걷거나, 먼 지방으로 여행해도 이런 두려움의 징조들을 피할 수 없다. 집 안에 머물러 있다고 사정이 더 좋아지지는 않는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뉴스 진행자가 온갖 나쁜 소식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을 때, 화면 하단에는 추가적인 충격적 내용의 텍스트가 보이고, 웹 브라우저의 알림창과 스팸메일은 끊임없이 우리가 당장 무엇인가를 구매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협박 조로 경고한다. 오늘날의 미디어와 문화는 우리에게 더 많이 두려워하라고 권한다. 수세기에 걸쳐 두려움에 익숙해 있고, 그 두려움이 날도 더 위협적인 형태로 체험되는 현대인에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은 매우 특별한 위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32)
이것은 어둠 속에서 용기를 북돋워 주는 호루라기 소리와는 다르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확증이요, 지상에서의 삶에 편만한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최종적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말이다.
오늘의 본문은 인간 실존의 연약한 실을 엮어서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에 구현된) 하나님에 관한 확신의 주단을 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이고, 하나님의 기쁨은 하늘나라, 즉 썩지 않을 하늘의 보배를 주는 데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보호의 은총은,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과 더불어, 인간이 이 땅에서 겪는 미래에 관한 잘못된 확신, 충족감, 공포의 문제에 관한 치료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누가복음 12장에 “염려하지 말아라,” “두려워 말아라”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누가복음의 원래 독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당신은? “당신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운가?”라고 예수가 묻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에 까지도 신경을 쓰신다는 것을 기억하라.(12:4-7) 복음에 대해 증언할 때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을까 걱정하는가? 성령이 할 말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라. (12:8-12)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의 필요에 대해 무관심하게 하고 탐욕심에 얽매어 소유를 쌓아 놓도록 만드는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갖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12:13-21) 당신의 삶에 대해 염려하는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 혹은 유기농 채소, 명품 의류, 고급 승용차, 두툼한 지갑 등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양 때문에 염려하는가? 혹은 더 기본적인 헐벗음과 굶주림에 대해 두려워하는가? 이런 것들에 관한 걱정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2:22-31)
삶과 죽음(인간의 유한성)이나 의식주(이 땅의 소유)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들은 보호와 안녕을 위한 인간적인 방도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방도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런 것들 때문에 걱정한다고 살아 있을 때나, 죽고 나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신 후 뒷짐을 지고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관찰하는 냉담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참새와 까마귀와 백합도 돌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카락에 까지도 관심을 가시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보화를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이런 하나님의 친밀함을 강조함으로 설교자는 본분의 임박한 종말에 관한 경고가 또 하나의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물론 누가복음의 본문은 다가오는 심판과 징벌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기에 용이하게 보인다.(예, 19:12–27). 그러나 오늘 본문의 종말론적 관심은 마지막 때(the end times)보다는 마지막 길(the end ways, 최종적 방식)에 놓여 있다. 계속 강조되는 메시지는 “준비하여서 징벌을 피하라”가 아니고 “준비하여 축복을 받아라”이다. 주인이 돌아올 때 준비된 사람들은 하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37–38).
주석적 관점
- 이 이야기 모음의 문맥은 궁극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의 계획을 이루고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길에 있다. 12:1-3, 8-12에서 예수는 숨겨놓은 것이 알려질 것과 성령께서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궁극적으로 가르쳐주실 것이라 말한다. 12:4-7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누가 궁극적으로 지배하는지 그래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킨다. 계속해서 예수는 부가 한 사람의 궁극적인 관심이 될 수 없다는 것(12:13-21) 그리고 제자들이 지나치게 삶의 2차적인 것 즉 음식이나 옷에 대해 걱정하지 말 것을(12:22-30) 가르치셨다. 삶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에 대해 부요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12:21,31).
- 본문은 명령으로 시작하는데(32) 정체성과 강조의 이유를 말한다. 솔직한 명령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것은 스가랴(1:13), 마리아(1:30), 목자들(2:10), 베드로(5:10), 야이로(8:50), 그리고 제자들(12:4,7)에게 주었던 명령과 유사한 명령이다. 이러한 예들에서 두려움은 임박한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삶에서 작동하는 방법을 인식한 사람들의 인간적 반응이다. 이 맥락에서 두려움은 삶의 기본적 필요성에 대한 불안들을 놔두는 것(22-30a)과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신의 사랑으로 제공하는 분이라는 것을 잊는 것(12:30b-32;11:1-13)을 포함한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준 정체성은 ”적은 무리여“인데, 이는 하나님이 제공하는 돌봄과 보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적은 무리의 구성원에게 준 강조의 이유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먼저 주시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하나님의 우선적 결정은 32절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근거를 줄 뿐만 아니라 33절의 팔고, 줄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예수의 신적 투자프로그램은 1세기의 주는 패턴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는다. 약탈적 상호성의 사회적 현실에서 사람들은 오직 반대급부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받는 경우에만 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줌으로써 우리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심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기준을 적용하는 행동으로 반응하는데, 여기에서는 소유를 팔고, 자선을 베풀며,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두는 것을 포함한다.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보물을 축적하여 부자가 되는데 두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궁극적 보물에 두게 되는데 그것은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1:50-55, 72-79; 3:10-14; 4:18-19; 6:27-31,36; 9:1-6; 10:1-9,25-37; 12:34).
- 본문에서 소유(33-34)에서 파루시아(35-40)로의 운동은 처음에 생각하듯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본문은 계속해서 궁극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 궁극적인 초점은 예수의 재림(파루시아)에 맞추어 지는데,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이 나라에서의 우리의 삶을 포함하여)가 완전하고 명백한 현실이 된다. 본문의 긴급한 관심은 예수의 오심이 늦어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12:45), 그의 오심과 연관하여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긴장에 있다. 한편으로는 예수의 재림은 확실하다. 그래서 35절에 온전한 준비에 대한 권고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오시는 정확한 시간을 불확실하다. 그래서 39절의 밤의 도둑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있다.
- 우리의 삶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본문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기쁨으로 우리를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필요하고, 축적하고, 소유한 것은 시간이 가는 것처럼 일시적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의 결정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소유와 시간을 지금 이시간과 미래에 궁극적으로 도래함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왕국의 가치와 의제를 위해 행동하도록 힘을 주신다.
목회적 관점
목사나 교인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고, 하나님의 일로부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많은 프로젝트와 일들이 있다. 금주의 복음서 말씀은 청중들에게 중요한 일을 앞에 놓으라고 유혹한다. 하나님의 일은 모든 기독교인의 삶에서 가장 긴급한 우선순위를 부여받는다. 두려움도, 세속적인 혼란도 하나님의 다정하고 세심한 보호로부터 아이들을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특별한 보화를 받으려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선물을 주셔서 놀라게 하시기로 약속하셨다.
참을성 없는 세상에서 이런 기다림은 쉬운 것이 아니다. 목사로서의 삶이 분주한 것이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것은 더욱 진리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정말로 하나님께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교구 프로그램은 교인들이 계속 참여하도록 만들어 진다. 교회의 활동은 특정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각각의 인생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매력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흩어질 거라는 가정 아래 진행된다. 많은 교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날을 열망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리라고 지시하신 게 아니라 계속 바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는 인상을 준다. 한 주간을 경주하듯이 보내면서, 병원을 심방하고 성경공부를 계획대로 인도하는 것으로 교역자실의 중요성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 목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금주의 복음서 독서에서 예수님은 정신없는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32절) 단순하게 말해서, 선물은 재산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실한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자유롭게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이 복음서 말씀의 핵심에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놀랍도록 다정한 관심이 있다. 목사가 할 일은 교인들이 이 말씀을, 그들의 미래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과 임재 안에 있다는 것을 믿도록 초대하는 것으로 듣도록 돕는 것이다.
첫 번째는 희미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보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이라는 이미지이다. 설교자는 우리가 과거에 언제 어디서 이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났었는지 깊이 생각하도록 초청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초기 역사에 극적인 선교적 열정과 성장의 시기가 있었는가? 사람들이 위기에 직면하여 용감하고 참을성 있고 침착했던 때가 있었는가? 미래를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다는 믿음의 본보기가 되려고 자기에게 허용된 개인적인 이익을 제쳐둔, 지역 사람들이 잘 아는 신앙의 거인들이 있는가? 교회 자신의 역사와 기억을 타진하는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오늘 본문에 대한 토론을 활기 있게 만든다.
두 번째 이미지는 한 밤중에 집으로 돌아 온 주인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에 나온다. 제자들에게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는 하나님께서 앞치마를 두르고 한밤중에 벌어진 연회에서 방심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서빙을 하는 그림을 보여준다. 회중들은 이 장면을 예배당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것처럼 그려볼 수 있을까? 친교실에서 즉흥적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하나님을 그들 가운데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처럼 보이는가?
금주의 복음서 본문에서 뛰어난 도전은 우리의 초점을 과도하게 계획된 삶의 요구가 아닌 하나님께 두는 것인데, 이 하나님은 작은 무리에게 위로와 확신과 영원한 보화를 주시기 위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목사의 과제는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중요한 일들을 상상하게 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극단적으로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한, 주말 예배에 늦지 않게 도착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교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주말 생활 한 가운데 찾아오실 것이다. 교회는 어디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근처에 있는 오피스 빌딩의 휴게실에서? 동네 병원 식당에서? 누군가의 집 부엌에서? 이들 특별한 추종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친절한 보장이라는 단순함이, 걱정거리가 많은 세상의 열광과 초조함과 어디에서 교차하는가?
하나님께서 공포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은혜로운 사건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 확실하다고 설교하는 목사는 회중들이 이 복음서 말씀을 평소보다 더 쾌활하게, 기대하면서 읽도록 초청할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이 전해질까? 어떤 관대한 행동이나 자선이 천국의 문을 통해 마음껏 몰래 들여다보게 할까? 어떤 작은 발걸음이 이 특별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미래에 대해 확신하게 할까? 이 모든 질문은 이번 주의 복음을 더 풍성하게 한다.
설교적 관점
-어느 누가 졸지도 않고 언제나 깨어있을 수 있겠는가? 깨어있으라는 요청은 특정한 상황에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요청은 어떤 일 이후에 주어지는 특별한 사안에 대해 주의력을 뜻한다(“잘 들어!” “지금부터 집중해야 해!”). 또 그 요청은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초점을 바꿀 수 있다 (“잘 지켜봐!” “다음사항을 지켜야 해!”). 그것은 위기상황이나 임박한 위협에 직면하여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할 수도 있다 (“조심해!”). 또 무엇을 주시하는 일을 하는 중에 지치거나 게을러져 있을 때 다시 그 일에 집중하라는 것일 수도 있다 (“일어나!”). 변화하는 상황에서 깨어있으라는 요청은 이유없이 나오지 않는다: “적색경보”(red alerts)는 공공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시기적절하게 명령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경보에 무한정 긴장상태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지나치게 끊임없는 집중은 창조적인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 작곡가, 작가, 심지어 설교자들도 인식의 돌파구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복잡한 과제에 오랫동안 집중해 있다가 잠시 쉴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일어나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깨어 기다리는 것에 대한 건강하고 보다 현실적인 (아마도 보다 신앙적인)접근은 무엇일까? 한 가지 가능한 접근은 지난 주 고민거리였던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번 주 본문의 두 줄과 연관하여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32절)과 (하인들이 깨어있는가를 확인하러 돌아온 주인의 행동을 표현하는) “그 주인이...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37절). 아마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소유를 포기하라고 명령한 것은 부자를 어리석다고 평가한 것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제자들이 지키려는 재산 (그리고 부유한 농부가 쌓아두기로 결심한 그 재산)은 깨어있어야 하는 그들의 의무(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부여한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에서 마음을 빼앗는(distraction)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단순히 보다 큰 곳간을 짓는 것보다 나은 경영전략을 택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명령하는 것은 우리의 온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풍성한 선물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받거나 나누지 않는 것은 손에 무언가를 잡고있거나 꽉 쥐고 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이 보여주듯이) 우리 인식을 언제나 존재하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향하여 열어놓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밤낮 깨어있는 하인의 이미지와 (언제 도둑이 올지 예기하지 못한 주인과 대조적으로) 연관되는가? “높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것”과 “깜박 잠이드는 것” 이 모든 것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우리는 깨어서 기다리는 일을 고정되거나 애매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자신을 놀라운 자리에 둘 수도 있다”(position ourselves to be surprised.” 놀라운 자리는 드디어 주인이 나타나서 하인들의 기대를 뒤집어 놓은 것인데 그것은 주인을 위해 일했던 바로 그 하인들을 시중드는 일이다. 우리가 애써야 한다고 배웠던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주어져 있는데 (연회가 그들에게 주어져있던 것처럼) 보상이나 애써서 얻은 결과물이 아니고 선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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