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오늘과 같은 다종교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질문을 매일 듣는다. 오늘의 비유를 그 답으로 제시하면 정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비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예수의 비유 중 이것이 가장 친숙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친숙한 것을 경시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비유를 얄팍한 생각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단순한 교훈으로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비유에 나오는 고약한 제사장처럼 행하지 말고,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 오늘 본문에 담겨있는 신적인 명령에 대한 순종은 그렇게 단순화할 수 없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어떤 생각에서 그런 자비의 행위를 하였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행동과 자아에 대해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그런 행위는 아무 판단 없이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매 맞고 쓰러진 사람은 다른 두 종교인에게나 사마라아인에게나 아주 귀찮은 존재이다. 모든 윤리적 행동은 신학적인 숙려(熟慮)를 동반한다. 이 비유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비유가 단순하다고 해서 바울 신학의 핵심, 즉 “그리스도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전 1:23)는 고백의 심오한 복잡성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무시하면 안 된다. 한 사람의 자연적인 자기중심주의를 타인을 위한 진지한 관심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복음 전체가 – 그 중심은 십자가- 필요하다.
또한 많이 배운 사람들은 행동과 사고, 윤리와 신학의 연결을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습관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교부들은 알레고리를 너무 좋아해서 이 비유의 아주 세부적인 부분의 의미까지 찾아내려고 애썼다. (강도만난 사람은 그리스도; 여관 주인은 교회; 동전 두 닢은 성례전 식으로)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쉽게 주워들을 수 있는 심리학적 이론을 거론하면서 보석과 같이 명료한 이 비유를 아주 복잡한 이야기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회중은 모든 연민의 행동은 산더미 같은 분석과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착각을 받게 된다.
오해하지 말자: 이 비유의 메시지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자기의에 빠졌던 율법교사도 금방 그것을 알아차렸다. 누가 이웃이었냐는 질문에 배타적 종교관 때문에 “사마리아인”이라고 직접적인 답을 줄 수 없어서 그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라고 대답했다.
이 율법교사를 우리는 여러 이유로 비난한다: 그는 진정한 이웃은 멸시받은 외국인, 경쟁의 대상이 되는 종교 신봉자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복잡한 율법적 규정을 넘어서서 “자비”라는 용어를 이웃의 진정한 표지로 해석했다는 점은 잘 한 것으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런 해석은 오늘의 사회 속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오늘 우리 사회는 자비보다는 경쟁, 탐욕, 개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고, 이 사회의 도덕적인 사람들은 용서보다는 권리에, 자비보다는 정의에, 동정보다는 평등에 더 관심을 준다.
Kurt Vonnegut*는 한 미국 청년이 “모두 다 괜찮아 지겠지요?”라고 질문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청년이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습니다. 지구는 구형이고, 물기가 많고, 붐빕니다. 겉으로 볼 때 한 백년 쯤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은 친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Vonnegut가 말하지 않은 것은 (그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인간이 진정한 친절을 행할 때, 그것은 “우리를 만들고 우리가 진정한 인간으로 계속 남기를 원하시는 분”의 친절에 대한 아주 보잘 것 없는 응답이라는 것이다.
영원의 심장은/ 가장 경이로운 친절이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의 위대함은 – 특히 오늘의 기독교인에게 – 친절에 관한 성서윤리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행동과 결합될 때 그 면모가 드러난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도 동일한 충격을 주려면 우리는 “사마리아인” (오늘의 독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 어쩌면 반대 의미로 다가오는 단어)이라는 단어를 “이슬람교도,” “시크교도,” “유대인,” 혹은 어떤 상황에서는 “가톨릭”으로 대체시켜야 한다.
진정한 선과 도덕은 어느 특정한 집단이나 신조에 의해 제한 될 수 없고, 정통적인 이론에 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참된 도덕은 그 열매로 드러나는(마7:16) 기본적인 태도 및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간의 정신에 특정한 신조나, 도덕률이나, 신앙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친절의 본능”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일반 은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모든 참여자가 이런 인식에 근거해서 종교 간의 만남이 시작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타종교와 접하게 되는 상황마다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는다면 인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연민의 역량이 어떻게 발현될까?: “하나님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이여, 친절해라!”
* 커트 보네거트(1922-2007) 혹은 보니것. 미국 최고의 풍자가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번역된 책으로는: 나라 없는 사람; 마더 나이트;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드워터 씨;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갈라파고스; 제5도살장; 타임 퀘이크.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로 알려지기도 했고, 보수교단에서는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기도 했지만, Douglas Hall은 그를 crypto-evangelist라고 칭함. ,
주석적 관점
-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오랜 역사에서 보듯이, 이야기의 맥락에서 벗어나 적용할 때는 종종 중세시대의 도덕극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가 25-29절과 36-37절을 결합하여 비유를 제시하면서, 여행자에 대한 동정, 관용, 예의 이상을 것을 제시한다. 이 비유는 듣는 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실행하는 기회를 잡을 것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놀라운 원천을 배우도록 요구하고 있다.
- 이야기의 전체 맥락이나, 이 일이 일어난 장소가 제시하듯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이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과 연관된 대단히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자신들의 동족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는다. 비유는 그들이 피하여 지나갔다고만 말한다. 강도만난 사람이 죽었기에 시체로부터 부정을 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근거도 전혀 없다. 설사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그러한 정결례를 지키는 것이 노출된 시체를 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요점은 아마도 희생자의 정체성과 신앙을 대표할 두 사람이 그 희생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장소에 있다가 어려움을 당할 모험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똑 같이 행동했는데,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들이 도와주는 것을 거부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 사마리아 사람을 여기에 등장시킨 것은 청중들에게 충격적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이 가는 길에 등장한 것이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적이나 타자를 의미한다. 비록 열왕기하 17:24-41은 주전 8세기의 앗시리아의 정복 뒤에 북이스라엘에 이방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지만,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갈등의 역사적 뿌리는 분명하지 않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같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했지만, 각기 자신들의 성경, 성전,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9:53에서 누가는 이 둘 간의 긴장된 관계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가 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이었기에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종족이 다르고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대립해 왔기에, 비유에서도 사마리아 사람과 강도만난 여행자는 서로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동정심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무관심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가 보여준 여러 행동으로 보아 그 사람을 적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했다. 동정심에서 나온 그의 모범적 행동은 사랑이 갈 길을 보여준다. 진정한 사랑은 차별하지 않고, 이웃의 관계를 만드는데, 왜냐하면 본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 예수는 율법교사의 본래질문으로 돌아가 이 비유에서 누구를 자신의 이웃으로 고려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예수가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제한하려는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대화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율법교사는 누가 자신의 사랑을 받기에 적절한가라고 제한하려 하지만, 예수의 비유는 비록 기존의 장벽과 편견이 도와주지 못하게 하려 할 때도 사랑은 이웃들에게 동정과 돌봄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이 본문의 설교는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는 진부한 가르침으로 축소될 교훈화를 피해야 한다. 설교자는 비유에서 무엇인가 문제가 되는 측면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청중들이 그들과 이웃의 관계를 맺기에 가장 적절하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그의 사후에 출판된 십계명에 관한 책에서 Paul Lehmann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관하여 변화의 종을 울린다. 레만은 확실하게, 우리가 율법을 복음이라고 이해하면, 율법에 대한 복종이 신앙을 실천적으로 증거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점점 더 다듬어서, 사람의 의견과 전통을 계시와 같은 위치에 놓게 된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표에 이르기 위해 받은 수단이다. 만약 복음이 율법인 것처럼 사는 삶을 추구하면, 우리는 길에서 벗어나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우리는 철저하게 취약한 제자들처럼 은혜로 여행하면서, 누가복음에서 보냄을 받은 것처럼 다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기 위해 보냄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도록 만들어지고 회복된 세상 안에서 신앙에 복종”하도록 부름 받았다.[Paul Lehmann, The Decalogue and a Human Future (Grand Rapids: Eerdmans, 1995), 18.]
율법학자는 율법이 복음이라고 이해하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어쨌든, 율법학자이다! 영생에 대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는 미리 추적을 차단한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의 인생이 신앙의 복종을 실천적으로 증거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답게 그는 율법을 인용한다. 아직도 그는 좋게 떠날 수 없다. 예수가 그에게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의 이웃을 그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율법이 명령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복종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와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도 법률가가 몇 명 있다. 우리 모두를 풍자하기 위하여 율법이 복음인 사람들 대부분은 법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경계를 찬미하고, 규범들을 열거하고, 제자직을 체계화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종종 정의(定意)를 요구하고, 그래서 한계를 정해놓으려는 질문이다. 정확하게 내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율법이 복음이 될 때, 나는 배우이고, 나의 연기는 인간이 규정한 율법에 대한 이해와 복종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예수가 율법학자에게 한 이야기-우리가 강단에서, 병실에서, 회의실에서, 열려 있는 무덤 앞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하려고 시도했던 이야기-는 우리와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을 배우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하게 선한 사랑에 따라 행동하는 배역으로 선택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한 이웃에 대한 점점 더 협소해지는 정의, 복음으로서의 율법이 이웃이라고 규정한 것 때문에 초래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가 말한 이 이야기는 율법으로서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만약 이와 같은 이야기를 우리가 섬기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위험한 길로 가도록 인도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복종이 신앙의 실천적 증거라고 믿을 것이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점점 더 다듬어서 사람의 의견과 전통을 계시와 같은 위치에 놓게 된다. 우리는 매 맞고 옷이 벗겨져서 무력하게 거의 죽은 채로 길 가에 버려졌다.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는 전통의 수호자들은 우리 옆을 그냥 지나쳐 간다. 어쨌든 선한 것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길을 여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복음을 명백하게 율법이라고 하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캐릭터-가 가까이 오면서, 보고, 연민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우리 인간의 조건은 Lehmann이 말한 것처럼,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도록 만들어지고 회복된 세상 안에서 신앙의 복종”을 향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것은 단지 다가와서 보고 연민으로 감동된 어떤 사람이 아니다. Amy-Jill Levine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 자신을 수렁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거기서 요청하기를 “거기 아무도 없나요? ‘그녀가 도와주겠다’고 했거나 혹은 ‘그가 동정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사람 없나요?” 더욱이 회원들이 우리를 돕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는 모임은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지 아는 것이다. 실천적이고 정치적이며 목회적인 용어로 이 비유의 충격과 가능성을 인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1세기의 지리적이고 종교적인 관심을 우리의 현대적인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Amy-Jill Levine, The Misunderstood Jew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2006), 148–49.]
Levine은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질문했을 때, 지금까지 해 온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율법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웃으로 입증된 사람이 누구인가? 마음과 생각과 영혼과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누구이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가? 유대인인 Levine이 보기에 그것은 자비를 보여준 Hamas의 일원이었다. 9/11의 공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 앞에서 이 비유에 대하여 한 강연에서 그녀는 이웃임을 증명한 사람은 Al-Qaeda의 일원이었다고 시사했다.
설교적 관점
-비유가 진부하게 될 때 여전히 공동체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선한 사마리아인”은 다른 사람들 도우러 온 누군가로 보통 여겨진다. 예수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실로 이것을 의미하는가? 그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우연히 만날 때 도우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단지 한 예를 보여주었는가? 예수는 우리가 노숙인을 무시하고 지나칠 때 죄의식을 느끼게 하려고 이 비유를 말하고 있는가? 이 비유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의미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 이상이라고 본다. 그것은 도전을 줄 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보다 깊은 것을 제시한다. 이 비유는 스스로를 여행 중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단지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여행이 아니라 탄생에서 거듭남, 불완전한 삶에서 풍성한 삶으로의 여행)을 위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이 위험한 세상에서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을 선포한다.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9:51).예수는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한 율법사를 만나는데 그그는 생명을 얻는 것에 관해 묻는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율법사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랍비들의 대화에서 사용되는 “시험” (testing)이라고 본다. 아마도 그는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하나님과의 보다 심원한 교제를 얻기 원하는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라고 묻는다. 이 율법사는 토라(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를 적절하게 인용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10:27) 예수께서는 그를 칭찬하신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28절) 그러자 그 율법사는 오늘의 이 비유가 등장하게 되는 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29절)
-이렇게 해서 우리는 또 다른 여행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즉 다윗의 평화로운 도시, 언덕 위에 높이 서있는 그곳에서 광야를 20마일정도 지나 사해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혼자서는 아무도 여행하지 않는 위험한 길이다. 그는 강도에게 공격을 받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잔인하게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 먼저 제사장이 지나가고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간다. 둘 다 그를 보지만 둘 다 그를 피하여 길을 지나간다. 예수의 청중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 남자는 거의 죽게 되었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죽은 자를 만지게 되면 그들은 부정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에게 질문하는 율법사처럼 율법에 대해 알고 있다. 율법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예배를 위해 정결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이 상황은 함정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길로 간다.
-한 두해 전에 12살된 팔레스타인 소년 Ahmad Khatib에 관한 것을 읽었는데 그는 웨스트뱅크 Jenin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시위를 하는 도중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을 맞고 사살되었다. 이스라엘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 후에 죽었다. 그의 부모는 소년의 이식가능한 장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생후 2개월된 아기를 포함하여 6명이 심장, 폐 그리고 신장을 이식받았다. 소년의 어머니 Abla는 “내 아들은 죽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소년의 부모는 하나님의 연민을 향한 여행을 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살고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연속적인 사랑의 흐름이 영생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게 한다. 선한 사마리안인의 비유는 성경을 GPS로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즉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연민을 향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도움을 주는 낯선 자에 관한 비유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이 위험한 세상에서 여행을 하는 우리들을 생명의 풍성함으로 또 영생으로 지금 여기에서 옮기우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1장 1 ~ 13절 (0) | 2022.08.18 |
---|---|
누가복음 10장 38 ~ 42절 (0) | 2022.08.18 |
누가복음 10장 1 ~ 11절, 16 ~ 20절 (0) | 2022.08.18 |
누가복음 9장 51 ~ 62절 (0) | 2022.08.18 |
누가복음 8장 26 ~ 39절 (0) | 2022.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