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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2장 41 ~ 52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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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특별한 아들) 전통적으로 이번 주일은 신성가족 축일 (the Feast of the Holy Family)로 지켜져 왔다. 그러나 본문에서 발견하는 예수의 가정은 모범적인 가정은 아니다. 어린 예수는 충동적 행동 증세를 보이고,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무지하다. 그가 결국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지상의 부모와의 단절은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의 부모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계시를 받은 바 있지만,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예수는 부모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아들의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것으로 드러난다.

 (신적 지혜) 예수는 신적인 지혜를 타고났다.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가 율법을 이해하는 능력(47)과, 내 아버지 집(49), 지혜의 성장(52)에 초점을 맞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본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리겐은 예수의 소년시절에 대한 묘사 속에서 예수가 이미 소크라테스적 대화법을 마스터한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를 성전에서 찾은 이 사건은 거룩의 의미에 대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자 지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최근의 신학자들은 이 이야기 속에서 유월절-부활절의 주제를 찾아내기도 한다. (예수를 잃었다가 3일 만에 찾음)  (예수의 인성) 또한 본문은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거리를 제공한다. 예수는 율법과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경건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양육되었다. 예수는 자원하여 인간이 거쳐야 할 단계를 모두 거침으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일상적 삶의 컨텍스트에서 계시된다. 웨슬리는 오늘 본문이 지혜의 진보에 대해 말한다고 했다. 즉, 예수는 완전한 분이었지만, 완전성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거룩이나 사랑은 항상 더 완성시킬 여지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성육신의 깊은 의미) 이상의 모든 주제들은 성육신의 새로운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전통적으로 성육신에 대한 논의는 신성과 인성의 개념적 구분과 양자의 대조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성육신의 깊은 의미는 양자의 분리와 대조가 아니라 상호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신성은 인성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신성은 인성을 완성시킨다. 신성을 통해 인성의 충만하고 복합적인 측면이 완성되어 드러난다. 

(어려움이 있는 구체적인 가족의 상황과 계시) 오늘 본문은 또한 이 땅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족과 관계되는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수의 가정은 완벽한 가정이 아니었고, 많은 문제점들과 분열이 있었다. 하나님은 모범적인 가족이나, 일상적인 가족의 질서 안에서나, 한 가족이 평온할 때만 그 가족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노인 뿐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주어진다. 그 점에선 우리는 하나님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시의 방법에 대해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신적 지혜에 대해 우리는 한계를 경험하지만, 반면 신적 지혜는 그 한계 속에서 계시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지혜가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온 순간이다. 따라서 변혁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더 큰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 일의 내용은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가 해야 할 일 (4:18)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특별한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 드러난 성육신의 의미의 깊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넓은 지평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주석적 관점
 
▶ 어린 예수가 성전에 두 번째 방문한 이 이야기는(2:22-39을 보라) 탄생이야기와 3장에서 시작되는 성인 예수의 사역이야기의 전환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이(가브리엘, 시므온, 예수의 탄생 시 천사들) 예수에 대해 말한 것과, 49절에서 시작되는 예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말한 것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의 예수의 방문은 그의 유월절 마지막 여행을 예시한다. 예수가 “ 율법의 선생들” 과 함께 묻고 대답한 것은 나중에 율법에 관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는 것을 예고한다. 사실상, 그러한 유대율법에 관한 논쟁이 예수의 사역 처음부터(4:1-13), 마지막까지(24:25-27)를 특징 지우고 있다.     

▶ 예수의 대답에 대한 선생들의 경탄은(2:47) 나중에 사람들의 예수의 지혜에 대한 경탄(4:32;20:26)을 예시한다. “ 경탄한다” (amazed)라는 말은 예수의 많은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도 사용되었다. 비슷한 말이 성전에서의 예수에 대한 부모들의 반응에도 사용되었는데(2:48), 이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그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전의 이야기를 성전에서 시작하고(1:8), 끝내는데(2:41), 복음서 전체 이야기도 그러하다(24:53).

▶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앞 이야기에 비해 Semitisms(히브리적 표현들)도 적은편이다. 예수를 처녀로 잉태했다는 언급도 안보이고,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의 양친으로 나타나며, 마리아가 요셉을 “네 아버지” (48)라고 언급한다. 이런 이유들로 어떤 학자들은 이 설화에 대한 특별한 자료를 가정하는데, 누가는 예수의 성장(40,52)에 관한 언급으로 이를 연결한다. 49절의 “내 아버지의 집에서” (NRSV) 또는 “내 아버지의 일” (KJV)이라고 다양하게 번역되는 구절 외에는 문장이 직선적이다. 구문으로 보아 전자가 더 유력한데 부모들이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기 때문이다. “ 3일 후에” 예수를 찾은 것이 부활에 관해 은근히 언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 예수가 성전에 남아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한 곳이 없어 가능한 이유들을 추론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12살 된 소년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야 만 한다는 것도 유대자료 어디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아이들이나 여자들이 순례 행진에 동행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었지만 예수가 단순히 그의 양친과 동행했을 가능성이 많다.      
 
▶ 이 이야기는 신약 경전에서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해 말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어린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데, 그중에 많은 것들이 위경인 “ 도마의 유아복음서” ( I n f a n c y G o s p e l o f T h o m a s , 유명한 도마복음서와는 다른 책)에 수집되어 있다.
거기에는 예수가 5살에서 12살까지 8년간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대부분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는데(다섯 살에 진흙에서 새를 만들어 박수를 쳐서 날려 보내고, 나중에는 그의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우면서 본래 사용 용도보다 짧은 나무판을 늘이기도 했다), 때로는 악의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시장에서 그를 놀리는 소년을 죽게 만들었고, 계속해서 그에게 불평하는 아이들을 눈멀게 했으며, 예수가 밀어서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를 일으켜 살리기도 했다). 위경은 눅1:42에  덧붙여 연결한 눅2:41-52을 인용함으로 끝맺는다. 예수는 성전에서 박학한 지식으로 그에게 질문하는 
선생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선생들은 모두 그러한 슬기와 지혜를 본 적이 없다고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고대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12살이나 그 어간에 나중의 고매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야기는 인도의 부처, 이집트의 오시리스, 페르샤의 고례스대왕, 그리고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관해서도 있었다. 그러기에 그런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오는 것도 별 놀라운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할만하다     

▶ 이야기의 유대적 뿌리는 명확하다. 유월절을 때를 설정한 것이나, 중요한 일들이 성전에서 일어났다는 장소 설정이나, 예수가 그의 부모에게 복종한다는 것들이 이러한 뿌리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어린 예수와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 사이의 연관성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눅 1:46-55 마리아 찬가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삼상 2:1-10)를 반향하고 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축하하는 관습도 사무엘 부모들의 비슷한 관습을(삼상1:3,21;2:19) 반영하고 있다. 예수의 성숙에 관한 두 언급(눅2:40,52)도 어린 사무엘의 성숙에 관한 두 언급(삼상2:21,26)과 비슷하다. 그러기에 누가의 예수의 초기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누가는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마태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예언자들을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는 것을 반복했다) 이러한 연결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 그러기에 이 이야기에 나타난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지혜와 인격이 성숙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전적으로 감당하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전이야기는 또한 예수가 그 사명을 완수했던 결과적인 필요불가결함을 묘사하고 있는데, 초기에서 부터 하나님의 나라 선포(4:43), 귀신 축출과 치유(13:32-33), 그리고 마침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는 사역까지의 필수 불가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목회적 관점  
 
어린 예수가 성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문화적인 렌즈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해석하게 되기 쉽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특별히 가정생활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Phil 박사와 같은[미국에서 가정문제를 상담해주는 예능프로그램의 진행자] 방식을 채택한다. 결국 가정사는 시트콤이나 토크쇼, 상담 전문가들, 모든 종류의 정치인에게 인기 있는 주제이다. 교회 역시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그 문제들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전달되고 그리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심리적 결과들을 무시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특히 어린이들이 조금 더 어른 같이 몰입하고 행동하고 싶어 했던 과도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모가 기억할 수 없는 순간들, 아이가 부모의 시야와 보호로부터 사라졌을 때가 있다. 실제로 필자는 크리스마스 휴가 중에 아들이 놀이공원에서 사라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공포에 휩싸여 정신없이 찾아다녔던 것과, 다시 만났을 때 밀려오는 안도감을 기억한다.
부모의 문제, 십대의 문제, 가족 생활, 가족 여행, 자라나는 세대의 이야기들, 그리고 가족형태의 교회에서 혼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일들은 지각 있는 종교 실천가들이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 독특한 이야기를 설교할 때 그들에게 목회적 시금석이 된다. 엄격한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초점을 벗어나 있다. 회중들이 자연스럽게 심리학적 분석을 제공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이 본문은 심리학적 분석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 해석자가 그들이 살아 온 경험-특별히 성탄 절기에-과 이 이야기 속에 있는 기독론적 강조 양쪽 모두를 존중한다면 민감한 접촉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 요소들 사이에서 춤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 목회적 과제에 대한 하나의 접근 방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와 그의 인간적인 발달과 의식의 성장에 관한 처음이자 마지막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와 하나님의 고유한 관계에 관한 첫 번째 보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맥락에 대한 고려는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인간적인 특성이라는 요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그는 그를 돌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그들은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는 더 큰 공동체의 한 부분이다(그들은 친구들과 친척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 그는 이런 관계들을 존중했다. 그는 성숙해졌고 성장했다. 그는 듣고, 배우고, 가르쳤다. 이런 것들을 통해 그의 인간성이 설명되고 확인되었다. 이런 세부사항들은 예배 공동체를 위한 예리한 목회적 연결을 고취시킨다.
어떤 교인도 예수와 똑같을 수는 없고, 예수의 고유함은 그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국면으로 보인다. 누가의 탄생 설화가 예수의 특별한 지위를 드러낸 것처럼, 이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의 집에(49절) 있어야 한다는 자기 인식이 성장하는 것을 강조한다. 나중에 그의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누가는 예수가 성전으로 돌아와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했다고 보고한다(19:46). 그의 아버지의 집은 그의 집이기도 하고, 그의 관심을 요구하는 곳이다. 우리는 무엇을 주목하고 있는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예수는 인간적으로 성숙해졌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집을 그들의 집으로 여기도록 초대했다. 점차적으로 복음서 저자이며 신학자인 요한은 완전히 성숙한 예수가 이것을 그의 친구들에게 말했다고 보고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요 14:2-3) 또 다시,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가 열두살 되었을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그가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의 관계에 관하여 이해한 것은 그 나이에 적절한 것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놀랍고 당황스럽다. 예수는 그의 조숙함과 거룩한 카리스마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때때로 초조하게 한다. 때때로 오늘의 구도자들과 추종자들이 예수가 그들을 잠재적으로 괴롭히는 도발들이 그들의 영적인 성숙에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건강한 가정들에서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의 선생이 되며 종종 부모의 유감으로 등장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불안해 해야 할 것이 난무하는 느낌이었다. 예수가 사라졌다. 근심으로 가득해서 그의 부모는 그를 찾기 위해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이 예수가 성전에 있는 것을 발견했을 대, 그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49절). 그들은 그를 찾아야만 했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만 했다. 이것은 예수와 그의 부모의 정체성의 본질에 관한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그들은 서로 그들이 해야만 하는 것을 했다. 당분간 이로 인하여 갈등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부모/자식 관계가 진전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 긴장은 예수의 근본적인 정체성으로 인한 것이다. 
예수의 고유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의 부모에게 순종했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51절). 이것은 이 짧은 글에 적절한 결론이지만, 또한 꽤 많은 문화적이고 개인적인 짐을 방안에 들여놓으려고 하는 교인들을 위하여 잠재적으로 유용한 시작이기도 하다.
 
설교적 관점


-성탄절 후 첫번째 주일 성전은 더 이상 붐비지 않는다. 연례축제는 끝났고 방문객들은 짐을 나귀에게 지우고 고향을 향해 떠날 것이다. 성전에는 평화가 깃들고 일년 내내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 그리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소년 예수가 있다. 부모들이 고향을 향해 떠난 후에 그가 성전에 남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한 여느 소년처럼 시간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야 어떻든간에 그는 성전에서 선생들과 이야기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한 어머니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그는 “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라고 한 후 어머니의 고민의 원인이 그녀에게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말한다. 마리아는 알지 못했다. 예수의 부모는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누가는 말한다.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 누가는 최소한 3개의 주제 곧 누가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중요한 주제를 말한다: (1) 예수의 생애에서 성전의 중요성, (2) 예수 가족의 범위, 그리고 (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사로서의 예수의 권위. 각각의주제는 성탄절 후 처음맞는 이 특별한 주일에 설교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서 성전의 중요성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심지어 걷기도 전에 성전으로 이끌렸다. 그의 부모들은 모두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잘 지키는 유대인이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한 후에 한 달 되기 조금 전에 성전으로 주님께 데리고 갔다 (22-24절). 거기서 시므온과 안나는 그를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놀라게 할 그 무언가를 보았고 운명적인 아이임을 알아본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는 율법에 명시된 세 개의 명절 중 하나를 지키기위해 성전에 돌아온다. 이전처럼 성전은 예수에게서 그 부모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이 보는 장소이다. 훗날 예수는 다시 어른이 되어 그의 가르침에 대한 추종자들과  비난자들과 함께 성전으로 돌아올 것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성전은 진정으로 예수의 고향-그의 “ 아버지의집” -이고 거기서 그는 자신의 목적을 발견하고 또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볼 줄 아는 사람을 발견한다[예를 들면 시므온, 안나:과거, 토론한 선생들등-현재]. 
 
예수 가족의 범위
-첫번째 주제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로 연결된다. 예수의 부모는 사흘 안에 그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핵가족으로 여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가족과(extended family) 친구들로 여행을 한다. 그들이 성전에 돌아왔을 때 예수가 “ 그의 아버지의 집” 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만들어놓은 확대된 공동체에서(extended circle) 즐겁게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누가복음에서는 후에 예수가 이스라엘의 집을 넘어서 이 공동체의 범위를 (boundaries of this circle)넓혀 자신의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복음을 말하고 있다.[가족의 범위가 혈연에서 그 경계선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보듯 가족의 범주를 넓히는 일은 쉽게 되지 않는다. 예수는 여기에서 요한복음에서처럼 (요2:4-“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 그의 어머니에게 신랄하게 말한다. 마가복음에서 그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3;33)고 말한다. 후에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14:26)고 하여 가족의 범위가 삶의 태도에 있음을 말한다.  Jacob Neusner는 이 질문을 자신의 책 A Rabbi Talks with Jesus 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예수당시의 이스라엘에서 토라는 가계보다(genealogy) 우선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 토라를 섭렵한 사람은(master of the Torah) 새로운 가계를 얻는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이해가 가족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토라연구의 진지함을 강조하였다.  
 
-성탄 후 첫 주일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는 가족이라는 의미의 연구와 연결되어있음을 성찰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가 가족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대신 다른 선생들과 연구하는 것을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본래 태어난 가족을 중요시하고 동시에 신앙의 공동체도 아울러 중요시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인가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사로서의 예수의 권위
-누가는 그의 복음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 예수가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예수가 유대인임을 (Jewishness) 놓치지 않는다. 그가 첫 설교를 할 때 (4:18-19) 유대인으로 받은 교육을 사용하고 있다. 이번 성탄 후 첫 설교에서 설교자는 예수가 자신의 종교적 뿌리에서 시작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발전하였음을 보여줄 수 있다. 어려서 지혜가 충만하였던 이 소년은 (40절) 자라면서 지혜가 자랄 것이다 (52절). 그는 마리아의 아이일뿐만 아니라 지혜의 아이이고 그러한 인식은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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