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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장 68 ~ 79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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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사가랴의 찬가는 누가복음 1-2 장에 나오는 탄생 이야기에 포함된 6 개의 찬양 중 하나이다. 다른 5 개와는 구별되게, 이 찬가는 예수의 탄생보다는 (지금까지 되어 진 일과 앞으로 생길 일에 대한 징표로서의) 요한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1 부 찬양(68-75) 2 부 예언(76-79)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찬가에는 이스라엘과의 약속의 성취와 개인의 삶의 의미의 충만함에 대한 기쁨의 내용이 다 담겨있다.

누가의 텍스트는 대림절을 통해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의 성찰을 동시에 하도록 인도한다. 사가랴는 유대인 중에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찬가는 주님의 가난한 자들(the Poor of the Lord)”의 찬양에 근거한 것인데, 이를 통해 그는 누가복음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운명의 역전 (reversal of fortune)"의 주제에 접근한다. 사가랴의 찬가는 예수를 정치적이면서 영적인 메시아로 그리고 있다. 69  (종 다윗의 가문에서... 능력의 구원자), 74  (우리의 원수의 손에서), 79  (평화를 약속) 등은 로마-유대 전쟁 직후에 써진 것으로 정치적/물리적 구원과 관계된다.

다른 한 편 77  (죄의 용서를 통한... 구원)은 영적인 차원과 더 연관된다. 이 양자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일까? Stephanie Buchanon Crowder  누가는 독자가 제국주의 지배 하에 있는 기독교 신자라는 특별한 상황을 전제로 하며 믿음이 총체적 안녕 (holistic well-being)을 위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Alfred Plummer 는 본문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개혁에 근거한 정치적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9 개월간의 침묵을 깨고 불려진 사가랴의 찬가는 성육신을 통해 오게 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노래한다. 사가랴는 지배층에 속한 특권을 누리는 남성 지도자였지만, 탄생 이야기 속에서 운명의 역전을 노래하게 된다. 이 노래와 누가복음 전체에서는 여성, 가난한 자, 외국인 등이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을 받는다

1부에서 사가랴는 (성육신은 오랜 옛날, 조상들에게 주었던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기 때문에) 새로 오는 시대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이런 선언을 함으로 사가랴는 전통적인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지위와 피지배국의 국민으로서 억압을 받는 입장은 서로 조화되기 힘든 복잡한 관계이다. 조상들에게 준 약속의 성취(72)를 언급함으로 이 복잡성은 역사적인 차원을 갖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적 정복의 상황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약속의 성취는 과거 역사와 현재를 이해하는 틀이 된다. 아브라함 이후 조상들에게 주어 졌던 약속의 완전한 성취에 대한 기대는 사가랴의 시대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형성 시기는 최근의 로마-유대 전쟁(66-70)과 계속되는 로마의 지배와 관련되어 있어서 우리의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원받음”(74)이 매우 절실하게 느껴지게 한다.

2 부는 세례 요한의 삶에 더 초점을 맞춘다. 1 부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묘사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찬양을 했다면, 2 부에서는 요한의 생애에 대해 말함으로 새로운 예언을 선포한다.

사가랴는 여기서 계속해서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세례요한에 관한 예언을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의 맥락 속에서 전개함으로 그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한다. 요한의 미래를 예측할 때 그는 부모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요한을 바라본다. 요한은 구원과 용서에 관한 가르침을 줌으로 성육신을 위한 길을 준비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나온 성육신을 통한 용서는 세상을 다르게 볼 눈을 준다.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은 새벽이 동트면서 빛이 비치는 것과 유사한데, 패러다임의 변화와 운명의 역전을 불러일으킨다. 아마 앞에서 원수로 묘사되었던 사람들이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그런 화해의 이야기가 많이 소개된다. (삭개오, 바울, 이방인)

빛을 준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얻게 되는 새로운 지식 뿐 아니라 이방인이 구원에 포함된다는 것과 연관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새로운 광명과 새벽의 도래로 열려지는 가능성에는 미움을 극복함이 포함된다. 두 편(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다 빛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누가복음의 역전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모두가 다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 매해 다가오는 대림절의 기다림을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패러다임 쉬프트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변혁을 지금 이 순간의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역전으로의 초대로 여긴다면 이런 기대는 연례행사로 여길 정도의 가벼운 것은 아니다.

설교적 관점

-대림절은 계속되고 우리의 생각은 깊어만 간다. 우리는 기다리고 바라보며 과연 우리가 평화를 알게 될 것인지 의심한다.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발견할 것인가? 이 땅위에 평화가 있게 될 것인가? 평화는 대림절 둘째 주의 전통적인 주제이고 그것은 단지 폭력이 없는 평화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평화, 전체를 치유하고 새롭게 하는 평화,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아이와 그렇게 있는 평화를 말한다. 또 이 평화는 어린아이가 어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평화, 온 땅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더 이상 상처를 주는 일이나 파괴가 없는 그런 평화를 뜻한다. ( 11:6-9)

-사가랴의 위대한 예언, 찬양, 축복인 Benedictus는 우리를 헤아릴 수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평화로 이끌고 있다. 여기서 과연 그것이 올까하면서 마음 속 깊이 바라는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평화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평화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사가랴의 찬양이 지닌 문학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장면 뒤에 나올 마리아처럼 사가랴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놀란다. 마리아처럼 그는 자신과 아내가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리라는 기적적인 수태고지에 의문을 갖는다. 옛적에 사라가 이런 소식을 듣고 웃었던 것처럼 사가랴는 천사의 선포를 의심한다. 하지만 마리아와는 다르게 그는 천사의 선포를 믿지 않아서 벌을 받게 된다. 아마도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또 연륜을 지닌 남자로서 그는 일개 농촌소녀보다[마리아] 이러한 방문에 보다 잘 준비되어있어야 했다. 아마도 연배가 높은 제사장은 틴에이저 소녀가 자신의 길을 찾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준비가 있어야했다. 아마 여기에는 어떤 기준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보다 나이많고 성숙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인도할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Tom Wright는 이에 대해  기억들과 생각들을 잘 보존하고 희망의 소식을 살아있게 하는 일은 보통 나이 든 사람들의 몫이다.... 이 본문에서 사가랴는 오랫동안 고통과 희망을 성찰해왔던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에 대해 놀라움과 기쁨을 만났을 때 그에게는 두 가지 [기다림과 의심]생각이 솟아남을 발견한다

-사가랴는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발전시켜도 좋다.  이 기간동안 사가랴는 자신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이러한 기쁨과 축복의 찬양에 도달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다. 틀림없이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기간은 그를 기다리게 하고 바라보게 하고 또 의심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육체적 상태로 인해 그는 살아온 인생-사제로서의 신앙적 봉사, 엘리사벳을 향한 신앙적 사랑,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해줄 거라는 신앙적 믿음-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 그는 삶의 궤적을 성찰하고 어떻게 거룩한 것이 어느 한 시점에 예기치 않던 방법으로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삶이 혼란스럽게 되었는지를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마침내 사가랴는 아기의 이름을 지으려는 소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마을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일이 그에게 일어났던 것을 알지만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름을 지어야하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 “이 아이의 이름은?”하면서 묻는 사람들에게 이 연로한 사제는 환희에 찬 예언과 축복으로 말을 시작한다. 이 아이를 누구라 할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인 요한이라 불리울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옛 예언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것이다. 사가랴의 노래를 기록한 누가복음은 그의 어린 아들을 위한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축복을 인용하고 있다. 요한은 율법과 그 완성의 다리를 놓을 것이며 메시아의 현존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될 것이며 모든 피조물을 구원의 약속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요청하는 소리가 될 것이다.

-이 옛 찬양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 번째 부분은 사회적 구원 즉 백성들의 구원을 다루고 두 번째는 보다 개인적 구원 즉 영혼구원을 말한다. 용서로 이끄는 회개는 곧 개인적이고 또 집단적인 회개와 구원은 요한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설교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또 오늘날 상황에서 모든 종류의 회개의 필요성에 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여 변화될 것을 보게하고 또 자신들이 살아오던 삶의 방식에서 다른 방향으로 방향을 어디서 돌려야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만든다. 사가랴의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우리 자신의 욕망과 열망을 한 켠으로 치워놓았을 때, 혹은 최소한 그것들을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었을 때 진정한 평화가-우리의 내면이든 세상에서든-올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있다. 영혼과 피조세계는 자기중심적 (self centeredness)이거나 자기 만의 세계에 갇혀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주어지는 것들, 옛 계약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 또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오심 속에서 여전히 주고있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이 시간들 사이에 [주신 것들과 주고있는 것들]살고 있지만 여전히 평화의 길을 온전히 걷지 못할 때, 오늘 사가랴는 자신의 어린 소년 요한이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향하여 희망 가운데 살아갈 때 이 시간들 사이의 다리를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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