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3장 1 ~ 6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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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사역의 시작을 보여준다. 본문은 짧지만 새로운 예언자를 잘 소개 하고있다. 첫째로, 구약의 예언자들을 반영하여 누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당시의 정치적 맥락에 놓는다( (1:1;  1:1-3;  1:1-3;  1: 1;  1: 1;  1:1  1:1  1:1  1:1 참조) ). 이 역사적 설정은 일시적으로 주목하는 것보다 다 훨씬 중요하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적 역사의 맥락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일깨워준.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의 신화적 영웅과는 달리 세례요한과 예수는 역사적 시간과 공간에 존재했고 특정한 문화적 상황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누가는 이 상황이 얼마나 복잡하고 촘촘하게 얽혀져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누가는 유대지방 여러 곳의 로마 지배자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들 중 몇 사람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직책으로 두 명의 유대지도자도 들어 있다.

이런 식으로 누가는 로마 지배와 유대종교 간의 긴장을 나태내고 있는데, 이 긴장은 종교 적 지도력 자체가 애매하여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유대에서의 로마의 통치를 알아보면 복잡하다. 종교적으로는, 로마인들은 황제숭배를 독려했고 심지어 거룩하고 성상을 거부하는 (우상숭배로 생각하여) 예루살렘에서도 황제의 상을 세웠다.

정치적으로는 대헤롯이 세금 문제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통치했고, 그의 아들들도 그러한 정책을 이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갖고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한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역사적인 상황이었다. 누가가 사갸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승리의 귀환을 선언한 것이다.

누가가 세례자 요한을 사가랴의 아들”( (1:5-25) )이라고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영을 받은 예언자의 부를 때의 공식을 따른 것이다.

광야라는 장소도 중요한데, 누가에게 있어서 광야는 시험 (4:1)이나 기도, 물러나 쉬거나 기적을 행하는(4:42; 5:16; 8:29; 9:12) 장소였다.

세례 요한에게 광야라는 장소는 사역을 위한 준비나 그의 금욕적 생활 스타일과 결부되어 그가 쿰란의 에세네공동체에서 훈련받았든지, 아니면 그들과 대단히 친숙했다고 추정 된다.

 3절에는 주님의 말씀을 받은 세례 요한이 행한 사역의 간략한 요약이다. 그는 요단 강 부근 지역에 한정하여 예루살렘 쪽으로 넘어가거나 광야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순회 설교자로 활동했다.

헤롯 안티파스는 요단 강이 흘러나오는 갈릴리 호숫가에 티베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곳은 세례 요한이 그와 그의 아내 헤로디아에 관한 비난을 잘 들을수 있는 곳이었고,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세례 요한은 투옥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세례 요한 이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하지만, 세례 요한의 정치적 활동에는 별 관심을 두 지 않고 대신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 선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세례 요한이 회개라는 것으로 의미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 주 본문 7-18절에서 자세히 설명 할 것 이다. 여기서는 요한의 세례가 예수의 부활에서 명령한  세례와 같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 본다. 

 두 세례 모두 옛 삶 에 대한 회개와 새로운  삶에 대한 헌신을 표명하고 있지만,  요한의  세례는 다가올  심판에 대한 준비의 하나로서  지위나  혈통,  예식이 아니라 오직  회개만이  심판이  다가왔을  때  용서 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예수의  사역,   삶,   죽음에  대한 준비인데,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요청을 받아 아들인 사  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하고  메시야 이신 주님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첫 번째

단계는 죄로부터의  회개인데, 히브리 예언자들의 예언의 반향으로서 대림절기에 아주 적절한  메시지이다.

 ▶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그의 사역을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한 것은  누가로 하여금  세례요한을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로 보게 했다.  이사야 40:3-5의  말씀은 본래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서 이스라엘 백성을 잊거나 소홀하게  여기시지 않고  구원의 손길로 억압의 시대가 끝낸다는 선포이다. 

 누가는 이 말씀을 교묘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야적 소망과 결부시켜 이스라엘 사람들 이 세례 요한이 약속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는 소리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진실로  “좋은 소식” (18) )인데,  왜냐하면  그의 회개의 메시지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받아 들이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위로를 행하도록 준비하기 때문 이다.
 
 누가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사역의 연속성을 보여 주기 위해 이사야의 말씀을 사용했다.
 세례 요한이 출현이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메시지가 진실로 기쁜 소식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의 사역이 중첩되어 있고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 3:13-17),  누가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들을 예수의 사역과 분리되어  있고 앞서 있는것으로 나눈다.  하지만 두 사람에 의해 선포된  한 통속의 메시지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세례 요한이 먼저 준비했고,  그리고 예수가 이를  실체화했다는  것이다.

▶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이 하는 우리들에게 오늘의 국가와 교회, 죄와 용서에 관한 현실들은 누가복음의 말씀에서 무엇을 던져주  고 있는가?

 그 말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수 있다.   그 말씀은 오늘의 사회적 현실(신문)과 우리의 삶(일기)의 여러 장면에 다리를 놓아 준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가의 말씀은 시대를 뛰어 넘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세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고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자.

 
목회적 관점
칼뱅이 그의 주석에서,  본문 3절에서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것은 세례의 신학을 시작한 것이고  동시에 성례전을 시행하 고 설명할 때 목회자가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적 측면에서는,  칼뱅은 세례에 있어서 회개  와 용서의 중심성에 대한 확증을 들었다. 연설이라는 측면에서 칼뱅은  “축사(逐邪)를 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듯이 웅 얼 거리는 것을 지지하지 않고 신앙을 세우라고 선포하는 분명하고 구별된 목소리가 영향력 있다” 고 지지했다.  이 모든 것이 “선포  하였다”는 말에서 비롯 된다.  그러나 이러한 칼뱅의 이중적 독서가 가진 수사학적 측면을 너무 빨리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양쪽을 가로지르는  메시지로터 목회적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장벽을 제거하 것은 언제나처럼 우리시대를 향한 목회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사 야 40 장에서 비롯된 요한의 사역에 대한 보증은 그 자신의 방식으로 이러한 의무를 강화 한다.  광야의 소리는 몹시 급박하게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외친다.  이러한 급박성은 신앙의 말을 선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사학적인 예민함을 요청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열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극적인 비유가 있다:  큰 길을 곧게 내고, 계곡과 산들은 평지로 만들고 거친 들은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 40:4-6).
 백 년전에 포장된 길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풍경이 되었다. 숲을 벌목해서 길을 곧게 만들고, 아스팔트는 그 길을 매끈하게 했다. 
다리는 계곡을 높이고 터널은 산을 평평하게 했다.  이제는 이런 통로의 힘을 생각하기도 하고 깨닫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 길을 통해   여기서 저기로 달려 간다.  이러한 비유는 아직 길이거칠어서 때로는 지나갈 수 없었던 때, 아직 자연은 정복하기에 쉽지않고 여행은  단순히 내비게이션 화면에 목적지를 표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해야했던 때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과 말할수 있는 것 사이에는 도전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굽은 길과 올라야 하는 높은 산과 굴러 떨어지는 많은 계곡들이 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사역은 고되고 복잡하다.   이 사역은 각각의 지형에 각각 접근하기를  요구한다.
 
평평하게 하고 곧게 한다는 비유는 똑같게 하고 획일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사역의 결과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라기보다는  예언자의 소명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만들고, 열고, 깨끗하게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설교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인지 듣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는지 사이에 무엇이 있을 까? ? 
폴리꾀르는 설교자의  “설교 이전” 사역에 관하여 썼는데, 우리가  해야만 하는 사역은 단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듣도록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사역은,  설명하는 사역이 교회가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으로 완수 된다는 점에서는 지구적이지만, 시간, 장소, 특정한 사람,  구체적인 문화적인 압력에 대한 저항,  화자와 청자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선호하는 것 등에 있어서  는 대단히 지역적이다. 모든 설교자는  장애인들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를 늘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응답할지 연구해야 하는데, 도움 을 줄 수 있는 주제들은 제한적이다.
성격에 관한 고전적인 질문은 설교자들이 용서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성령에게 응답하도록 초청하기 위해서,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정죄할  때 그들이 신뢰하도록 하기위해서 목회적이고 개인적으로 어떤 습관들을 가질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한다. 성격에 대한 질문은 회중에게도 제기된다. 공동체의 삶에서 어떤 실천을 해야 방청객을 들 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취자 회중으로 만들 수 있을까 ?  
  환경은 어떨까? ?  성서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라고 위임한다. 예배 장소는 안락한지, 음향은 효과적인지, 장애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지 등등.  가난, 폭력, 분열,  그 밖에 성소  안팎의  문화적 현실들은 어떤가?  그런 것들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과 사람들이 그것을 듣게 하는 것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가? 이런 도전들을 선포하는 힘과 지혜를 어떻게 찾을수 있을까?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무작위적이든 순차적이든, 인식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메시지가 형성되고 들려지는 데 효과적일까? 어떻게 메시지를 정교하게 다듬어서 듣는 사람들이 의도를 알아차리도록 할 수 있을까?
대화할 때에 사람들이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듣게 하기 위해서 어떤 영적이고 신학적인 모습이 요구되는가? 성경의 증인들과 경박하게 소통하는 방식을 채택한 현대 미디어에 의해 혹사당하는 청중들을 회복시키지 위해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가:이야기, 상징, 리듬, 아이러니, 미스테리, 은유? 메시지가 즉시 소비되고 내일이면 잊혀지는 문화 속에서 비폭력적이고 해방하는 기독론적인 언어의 가치를 기독교 예배와 증언에서 수사학적으로 재생하는 설교이전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긴급한 목회적 과제일 것이다 길을 예비하라 길을 곧게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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