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에서 다음의 표현에 관심을 집중해본다: 독사의 자식, 돌들, 도끼, 불, 성령의 세례
세례 요한의 설교는 매우 실천적인 윤리를 담고 있다. 세례 요한은 공정, 정의, 관대함, 이타심 등을 강조하면서, 정신적 영적 유턴, 즉 진정한 회개를 선포하고 있다. 그에게 회개는 기도, 예배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부에 대한 태도, 사회적 봉사, 청지기직 수행 등과 더 관련되어 있다.
대림절 설교의 주제를 영적인 측면에만 맞추려는 유혹이 있고, 세례 요한의 회개의 촉구는 너무 냉혹하고 삭막한 것 같아서 복된 소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그러나 참된 복은 신적인 도끼가 우리의 탐욕, 자기도취, 이기심, 위선 등을 찍어내어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넣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이 본문에는 종말론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이 결합되어 있다. 이레니우스는 대림절 기간 동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두 가지라고 한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와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그 분의 오심이다. 회개에의 촉구는 종말론적인 긴장의 역동성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속할 가치와 관련된다. 회개의 열매는 앞으로 올 추수의 첫 열매가 된다.
종말론은 두 가지로 잘못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1) 종말론의 긴박성을 도외시한 채 윤리적 차원만 강조하여 예수를 훌륭한 도덕 선생으로만 강조하는 경우 (부르주아적 문화개신교 Kulturprote stantismus ) (2) 이 세상이나 윤리적 토대로부터 분리된, 도피주의적이고 내세중심적인 근본주의 맨탈리티 (Left Behind 류)
본문이 말하는 성령의 세례는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는 “성령의 세례는 신적인 정화(devine cleansing)와 인간의 재정향 (reorientation of men)”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령의 주제가 중요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절이 있으니 이번 주일에 성령에 너무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석적 관점
▶ 마침내 누가는 세례요한의 설교를 전해준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심판을 준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를 보여주기 위해 그의 메시지로 눈을 돌리게 한다. 예수의 오심을 준비한 이 사람은, 오늘도 설교자들과 교인들에게 주님의 오심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 첫 번째 부분(7-9절)에서 세례요한은 무리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마태가 사두개파 사람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사용한 용어이다(마3:7). 누가는 이 용어를 “무리들”에게 일반화시키는데 이는 단지 지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풍자라고도 볼 수 있지만, 경고이기도 하다.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요한은 사람들이 그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는가를 살펴본다. 그는 실제적인 훈계로서 “열매를 맺어라”고 권고한다. 다가올 심판의 날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믿는 것뿐만 아니라 처신을(behave) 기대한다. 세례요한은 금방 이 열매를 정의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그들이 위안으로 삼고 있는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부분에 대해 공격한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다. 세례요한은 이 안전장치를 그들에게서 제거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적 유산에 의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들이 각자의 결단을 하도록 촉구했다. 누가는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유산을 넘어선다. 티끌에서 사람을 만든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핵심적인 것은 믿음(여기서는 열매)인데,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그의 진정한 자손이 되려면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치 못하면, 심판이 임하는데,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회화적으로 묘사한다(눅13:69). 세례요한의 어법은 임박한 심판을 가리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이, 심판은 다가온다는 것이다. 2000년 후 우리는 이 경고를 무관심하게 듣고 있지만, 그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심판의 도끼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 두 번째 부분(10-14절)은 삼중 패턴을 가진다. 세 그룹, 즉 무리, 세리, 그리고 군인들이 무엇을 해야할 지를 말한다. 각 그룹들은 가난한 자를 배려하고, 진리와 정의를 행하도록 하는 실제적인 요구를 받았다. 요한은 예전, 성전, 희생제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는 종교적 예전보다는 사회정의에 대해 더 관심을 둔다. 각 그룹들이 지위(역할)나 재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명령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리들에게는 음식이든 의복이든 그들보다 좀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의 부를 나누도록 권한다. 그들은 가진 것 모두 다 나누도록 명령받지는 않았고, 여유가 있는 것을 최소한도로 나누도록 했다. 부패와 탐욕으로 잘 알려진 세리 그룹에게는 공정하고 정직하게 일하도록 명령했다. 의외로 회개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군인들에게는 그들의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족함(contentment)을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회개의 결정적인 열매인데, 왜냐하면 족함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일과 뜻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청중들은 그의 역동적인 설교 때문에 그가 단지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세례요한은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메시야적 소망이 널리 펴져있었고,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는 카리스마적 설교자요, 현재의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3:19)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희망을 두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16절에서 그의 위치를 ‘준비하는 자’로서 확실히 말하고, 그의 사역과 오실 그 사람의 사역을 비교해 설명했다. 요한의 물세례는 회개의 상징이고, 오실 그 분의 세례는 성령과 불의 세례, 즉 능력의 세례이다. 옛날에도, 성령이 각 개인에게 임하게 되면 그들이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힘을 받았는데(사울과 다윗의 사례), 더구나 진정한 메시야를 보고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적절하게 살아가는 데 힘을 얻게 된다.
▶ 세례요한은 이 약속을 다른 경고로 이어가는데, 이것은 농사짓는 일에 비유한 것이다.
그는 메시야가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고,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회개하고 열매를 맺은),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는(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기적 삶의 스타일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벌을 주시는) 일을 하신다고 비유했다. 16절과 17절의 “불”을 다른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첫 번째 ‘불’은 성령과 반대의 이미지로서 오시는 메시야의 세례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고, 두 번째 불은 회개하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불이다.
▶ 결론적으로 누가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복음 (기쁜소식)으로 요약하는데, 여기에는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의 기쁜 소식이 포함되어 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진정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는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를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자연적 결과인데, ‘겸손한 복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경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청하시는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세례요한은 예수의 선지자로서 회개는 정직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목회적 관점
누가는 세례요한이 권면이라는 방식으로 선포했다고 설명한다(18절). 그것은 이 이야기 속에 있는 풍유, 과장, 비평, 경고, 지시, 예측 등이 뒤섞여 있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방식은 그것을 말하는 예언자들이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를 깨우치고, 회개로 인도하며, 우리 생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서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목회적 관점으로 이 본문을 읽는 것은 요한의 수사학인 권면을 연구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권면이 역사적으로 가졌던 풍성한 의미를 현대의 독자들은 쉽게 놓친다. 긴급한 요청들은 단순한 명령보다 심오한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방식과, 행동, 기억, 정체성에 있어서 흠 없는 모습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강요된 것만이 아니라, 위로하고 확신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그들이 이미 알고 있고 단언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동하라고 권면하고, 그들이 주장하고 권면하는 사람이 그들과 함께 주장하는 전통과 사람들의 가장 깊은 가치들로 벗어나서 행동하라고 권면한다. 권면은 권면하는 사람이 자기가 권면한 것을 지키도록 구속하고, 단순한 명령-응답 방식이 아니라, 그들을 함께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들에 매이게 한다. 권면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선포는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방식을 바꾸도록 설득하거나 고무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한 수사적 행동이다.
요한이 세례를 받으려고 광야로 온 사람들에게 풍유법과 과장법으로 선포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3절). 명백히 묵시적 맥락에서 요한은 오고 계신 메시아의 급박한 구원에 대한 기대 안에서 급박한 심판을 선포했다. 아이러니하게, 요한은 결과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긴 것 같다. 요한은 그가 “선포”한 세례를 받으려고 나온 사람들의 동기를 의심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누가 너희에게 닥쳐 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라고 물었다(7절). 아이러니하게, 요한 자신이 그랬다.
이것은 쉽게 시도하는 복음전도방식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게 온 사람들이고, 동참할 것 같은, 심지어 다음 번 청지기직 캠페인에 참여하기로 서약할 것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다. 요한이 한 비난 전술이 오늘에는 최선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공연이 준비된 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하기보다, 더 깊은 수준의 자기 성찰과 회개를 하도록 도전을 줄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한을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갈등 상황에 놓는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와 학문과 성취를 이용해서 요한의 권면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8절).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군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갈등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자부심을 가졌다. 억압받는 민족이 그들을 억압하는 군인들에 대하여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보는 만족이 있다.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회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회개만큼 중요하다고 외쳤다. 이것은 우리가 그 뒤에 숨는 전통, 국가적 혹은 교회적 정체성, 부, 민족성, 지위와 같은 것들을 조사해보라고 요청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인 것처럼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요구된다.
요한은 청중이 그들의 세례를 가치 있게 하는 “열매”인 선한 행실을 하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아브라함의 열매라고 (혹은 로마의 군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기가 교회의 자녀라고, “좋은 시민”이라고, 혹은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다고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가지에 앉아 있다고 해서 나무나 그 열매가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나무는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도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 비유를 바꿔보자면, 나무보다 뱀에 가깝다. 요한은 그의 청중을 독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독사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자식(brood)이라는 말은 어린아이, 생산품 혹은 열매를 말한다. 누구의 메시지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할 만큼 강력한가? 교회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뱀굴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통찰도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겉옷과 음식을 쌓아두고 있기 때문이다(11절). 우리는 세리와 같아서, 우리 생활의 불의한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점령군과 같아서, 착취와 폭력의 문화에 사로잡혀 있다.
권면: 나눔으로 온전한 열매를 맺어서(11절),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돌봄으로(13절), 공평하고 정의롭게 행동해서(14절), 나무가 되라. 또한 결실하는 나무의 열매가 되라. 세례가 요구하는 회개로 인도하는 선포에 자신을 묶으라. 우리를 열매로 가득 찬 정원, 더 이상 뱀이 유혹하지 않고 도끼가 위협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은 모닝콜이나 선교 성명서나 설교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나무에게 물을 주는 것 그 이상이신 그 분 안에 있다. 나무 자신의 생명이신 그 분 안에 있다. 그것은 오고 계신 분 안에 있는 것이다.
목회적 권면은 우리의 청중들을 그들이 세례받을 때 주장했던 것으로 돌아가도록 요청하고, 교회를 온전함, 자기반성, 상호고백, 그리고 우리 안에 우리의 대림절 소망을 두시는 분에 대한 개방성을 향한 부르심 안에서 연합하게 한다.
설교적 관점
-어느 누구도 성탄절이 가까워오는 시절에 세례요한으로부터 이런 질책을 받기 원하지 않는다. 어느 설교자도 대림절 셋째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본문으로 하기를 원치 않는다.
성탄절 선물을 살 것을 생각하며 앉아있는 어느 교인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요한의 이 말에 도전받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대림절 셋째 주에 성서정과는 또 다시 우리들에게 세례요한과 광야에서 외치는 그의 말을 설교하도록 한다.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이 거친 예언자의 소리를 듣지 않고서 베들레헴 구유에 있는 아기예수에게 갈 수 없다. 이 요한의 외침을 피하거나 포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을 가지고 구유에 가려면 요한이 요청하는 깊은 자기성찰 후에 가능할 것이다. 대림절 설교자 역시 이 본문으로 설교준비하기 전에 여기에 이르러야 한다. 세례요한이 자신을 따라온 바로 그 군중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 21세기 대림절 설교자가 편히 앉아서 성탄절을 기다리는 교인들에게 살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고
(reprioritize) 하나님을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 2개의 주제가 가능하다. 첫째 이 짧은 본문에서 세례요한에게 각기 세 번 질문한 사람들에 초점을 둘 수 있다. 먼저는 군중이 그다음엔 세리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인들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느냐?”고 묻고 있다. 그들 모두에 대해 요한의 권면은 매우 현실적이고 분명하다. 그의 대답은 질문한 사람들의 직업과 그 일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고 또 자비롭고 정의로운 행동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세례요한은 나누어주고 필요이상으로 갖지말고 공평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정직하라고 분명하게 답한다. 21세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설교자에게, 교회에게, 또 자신들의 믿음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대림절 곧 준비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기간은 설교 서두에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알맞은 때이다.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아마 일년 중 다른 어느 기간보다 밖으로 관심이 향하는 때일 것이다. 교회와 자선단체는 일년 중 어느 때보다 12월에 더 많은 기부를 받는다 (부분적으로 세금공제혜택이 있고 또 성탄시즌의 관대한 마음으로 인해). 대림절에 이 본문은 신자들이 기다리는 구원자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을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웃을 향한 실천으로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하는 역할을 한다. 세례요한의 대답은 따르기에는 너무 다듬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중들, 세리들, 그리고 군인들에게 이타적인 선택을 하고 수입의 범위 내에서 생활하며 올바른 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세례요한의 이 가르침은 오늘날 대부분의 주류교회에서(mainline churches) 잘 실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림절 예배자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신들이 어떻게 답을 하고 살것인가에 관한 분명한 의식을 하면서 교회 밖으로 나서게 될 것이다.
- 둘째로 설교자는 대림절 예배자들에게 세례의 의미에 관심을 갖게 하고 예배 중 이들에게 세례를 재확인 (reaffirmation) 할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대림절 예배에서는 보통 세례나 세례의 재확인을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 연결을 요청하고 있다. 예배자들로 하여금 세례시의 서약을 재확인하고 나아가 아기 예수를 받아들일 마음과 생활을 준비하게 하려면 그리고 세례를 통과하여 각자가 부름받았던 그 생명을 기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내가 몸담고 잇는 교단에서는 세례재확인 예식서 (the liturgy for reaffirmation of baptism)가 있어서 신자들은 죄와 악한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할 것을 요청하는 질문들이 있다. 추가적으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서 살 것을 약속하겠는가라는 질문도 들어있다. 이 내용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한 선언과 일치한다. 회개하라! 방향을 돌려 하나님을 향하라! 그리고 그들이 세례요한의 명령을 따를 때 삶이 어떠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비롭고 정의롭게 살라고 말한다.
-한 동료목사는 세례를 베풀고 난 후 언제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야 너는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 속해있고 그리스도의 표시가(the mark of Christ) 너에게 있단다”. 세례요한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깨달을 것을 요청한 것이 바로 이 표시의 의미이다.
그는 광야에서의 추종자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삶이 진지하게 바뀌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그는 일단 이 표시를 받았을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요구들에 대해 주의깊게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올 사람 곧 메시아 예수에 대해 말하고 그가 베푸는 세례와 삶의 요청은 “여러분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킬 것” (16절)이라고 환기시켰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례에 대해 믿는 바이다. 우리는 깨끗해지고, 새롭게 되고 영원히 변화된다. 세례시 우리는 세례받는 물로부터 섬김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보내심을 받았다고 믿는다
-설교자는 예배자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우리의 삶을 성찰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표시를 지녔고 그의 신실한 제자로 살고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례 요한에 의하면 우리는 가지고 있다고 선포한 신앙을 살아내야한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은 항상 이런 도전을 담고 있다. “변해야 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너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세어보는 것은 너의 삶이다” (8-9절) 이것이 예배자들에게 도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대림절 예배 때 세례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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