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간 것은 자신에게 닥칠 일에 대해 천사가 말해준 것을 완전히 믿지 못해서 확인(confirmation)과 격려(encouragement)가 필요해서였나 아니면 천사의 수태고지로 충분한 것이었나? 칼뱅은 마리아가 확인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확인이 필요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마리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간 것은 하나님이 맡긴 일을 회피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했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확인과 격려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준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Bede는 마리아가 나이 많아 임신한 엘리사벳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고 격려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은 성령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자 성령이 충만히 임했다. 엘리자베스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마리아의 특별한 상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따라서 42절부터 나오는 엘리사벳의 축복은 성령이 지시해준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을 통해 듣고 믿게 하신다. 46-55절에는 마리아의 노래가 나온다. 이 노래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선함이 노래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고 계셔서 그 앞에서는 모두가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겁에 질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역설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체험했지만, 그와 동시에 범죄하고 연약한 인간에 대해 주시는 자비, 용서, 오래 참음도 체험했다. 우리는 또 겸손이 하나님의 선함을 목격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드높이고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겸손하게 낮췄다. 하나님의 선함은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을 이해하라. 하나님은 우리 조상에게 보여주신 은총이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상속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믿음에 의해 입양됨으로 만백성이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주석적 관점
▶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만남으로서 수태고지(1:26-38)의 기쁜 소식의 첫 목격자가 된다. 두 여인은 전달자(messenger)와 메시지(message)라는 중요한 사람을 임신한 것이다. 이야 기, 연설, 찬양을 통해서 오늘 두 사람은 예언자적으로 복음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소망의 확증이요, 약속의 성취이다. 복 음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예수의 가르침, 비유, 치유,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약속의 성취와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선택적인 두 번째 본문(46-55)은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 양이다. 찬양 에는 탄생에 관한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고 있기에, 아마도 누가가 그 사 이에 들어가 있는 탄생설화와는 다른 자료들을 가지고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상황들이 연결점을 주는데, 마리아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칭송하고, 그리스도 사건에서 예언자 를 통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다. 예수와 요한의 탄생설화를 결합시킨 오늘 본문(39-45)은 탄생의 약속을 예언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성탄절 전 대림절 마지막 주일의 긴 호흡에 잘 들 어맞는다.
▶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과 예수가 순서대로 공적 활동을 하기 전의 이야기로. 두 사람의 길고 잘 연결된 탄생설화(1:5-2:52)의 일부분이다. 성경의 탄생설화들-예를 들어 야곱, 모 세, 삼손, 그리고 사무엘의 경우과 같이-은 역사적 구원의 구체적인 예를 동반하는데, 그러 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 구세주의 오심이라는 누가의 중심 주제와 잘 맞는다.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설화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인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누가 는 그들을 친척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주님, 구세주 하나님”(46-47) 일을 하 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55)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은 마리아가 그의 집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약 120km 떨어진 유대 산골 한 동네 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39).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엘리 사벳은 그의 뱃속에 든 아이가 기뻐 뛰어 놀았기에(특별한 인정, 처음의 예언), 자신도 예언 자가 되어 ‘성령을 가득 받아’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42) 성경의 익숙한 모티브이기도 한 임신에 대한 축복은 (구약의 중요한 어머니들처럼 아이가 없었던 여인(7절) 최고의 축복을 더 한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 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43). 그들이 만났을 때 엘리사벳은 이미 마리아가 알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엘리사벳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마리아의 축 복과 믿음(45)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엘리사벳은 “정녕 복되다”고 외치는데, 곧바로 시므온이 그 아들 때문에 마리아의 영혼이 슬픔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도 나온다(2:35). 태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뛰어논다는 (44)모티브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천사들의 예고에서 절정에 이른다(2:10-14).
▶ 마리아의 노래는 누가의 서론 부분의 셋째 중 첫째 부분이다. 그 다음은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의 노래(1:68-79)이고, 시므온의 노래(2:29-35)이다. 설화와 예언적 찬양을 잘 연결 한 것은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선포 뒤에 누가가 말한 예수의 공적 활동을 위한 예배적인 무대 장치같은 효과를 가진다. 마리아찬가는 넘치는 기쁨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사역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찬양을 연결시킨 것이다.
▶ 마리아찬가에는 강한 사회경제적 요소가 들어있다(51-53). 이런 이미지는 구약의 찬양 의 언어를 생각나게 하는데 특히 미리암의 노래(출15:21)나 드보라의 노래(삿5장)와 같은 여인들이 부른 찬양의 언어들이다. 그러한 감정적 언어와 승리의 이미지는 그렇지만 버질의 제국의 승리의 노래인 Aeneid2)의 유대와 기독교 판이 아니다. 여기의 목소히는 세상의 강 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운동의 주변부의 사람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의 소리이다. 니카라구아 농민들이나 수단의 가난한 인민들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누가가 말하는 부의 역전이라는 모티브(51-53)는 폭력적 저항을 고무하려는 것이나 부자와 권력자들을 파멸로 몰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부자 청년(18:18-30)이나 삭개오(19:1-10)과 예와 같이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약속된 구원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들의 부를 잘 사용하도록 권고하는 차원으로 읽혀져야 한다.
목회적 관점
기다린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기술이 아니다. 그래서 대림절을 무시하려는 충동은 강 력한 것이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 되면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많은 교회들은 봇물 이 열린 듯이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기 시작하고, “성탄주일”이라고 이름을 바꿔 부른다. 누가 복음의 본문은 이런 유혹에 저항하기 위한 경고와 지침을 제공한다.(경고: 목회자의 용기는 별 도로 공급되어야만 한다.) 성서정과는 마그니피카트 부분을 선택사항으로 해서, 마리아와 엘리자벳의 만남이라는 익숙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한다. 일 년 중 가장 출석률이 좋은 주일을 위한 것 치고는 이야기의 규모가 크지 않다. 그러나 그건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정중 하게 “휴일”이라고 부르는 고역에 기진맥진해서 이날 예배에 참석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위험 수위에 이르렀는데, 가족들은 시대착오 적으로 이상적인 휴일을 목표로 한다. 슬퍼하거나 의심하거나 질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염려 들을 위한 플랫폼이나 인내를 거의 찾을 수 없다. 많은 가족들이 크리스마스 카드의 그림들이 좀 더 풍요해 보이거나 좀 더 조화로워 보이거나 좀 더 예뻐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한 다. 정서는 다듬어지지 않았고, 문화적 향수 nostalgia 는 하나님을 향하기보다는, 뒤돌아서서 보는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밀어낸다. 프랑스의 석학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단지 사소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단지 사소한 일이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의 외롭고 조각난 영혼들에게 누가는 멋진 미리-크리스마스 선물을 남겼다: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임산부 사이의 진정한 연결에 관한 작은 이야기.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 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들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엘리사벳의 자궁 안에 있는 아기(요한)가 마리아의 방문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으로 성령의 사역이 선포된다. 적절한 시 간에 아기가 발차기를 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처럼, 전개되는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이 해가 수취인에게 열렸다. (취업 면접을 하는 중에 발차기를 하는 것은 채용이 되거나 재빨리 달아나는 것인가?) 용감한 목회자는 교인들 가운데 부모들에게 그들의 아이가 발길질한 이야기를 설교 중에 해도 되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인사는 응답에 따르는 인 식 의 순환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회중을 통해 자발적으로 반향되는 것이다. 성서의 세계는 오늘 의 현실을 삼킬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제사장인 스가랴는 이 이야기 내내 침묵하지만, 엘리사벳은 주제넘지 않은 “설교자의 아내”로, 사실상 예언자의 역할을 한다. 성령께서 해야 할 말을 알려주어서 엘리 사벳은 젊은 친척이 하도록 부름받은 특별한 역할의 개요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또한 엘리사벳 의 예언자적 증언은 마리아를 격려하고 힘을 주었다. 엘리사벳의 설명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 마리아는 대담하게 마그니피카트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다시 한 번, 인식은 응답을 수반한다. “산골 동네”에 사는, 일을 못하게 된 제사장의 집에 단순히 방문해서 시작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정치와 경제 관한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설교의 초점을 마그니피카트로 옮겨서 임박한 출생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하루만이라도 본문을 충실하게 읽는다면, 개인적인 차원에 더 가까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그들 각자에게 부족한 두 가지, 공동체와 관계성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들이 고립되지 않게 하셔서 그들의 개인적인 운명보다 더 큰 어떤 것의 일 부로서 그들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우신다. 그들은 함께 그들이 개인으로 하는 것보다 더 완전하게 알려지고, 더 분명하게 보기 시작했다(고전 13:12). 이것이 천천히, 조용하게 시작 한 희망과 이해라는 진짜 대림절 메시지이다. 우리는 이것이 자라서 충분히 드러나기를 기대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전형적인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번 주일 은 크리스마스와는 별개로 대림절의 진짜 메시지를 들을 마지막 기회이다. 공동체 안에서 희망이 발전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마리아들과 엘리사벳들 (또는 사가랴들과 요셉들)이 교회 장의자에 앉아서,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좀 더 깊이 연 결될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이야기가 하나님의 더 큰 이 야기와 연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교회들이 인식과 반응의 주기 cycle을 격려해서 성령의 범위를 넓힐 수 있을까? 세상은 우리를 더 시끄럽고 더 크고 그리고 좀 더 값비싼 12월 25일로 향하도록 끈질기게 밀어대지만,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대림절의 본문은 대단히 대안 문화적이다. 기독교국가 시대의 교회들은 더 넓은 문화와 쉽게 친밀해질 수 있었다: 도시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 학교 음악회에서 캐롤을 부르는 것, 정치인들이 그들의 후원자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것. 지금은 크고 화려한 행사들은 대체로 유명인사와 소비주의라는 쌍둥이 우상의 주위에 집중된다. 좋든 싫든 교회는 소외되어 있다. 이번 주일에 설교자는 복음은 신실한 성도들을 이 주변부로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서 해산을 앞둔 어 머니들처럼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듣고 기다릴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문화에서 소 외된 사람들은 성령이 방문할 수도 있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에 무엇이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아마도 그들은 매주 교회에 나왔거나, 혹은 어쩌면 오늘이 뭔가 특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림절 촛불의 빛을 보려고 왔거나 혹은 축제에서 노래를 하거나 다과 시간에 쿠키를 구우려고 왔을지 도 모른다. 그들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의심과 상처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교인들은 그들을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사람이 아닌, 그들 자신 그 대로 받아들여줄 사람들—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잠시 동안 앉아있고 싶어 한다. 예배 중에 진정한 용납을 경험함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이 엘리사벳에게 물어보게 될 수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요?”(1:43).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대하고 역사를 바꿔놓을 탄생 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아주 인간적인 규모의 이야기이다.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오래 머무르는 교인들은 그들의 성탄축하행사를 위해 격려 받고, 준비되고, 깊어질 것이다.
설교적 관점
-이 이야기는 설교자로 하여금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으로 인해 나오는 기쁨, 놀라움, 어리석음 그리고 위험등에 몰입하고 또 표현하기를 요청한다. 여기서 우리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놀랍고도 두려운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도전” (challenge to good order)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성육신으로 인해 시작된 질서가 뒤바뀌어지는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이 본문은 진지한 학문적 주석이나 경건한 종교성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민담이나 당 대의 사회적 체제를 풍자하거나 뒤바꾸어 놓은 바보제나 카니발 같은 (Feast of Fools) 길거리 공연이라는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Harris, Carnival , 140). 거기서는 당시의 사회 체제가 풍자되고 뒤바뀌어지며 낮은 자들이 명예로운 자리로 높임을 받는다.[바보제는 중세 에 매년 1월 1일에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행해지던 놀이로 이 날은 엄격한 기독교 도덕규범이 금지되고 풍자적인 예식들이 시행되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를 교황이나 주교로 선 택하기도 하고 교회고위직이 그날은 하인의 자리로 강등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기독교가 지 방축제문화와 만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교회는 이러한 풍습을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민간에서는 지속된 축제였다-우리나라 마당극과 유사: 역자 주]. 교회는 이번 주를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는데 심각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뒤섞여진 웃음, 노래, 그리고 놀라움을 통해서 해야 한다. -본문의 장면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의 도래를 예견하고 선포하는데 그 일이 천사장이나 대제사장, 황제 심지어 안수 받은 설교자들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소외된 임신한 여성들-하나는 어리고 가난하고 결혼도 안했고 또 다른 사람은 임신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고-이 자신들의 기적적인 회임을 축하하기 유대지방 언덕에서 만난다. 한 아기가 뱃속에서 뛰놀고 있다. 축복이 서로 공유되고 있다. 놀라움이 드러나고 노래가 불리워진다. 바로 이 두 여성들에 의해. 이 이야기는 이상하고 또 기쁜 일일 뿐만 아니라 성육신의 전조로 육적이고 체화되며 이 땅의 일이다. 이 여성들의 행동을 통해 세상은 위 아래가 뒤바뀌어진다 (upside-down). 위계질서가 바뀌게 된다. 강한 자가 내려온다. 두 명의 소외되고 임신한 여인은 앞날을 책임지고 있고 메시아를 선포한다. -마리아의 노래 곧 마리아 찬가 (Magnificat)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구체화하는 뒤바뀌는 성육신을 노래한다. 마리아가 마리아 찬가를 부르는 사실 그 자체가 이상하고 뒤바뀌는 것 을 보여준다. 이 어리고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여인-당시 문화에서 완전히 주변인이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적인 선포중 하나를 하고 있다. 이것이 주는 이미지는 특별하고 심지어 코믹하기까지 하다: 어린나이에 임신한 마리아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뛰어넘으라고 초대한다. 마리아 자신도 이러난 일에 놀라워했던 것 같 다. 그녀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 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vv.47-48a). 그리고 그 노래의 남은 부분은 하나님께서 시작한 세상을 뒤바꾸는 일을 선포한다: “그는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습니 다.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vv. 51b–53). 이 노래는 현실을 선포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실현할 미래의 일을 약속하고 있다. 이 노래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아들을 가질 수 있는 마리아 자신의 능력을 가치 있게 해주는 사회구조의 종식을 예견한다. -마리아의 노래는 바보제에 영감을 주었고 바보제는 사실상 마리아 찬가 즉 “인간지배질서 를 무너뜨리고 낮은 자들 명예로운 자리로 올리고 축하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이한 증언을 문자적으로 적용한 행동이었다. 이 본문의 설교자들은 교회와 사회 모두에 있어서 위선과 위계질서를 뒤바꾸는 바보제의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중세와 근세초기 유럽에서 성탄절은 현존질서를 축제적으로 뒤바꾸는 시간이 었다 . 9 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한 거짓 대주교를 선출하여 성만찬을 풍 자하고 나귀를 타고 온 도시를 다니게 하였다 . 1685 년 12 월 28 일 Innocents’ Day 에 Antibes 의 프란시스칸 교회에서는 평신도 형제들과 하인들이 “ 제의용 옷의 앞뒤를 바꿔입고 책을 거꾸로 들고 ... 안경알 대신 오렌지 껍질을 동그랗게 만들어 끼워 넣고 ... 향로의 재를 각각의 얼굴과 손 위에 대고 불었다 .” 남성 은 여성용 옷을 입고 동물 가면을 쓰고 악취가 나는 향을 퍼뜨리고 가짜 주 교 , 교황 , 대주교를 선출하는 일은 일상적인 인간사회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
-교회가 너무 진지해질 때, 이 마리아 찬가는 심술궂게도 예언자적으로 되고 또 분노를 담 고있게 된다. 하지만 설교자들에게 있어 이번 주일은 마리아처럼 담대하게 예수의 성육신에 서 시작된 세계의 뒤바뀜을 선언할 좋은 때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뒤바꾸어 놓은 일을 정치적, 사회적, 교회적으로 선언해야하는 주일이다. 예수께서 오시는 일은 마리아같은 백성들에게는 기쁘고 좋은 소식이 될 것이고 힘 있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번 주일은 설교자들이 “바보역할을 할” (to play the fool) 좋은 때이다. 이번 주일은 (교회권력을 포함하여) “현존권력들 ” (powers that be)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풍자하는 성 육신을 위한 준비를 하는 날이다. 성육신은 두 명의 여성들이 웃고 노래하면서 제일 먼저 축하하였고 여관에 방이 없어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와 어리고 결혼조차 못한 엄마를 통하 여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2장 22 ~ 40절 (0) | 2022.08.16 |
---|---|
누가복음 1장 68 ~ 79절 (0) | 2022.08.16 |
누가복음 1장 26 ~ 38절 (0) | 2022.08.16 |
마가복음 13장 1 ~ 8절 (0) | 2022.08.10 |
마가복음 12장 38 ~ 44절 (0) | 2022.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