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13장 1 ~ 8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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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묵시론적 문서는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 거기에는 메시아 도래 이전의 거짓 메시아 출현, 전쟁, 지진, 기근 등의 총체적 재난의 장면이 소개된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가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을 하신다. 모든 공관복음이 정치적 소요, 자연재해, 신자들의 박해 등의 예언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전에 우주적 대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술한다.
  신약성서에서 구원을 언급한 구절 중 1/3 정도가 구체적인 해악 (포로, 병, 귀신들림, 종말론적 공포, 육체적 죽음 등)을 언급한다.

8절의 짧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묵시론적 공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질서, 우리가 수립한 관계들,
우리를 문화적으로 규정하는 온갖 기념물들이 전부 지워져 버린다. 이것은 가장 강력한 의미에서의 파괴이다. 완화될 가능성이나 자비의 여지가 없는 이런 재앙으로부터 아무도 (심지어 신자들도) 피할 수 없다. 옛 시대가 날라가 버리고 새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작은 묵시록이라고 불리는데 (다니엘 7-12장과 요한계시록과 비교해서 작은 분량이므로) 복음에서 예수가 가장 길게 말씀하신 경우가 이곳에서 발견된다. (이 장의 마지막 절인 37절까지 계속 말씀하심) 마가는 성전파괴를 이 시대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연결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묵시론적 맥락에서 구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깊게 생각게 한다.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희망과 도전을 준다. 구원은 정적인 사건이 아니고 회개, 용서, 새로 태어남의 과정이다. 
  예수는 이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오는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파괴에 대한 예언 속에 구원의 씨가 배태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구원은 간단한 요식적 과정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인 변혁이다. 이는 어둠에서 빛으로, 소외에서 거룩한
사귐으로, 죄의식에서 용서로, 억압에서 자유로, 위협과 공포에서 해방과 확신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신학자 제임스 콘은 흑인의 종교전통에서 구원의 과정이 얼마나 강조되는가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흑인 예배는 억압받는 흑인들의 삶에서 체험된 구원 이야기의 실현이다. 노예제도와 온갖 비인간적 대우의 환경은 구원과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매일 묵시론적인 처참한 노예생활을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구원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비젼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묵시론적인 대재앙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믿음의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 재난과 고난을 헤치고 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파괴의 날은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날이지만 깊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의 날이다.
구원을 통해 얻게 되는 새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르익고 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것에 귀기울여야 한다: “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주석적 관점 
 
▶ 진리를 깨닫는 것은 어려운 것이고, 때를 분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마찬가지이다(8:32-33;9:5-6). 그러기에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가를 ‘볼 수 있는 눈’ 과 ‘ 들을 수 있는 귀’ 를 갖도록 도와주었다. 바로 여기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앞둔 주간에 예수는 제자들이 외양 너머를 보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와주고 있다.    

▶ 외양을 넘어서(1-2절)
  어떤 주석가들의 의견과는 달리, 마가복음에서 “ 작은 묵시록” (막13장; 마24장; 눅21장) 이라 불리는 이 본문이 마지막 성전 방문과 감람산 강화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도리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가장 긴 연설인 뒤에 나오는 묵시적 이야기의 적절한 서론이다. 13장은 유대 묵시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묵시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것, 세상은 너무나 악하게 되고 하나님만이 이를 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때에 정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물을 세움으로써 세상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이었는데, 하지만 예수의 성전 파괴 예언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성전을 떠나가려 했을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이 굉장한 건물임을 감탄했다. 그는 아마도 예수가 외양과 실제는 언제나 같지 않다는 바로 앞의(12:38-44)가르침을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성전이 대단한 건축학적 성취임은 분명한데, 예루살렘 성전은 주위 건물들과 더불어 위용을 자랑했다 (요세푸스의 책 참조).
로마역사가 타키투스도 성전을 황금으로 장식된 백석 대리석의 “ 엄청나게 호화로운 성전” 이라 불렀다. 성전의 어마어마한 돌과 뻗어있는 안마당과 주랑을 갖춘 마당, 큰 현관과 발코니, 포장된 산책길, 그리고 대형 계단이 달린 부속건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주었다. 대헤롯은 자신이 가장 번영을 이룬 막강한 통치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성전을 건축했다. 2절의 예수의 성전파괴 예언은 충격적이다. 일차적으로는 헤롯의 성전이 그전 솔로몬이나 스룹바벨의 성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는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그곳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과연 놔둘 것인가? 이를 위해 전 사건들의 맥락을 짚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성전으로 곧바로 갔다(11:11). 그리고 베다니(‘ 가난한 자의 집’ 이란 뜻)로 떠나셨다가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 잎이 무성하지만(leafy)”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그 나무는 말라 죽었다(11:12-14).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와 성전을 정화하셨는데 이는 종교지도자들을 격분케 했다. 이제 성전을 떠나려 하는데 한 제자가 성전의 외양이 잎이 무성하다고 하자(leafy), 성전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신다. 상징적으로 성전에서는 열매 없는 예배를 계속해왔고 – 거기에서 일한 성전지도자들과 같이(11:15-19;12:12,38-40)- 무화과나무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예수의 선언은 외양 너머를 보도록 제자들에게 권고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의 중심이 다른데 있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진리의 분별(3-8절)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감람산을 오른다. 마가에게 산정상은 언제나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그곳에서 열두제자를 임명하고(3:13-19), 기도하고(6:46), 변모하셨고(9:2-8), 이제는 장래에 대한 예언을 하신다(13:3-5).
감람산에서 예수는 성전을 마주보고 앉아서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들에게 성전의 파괴에 관해 말한다. 그러한 일에는 징조가 있게 마련이다. 에스겔은 성전에서 감람산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을 예언했고(겔9:3;10:18-19;11:23),
스가랴는 마지막 날에 감람산이 구원의 중심지로 지명했다(슥14장). 더구나, 제자들의 질문은 다니엘 12:7절의 하나님의 전령의 선언과 비슷한데, 그들이 예수의 성전예언을 종말론적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전파괴의 예언은 그러기에 “이 모든
일들의” (4,23,29,30)의 한 측면인데, 제자들은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의 인도를 구하고 있다. 예수는 두 명령과 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다. 첫째로, 예수는 그들의 장래 지도자들을 잘 분간하도록 충고했다(5b). 이스라엘은 거짓 예언자들을
신뢰하고, 불충실한 지도자들을 따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신13:1-5;왕상13:33-34;사30:9-11;렘23:13,32;29:8-9;미3:5). 예수는 장래에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속이는 지도자들에 대해 경고하신다. 궁극적으로 예수의 조심하라는 요청은 또한 그의 말과 행동을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명령이다 (1:17-18; 2:14-15; 3:7;5:24; 6:1;8:34;10:21,28,52;14:54;15:41). 둘째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소란한 사건이 일어나도 잠잠히 있으라고 충고했는데 왜냐하면 다가올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난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7b-8). 그것은 악이 세상에 만연하고, 온 지구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자체적인 공포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확실하다. 거짓예언자와 전쟁 지진 기근이 만연한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하나님통치의 메시야 시대를 세우기 위한 “ 진통의 시작” 에 불과하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목회적 관점  
 
높이 솟은 건물들은 땅으로 무너지지 않게 되어 있다. 바다는 그 밑바닥에서 뛰어 올라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까지 덮치지 않게 되어 있다. 땅은 흔들리고 출렁거리지 않게 되어 있다. 하늘은 구름을 땅에 쏟아 부어서 마을을 파괴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고, 쓰나미가 여러 나라들을 덮치는 것을 바라보고, 지진을 겪고, 토네이도의 위력 때문에 고생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일들로 인한 피해자들을 돌봐준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깊은 상실감을 드러낸다고 보고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죄를 범했다는 깊고 지속적인 감정에 빠지게 된다.
지금 그들은 그들이 전에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예를 들면 높이 솟은 건물이 영원히 서 있고, 바다가 그 밑바닥에 안전하게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세워 온 삶의 토대였던 근본적인 믿음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땅이 계속 흔들리지 않고 있을지 잠시 동안이라도 겁내지 않고서는 땅에 발을 디딜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그들은 파괴하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지 않은지 두려워하지 않고서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시인 William Buttler Yeats는 이러한 결백함을 잃어버린 느낌을 그의 시 “재림 The Second Coming”의 첫 부분에서 종말의 시간에 대한 묘사를 통해 보여준다.  

점점 넓어지는 소용돌이로 돌고 돌기에 / 매는 매부리를 들 수 없다; / 만물(萬物)이 떨어져 나가, 중심(中心)이 지탱할 수 없다; / 완전(完全)한 무질서상태(無秩序狀態)가 세상에 풀어진다, / 피로 흐려진 호수(湖水)가 풀어져, 사방(四方)에서 순결(純潔)의 의식(儀式)이 익사(溺死)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성전을 떠나가실 때, 제자들이 큰 돌들과 변할 것 같지 않은 건물들에 대해 언급했다. 예수는 성전을 만든 가장 큰 돌조차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해서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예수의 일행이 올리브 산에 함께 앉아서 웅장한 성전을 보고 있을 때, 제자들은 상상하기가 조금은 어려웠지만, 예수의 말씀이 마음에 걸려야만 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따로 예수께 그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지를 물었다. 예수는 수수께끼같은 표현으로, 예수를 뒤이어 올 사람들에게 이끌려 잘못된 길로 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가 비록 예수 자신의 권위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전쟁이나 전쟁의 소문이나 지진이나 기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일들은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징조이다.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예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모든 관심이 성전의 파괴나 재림에 두지 않도록 하는 삶의 방식을 시작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관심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의 초점을 시대의 종말에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문제다. 많은 출판물과 인터넷 사이트들은 모든 비극적 사건, 모든 허리케인, 모든 전쟁, 모든 기근, 모든 토네이도, 모든 지진을 예수의 재림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하는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많은 단체들이 그들 자신의 종말 시계를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주장하면서 “휴거 시기”(rapture index) 를 말하기도 한다. 다른 해석자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서 각각의 날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고, 마지막 날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숨겨진 계시라고 주장한다.
예수의 경고는 어느 때보다 강경하다. 분명히 모든 세대는 자기들이 그리스도가 언제 다시 오실지에 관한 비밀스러운 내부자 지식을 알고 있다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들었다. 이것이 종말의 시간들에 대한 주제를 그렇게 매력적이고 위험하게 만든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일에 집중하느라고 더 중요한 우리의 사명인 이 시대에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에 소홀하게 될 수 있다.
Kathleen Norris는 “종말론”이라는 용어가 한때 그녀를 당황하게 해서, 그녀가 그날의 사건들에 관하여 지나치게 몰두해서, 마지막 날에 대한 공식을 분별하려고 애쓰게 만들었다고 썼다. 점차적으로 종말의 시간들에 대한 두려움을 통하여 그녀가 갈 길을 발견하여,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그 말이 가진 사전적인 정의가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방법으로 삶을 확증해준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가 뛰어난 젊은 학자였는데, 암에 걸렸다. 몇 년 동안 치료받으면서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이후로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으로 광범위한 치료를 받으면서 새로운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의 예후는 기껏해야 불확실한 것이지만 그녀는 다시 가르치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녀가 가르치는 과목의 학과장에게 말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매일 아침이 가진 의미를 알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학과장이 그녀에게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같이 겪어 왔어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그래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요! 그리고 그게 축복 아닌가요?”
공격적인 암이나 다른 질병으로 인한 황폐, 건물의 붕괴, 자연재해의 후유증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어떻게 결백함의 상실에서 살아남을까? 이것이 시대의 종말의 징조라고 저마다 열정적으로 경쟁하듯이 주장하는 목소리들의 한복판에서 어덯게 살 수 있을까?
우리의 초점은 징조 그 자체가 아니라 오실 분-이런 황폐 이후를 보고 축복의 확실성을 주장하는-에게 맞춰져야 한다. 모든 일이 확실하게 산산히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 무정부 상태가 세상에 풀려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은 유지되고-놀랍게도 우리가 보다 신실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설교적 관점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옆에있는 Brandenburg Gate에서 행한 한 연설에서 당시 미국대통령 레이건은 한 도전적인 제안을 했다: “ 고르바초프 대통령님, 이 장벽을 무너뜨립시다.” 이 과제는 당시 사람들의 목표였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래로 서구세계의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종식시키려는 대중운동의 요청을 받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그 억압적 체제하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일이 성취되려면 완전히 새로운 평화와 자유세계가 갑자기 도래해야 한다고 하였었다. 그 날 레이건 대통령은 이 일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열정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같은 전사 모집자들이 오늘 이 본문의 배경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본문은 66-70년에 일어난 유대-로마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이 반란은 다윗왕국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 국가의 순수성과 독립을 이룰 것을 약속하였다. 마가가 이 본문을 썼을 때 성전은 거의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그 직전이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성전은 이 전쟁에서 파괴되었고 재건되지 않았다).  

-어느 상황이든간에 마가가 이 본문을 썼을 때는 마가공동체가 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었다. 반란군은 팔레스타인 농촌지역을 다니면서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시대의 최종목적 (telos) 즉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회복을 가져올 이 마지막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포함된 마가공동체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하였다. 예수와 함께 그들이[제자들]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날 때 그들이 얼마나 이 성전에 매료되었던가!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혹은 놀라운)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혹은 놀라운) 건물들입니까!" 성전의 영광을 회복하고 다윗왕국을 승리를 통해 회복하는 일은 제자들에게 있어 삶의 목적으로 다가왔다. 이 목적이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이루려는 전쟁에 참여를 안하게 되면 이 공동체는 반란군들에게 박해를 받게 될
것이었다. 즉 그들은 동족들에게 배신자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반란군을 모집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압력을 가했고 지금 그러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목적은 여전히 교회의 마음을 끌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매우 가치있는 목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이 세상의 삶(생명, life)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telos)인가?

-베를린 장벽은 레이건 대통령이 그 연설을 한 이후 2년이 조금 지나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냉전체제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세계질서가 과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인가?
아니면 저 끔찍한 9/11테러 이후에 등장했던 부르는 소리를 생각해보자. 그 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여하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테러리스트들을 이 세상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문명사회를 구하는 일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테러리스트들로부터 자유하게된다 한들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져있는 그 세상이 과연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일까?

-주일 아침 이 본문을 듣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인 교회에서 GLBT (gay, lesbian, bisexual, and transgender-남성동성애자, 여성동성애자, 양성애자, 그리고 성전환자)문제로 고심하는 교회를 생각해보자. 우호적인 그룹이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자신들의 목적은 교회의 평화, 일치, 순결을(peace, unity, and purity)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그룹이 원하는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인가?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연설에서 예수는 메시아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왕국과 성전을 회복하는(restore) 마지막 전쟁을 외치는 것은 바로 젤롯당원들이[무장독립파] 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한다. 성전의 회복과 다윗왕조 영광의 회복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telos)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영광 중에 도래하는 인자에게서 이루어진다 (막 13:26-27) 예수는 “ 주의하라” (beware!)라고 말한다. 반란군을 모집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여라. 그들의 목적에 너희들의 생명을 맡기지 말라. 그들이 말하는 달콤한 약속은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목적을 너희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아라. 그 대신 참고 하나님의 목적을 붙잡아라. 그 목적은 인자가 올 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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