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장 26 ~ 38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6.
728x90
반응형
SMALL

신학적 관점

    개신교인들에게는 대림절 넷째 주일이 마리아라는 인물에 집중하는 유일한 주일일 것이다. 마리아는 수태고지 이야기(가브리엘 천사에 의한 성육신의 선언)를 다루는 오늘 본문의 중심에 서 있다. 열두 구절 안에서 마리아는 은혜를 입고, 당황하고, 사려가 깊고, 두려워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마리아는 질문하고, 믿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순명한다.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가 연관되는 것을 고려할 때, 예술가들이 마리아를 매우 다양하게 그린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태고지(The Annunciation)"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들을 보면 두려워하고, 품위 있고, 단호한 마리아의 모습이 금방 드러난다. 어떤 그림은 마리아와 가브리엘이 오랜 친구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다른 그림에서는 마리아가 가브리엘이 전해주는 소식에 놀라 그의 발아래 앉아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마리아를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표본, 즉 흠잡을 데 없는 교인의 대표자로 간주해왔다. 마리아는 절대적 순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함으로 하나님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인물로 높은 평판을 받는다.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기 그리스도를 낳도록 부름을 받은 복 받은 자이며, 자신처럼 미천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갈망하는 "주님의 종"이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선택되었고, 그녀는 전심으로 그 사명에 참여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선택과 그에 대한 그녀의 반응의 특징에 관한 해석에 대해서는 역사상 매우 다양한 열띤 토론이 있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은혜를 입은 자" 또는 "축복받은 자"라고 호칭했을 때, 그 안에 무슨 뜻이 담겨있었는가? 가톨릭 신학자들은 가브리엘의 인사를 통해 마리아의 특별한 성품이 강조되었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죄가 없고, 또한 어머니면서 동시에 영원한 처녀이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신교 신학에서는 마리아와 관련된 비범성(extraordinary thing)을 그녀의 평범함(ordinariness) 속에서 찾으려 한다. 마리아는 만인 제사장 중의 하나로, 죄인인 우리 모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중요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신비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자 칼뱅은 가브리엘의 "은혜를 받은(favored)"이라는 호칭이 마리아가 "칭송을 받을만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보다는,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오직 경외를 받으실 한 분인 "하느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은 "행복한 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논쟁거리는 우리가 마리아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 한 것은 그녀가 가브리엘의 말을 의심하였다는 뜻인가? 만일 그렇다면 눅 1:18-20에서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 벌을 받은 것처럼 마리아도 벌을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자유와 자율을 중요시하는 오늘의 시대와 문화 속에 우리에게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질문은 과연 마리아가 성육신의 과정에 자유롭고 능동적인 태도로 참여했는가이다. 마리아가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 수동적인 도구의 기능을 하고자 자신을 버리겠다는 의미인가? 만일 그렇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이 자발적으로 공헌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하나님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을 위한 모범인가?

  가브리엘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도움이 되는 개혁교회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전적 타락, 기독교인의 소명, 그리고 “이중적 주체성(double agency)”교리이다. 아마도 마리아의 처녀성에 관한 언급은 가브리엘의 메시지에 관한 의심보다는 놀라움에 의해 촉발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고려할 때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 즉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 자체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는 모두 타락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처녀이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우리 자체로그리고 우리 스스로 임신할 수 없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마리아의 반응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참여를 지나치게 능동적으로나 (자율적인 인간이었던 마리아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반대로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기독교인의 소명에 관한 교리가 이 문제를 명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마리아의 순종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강제된 것도 아니었다마리아는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을 바칠 때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소명에 응답하는 유일한 참된 선택이었다그것이 실제 그녀가 누구인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마리아는 아기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함께 창조적인 동역자이자 행위 주체로서 행동한다. 마리아의 참여의 이중적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451년에 채택된 칼케돈 신경이다. 아직도 정통적 신조로 여겨지는 그 신경에 따르면 신성과 관련하여서는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바로 그 동일한 존재"가 인성과 관련하여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로 하나님 및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뿐 아니라, 성육신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밝히는 것을 통해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함을 강조한다. 가브리엘은 특정한 시간(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특정한 장소(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에서 특정한 여성(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을 방문한다. 신학자들은 "특수성의 난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지전능한 우주의 창조자가 역사적 실존의 특수성 속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우리는 설명하기 힘들다. Theotokos("신을 낳은 자")로서의 마리아에 관한 5세기의 논쟁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태 속으로 신이 들어갔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로서 신의 전능성과 모순된다고 신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거부하는 기존의 신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특수성의 난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 신적 내재가 끼치는 혁명적 효과이다. 예수를 통해 결정적으로 알려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 속으로 들어와 우리와 섞이신다. 최근에는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폭행을 당한 것이라는 연구도 등장했다. 그러한 위험한 해석에 대한 반론에 몰두하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부름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부여한 자아상을 어떻게 깨뜨리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의 부름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을 잉태할 수 없는 "동정녀">로부터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믿음을 갖고 행동하는 창조적 행위주체자로 변화된다.

  주석적 관점

많은 면에서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의 임박한 기적적 탄생을 알리는 장면은 이스마엘(16:7-13), 이삭(17:1-21; 18:1-15), 삼손(13:3-20) 그리고 더 명확하게는 세례요한의 탄생(1:8-20)과 거의 흡사하다. 이 본문은 왕국의 언약과 관련한 신비한 탄생에 대하여 성서 속에서 방대하게 등장하는 기존의 이미지들의 예수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인간의 역사와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들 속에서 기적적인 탄생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일련의 컨텍스트 안에서 예수의 탄생을 배치시킨다.

그러나  이야기는 고전적인 패턴에서 벗어나있다예수의 독특성은 기적적인 탄생이라는 고전적인 형식과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의미들 모두를 긴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누가의 서술에서 예수 탄생의 경이로움은 다른 초자연적 탄생들의 의미를 넘어선다그리고 예수의 독자적인 메시아로서의 운명은 고대의 언약들의 의미를 다시 쓰게 만드는 것이다.

특별한 탄생이 고지되는 성서의 이야기는 신적인 존재의 등장, 신적인 존재와 맞닥뜨린 이의 두려움과 혼란, 메시지의 전달, 메시지를 받는 이의 거부, 최종적으로 신적인 존재로부터의 약속이나 축복이라는 일관된 패턴이 있다.  구조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틀을 만드는 것보다  많은 의미가 있다.  구조는 인간 역사에서 신적인 개입의 어려움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주로  이야기는 인간의 저항이 함께 등장한다. 이것은 실행되고는 있지만, 실행되지 않는 약속이라   있다. 또한  약속은 또다른 약속이 뒤따라 온다. 예수 자신의 메시아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구조의 범위 안에 있다.

 고지사건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기적적인 탄생에 대한 고지로서는  번째로 나온다. 가브리엘은 마리아 뿐만 아니라 1:8-20에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스가랴에게 나타난다. 그래서  본문은  주의 날을 준비하는 엘리야(4:5) 역할을 하는 세례 요한과 예수를 조심스럽게 연결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누가는 조심스럽게 예수를 요한보다  끌어올리면서도, 요한의 특별한 소명과 위치를 강조한다.  예수는 7:28에서 자신을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 요한보다   인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크다." 라고 표방한다.

가브리엘이 기독교 전통 안에서 핵심적인 존재라 하지만, 성서 속에서 가브리엘은 누가의  번의 탄생을 알려주는 장면과 다니엘서에 임박한 분노에 대해 알려주는(8:15-27) 장면에 나올 뿐이다. 오늘 본문에서 가브리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의 후손과 약혼한 처녀에게 보내진다. 본문의 핵심적인 기독론적 의미는 마리아와 요셉이 드러남으로써 나타난다. 요셉은 "다윗의 가문"이다.  가계는 예수의 메시아로서, 왕으로서의 지위에 매우 중요하다.  마리아는 처녀이다. 헬라어에서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많은 단어가 사용되지만 누가는 처녀성과 관련된 단어와 선택했다. 마리아 그녀 자신이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한다."(1:34) 항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처녀성은 누가복음(그리고 기독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에 대한 특정한 호칭이자, 주장을 전파하고 일반화시킬  있도록 한다.

가브리엘의 시작인사는 마리아 자신과 다가오는 탄생에 대한 특별한 성격의 신호이다. 마리아는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마리아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천사의 알려줄 때의 전형적인 반응의 모습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쨌든 가브리엘은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여, 너는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었다."라고  고지의 긍정적인 성격을 알려준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메시지의 본론을 전달한다. 마리아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들의 운명에 관계된 1:32-33 메시아 이미지들은 본문의 기독론적인 핵심이다.  구절들의 각각의 이미지는  누가의 예수 이야기의 토대이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왕좌에 앉아, 영원히 통치할 메시아로 그려진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것과 같이, 임박한 십자가 처형과 메시아 언약들 사이의 역사적 모순에 대한 단서는 없다. 예수는 여기서 또한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 명명된다. 이런 메시아 고지에 대한 컨텍스트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는 "신적인 능력과 임무를 받은 "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마리아의 처녀성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는  단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리아의 대답은  새로운 의미를 보여준다. 그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있는지 놀라워한다. 왜냐면 그녀는 "남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독자들은 그녀의 대답이 약간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말해왔다. 일반적으로 약혼했다는 것은, 마리아가 요셉과 (육체적)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다윗의 가문의 요셉을 통하여 다윗형통의 메시아를 임신하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마리아의 항의는 그녀가 계속 처녀로 살아왔다는 것이나 처녀를 통해서 새로운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신학적 목적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물음은 일반적인 혼란스러움에 대한 표현이다.

어쨌든 가브리엘은 그의 두번째 발언에서  혼란스러움을 없애버린다.  그는 성령과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 말한다. 그는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수태를 언급하며, 하나님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전한다. 그녀에게 임한 성령이나 능력에 대한 표현 속에 성적인 의미는 없다. 누가는 처녀 탄생에 대한 생물학적인 설명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대신 누가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상기시킨다.  (가브리엘을 통한)  과감한 새로운 기독교적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부른다는 것의 신비로 계속 남긴다.

 수태고지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성격을 가졌지만, 마리아의 대답은 유대적(그리고 기독교적) 의로움의 유형 안에 있다. 그녀는 그녀의 물음을 거두고 그녀 자신을 "하나님의 "으로 명명하고, "당신의 말씀" 그녀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이런 모든 면에서 기독교 전통안에서 마리아가 가지는 특별한 위치는 시작되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크리스마스 전 주일에 사람들은 기적을 위한 분위기 속에 있다. 수태고지에는 이 갈망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재료가 포함되어 있다. 난데없이 천사가 나타나서는, 한 처녀에게 그녀가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이 놀라운 일에 더해서 천사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사건을 언급한다. 임신할 수 있는 나이를 훨씬 넘은 한 여인이 임신 6개월째라는 것이다. 그들의 절묘한 신비를 넘어, 이런 놀라운 탄생 예고는 삶의 불확실성과 의문에 한복판에서 격려와 확신을 구하는, 성탄절에만 교회에 가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제공한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그저 조심스럽다분주한 종교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마을에 살면서 그녀는 그녀가 유일하게 특별한 역할을 할 운명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벽지에서 주제넘지 않게 살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이런 생각은마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나 숲 속의 화재혹은 지역 공동체의 멤버가 이루어 낸 성취로 인해 자긍심을 가지게 된 작은 마을들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처럼갑작스럽게 마리아를 방문한 천사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악명이든 호평이든 주요 대도시 지역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가 되도록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측 가능한 영역에서 벗어나 기대하지 않고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자기를 열게 할 기회이다.

4세기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주님, 내가 주님께 아뢰고 싶은 모든 것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태어났을 때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죽음이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말해야 할까요? 이것이 내게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기 부모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는지를 아는 외동이들은 다른 사람의 꿈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눌리게 된다. 막내딸은 부모가 의도적으로 많은 가족을 가지려고 했는지, 자기가 태어나서 가정 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어머니 태속에 생기기 전에 그를 아셨다( 1:5). 예레미야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천사 가브리엘의 말은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과 의도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 일어날 일들을 명기하시고, 마리아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는 계획을 세우셨다. 세부적인 내용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임신하기 이전부터 인간 존재의 전개에 참여 하신다. 이러한 깨달음은 죄책감, 후회 또는 실망을 안고 있는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다.

우리가 운명을 완전히 책임지고 있지 않다는 인식은 우리 인생을 통해 계속해서 되살아난다. 기쁜 소식이든 슬픈 소식이든, 놀라운 소식은 마리아가, 주 하나님께서 신성과 왕권을 주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했던 질문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는 암이 소멸되거나 비관적인 예후와는 달리 불안정한 혈구수가 정상이 되어서 간병인을 놀라게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는 말은 누군가를 자극하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제 그와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라고 말하게 한다. 이웃, 공동체 또는 학교에서 재난이나 재해가 발생하면 집단적인 고통의 탄식이 일어난다. 마리아의 당혹은 놀라운 소식에 적응하고, 시련과 비극, 또는 하나님의 장엄한 약속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묻고, 그 일이 어떤 영향을 가져올 지를 숙고할 시간을 가지는 권한을 부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적용하자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숨겨져 있는지를 상기시켜줌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구체화시키는, 반복되는 후렴이다. 이 네 마디의 절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잘 나타낼 수 있다.

누구든지 천상의 존재가 개인적으로 방문한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권위나 가난을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은 종종 천사 가브리엘과 같은 방식으로 곤란하거나 부담스러운 일을 담당할 사람을 모집한다. 어떤 직원이 감당하기 힘든 승진을 제안 받았을 때, /그녀는 마리아처럼 자기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거나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책임감을 함께 지는,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는 “은혜를 입은 자”이다. 지도적인 직책에 선출된 교인들은 동료 교인들이 자기를 신뢰해서 치켜세워졌지만, 불안감을 토로하면서 “왜 내가 이 직책에 선출 되었을까?”라고 속삭인다.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의 신뢰에 부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때로는 실현 불가능한 기대를 전달하는 기회가 제공된다.

천사 가브리엘은 성령이 그녀를 감싸 줄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마리아의 의심을 뒤집어 놓는다그리고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녀의 친척 엘리자벳이 늙어서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놀라운 목적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강조하고“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설명한다이 후렴구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대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지지와 위로와 용기를 전해 준다.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투쟁에 얽매인 명예다. 그 시대에는 미혼 여성이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웃들이 그녀를 경멸하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탁에 따라 기꺼이 그 일을 진행하려는 마리아의 의지를 가로막지 못한다. 수태고지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칭찬할 만하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인생과, 그녀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인생이 다시 정렬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용기를 꺾는 말을 하는 사람보다, 인간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더 신뢰한다. 아마도 마리아의 말은 하나님의 크리스마스 소원을 전달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을 것이며,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기적을 이루시도록 초대할 것이다.

 설교적 관점

  -대부분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어린시절부터 익숙하고 사랑받던 이야기를 다루는 일은 부담이 된다. 그렇지만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풍성한 설교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세 가지 뚜렷한 주제가 그것이다: 거룩한 것의 침입,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 그리고 다가올 예수탄생 고지를 하는 가브리엘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  

 거룩한 존재의 침입 (Inbreaking of the holy)

-헨리 태너 (Henry Ossawa Tanner) 1898년 그림“수태고지” (The Annunciation)에서 누가가 가브리엘이라고 밝힌 이 메신저가 거룩한 존재(holy being)라고 한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 천사는 팔레트[침대보] 위에 앉아있는 마리아 앞에 현현하는 한 줄기 밝은 빛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그녀가-혹은 우리들도 이전에 본적이 없는 존재이고 인간의 경험이나 인식 너머에 있는 광채(radiance)이다. 그 거룩한 존재는 이 땅으로,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 (26), 또 특별한 공동체 안에 (27)있는 특별한 사람에게 하나님에 의해 보내어져서 뚫고 들어왔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우리 역사 속으로 침입해오는 방식을 예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심지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의 탄생선포조차도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상상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의 수태에 대해서도 말했듯이,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7). 우리는 인간의 곤경을 전쟁의 위협에 놓여있는 상태라고 하든 혹은 파괴된 삶의 모습이라고 정의하든 그것은 회복되거나 변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누가는 구원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과 삶,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인해 그 거룩한 존재가 계속해서 우리의 삶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고 우리를 창조의 완성과 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닌 하나님의 통치(already-and-not-yet reign of God)에 보다 가깝게 이끌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Being Favored by God)

-두 번이나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을 알게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을 입는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볼 것이다. 세속적 이해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도덕적 혹은 정치적(아니면 둘 다) 선한행위로 인해 얻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이 견해는 하나님은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좋아하고 혹은 역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다시 하나님께 복을 되돌려 드릴 힘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로버트 테인힐 (Robert Tannehill)이 지적하듯이 하나님은 마리아를 선택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사회에서 어린 소녀이고 마리아찬가에서 (1:47-55) 자신을 천하고 가난한 존재라고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인간의 영역에서 그녀는 환영을 받는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마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마리아 찬가를 기대하게 한다. 정의로 다스리고 또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을 마리아에게 부어주는 데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에서 구체화된다.    

-에르네스또 까르데날 (Ernesto Cardenal)의 책 “말씀이 우리와 함께-솔렌티나메 농어민들의 복음대화” (The Gospel in Solentiname)는 니카라구아 호수 (Lake Nicaragua) 주변 시골에 살았던 농장노동자들, 농부들, 어부들이 모여 복음서를 읽고 토론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으며 그들은 가브리엘의 호의를 담은 인삿말이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까지 확산되어 오는 것을 듣는다. 왜냐하면 그 천사에 의하면 이 구세주, 이 해방자는 그들 곧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이 필요한 사람은 부자가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야”라고 한 사람이 말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해방이 될거야”라고 또 다른 사람이 응답한다. “우리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부자는 그들 스스로 곧 그들의 부(wealth)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노예이기 때문에.  

-이것은 [미국에 살고있는]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하기 어려운 그러한 복음이다.  감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 엉망진창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회복하고 드러내고 또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포하겠는가?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복음이 현재의 세상을[지배체제를] 뒤집어 놓을 것이고(upside down) 그 소식이 [미국에서]아주 좋다고 선포하겠는가?

  마리아의 응답(Marys Response)

-마태에서는 요셉이 예수의 어릴적 이야기에서 모든 주목을 받지만 여기서의 초점은 마리아이다. 그리고 그녀는 주목을 받는 모습이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서가 이 젊은 여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과 천사의 놀랄만한 고지에 대한 그녀의 응답에 주목하려고 한다. 앞에 언급되었던 태너(Tanner)의 그림에서 마리아는 여전히 마르고 안짱다리의 모습을 한 젊은 틴에이저 소녀이다. 그녀의 얼굴은 무언가 소통을 하는 표정을 짓고 있고 동시에 경계와 호기심, 조심스러움과 단호함 모두를 지니고 있다. 비록 그녀는 가브리엘의 메시지가 지닌 온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 소식을 단순하게 수동적으로 받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닥친 거룩한 혼란에 능동적으로 의지를 지닌 파트너로서 응답한다.    

 -그녀의 응답으로 인해 마리아의 자궁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세상으로 가져오게 하였다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마리아를 생명수의 원천으로 보았고 “아버지의 가슴으로부터 샘솟은 충만함을 받은 송수관이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었고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품을 수 없었다.   세례준비자나 입교준비자를 둔 교회는 자궁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시키는 세례예식을 기대할 수 있다초기교회에서 세례용 물통중 몇몇은 원형이었는데 그것은 자궁의 모양을 뜻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마리아의 자궁의 생명수가 하나님 보좌에 있는 은혜의 샘물을 우리에게 보내는 통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우리 역시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듯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세례반[세레용 물통 ]이라는 자궁으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관점

이번호에서는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국제적인 평화를 다루는 기사를 살펴 보았다.

먼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치의 난민송환]이란 제목의 미얀마의 로힝야 난민 송환에 관한 기사이다. 로힝야족은 잘 아는대로 불교국가인 미얀마에 사는 무슬림을 믿는 소수민족이다. 이들에 대한 미얀마정부와 불교도 폭도들의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위협당하면서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로 쫓겨나고 있다. 이를 방관하고 있다고 실제적인 미얀마 통치자인 노벨평화상를 수상한 국가자문역 아웅산 수치를 향한 국제적 비난도 높아져 가고 있다. 지난 1128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얀마를 방문해서 수치여사를 만나 이 문제에 대해 관심과 변화를 촉구했다. 하지만 여전히 로힝야족의 고난은 계속되고 있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문제이기도 하다. 1978 4월 당시 네윈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그해 말까지 로힝야난민 약 20만 명이 방글라데시로 쫓겨났다. 423일 버마(미얀마) 군인 30명이 방글라데시로 국경을 넘어가는 무슬림(로힝야)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군인들이 여성들의 가슴을 자르고 이내 칼로 찔려 죽였다. 39년 전 기사인데 오늘날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사이다. 우리의 광주5월의 기억도 되살리게 하는 기사이다. 당시에도 방글라데시정부는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며 양국간 난민 송환에 합의했지만 정작 이들은 돌아가길 거부하고 이에 난민들의 식량배급량을 일부러 줄였다.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1978 5월부터 12월까지 총 1만명이 굶어 죽었다. 아사자 가운데 70%가 어린이였다. 결국 난민들은 난민촌에서 굶어죽기 보다 미얀마송환을 택했다. 2차 송환 때인 1990년대 상황도 인도주의 원칙에 위배되기는 마찬가지였다. 1991년 후반부터 이듬해 중반까지 25-30만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했다. 이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되거나 보수를 받지 못하고 식량제공도 전무했다는 것이다. 지난 1123일 다시 미얀마와 발글라데시 양국은 로힝야난민 송환에 합의했다. 지난 석 달간 총  62 4251명의 난민이 발생했는데 이들 또한 마을을 불태우는 미얀마군과 불교도 폭도들을 뒤로 한 채 국경을 넘어 온 사람들이다. 이들 난민들은 시민권과 인권, 각종 손실에 대한 보상 그리고 유엔이 보장하는 안전을 요구하고 있다.

또 다른 기사는 여행작가 환타가 쓴 [인도를 좀 안다고 떠들어왔건만]이다.

인도에서 겪는 문화충격 중 하나는 길에서 스스럼없이 ‘큰일’을 보는 사람들이다. 기차 여행 도중 해 뜰 무렵 창밖을 보면 기찻길 옆에 일렬로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인도인들의 ‘집단 군무’가 펼쳐진다. 어떤 해변도시에서는 이른 아침 그 마을 사람이 모두 해변에 나와 바닷가에 볼일을 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렇게 인도사람들이 기찻길이나 해변에서 배변을 하는 이유는 집에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2017년 유니세프에 따르면 전 세계 약 55000만 명이 길에서 배변을 한다. 그나마 인도는 최근 몇 년 사이 화장실 건설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인도에서 화장실이 부족한 이유는 복합적인데 우선 상수도 문제가 있다. 농촌 인구가 절대적인 인도에서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하수도를 설치하는 건 요원하다. 그러니 우리처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는 건 꿈도 꾸기 힘든 사치다. 종교적 요인도 있다. 힌두교는 청결함과 불결함을 극단적으로 구분하고, 이게 결국 카스트로 이어진다. 청결한 일을 하는 사람은 상층 카스트이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람은 하층 카스트에 속한다. 그러나보니 불결함을 상징하는 화장실을 집 안에 두는 건 힌두교 전통에서 용납할 수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들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화장실 건설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은 2014년 사촌 자매가 심야에 야외에서 용변을 보다 성폭력을 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인 화장실 건설운동으로 집에 화장실을 만들겠다면 우리 돈으로 20만원 가량을 지원했다. 돈을 떼먹는 사건도 비일비재하자 후불재로 바뀌었다. 이제는 인도를 여행해도 노상 배변을 보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계속 늘어나던 인도 성폭력 범죄율이 화장실이 집중적으로 건설된 지역을 중심으로 감소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관련된 평화에 관한 기사로 대기자 문정우가 쓴 [코스타리카를 꿈꿔도 될까요]이다. 그는 군대를 간 늦둥이 막내의 방을 보며 군대 없는 코스타리카를 생각하게 된다. 코스타리카는 1940년대에 군대를 폐지했다. 그리고 관광대국으로서 유엔 평화대학과 각종 시민단체를 유치해 선의의 안보력을 키워 온 나라이다. 한반도가 전란에 휩싸이게 된 중요한 이유로 강대국 사이에 낀 지정학적 특수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코스타리카도 만만치 않았다. 쿠바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서로 어느 편이냐고 묻는 험악한 상황을 이겨냈다. 파나마, 니카라과,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주변이 온통 내전에 시달리거나 군부가 통치하는 나라여서 언제 전쟁의 불똥이 튈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 코스타리카 지도자들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자국을 평화를 상징하는 남미의 등대로 자리매김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스카 아리아스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부유한 군사 계약자들은 전 세계에 첨단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약화한다. 국내의 납세자들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해외의 독재자들을 강하게 만들고 인간의 비참함을 더욱 악화시킨다.” 물론 이 나라에도 빈부격차도 있고 강력 범죄도 일어나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즐겁게 산다는 점에서는 독보적으로 세계 1위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하루 중 세계에서 가장 자주 웃는다고 한다.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은 만개한 민주주의이다. 이 나라에서는 평범한 대학생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을 지지한 대통령에 대해 소를 제기해 승소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초등학생들이 놀이터를 밀고 주차장을 만들려는 교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청소년들은 자유롭게 자기가 좋아하는 정당의 행상에 참여한다. 뜻만 있다면 정치 신인도 공탁금 한 푼 안내고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EBAIS라는 의료시스템을 갖추어 의사, 간호사, 기록관리자, 그리고 몇 명의 기술자로 이루어 진 팀이 각각 3500명 정도의 국민을 할당받아 방문하여 관리하는 제도이다. 이들은 매일 10가구 이상을 방문해 진료기록을 업데이트하고, 혈압을 재며 백신을 나눠주고 조언을 한다. “이 모든 일이 군대를 포기하는 데서 비롯했다면 우리도 코스타리카를 꿈꿔도 좋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문기자의 결론인데, 얼마 전 방한한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말처럼 “국방 예산을 감축해야 하며, 교육받은 국민이 가장 뛰어난 무기”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보면서 북핵 위기로 전쟁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는 한반도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오래전부터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온 사람들이 많다강대국 사이에 끼여 항상 전쟁의 참화를 겪고 급기야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한 평화의 과제를 해결할 방안이라고 생각해서 이다코스타리카처럼 군대를 없애기는 어려워도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처럼 영세중립국을 추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728x90
반응형
LIST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장 68 ~ 79절  (0) 2022.08.16
누가복음 1장 39 ~ 45절(46 ~55절)  (0) 2022.08.16
마가복음 13장 1 ~ 8절  (0) 2022.08.10
마가복음 12장 38 ~ 44절  (0) 2022.08.10
마가복음 12장 28 ~ 34절  (0) 2022.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