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20세기에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던 신학적 주제 중의 하나가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고 (갈5:22), 믿음·소망·사랑 중 제일이고 (고전13:13),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요일 4:8) 구절들을 생각해 볼 때 아가페에 관한 큰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토라에서 가장 중요한 두 계명임을 선언한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신적인 사랑 (divine love)이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우리의 반응에 불과하다.
예수가 본문에서 명확하게 밝히듯 하나님 사랑은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는 것을 말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30절) 토라 준수의 핵심과 하나님 나라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는 전적으로 반응적이지만, 이웃을 향한 아가페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에 속한다. 이웃 사랑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을 뜻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제1계명은 이웃 사랑의 한계를 설정한다. 더욱이 이웃 사랑은 근본적으로 상대의 상태에 초연한 것으로, 관능적인 사랑이나 우정과는 구별되고, 이웃의 존중할만한 품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와 반대로 이웃은 그들이 사랑을 돌려주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가페는 원수에게도 주어야 하는 사랑이다.
(마5:43-48) 이웃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이웃을 매우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자체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본문 해석의 다른 가능성도 있다.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과 유사한 종류에 속하는가?
예수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하면서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자기 사랑을 자만과 이기심과 비슷한 것으로, 아가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여겨왔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을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함으로 자기 사랑이 소멸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기 사랑이 아가페로 대치되어 모든 인간관계의 근거가 된다. 이웃의 행복을 추구함으로 우리는 나에게 속한 것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모든 신학자들이 자기 사랑과 아가페를 대립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막12:31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의 자기 사랑은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라는 암시를 한다. 아퀴나스는 자기 사랑 자체가 죄의 뿌리가 아니고 자연스런 범위를 넘어서서 과도하게 탐욕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요구 안에는 자연스런 자기 사랑과 아가페 사이에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다음은 아가페와 정의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20세기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를 지배했던 기독교 현실주의는 아가페를 윤리적 이상 (ethical ideal)으로 여겼지만 역사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Reinhold Niebuhr는 예수의 아가페에 담겨있는 사심 없음 (disinterestedness)의 요구는 “ 불가능한 가능성” (impossible possibility)으로서 인간의 실패를 확인시켜주는 잣대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 대신 정의가 사랑의 근사치로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도덕적 삶의 규정적 원칙의 역할을 한다고 니버는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가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 중 두 번째로 강조할 때, 예수는 우리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이상을 제시한 셈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 요구는 모든 인간이 내적으로 평등하다는 기초적인 정의(justice)를 바탕에 깔고 있다. 니버는 우리가
아가페의 실현 가능성을 강조할 때 우리는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빠져서 인간의 유한성에서 기인하는 현실적인 갈등을 무시하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심없는 이웃 사랑의 이상>과 <역사적 실존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인간 간의 이익의 충돌> 사이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른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아가페의 현실적 불가능성과 정의와 아가페에 관계에 대한 이런 입장에 반대한다. Paul Ramsey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아가페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고, 제자들에게 그런 사랑의 가능성과 우선성을 가르치기 위함이라 강조한다. 가장 큰 두 계명은 예수의 제자도의 표지가 되는 신적인 이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니버와는 반대로 램지는 정의란 단순히 사랑의 불완전한 근사치가 아니라, 우리가 둘 이상의 이웃의 요구에 대해 사랑을 실천할 때 필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한 확고한 헌신에 전적으로 지배되는 삶의 방식을 따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가페는 이웃을 위한 실천 가능한 자기 희생의 사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주석적 관점
▶ 교회력이 끝나가는 시점이여서인지, 마가의 고난설화 속에서의 이 본문을 배치한 것은 애매해 보인다. 하지만 설교자들은 이 구절들의 이야기의 배경이 많은 부분에서 풍부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는데,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이 일화는 이런 원리들을 예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세부사항들인데, 결론적 구절은 그것의 맥락을 독자들이 어느 정도 아는 가에 달려있다.
▶ 마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인기절정이었음을 말한다. 군중들은 예수의 오심을 다윗의 왕국 도래와 동일시했다. 11:18에 따르면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를 두려워했다(11:18,32;12:12). 더우기 예수는 그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지혜와 기적적 능력을 보이셨다. 마가는 이러한 예루살렘에서의 사건들을 예수가 복음서 모든 곳에서 극복하고자 했던 사역의 절정으로 기술했고, 여기서는 일종의 영적 충격을 주고 있다. 불편하지만 그의 말에 무화과나무도 시들게 된다. 마가가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고 했을 때, 예수를 공식적으로 의심할 여지없는 예루살렘의 챔피온으로 기술한다. 예수의 탁월함은 그의 이어지는 메시야와 성전 그리고 주의 날에 대한 가르침에 의심할 여지없는 권위를 부여한다.
▶ 율법학자에 대한 대답에서 주의할 사항은 비록 마가가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계명들의 중요성을 소홀히 여기지는 아니한다. 비록 율법학자들의 예수의 답변에 대한 가장된 시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번제와 희생을 대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답변은 부자가 영생에 관해 10:17-21에서 물었을 때와 같이 명백하게 유대적 전제에 의한다.
울법학자들은 그러한 답변의 현명함을 알고 있다. 다른 동시대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찮은 문제로 여기지 않았고, 그리고 여러 교사들도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비교할 수 있는 관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야기는 비록 그를 경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수의 예증의 정확함을 보여준다. 이 인용구의 끝에 예수의 대적자들은 그를 고소할 정당한 근거가 없음을 말한다. 마가는 예수가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그들이 전문식견을 가지고 있는 토라(율법)에 대한 논쟁에서 이겼다고 말한다.
▶ 본문은 마가가 위선적이라고 묘사하지 않는 한 인물로부터의 그럴듯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고 대답했다. 전반부 대답에서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율법을 따라야 할 우선적 이유가 없다. 마가는 마음, 목숨, 힘이라는 세 가지 기관의 기능을 말하며 뜻이라는 이성적 숙고의 기능을 추가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 영성, 생각, 그리고 힘을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삶의 길에 헌신하게 한다. 예수의 후반부 대답은 순종을 뒷받침하고 강화하는 상호성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우선적으로 두지 않는 제자들은 공동체를 묶어주는 무제한적 평등 같은 것을 나타낸다. 갈등은 다른 사람의 안녕보다 자신의 특권을 우선하는 것에서 온다.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이웃들은 율법을 따르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상호간의 적절한 관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그리고
레위기)는 치료적 의미에서 “ 자신을 사랑하는 것” 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상식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그는 자기혐오에 대해서도 눈살을 찌푸리지만 여기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지 비교적 수단으로 도입한다. 그들의 모든 존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이웃을 자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토라(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 예수께서 율법학자가 그의 대답을 수긍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는 에둘러서 부정적인 축복을 주고 있다.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과 기대의 수수께끼 같은 실체로 종종 묘사한다. 질문했던 율법학자도 제자들이나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사람으로 분류된다. 아무튼 이 구절의 의미가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는 율법학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
▶ 마가는 이 설화를 예수가 성전 부근에서 가장 건전하고 통찰력 있는 성경 주석가였음을 확실히 하고자 사용했다. 예수는 모든 바른 교리와 행동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선시함으로 자신의 권위를 나타냈다. 율법학자는 지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졌지만, 예수는 다른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정확한 답변 이상을 함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짧은 몇 절 사이에 예수는 이 구절의 공격할 수 없는 권위의 정점에서 끌려 내려와 십자가상의 불명예스런 죽음으로 향하는데 이는 율법학자나 우리 모두에게 전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댓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신학적 분열을 넘어서는 정중한 대화는 최근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는 한쪽에 속한다는 것이 다른 쪽에 대한 변절이 되는, 교단 총회장에서 벌어지는 심한 언쟁에 익숙해져 왔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경의 올바른 해석이 모든 분쟁의 바탕에 깔려 있다.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 앞에 나온 격렬한 논쟁도 다를 바가 없다. 먼저, 대제사장, 율법학자, 장로들은 예수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11:27-33). 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는 비유를 말한다(12;1-12). 다음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 몇 사람이 인간에게 충성하는 일에 관해 질문해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12:13-15a). 예수는 질문과 명령으로 반격한다(12:15b-17). 마지막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의 해석학적 편견은 마가에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부활에 관하여 가상의 상황을 제시한다(12:18-27). 예수는 결점이 있는 해석을 사용하여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신다.[James Luther Mays’ s 탁월한 글, “ Is This Not Why You Are Wrong?” Interpretation 60, no. 1 (Jan. 2006).을 보라]
마가의 상황을 우리 자신의 상황과 연결시켜 보면, 예수와 율법학자 가운데 한 사람과의 만남은 이례적이다. 율법학자가 앞선 논쟁에 드러나지 않게 관여하여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수의 본문 해석이 그 자신의 해석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의 본문 해석에 감동받았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 대한 예수의 이해는 율법학자를 논쟁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노회장에 있든, 성전에서 회중집회의 사회를 하든, 아니면 거실에서 교회 위원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든, 우리가 성경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우리의 입장을 서로 나누게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 목회에서 그리스도를 다시 소개하려고 한다면, 그 목회는 훈련된 연구와 학습된 성경읽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신학적으로 씨름하도록 인도하게 된다. 율법학자와 예수가 신학적으로 반대편에 있고 분명하게 서로를 존중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념적 분열을 넘어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구원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게다가, 앞서 있었던 논쟁에서 그가 예수가 하는 말을 호의적으로 들었던 점을 감안하면,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한 질문은 명백하게 우호적인 것이다.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신학적 대화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응답은 방어적이지 않고 직접적이다.
예수는 성경과 모든 다른 계시적인 주장들을 해석하는 텍스트를 인용한다. 예수의 응답은 창조 이래로 분열된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를 가로지르는 솔직한 대화의 공간을 만들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분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고백하는 것은 종교 간의 대화를 사려 깊게 들으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고, 기독교가 단일신론이라는 의혹을 가지게 할 수밖에 없다. 이 계명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으로, 뜻과 힘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사랑 안에 성육신함으로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려고 온 분은 우리가 분열에 성육신한 것을 그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신명기의 이 본문에 추가한 내용 또한 주목할 만하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는데 비해 예수는 거기에 우리의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도 한다. 율법학자는 동의했다.
대개의 경우, 교회는 거기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날 지적 생활은 교인들 안에서 그리고 목회자들 사이에서 종종 경멸의 대상이 된다. 교회와 학문 사이에 분열이 더 커지면서 경멸이 가진 양면성을 보여주는데도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싸울 때 그 결과는 빛의 측면보다는 열의 측면 쪽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지적인 생활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감히 말하기를, 모든 기독교인들은 원래 처음부터 신학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가 믿는 분 안에서 참된 비전을 가지고, 그에 관한 참된 생각을 가지고, 이런 생각들을 표현하는 올바른 말을 찾아내는 원래 처음부터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1 (Edinburgh: T. & T. Clark, 1936– 62), 765.]
신학자인 율법학자는 망설이지 않고 예수가 율법을 다시 설명한 것이 옳다고 선언한다. 그가 들은 것을 되풀이하면서, 그가 예수에게 들은 다른 것도 진실하다고 확인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는 좀 더 말한다. 그는 이 보편적인 본문을 가지고 종교적 세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의 자리를 비평한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종교를 덜 사랑하게 되었다. 그 순간 예수의 현존 안에서 그는 종교적 실천이나 분열된 인간의 권위에 의해 규정된 것을 발표하는 것보다, 성경의 가장 큰 계명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통일성을 전적으로 믿었다.
우리도 같은 시도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자 폴 레만은 신앙 공동체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부름 받은 다양한 공동체라고 말한다. 폴 레만은 우리가 공동체의 다양성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부여받았고, 이런 교제 안에 있는 다양성은 교제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것들은 교제의 현실성과 성숙함을 표현하도록 고안된 다양성이다. [Paul Lehmann, Ethics in a Christian Context (New York: Harper & Row, 1963), 66– 67.] 현실성과 성숙함이라는 빛으로 교제에 대해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는 다양성으로 표현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이스라엘로부터 돌아서지 않았고 예수를 따르지도 않고 있는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이 “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는 것이었다.
예수를 비판하는 자들은 침묵하였고,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엄청났다. 곧 같은 사람들이 예수를 몰래 체포해서 죽이기로 모의한다. 이것은 우리 같은 종교 전문가가, 그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가 분열함으로 예수를 죽이는 쪽을 먼저 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율법학자는 가까이 와서 오늘 기독교회들이 서로 논쟁하는 것을 듣고는 단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너무 멀리 있다.
설교적 관점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관한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중심, 정신, 그리고 영혼을 단순하고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다양한 신앙공동체 가운데서 이 본문은 윤리적 사고와 실천, 신학적 성찰, 그리고 성서해석학의 기본 틀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반영하거나 나타내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적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사랑에 대한 이 교훈은 이 본문의 문학적, 문화적 상황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고 풍부한 보편적인 감동을 지니고 있다. 사실 누가복음에서 문학적 상황이 바뀌었고 거기서 이 교훈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서곡(prelude) 역할을 한다.(눅
10:25-28)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이 본문은 문학적, 문화적 측면을 감안하면 그 의미가 더 깊어진다. 서기관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역의 기반을 제공했던 풍성한 전통을 확인해주는 서로간의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서기관이 예수께 가장 중요한 계명에
관해 물었을 때, 예수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말로 알려진 한 단어를 말한다: 들어라 (Hear, 히브리어로 쉐마, Shema). 쉐마 (신 6:4-9)는 하나님 한분에게만 충성을 다하고 온전히 헌신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한다.
-어떻게 특정한 문화 속에서 쓰여진 본문이 다양한 신앙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강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앞의 내용 참조 곧 너무 감동적이어서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마태와 누가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직접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마가는 여는 말(서곡)을 먼저 배치한다: “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12:29). 마가는 이 선언이 절대적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본문과 관련하여 다양한 전통을 가진 종교그룹 혹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대화하면서 느끼는 점은 철저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그 공동체가 속한 신앙전통에 깊이 천착해야 한다는 점이다.
-회중들은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과는 달리 마가를 관통하는 중심주제는 사랑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사랑에 대한 초점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위기상황에 나타난다. 그의 사역은 이제 예루살렘 한 가운데 있고 성전예배에 대항하려고
준비를 마쳤다. 예수는 탁자를 뒤엎고 사람들을 성전으로부터 쫓아냈다 (11:15-18):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논쟁에 나오게 했고 (11:27-33; 12:13-17, 18-27)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화가 났으며 그를 체포하려고 한다(12:1-12; 11:18). 이제 그들의 손에 예수의 죽음이 임박해있다(8:31; 9:30– 31; 10:32– 34).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신앙의 근간이 되는 특별한 요청을 하는 이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특수한 상황 하에서 나온 예수의 이 말씀은 서기관들 곧 종교기관의 후견인 역할을 해왔던 이들의 가르침에 날카로운 비판을 보였다. 매순간마다 서기관들은 예수에게 그 권위와 권세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며 반박했다 (2:6, 16; 3:22; 7:1, 5). 예수도 반복해서 서기관들이 잘못된 편에 서있다고 논박하였다. 하지만 이 본문의 상황에서 한 서기관은 예수의 편에 서서 그의 입장을 동조하고 (12:28) 그 가르침이 옳고 진실하다고 말한다.(32절) 이 서기관은 최근에 성전을 정화한 예수와 같은 편에 선다. 그는
성전제의가 그 정신과 목적, 도덕적 권위, 개혁에의 의지를 상실하고 하늘의 소리를 더 이상 듣지도, 분별하지도 또 응답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예수의 분노에 공감한다. 그 서기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점철된 삶이 모든 번제나 희생제물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예수께 보여준다. (33절)
-마가는 누가와는 달리 사랑에 대한 논문을 쓰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상황에서 적용한다면,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랑과 동정의 대상인 과부, 고아, 외국인, 가난한 자, 노예가 오늘날에는 이민자들,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들, 환경과 경제적 부정의의 희생자들, 그리고 질병, 전쟁, 폭력으로 피폐해진 사람들로 선포될 수 있다. 이 서기관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듣는다: “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와 결합되어야만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회중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선포로 (1:14)이해하고 기뻐할 것이다. 예수의 사역에서 이 선포와 동반된 것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1:39) 많은 병든 자를 치유하는 것 (1:40– 42; 5:12– 13)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랑을 명령하거나 강제로 혹은
의무적으로 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예배, 사랑, 그리고 순종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진정한 예배, 가르침, 믿음 그리고 실천 속에 포함되고 구체화된다.
-아마도 마가는 우리가 그 서기관을 제한된 사랑과 제자도를 가진 사람으로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을 포함한 그 서기관과 모든 인물들에게 있어 사랑의 이야기는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전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오늘 이 복음서는 우리들에게 사랑, 예배 그리고 제자도를 보여주고 이 서기관이 사랑을 경험할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온전한 실천을 경험하게 될 것을 기대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그 때 그는 즐겁게 순종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오직 사랑만이 인도할 수 있는 곳으로 따라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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