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본문에는 세 가지 신학적 주제가 등장한다. 첫째, 결혼, 자녀, 이혼에 관한 내용. 둘째,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것과 연관하여,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권위가 어디(누구)에게 있는가?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양심? 셋째, 예수의 대답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의 바른 태도에 대한 내용. 이 세 질문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를 받고 그 안에 들어갈 사람의 올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함정을 피하면서 결혼, 자녀, 이혼 등에 관한 (엄격하게 종교적이면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적극적인 대답을 제시하신다.
종교 지도자들은 여러 번 예수에게 쉽게 대답할 수 없다고 여기는 질문을 던졌다. 대립되는 분파나 학파 간에 논란이 되는 문제여서 어떻게 답을 하던 불만을 가진 사람은 있게 마련이었다.
어떤 여자가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을 했다면 하늘나라에서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인가? (막12:23)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나? (막12:14) 여기서는 이혼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예수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을 보니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답을 알고 있었다: 모세는 남편에게 이혼을 허용했다. 이혼의 합법적 근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부적절한 성적 관계만이 이혼의 사유가 되나? 아니면 그 외의 다른 과오, 예를 들어 부인이 다른 여자들보다 덜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나?
다른 곳에서처럼, 예수는 논의의 틀을 바꿔버린다. 예수는 이혼의 근거에 관한 질문을 결혼의 근거에 관한 것으로 바꿔버린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를 위해 창조하셨다. 이 둘은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동안 교회는 결혼에 근거에 대해 많은 규정을 만들었다. 전통적인 영국식 결혼 예식서는 두 사람 간의 결혼의 목적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결혼은 남편과 부인 두 사람 간의 결합이다. 둘째, 결혼은 자녀를 생산하고 양육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셋째, 결혼은 남녀간의 성적인 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하게 해준다. (교회는 성에 관해 이중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첫째와 셋째는 긴장관계에 있다. (바울이 정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지만 그래도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 한 것을 기억하라. 고전 7:8-9.)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교회에서는 생산과 정욕의 해소보다는 결합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결혼에 관한 관점의 변화는 이혼에 관한 관점 변화로 발전된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는 이혼의 관습이 전제되어 있다. 그들의 질문은 그것이 적법하고, 율법적이고,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예수는 질문을 결혼에 대한 것으로 바꾸고 급진적으로 해석했다.
모세는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서 이혼을 용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이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의 결합은 영원하다. 그 엄격성은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다시 강조된다. 누구든지 이혼하고 또 결혼하면 간음을 범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대교 율법과는 반대로, 그러나 로마의 법 정신과 유사하게, 요구조건은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에게 간음을 범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는 무엇이 법적으로 허용되는가 (따라서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마음(heart)의 절대적 순수성의 철저한 요구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여기에 난제가 있다: 예수가 요구하는 철저한 마음의 순수성은 불가능한 이상이다. 누구든지 음탕한 마음으로 여인을 보는 사람은 그 마음에 벌써 간음을 범했다는 예수의 말을 상기해보라. (마 5:28). 그리고 우리의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빼어 버리라는 막 9:47의 말씀을 생각해 보아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막 10:26에서 제자들이 물어보는 질문이다.) 이혼을 하고 다시 결혼하지 말라는 요구에서 더 나아가 이성을 관심을 갖고 보지 말라는 요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오늘 본문이 제기한 다른 질문으로 연결된다. 누가 적절한 권위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이혼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이는 그들이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곤궁에 빠뜨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문제성이 있는 대답을 주었다. 마음의 순수성의 강조는 모세의 요구보다 더 철저했다. 사실 인간으로서 지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10:27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받고 거기로 들어갈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를 정당화 함으로서가 아니고, 부모의 은혜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는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가능하다.
이혼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결혼 제도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종종 결혼이 끝까지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혼은 비극적이지만 최악은 아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현대적 바리새인이 예수께 질문을 한다면 바람을 피우는 것이나 동성 간의 결혼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볼 수 있다. 그것은 허용되는가? 우리가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답이 무엇이든 그것이 우리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도 뛰어넘는 권위를 주장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질문의 틀을 바꾸고,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면서 완전한 마음의 순수성의 요구를 강조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인가? 예수는 인간이 결혼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결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까?
목회적 관점
그녀는 바리새파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작은 키에, 둥근 얼굴에 비해 너무 큰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가 그 교회에 온 것을 환영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 나의 맨 처음 목회사역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 목사님, 이혼한 사람은 지옥에 가나요?”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들고 있던 과일음료를 떨어뜨릴 뻔 했다. “ 나는 방금 목사임용시험에 통과했어. 이건 뭐지? 다른 종류의 시험인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해주려고(그리고 나 자신이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마음속에 있는 자료창고에서 목회적 돌봄이나 신약성서 과목들에서 배운 것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마침내, 나는 “ 저보다 더 나은 사람들도 이혼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녀가 다시 같은 질문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 목사님, 이혼한 사람들은 지옥에 가나요?” 나는 그녀에게 기본적으로 같은 대답을 했다. 명확하게 하려는 나의 시도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어땠는지, 그녀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녀의 집에서 오랜 시간 대화하는 동안, 그녀는 최근에 이혼한 그녀의 아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환영식에서 했던 그녀의 질문 뒤에는 그녀의 아들에 대한 깊은 염려가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문제가 많았던 결혼생활을 끝내고 재혼하기로 선택했다.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그녀는 예수가 (이혼에 관한 문제로 예수를 시험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한 말씀과 예수의 제자들에게 한 말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을 범하는 것이요” )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의 믿음이 성숙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나의 교인은 죄와 벌에 대한 엄격한 믿음을 붙잡고 있는 걱정 많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그녀의 아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믿었다.
마가복음 10장에 있는 이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본문이 어떻게 아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우리 교인의 걱정에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을 훨씬 더 큰 하나님 나라의 전망으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라고 예수는 대답했다(5절). 모세는 ”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 을 너희에게 허락했다(4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6절).
“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9절). 다른 말로 하면, 이혼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는 허용된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계획에 관해 관심을 가졌다. 예수가 이혼에 관한 질문을 다가오는 나라에 관한 메시지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그 교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첫 번째 열쇠이다.
예수의 시대에, 여자가 “ 이혼증서” 를 받으면, (재산을 소유할 권리 같은) 그녀의 모든 권리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거리에서 음식을 구걸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매매춘을 하게 되기가 쉬울 것이다.
분명히, 예수는 서명한 종이 한 장으로 그들의 인생이 산산조각난 여성들에 대한 목회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상호 존중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을 뿐이지, 신속하게 이혼을 증명하거나 변호사를 불러서 “ 그녀(혹은 그)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도록” 하지 않는다.
결혼이 모든 사람을 위한 표준은 아니지만(예수가 결혼했다는 증거는 없다), 혼인 서약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사 61:10-11; 렘 31:32; 호 1-3). 어떤 기독교 전통에서는 결혼은 성례이다. 마가복음 10:9에서 예수는 이렇게 선언한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막 1:15), 이것은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진문에 대한 대답은 율법 아래서 허용되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지금 펼쳐지고 있는 평화와 사랑과 정의의 나라에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각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상호 존중과 배려를 가지고 접근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선포했다. 이제는 허용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가능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 살기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남용과 무시가 존중과 배려를 대체하고 있다. William B. Oglesby 교수는 목회적 돌봄 수업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사람들은 어떤 결혼들은 하늘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어떤 결혼들은 지옥에서 태어난다.” 망가진 세상에서 이혼은 때로는 필요하다.
성서정과 본문 전체(10:2-16)에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10절).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긴장이 계속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진행되고 있다고 가르치는데, 제자들은 (그리고 우리는) 자주 깨닫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이 예수께서 14절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일 것이다: “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아마도 예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혼의 문제는 허락되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면, 당신은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만약 당신이 이것을 깨닫거나, 아니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다면, 이번 주일 아침에 회중 가운데 있는 남성이나 여성이 “ 목사님, 내가 나의 결혼 생활을 살려낼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혹은, 많은 사람들이 목회적 돌봄과 관련된 질문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 목사님, 이 병은… 내가 하나님께 벌 받고 있는 걸까요?” “ 목사님, 제멋대로인 우리 아이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준비하라. 그리고 성령께서 당신에게 은혜 충만하고 희망적이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대답을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라.
설교적 관점
-오늘 본문은 설교자에게 있어 참 어렵다. 두 개의 이야기가 한 성서정과에 있어서 둘 중 한 이야기만 다루든지 아니면 어려운 이혼이야기보다는 어린아이에 관한 이야기에 초점을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있어 다가오는 첫 번째 도전은 이 두 이야기간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2-12절에 걸쳐 나오는 예수의 어려운 가르침이 교인들 가운데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 혹은 GLBT or LGBT (게이-gay, 레즈비언-lesbian,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와 관련한 목회적 관심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하는 점이다.
-두 번째 도전과 관련하여 설교자는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나오게 된 특수한 상황을 주의깊게 이해하고 설교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테스트하기 위해 이혼의 합법성에 관해 특정한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는 그의 가르침을 말한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이혼이 적용될 수 없는 관계 예를 들어 게이, 레즈비언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본문에서 예수의 이 가르침을 가지고 이런 동성애 관계를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 (inappropriate)하다. 특정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다른 종류의 관계들은 이 본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설교자는 피상적인 데 머물기보다는 이 본문이 강조하는 중요한 신학적 명제를 찾아보아야 한다. 본문은 만고불변의 추상적인 “ 결혼과 어린아이에 대한 가르침” 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상황 (9:30-32)에서 하나님의 나라(14-15절)에 대한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문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혼과 재혼에 대한 새로운 “ 법” (law)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엄격한 법적인 원리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이해는 사실상 예수가 강조하는 신학적 명제와 반대되는 것이다. 예수는 적대자 들이 말하는 이혼문제에 대한 법적인 해석을 넘어서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상황에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신학적인 명제를 찾고있는 것이다. 이 전환을 하면서 예수는 성경에는 성경으로 대응하는데 바리새인들이 인용한 구절 (신명기 24:1-4)을 거부하고 창조이야기 (창 1:27, 2:24)에 나타난 신학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예수는 분명하게 이혼 후 재혼에 대해 몇 가지 강한 입장을 보인다 (이혼 그 자체가 이슈가 아니고 재혼임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여기서 재혼에 관한 새로운 법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지닌 깊은 결합을 존중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이혼이 가져올 수 있는 커다란 고통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 시점에서 두 이야기 사이의 관계가 (서두에 언급한 첫 번째 도전인) 설교자에게 도움이 될 수있다.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 결론에서 예수는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5절)라고 정리한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며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만 들어간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추상적, 법적 규범들-이혼과 재혼에 관련한 것들을 포함하여-지킨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함께 다룸으로써 설교자는 이혼의 아픔과 고통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져 있다고 느끼는 이혼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 즉 이혼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 지극히 작은 자” (least of these)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의지할 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이 본문의 표면 아래로 내려가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성찰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 핵심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사역인데 그것은 가부장적인 결혼관계를 뒤엎고 사회구조적으로 바닥에 있는 사람(어린아이)들이 들어올려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지배적인 전통개념을 승인하지 않고 예수는 적대자들의 가부장적인 이해를 뒤엎는다. 바리새인들은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 (a man to divorce his wife)이 적법한 것인지에 관해 예수께 묻는다. 그것은 오직 남자만이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는 가부장적인 틀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말하면서 예수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 (7-8절)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는 남편과 이혼하는 여자의 권리 (12절)를 말한다. 여자도 정확하게 남자들과 똑같은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똑같이 어린이들 즉 그 사회에서 가장 작게 평가받고 약한 존재들을 예수는 받아들이고 축복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모델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문화적, 법적 이해를 뒤엎는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단지 결혼과 가족관계에 대한 추상적인 법적 원리로 설교하는 것은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혁명적이고 역동적인 사회적 측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방향은 가장 억압을 받고있는 사람들을 향한 환대(hospitality)와 평등(equality)이라는 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오늘날 사람들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억압하는 사회구조와 인식에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본문해석을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설교자는 예수의 말씀과 실천이 살아있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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