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마귀(demons, 귀신)와 지옥: 귀신을 쫒아내는 일이나 지옥의 묘사는 계몽주의 이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면이 있다. 설교자는 오늘의 본문을 접하면서 이 상황을 회피하기보다는 정면 돌파하기를 택해야 한다. 그런 주제에 대해 너무 자세하게 말하는 데는 위험의 요소가 있다. 신약학자 Markus Barth는 “ 당신은 마귀의 존재를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 아니요, 그리고 당신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기독교 신학은 빛/어둠의 이원론을 경계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악의 위력을 너무 강조하다가는 악에게 본래 없었던 절대적 능력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귀신이나 지옥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귀신들렸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은 일이 많았고, 14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지옥의 불의 위협은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나 지옥을 구시대적 개념으로 쉽게 무시하는 것도 문제다. 신약성서에서 마귀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에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위협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예수에게는 어떤 실제적인
위협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를 원시시대의 상상의 산물로 무시한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 중대한 능력의 행위가 아닌 것이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축사 이야기의 핵심은 반복적으로 나오는 “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부분이다. (38-41)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예수의 성품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act in a manner consistent with his character) 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on behalf of Christ)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 예수” 라는 이름 자체가 신비한, 성례전적 효력이 있다고 말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은 것으로 묘사된다. 예수의 이름 자체가 효력이 있는 것 같다. 마태복음 25:31-46에서 본인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행동을 한 것과는 대조된다. 이것은 “ 익명의 그리스도인” 의 예는 아니다. 도리어, 예수가 암시한 것처럼, 축사(逐邪)는 회심의 표식으로 (그 능력의 행위를 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점에서) 작용한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39절) 이 부분에서 강조가 되는 것은 마귀의 능력보다는 언어의 능력 (말하는 자와 공동체의 성격을 변화시키는)이다.
다시 지옥에 대해: 마귀와 마찬가지로 지옥도 우리가 너무 쉽게 무시하면 안 된다.
43-48절에는 지옥에 관한 경고가 세 번이나 등장한다. 이런 구절들은 내세가 현세의 행위에 대한 상벌 시스템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흔히 사용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천당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고, 악행을 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살 것이다. 단테의 신곡은 이런 관점에서 지옥을 묘사하고 있는 고전적 사례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지옥을 이해할 수도 있다. 기독교 신학에는 지옥을 영원한 형벌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있다. 20세기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들은 지옥의 존재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Danial Migliore는 “ 지옥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과 분리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기를 원하는 것을 말한다... 지옥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반항이다” 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르트르가 No Exit에서 말한 지옥의 묘사(hell is other people)를 역설적으로 보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고, 그런 거부는 그에 따른 결과를 수반하지만, 하나님과의 분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 선포의 핵심적 관심도 아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정하기 위해 지옥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에게 관심을 주고 그들의 가는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자 한다. 42절의 작은 사람들은 9:36-37에서 예수가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킨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예수의 경고는 예수의 공동체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오는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지 말하는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돌아볼 때 이 구절에서 예수의 가르침 전체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예수를 따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어떤 이유에서도 (작은 사람이어서든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채 귀신을 쫒아내는 사람이어서든지)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주석적 관점
▶ 스캔들의 학교는 없다(No School for Scandal)
오늘 본문은 마가공동체의 햇병아리 신자들에게 어려운 두 주제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경계유지(boundary maintenance), 즉 누가 들어오고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공동체 구성원의 지위가 불분명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38-41), 둘째로는 규칙의 목록들 또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42-50)
▶ 경계 유지(30-31)
여기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사역을 할 때 누군가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 즉 국외자에 관한 이슈이다. 질문은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있는 요한에 의해 제기되었다. 무슨 관심사가 동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추측도 적절하지 않다. 사실 예수의 대답도 동기가 아닌 공동체와(40)과 예수의 이름으로 선행을 행하는 자들 모두에게(41) 해당하는 결과들에 관한 것이다. “내 이름으로” “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용어는 좀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마가에서는 오로지 9:37,38,39 그리고13:6과 16:17의 첨부된 마지막 부분에만 나타난다. 어떤 차원에서는 그 구절이 단순히 9:37 “내 이름으로 어린이를 영접할 때” 의 경우는 “내 대신” 이라는 뜻이다. 다른 참고들은 좀 더 무거운 의미를 가지는데 이름과 권세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과 연결되어져 있다. 그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공동체는 사실상 이 세상 속에 계속되는 그의 현존이 된다. 마가공동체는 제자들이 모이면서 교회를 형성하면서 이러한 책임성의 의미와 씨름하고 있다.
▶스캔들을 만들지 말라(42-50)
반문화적이지만 대단히 점잖은 지위의 역전(첫째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과 예수의 이름으로 부름 받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은 부적절하고 음울한 위협과 규정된 형벌의 폭발음 다음에 나온다. 이 가르침의 힘있는 효력을 완화할 필요는 없지만 구체적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는 것이 그 내용들을 분명하게 해 줄 것이다.
첫째로, 영어성경에서 skandalizein이라는 동사를 “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로 번역했는데 본래는 더 강한 어감을 갖고있다. 그 동사의 어감은 어떤 사람이 경험한 것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어떤 장소에 남아 있지 못하거나 걸어왔던 길을 갈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이 구절에서는 어떤 행동이나 말이 어떤 사람의 믿음이나 제자도를 벗어나 죄를 짓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첫 번째 경고는 “ 나를 믿는 작은 사람들” 을 죄짓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작은 자라는 용어는 아이들이나 공동체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애칭이다. 명성과 권력의 상대성과 큰 자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9:33-37) 앞의 본문의 맥락은 사회적 지위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 믿는 자들이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한 잘못의 결과는 심각한 것인데 차라리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죽는)것이 낫다. 42,43,45,47절의 skandalizein라는 동사의 병행적 패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세 가지 예에서는 주제가 바뀐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에서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성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에, 43,45,47절은 만약에 그러한 잘못이나 위협을 하게 되면 제거하는 것이 나은 여러 몸의 기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한 몸의 자해는 이상해 보이고 말도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공격적이다. 이 구절들을 공동체 신도들의 생활과 관계의 가르침의 맥락에서 보면 어떤 사회적 그룹을 지칭하는 몸의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고대 용법들을 말하고 있다. 그말이 맞다면, 핵심은 자해에 대한 충고가 아니라 공동체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들의 행동이 전체의 온전성을 위협한다면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골5:1-5참조).
그러한 배반들은 대조되는 43,45의 “ 생명에 들어감” 이나 47절의 “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 같은 종말론적 언어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평가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그 용어는 지옥으로 번역된 게헨나와 동일하다. 게헨나는 힌놈 계곡에서 유대왕국 때 행해진 종교적으로 금지되었던 인간희생제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예레미야의 게헨나 심판의 예언에서는(렘7:31-34) 지옥을 영원한 형벌과 고통의 곳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48절에
인용된 이사야66:24의 꺼지지 않고 타는 불의 이미지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형벌의 이미지는 49절의 “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라는 정화의 강조로 이행된다. 그 말은 본문에 나와있는 소금에 관한 여러 가지 말의 슬로건을 제공한다. 이것이 제자들을
“ 세상의 소금” (마5:13)으로 말한 것 같은 신중한 예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고대사회에서는 소금은 음식 맛내기와 음식보존, 의약용품 그리고 로마군인들에게 소금레이션으로서 월급으로 지불된 소중한 물품이었다. 여기에서는 소금이 로마제국경제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원들을 말한다. “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라는 마지막 절은 공동체의 공동생활에 대한 강조이고 소금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계약(레2:13)을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하는 강조한것이다.
목회적 관점
튼튼한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삶을 강화한다. 공동체란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는 정체성의 장소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를 통하여 나를 알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보호와 지원을 제공한다. 공동체는 가치를 형성하고 문화적인 규범을 제공한다.
그러나 강력한 공동체에는 위험요소도 있다. 사회 질서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제한할 수 있다. 과거의 방식들은 미래의 도전을 위해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강력한 공동체는 그 자체에 너무 집중해서 외부와 관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포용적이 되는 것과 배타적이 되는 것 사이에서 계속되는 긴장은 심각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공동체가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어디까지 관계를 진행해야 하고, 나와는 다른 표준들과 가치들과 풍습들을 가진 사람들을 어디까지 배제해야 할까? 공동체가 자신의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외부로부터 어디까지 고립시켜야만 하는가? 다른 공동체가 우리와 다른 방식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공동체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될까? 사람들이 자신들의 변별성의 한계를 상실하지 않은 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동료의식을 가지고 행동할까?
포용과 배제와 관련된 우려는 특별히 교회에서 더욱 심하다. 교회 공동체는 단순히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나 서로 즐겁기 위해서 함께 묶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한 신념에 의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깊이 믿는 것, 우리 자신에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우리가 복종하며 사는 것, 어떻게 우리가 훌륭한 삶을 정의하고 성취하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이런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때,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섬세하게 대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자주 인용되는 예로 9/11 공격 직후 뉴욕의 야구장에서 열린 야외 예배에서, 다른 전통에서 온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기도했다. 이 예배에 참여한 한 주교의 교구에 속한 그룹은 주교가 이 예배에 참여해서 다른 종교의 기도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주교를 해임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지 않고 어떻게 우리 자신의 공동체의 온전함을 유지할까? 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이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를 제지하려고 했다. 그는 “ 우리들,”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고, 제자들은 예수의 방법과 예수의 권능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는 확실히 능력이 있었고,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능력을 받았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의 그룹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같은 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되는 것이 몹시 싫었다. 심지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좋은 일이라고 해도. 제자들이 예수에게 그 사람에 대해 말했을 때, 예수는 이 상황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 자신의 그룹의 능력을 보존하는 것은 예수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선한 일을 한다면, 그들의 행동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예수는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외부 사람에게 보살핌을 받는다면, 제자들과 제자들을 도운 사람들 모두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한다: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외부를 향하여 자신을 개방할 수 있을까?
간단한 대답은 없지만, 모든 공동체는 내부인와 외부인 사이 어디에 선이 그어져 있는지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과 공동체 외부에 있는 사람 양쪽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가 개입된 문제들에 대하여 민감하라고 우리를 일깨우고,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위험을 감수하도록 촉구한다.
제자들이 외부인을 환영하기 원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다룬 후,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지도자로서 직면하게 되는 또 다른 염려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목회하려고 하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염려들에 대하여 지적한다. 첫째,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 앞에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을 놓지 않도록 경고한다. 예수는 생생한 말로 이렇게 경고한다.
“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우리는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과,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왜곡하는 것과, 진리에 대하여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과, 정죄하는 말을 서둘러서 하는 것이, 신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둘째,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다시 한 번 생생한 말로 예수는, 만약 우리의 손이나 발이나 눈이 우리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놓치고 마침내 지옥의 고통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선언한다. 이 말씀은 외부인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의 생생한 말씀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경고한다.
끝으로, 예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보존하고 확장하는 특성을 가진 제자들의 소금에 관하여 말한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예수가 하신 모든 말씀을 보면, 그들의 소금끼가 그들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그들을 겸손해지게
하며,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게 하며,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 서로 화목하게 지내” 게 된다. Harry B. Adams, Professor Emeritus, Yale Divinity School, New Haven, Connecticut
설교적 관점
-성서를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이나 환경을 재구성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을 대할 때에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설교자는 “그 본문이 기독교인 독자들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고 요구하는가” 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몇 가지 차원에서 여러가지 결정을 요구한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따르지 않는 귀신쫓는 자들을 용납할 것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말한 “ 작은 자들” (little ones)을 도와 줄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빼어 버릴 것인가? 우리 안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짠 맛을 잃지 않는 이 소금을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얻을 것인가? 이 본문의 매 구절은 실제적이고 긴박한 결단을 요청한다. 설교자의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결단이 지닌 이 긴박함과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얻는 풍성함을 잘 전달하는 것이다.
-이 본문은 그 안에 이상한 점이 있다. 예수와 요한이 귀신을 쫓은 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38-40절] 왜 어린아이를 영접하고[36-37절] 이런 어린아이로 인하여 죄를 짓지 말 것에 주의하라는 [42절] 이야기 흐름 사이에 들어갔는가? 왜 이 본문은 어린아이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으로 전환하고 있는가? [42절]
이 본문이해에서 중요한 점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예수를 따르는데 필요한 것을 다루는 연속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설교자의 과제는 이 본문을 그 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일이다(reintegrate). [이 사건 전에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한 사건에서] 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찾았을까?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들의 자리를 논할 때 어린아이로 제자들의 관심을 돌린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런 어린아이를 실족하지 않게 인도할 것을 경고한다. 문제의 핵심은 단지 어린아이를 “ 영접하는 것” (accepting)이 아니라 그 어린아이를 “ 바른 길” (right way)로 인도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들은 다가오는 메시아의 수난이라는 상황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제자들은 기꺼이 그들의 십자가를 지고 스스로를 부인하며 눈과 팔다리를 자를 수 있겠는가?
-설교자가 속한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면 이 본문은 공동체가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교할 수 있다: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0절). 나아가 복음적인 삶 가운데 “ 작은 자들” (little ones)을 인도하라는 요청은 회중들의 삶에 초점을 둘 수 있다. 이렇게 정한다면 설교자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선포한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성경구절을 소개할 수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 메시아의 본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복음을 가르치는 교사나 설교자의 역할에 도전을 주고 있는가? 회중 가운데 이러한 도전을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성화(sanctification)를 이루라는 그리스도의 준엄한 요청과 그 요청을 거부한 삶의 마지막에 대한 에수의 경고는 설교에 있어서 영원히 반복되는 주제이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는 이 성화를 경시하는 전통에 서 있는가? 아니면 거룩함(holiness)에 대한 요청을 듣고 새롭게 도전적으로 접근하고 있는가?
-이런 주석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특별한 구절은 권면이나 가르침이 될 수있다. 권면이라는 측면에서 이 본문이 택할 수 있는 첫 번째 주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지만 우리의 용어와는 다른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이다( acceptance of those who work in
Jesus’ name but not on our terms). 두 번째 주제는 성화(sanctification) 혹은 작은 자들을 인도하는 일이 지닌 위험이나 책임이 될 수 있다. 기독교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이 두 번째 주제는 지옥(hell), 성화 혹은 보다 흥미롭게는 둘 다에 관한 논의로 진행할 수도
있다. 어떻게 지옥과 성화 둘 다 (영원한) 불이라는 면에서 서술하고 있는가? 그 불은 무엇 혹은 누구인가? 결국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누구인가하는 점이다. 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부인할
것인가하는 일이다. 작은 자들을 섬기고 거룩하게 되라는 요청에 응답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이 이야기 속의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과 기도는 피할 수 없는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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