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부자에 관한 이야기(마태복음에는 부자 청년, 누가복음에는 지도자로 나옴. 마19:20; 눅18:18)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율법을 성실히 지키면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이 부자는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는 질문자에게 자신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로운 행동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리라고 가르치신다. 사마리아인은 종교적으로 이단자로 취급받지만 선한 이웃의 모범으로 추켜세워진다. 같은 방식으로 본문의 부자도
추켜세워져서, 가서,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특별한 초대를 받는다. 오늘 본문은 한 편으로는 우리가 예수를 따르고 영생을 얻기 위해 부에 대해 어떤 태도와 접근방식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구원에 대해 어떤 태도와 접근방식을 취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예수가 부자에게 준 대답은 제자들에게는 충격과 실망이었고, 오늘까지 계속 많은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고대 세계 (그리스, 로마, 히브리)에서는 물질적 번영이 영적인 덕행의 보상이나 부산물로 간주되었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만사가 평탄하게 진행되고, 좋은 성품이나 절제를 결여한 나쁜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나쁘게 진행된다. 물론 욥의 이야기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예외도 있고,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번영을 누리는가라는 질문은 항상 있어왔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던져진 것은 선행과 부귀를 당연한 인과관계로 묶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믿음과 보상의 관계, 덕과 부의 관계는 정말 어떤 것인가? 왜 이 사람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부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가 대신 받는 보상은 무엇인가? 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은 교과서적인 진리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우리가 부를 축적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안전과 평안에 관하여, 하나님보다 우리가 축적한 소유와, 부를 축적하는 능력을 더 많이 신뢰하게 된다. 정직하게 획득한 재산이나 너그럽게 나눠주는 물질까지도 교만으로 연결되기 쉽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과 평안을 즉각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고,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힘들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한 내용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예수를 위해 이 세상에서 희생을 한 사람은 앞으로 올 세상에서 백배의 보상을 받고 영생을 받을 것이다. (29-30) 이 약속은, 첫째로, 우리의 세상살이에서 나온 판단과 상반되기에 당혹스럽다. 예수의 제자들은 가족과 사회를 대체할 더 고귀한 무엇인가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서의 번영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로, 만일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보상에 있다면, 그런 제자도는 부를 추구하는 것보다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만일 백배가 넘는 수익률 때문에 믿음을 갖는다면, 믿음은 투자의 테크닉이고, 고차원적인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하다. 아무리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사람이라도 예수를 따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바보일 것이다.
예수의 대답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믿음과 보상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다. 믿음은 단순히 친구와 재산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반대로, 보상의 내용은 우리가 희생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차원적인 것이다. 100배의 상급을 받는다는 것은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야지, 동일한 것을 양적으로 백배 돌려받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더 역설적인 것은 이 고차원적인 상급(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된 관심이 우리의 믿음이나 공로를 통해 취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구원이라면 우리는 믿음의 본질, 공로에 본질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대답은 따라서 이중적으로 충격적이다. 첫째, 예수는 인간의 욕심 뿐 아니라 부 자체, 그리고 부를 얻게 한다고 여겨지는 덕행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신다. 이것은 자신의 소유에 자만하고, 물질적 번영이 궁극적인 안전을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슬픈 소식이다. 정직하게 재산을 모으고, 그 부를 너그럽게 베푼다 할지라도, 그런 부도 구원을 받는 데는 위험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부는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라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더 충격적인데, 예수는 자신의 덕행과 믿음에 대해 자만하는 사람에게 의문을 제기하신다. 순수한 동기로 행해진 덕행과 믿음도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도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의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관심을 돌릴 때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예수는 늘 우리에게 쉬운 답을 주지 않으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지만, 예수는 우리에게 완전한 변혁과 헌신을 요구하신다. 부자에게 예수의 부름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여 제자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낮은 수준의 요구를 하실까?
주석적 관점
▶ 막10:17은 알 수 없는 구도자를 소개하고 있다(‘ 젊은이’ 마19:22 ‘ 지도자’ 눅18:18)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무릎을 꿇고, ‘ 선하신 선생님’ 이라 부르며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까지 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 영원한 생명” 이란 말이 자주 언급되었지만, 마가에서는 오직 10:17과 30에서만 언급된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의 나라와 곧바로 연결해서 사용했기에(10:23-24,30), 마가는 아마도 이 두 용어가 대체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 예수의 대답은 뚜렷하다(10:18-19). 비록 다른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의 무죄함을 강조했지만(요8:46;고전5:21;히7?:26;벧전2:22), 마가는 특징적으로(1:14-15,44;5:19) 예수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심을 두도록 한다(10:18). 예수가 “ 속여서 빼앗지 말라” 는 것이 추가된(신24:14) 십계명의 5,6,7,8,9계명을 상기시킨 것은(10:19),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삶과 이 세상의 삶에서 시내산 계약과 일치하는 공동체적 정의와 결합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예수가 과격하게 말했지만(막10:2-12), 그의 가르침이 토라(율법)을 대신하진 않았다. 10:20에서도 마찬가지로 구도자는 자신을 평생토록 지켜온 유대인으로 고백하고 있다.
10:21에서 마가는 마태와 누가와 다르게 예수를 정감어리게 묘사한다. “ 예수께서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대담자는 심각한 문제를 정중하게 질문했고, 예수도 이 질문과 질문자에 대해 존중해 주었다. 그런데 부족한 하나가 결정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가난한 자를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는 것이었고, 특별하게는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21).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는 이 세상의 보화를 포기하는 것이 요구되었고(마6:19-21,눅12:33-34), 새로운 주인에게 속해야했다(마6:24-33;눅16:10-13). 구도자는 이제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되었지만 많은 것을 가졌기에(10:22) 그 한 가지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것은 별도의 예가 아니다(10:23,24b). 예수가 말한 것에 제자들이 듣고 놀랐다. 왜 놀랐는가? 하나님 나라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부자들이이여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의 답은 그 반대이다. 부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이 말을 완화하려는 해석의 시도는 있지만 올바르지 않다. 제자들은 놀라서 “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수 있겠는가?” 라고 서로 말하였다. 구도자에게 했던 것과 같은 행동으로 제자들을 눈여겨 보시며 예수가 답하는데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말한다. “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27). 사실 이것은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 “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궁극적으로 구원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기에 그의 도움없이 인간의 깊은 바람을 이룰 수는 없다.
▶ 여기서 잠시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 마가가 말한 예들을 살펴보자. 예수가 병자나 죽은 아이를 치유할 때 일어났다(5:21-43;9:14-29). 가난한 과부가 곧 무너질 성전을 위해 한 고트란트를 바칠 때 일어났다(12:41-44;13:1-2). 어느 여인이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를 위해 향유를 부었을 때 일어났다(14:3-10). 예수가 깊은 기도 속에 그의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 바치고자 아버지께로부터 힘을 얻었을 때 일어났다(14:32-42;11:20-25). 마가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가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 없다.
그들이 예수께 충성하지 않고 배반했던 밤을 이는 잘 설명해 준다. 그런데 부자청년과는 달리, 베드로가 강조했을 때 예수도 부인하지 않았듯이(10:28-29),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16-20;2:13-14). 그러한 복종에 대한 보상은 예수의 요청에 응답하면서 포기했던 것을 대신할 새로운 가족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다(3:31-35). 포기한 많은 것을 대신하여 오는 세대에 주실 영원한 생명을 포함한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10:30).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의 운명은 대단히 이상한 형태를 가진다. 하나는 이 새로운 가족은 고대에서는 결정적 인물인 육신의 아버지가 없다. 이 공백은 대단히 의도적인데 왜냐하면 마가에서는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11:25;14:36). 더구나 예수의 제자들은 다른 유대인 종말론에서 보게 되는 엄청난 보상도 없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받을 좋은 것은 ‘ 박해들’ 로 수놓아져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래하는 왕국은 모든 것을 뒤바꿔 놓는다(10:31).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때 무엇보다 이는 명확해진다 (15:33-41;16:1-8).
▶ 오늘 본문은 인간의 책임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균형을 잘 잡아준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삶은 그의 피조물 가운데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일치하는 행동에 달려있다. 어쨌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움 없이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어거스틴의 기도처럼 말이다. “ 당신이 명령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저에게 주시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하소서.” 이것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의지하도록 유혹하는 부에 집약되어서 보여지는 모든 거짓된 것과 무너질 구조들을 포기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복된 소식이다. 예수가 가르치고 그가 신뢰하며 헌신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분이나 조건없이 전적으로 받아들이신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다.
목회적 관점
미래를 향해 출발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려고 준비할 때, 맨 처음 데이트를 할 때, 자기 사업을 하려고 회사를 떠날 때,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을 치료할 때,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려고 할 때. 마지막 경우는 마가복음 10:17에서 예수가 “그 사람” 에게 추천한 미래를 시작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그는 처음에 “한 사람” 이라고 불린다. 나중에, 22절에서, 우리는 그가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는 그를 “ 관원” 이라고 하고, 마태는 “ 젊은이” 라고 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그는 종종 “ 젊은 부자 관원” 이다. 그러나 마가에게 그는 “ 재산이 많은” 평범한 청년일 뿐이다. 자기가 다른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이 사람은, 예수에게 궁극적인 질문을 한다: “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혼에 관한 질문으로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을 때(막 10:2-16)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는 이 질문을 “ 영원한 생명” 이라는 말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로 재구성한다(“ 와서, 나를 따라라.” ). 그 사람이 떠난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고 선언하신다.
마가복음의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질문을 가지고 예수에게 온다: “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각각의 경우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거기서 요구되는 새로운 행동이라는 말로 질문을 바꿔 놓는다. 대부분의 경우에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예수는 이해가 느린 제자들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더 자세히 설명하거나 다른 비유를 나누어야만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경우에, 제자들이 “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할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 구원” 이라는 말로 바꾸지만, 그들은 적어도 미래를 향해 출발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제자들은 그가 근심하면서 떠나간 순간만을 증언한다. 기독교전통은 그가 근심하면서 떠난 것은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기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고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근심하며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런 대담한 행동은 아무 감정 없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결정적인 걸음이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가 가진 모든 것과 그의 소유에 따라오는 관계들을 정서적으로 포기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건에서든, 제자들은 (그 사람이 그의 재산을 포기했건 포기하지 않았건) 얼마나 고통스럽게 미래를 시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행되고 있지만,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활동과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고 종종 몹시 고통스럽다.
우리 교인들과 우리도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종종 매우 어렵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알콜중독자협회에 처음 참석하기, 결혼상담소에 전화하기, 청바지 주머니에 마리화나를 가진 아들이나 딸과 이야기하기,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내기, 또는 목회를 하도록 부름 받고서 우리가 예수를 따르기 위해 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일에 참여하기. 그렇다면, 교회의 장의자에 앉아서 그들이 가진 것 가운데 전부(혹은 대부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이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죄책감이 들기는 할까?
“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절)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운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대부분 (혹은 전적으로)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서구 세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행운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처럼 물질적으로 복받은 사람들에게 설교자는 무슨 말을 할까?
예민한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모든 것을 단번에 주는 것은 좋은 청지기가 아닐 수 있다고 설명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계획된 기부와 사려 깊은 자선은 시간이 걸려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어쨌든, 설교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은 새로운 행동과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단번에 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돌보고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생활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변신과 성격 변화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에게 요구되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우리를 압박할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26절) 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필요한 것을 시작할 수 있을까?
예수의 동료요 현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좋은 출발이 될 것이다. 성격 변화는 예수와 하나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와서, 나를 따라라.” ) 그리고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은 성격 변화가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관계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교제 안에 정착하고 자라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행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제자들이 “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할 때, 예수는 희망적인 대답을 한다: “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27절) 우둔한 제자들은 마침내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변화하여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들과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변화하고 시작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29-30절]). 첫 번째 단계의 결과로 “ 첫째가 꼴찌가 되는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 (31절)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설교적 관점
-오늘 본문은 설교자에게 도전과(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가능성(사람은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가능) 모두를 지닌 갈등을(tension) 제공하고 있다. 그 갈등은 한 부자 (rich man)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예수는 이 장면 바로 앞에서 “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포하였다. 이 선언을 듣지 못했던 것이 확실한 이 부자는 이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5절)라고 묻는다. 이 부자의 마음은 특권층에게서 전형적으로 보이듯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이다. 그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완전히 의지함으로서 받으려 하기보다는 이 부자는 영생을 받기 위해 (inherit)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 사실 이 갈등은 그의 질문에 이미 나타나있다. 무언가를 (상속)받기 위해 사람은 할 일이 거의 없다. 개념상 상속은 주어지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진실하게 지켜왔다는 그 부자의 말을 인정하면서 예수는 무언가 더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제시한다. 예수는 그에게 “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절). 이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여 이 남자는 예수의 요청을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슬퍼하며 떠나간다. 여기서 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데(impossible)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고(more impossible)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의심가운데 “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27절)라고 대답한다.
-이제 독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한 가능성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 가능성은 단지 부자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예수는 거의 같은 어조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들은 박해를 받았지만 집과 논밭과 새로운
가정을 받게 될 것이고 앞으로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모든 것의 순서를 바꾸면서 결론을 맺는다: “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31절).
-설교자는 이런 갈등을 피하지 말고 잘 풀어나가야 한다. 이 본문은 극단적인(extreme) 요구들 (모든 것을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극단적인 판단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은혜와 보상으로 표현된 극단적인 약속들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선언은 본문이 가진 갈등(긴장)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예수가 그 부자에 대한 명령과 부유한 자들에 대한 준엄한 도전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은 모든 부자들은 문자 그대로 (literally)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영생을 얻을 것을 요청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단순하게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접근은 이 보다 앞서 있었던 어린아이에 관한 이야기(다른 측면으로 접근했던) 그리고 신약성서의 다른 부분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설교자는 이 부자에 대한 예수의 철저한 명령(radical command)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는 예수의 날카로운 언급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부자에 대한 예수의 날카로운 도전은 오늘날에도 특히 부유한 서구교회 회중들에게 해당이 된다. 예수의 명령과 그의 은혜의 말씀은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가 강조한 “ 값비싼 은혜” (costly grace)처럼 함께 있어야한다.
-이런 갈등 속에서 예수가 그 부자에게 보여준 접근은 설교자가 이 본문으로부터 난해한 구절들을 설교하는데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한다. 예수는 그 부자를 사랑한다: 그를 악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 그 부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온 신실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이 부자의 “ 죄” (sin)를 비난하기보다 예수는 그의 약점 곧 소유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삶을 살지못하는 것을 대면한다. 예수는 여기서 이 남자를 포로로 만들고 있는 그 “ 힘” (power)을 지적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초대한다.
자크 엘룰 (Jacques Ellul)이 말한 것처럼 돈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다(to give it away). 어떻게 돈이 지닌 영적인 “ 힘 ” 을 (spiritual power) 이길것인가 ?
보다 많은 돈을 축적해서도 아니고 선한 목적으로 돈을 사용함으로도 아니고 , 정직한 거래를 함으로서도 아니다 . 돈이 지닌 법칙은 쌓아두는 것이고 사고 파는 것이다 . 그러기 때문에 돈이 지닌 영적인 힘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가진 돈을 거저 주어서 그것을 비신성화하고 우리자신을 그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 돈을 버리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영적인 힘으로부터 승리하는 것이다 .
-예수는 사랑으로 이 부자에게 날카로운 말을 했는데 그것은 예수가 그를 자유하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랫동안 포로가 되어있어 자유함으로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다는 것을 예수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자리에서도 이렇게 약속한다: “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All things are possible with God).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0장 46 ~ 52절 (0) | 2022.08.10 |
---|---|
마가복음 10장 35 ~ 45절 (0) | 2022.08.10 |
마가복음 10장 2 ~ 16절 (0) | 2022.08.10 |
마가복음 9장 38 ~ 50절 (0) | 2022.08.10 |
마가복음 9장 30 ~ 37절 (0) | 2022.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