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고유한 주제를 갖고 있지만 공통되게 포함-배제(inclusion – exclusion)와 관련된 질문을 던진다. 30-32절에서는 갈릴리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자들이 구별되었고, 33-37절에서는 제자들의 모임에 어린아이가 포함되게 되었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에 관한 예언이 다시 나오는데, 우리는 왜 십자가의 스캔들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지 질문하게 된다.
30-31절에는 “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우리는 예수가 제자들에게만 가르쳐 준 교훈도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예언이 그렇게 충격적이어서 공동체에 속한 사람에게만 들려준 것인가? 비록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구절은 예수와의 관계가 예수에게 주어진 사명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에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제자들과 다른 갈릴리 사람들 간의 구별은 오늘날 전도와 양육의 관계에 대해 어떤 암시를 주는가?
예수는 은밀하게 “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 고 말했다(31절). 마가는 다시 십자가의 스캔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임박한 고난, 죽음, 부활에 관한 예수의 예언과 제자들의 몰이해(막 8:31ff.; 10:32-34). 이 가르침이 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의 하나로 인간의 지식과 신의 계시 사이의 큰 간격을 언급할 수 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의 방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고, 나의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 (사55:8) 인간 지식과 지혜의 한계 때문에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제자들이 십자가의 스캔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의 계시의 당연한 차이 뿐 아니라 인간을 타락시키는 죄의 위력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칼뱅은 제자들이 그렇게 명백한 선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 놀라면서 그런 입장을 개진했다: “ 선입관의 위력은 대단하여 가장 밝은 빛 가운데서도 우리의 정신을 암흑으로 덮는다.” 어리석은 상상력의 장막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바로 앞에 서 계시는 진리를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칼뱅의 코멘트를 통해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을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신의 계시의 차별성이나 인간의 죄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이 갖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예수가 메시아인 방식의 차이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제자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어떤 분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틀 안에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신학자들이 논쟁했던 질문과 연관된다: ‘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간의 관계’ 와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종류의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가? 초대교회는 144년에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사이의 절대적 단절을 정죄했다. 마르시온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교회는 그런 구분은 “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 (마태5:17)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상반된다고 판단했다. 마가복음 9:30-32은 제자들의 메시아적 기대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일어나는 새로운 존재를 확연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 본문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33-34절에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고 예수는 “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라고 말씀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한 것이요” 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어린이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수는 어린이가 약하고 독립적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나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천하고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예수와 성부 하나님의 관계를 암시하듯) 예수가 어린이를 안아 들고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의 표상으로, 그리고 예수 당신의 대역으로 제시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적 규범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것이었다.
Joyce Ann Mercer는 이것이 예수가 제국의 목적(the purposes of empire)에 대항하는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국의 정치학은 권력자와 특권층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예수가 보여주는 정치학에서는 낮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이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본받으라고 하며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하기를 종용하시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영접하고,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와 예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이는 하나님이 사회적 계층구조를 뒤엎고 낮은 자를 품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한다. 우리는 기쁨과 경의에 차 어린이를 볼 뿐 아니라 어린이를 통해 오늘의 모든 형태의 제국적 권력에 저항하고 예수가 제시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방식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 저항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목회적 관점
전도서에서는 “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전 3:7)고 한다. 말해야 하는 경우는 많이 있다: 중요한 쟁점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고 싶을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원할 때; 사회적인 대화에서 한 몫을 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을 동정하거나 격려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을 때. 그런가 하면 침묵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쟁점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말 모를 때; 파괴적인 증오 말고는 표출할 것이 없을 때;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신비를 마주했을 때; 어떤 말도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고 단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있어줄 수 있을 뿐일 때. 그러나 침묵해야 할 때인지 말해야 할 때인지 아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과 요구에 대해 더욱 개방적이어야 할 상황을 우리가 주도하려고 말을 너무 많이 할 때가 있다; 때로는 불의와 악에 반대하여 말해야 할 때 침묵한다. 때로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말한다; 때로는 위로와 지지와 통찰력 있는 말을 해주어야 할 때 주저한다.
마가복음 9:30-37에서 마가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주고받은 대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자들이 예수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두 번 침묵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들의 침묵은 애매하다. 그들의 첫 번째 침묵은 예수가 배신당하고 죽임당하고 죽음에서 부활할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거듭 말한 후에 찾아왔다. “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32절) 왜 제자들은 예수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예수가 하는 말을 충분히 들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싫어서 주저했을 거라고 이해할 수 있다. 듣기 두려운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침묵할 때가 있다. 질문해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들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침묵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의 두 번째 침묵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에 관해 논쟁을 했는지 물으신 다음에 찾아온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대답하기 부끄러워서 침묵하는 것으로 보인다. “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4절) 예수가 지금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논쟁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예수가 우리를 보면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조바심내고 있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침묵하게 될지 생각해 보면 제자들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지위에 관해 많은 시간을 염려하며 보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명예의 상징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 위한 계책을 찾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열어주신 인생의 길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침묵하게 될 것이다.
한번은 연회에서 메인테이블의 세팅을 책임진 적이 있었다. 테이블의 한쪽 끝에는 연회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앉고 그 옆에는 처음 참석한 사람이 앉도록 해서, 처음 온 사람들이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했다. 참석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자기 좌석
카드를 보자마자 자기 자리를 테이블 중앙에 있는 연회를 주재하는 사람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뻔뻔스러워야 하는데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줄 만한 자리에 있으려는 깊은 욕구를 드러낸다.
제자들은 그들이 침묵하더라도 예수가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했는지 어느 정도 알 거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분명히 곤란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예수는 계속해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5절) 예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시는데,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그를 껴안아 주시고 이렇게 약하고 무력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제자들과 우리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주목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남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어린이들과 동일시 될 것이며, 어린이들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에게는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바로 다음 장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에게 데리고 오고,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으면서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애쓴다. 그것을 본 예수는 “ 노하셨다.” (10:14)
마지막으로, 예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찾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은 부담스러운 요구라기보다는 해방하는 언어로 사용된다. 연회의 메인테이블에서 자기가 어디 앉을지에 관심이 너무 많아서 자기가 직접 자기가 앉을 자리를 바꾼 사람에게는 연민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연연하고,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의 품 안에서 편안하고 도움을 받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어린이를 통해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존재가 된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변화산 이야기, 귀신들린 아이를 축사한 이야기 그리고 계속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 다음에 나온다. 마가이야기의 핵심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십자가, 그리고 빈 무덤이다. 이 핵심적인 이야기 안에 진짜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에게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 또 예수를 통하여 “ 나를 보내신 분” (the one who sent me)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와 복음서 이야기에 대해 친숙하다는 얄팍한 우리인식은 때로 메시아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또 “ 친절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예수” 에 익숙해 있게되면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예수에 대한 철저한 복음의 내용을 부드럽게 하여 본질을 왜곡시킨다. [선입견을 버려야 보인다]
-이 본문을 가지고 하는 설교는 몇 가지 형태가 될 수 있다. 먼저 이 본문이 회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포인트나 원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약한 존재들 [어린아이]에 대한 예수의 관심같은 것이다. 또 설교자는 이야기 전체를 취해서 주석적인
설교를 할 수있다: 제자됨을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을 통해 보여준 예수의 가르침과 그것을 이해못하고 있는 제자들. 혹은 이 본문에서 2개의 주요한 구성가운데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지속적인 어려움이라고 강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어린아이 하나를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함으로써 예수를 보낸 분을 영접한다는 것이 지닌 실존적, 현실적 의미를 강조할 수도 있다.
-설교자는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우리들을 부르는 철저하고도 영적인 부름을 회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하여야 하나 하는 부담감을 느낀다. 설교자와 회중은 메시아 예수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갖게 될 것인데 그것은 때로는 성경본문의 메시아로부터의 부름일 수도 있다.
메시아 예수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때로는 우리기대보다 그 이상으로 때로는 구원자는 이래야된다라는 우리 생각을 반박하면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제자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메시아인 그의 역할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그 곳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종이 됨으로 얻는 지도력은 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할 때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물이다.
-본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본문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지도력과 권위는 섬김과 겸손함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복음서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제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는 공동체 안에서 지도력은 어린아이를 영접함과 같다라고 직접 보여준다. 문자적으로 이해할 때 본문은 어떻게 우리 회중들은 어린아이를 목회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다음에는 어린아이의 비유에 기초하여 어린아이처럼 약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 즉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 다른 인종들에 대한 질문이 뒤를 잇는
-대개 성서본문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오늘날 회중들, 환경, 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단순한 유사점을 찾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이 성서정과 본문의 경우 우리는 제자들과 우리 회중들 혹은 어린아이와 오늘날의 어린이들(회중이나 사회에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점을 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설교자는 한편으로는 메시아가 지닌 래디칼한 면에 관하여 회중들이 핵심적인 가르침에 이르도록 도움을 줄 필요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서 나오는 철저한 가르침 즉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처음된 자가 나중된다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본문은 사람들이 어린아이의 순진함에 대해 단지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교회에서의 주일설교에서 그쳐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어떠해야 하는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 이 지도자들의
방식은 무엇인가? 본문에서 예수가 스스로 메시아로 자신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제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가르침으로 전환함에 있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오늘날 우리 신앙공동체에서 본문을 적용하여 제자들의 공동체가 그야말로 철저하게 메시아의 몸이 되어야 한다고 읽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이 본문은 결단을 요구한다. 우리는 메시아가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권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가? 설교자는 회중들의 지도자들의 삶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리더쉽을 갖고 일하는 회중들의 삶에서 이 결정이 지닌 긴급성과 현실성을 이해하도록 전달하여야
한다. 철저하게 종이되는 리더쉽은(radical servant leadership) 교회에서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인된 삶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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