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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10장 35 ~ 4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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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칼뱅은 본문이 인간의 허영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했다. 거룩한 열심을 내면서도,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야망이나, 육신적 악덕과 같은 것들이 수반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허영, 욕망 등과 같은 악습의 문제는 기독교인에게만 문제가 아니다. 사회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나 영예를 추구하는 경우를 우리는 매일 본다.
우리가 정부, 기업, 자선, 학계, 교회 등 어느 분야, 어느 영역을 보든지 지도자의 이해관계를 그 추종자들의 이익이나 필요, 그리고 그 단체의 본연 목적 추구와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늘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생각할 때 현재 지도자들은 잘못된 목적을 갖고 있다고 판단한다.
   야망이나 허영의 문제를 마가는 역설적인 이야기로 제기한다. 예수는 방금 그가 재판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1-:32-34)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도 권력과 지위에 대해 꿈을 꾸고 있다. 곧 예수가 십자가에서 좌우에 강도와 함께 못 박히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한 채, 예수가 영광 중에 오실 때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예수의 “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그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권력과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열망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다른 제자들은 이 형제들이 그런 뻔뻔스러운 청탁을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그 이유는 자신들도 그런 꿈을 꾸고 있었는데 이들이 선수를 쳤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는 제자들의 지도자 상(이는 곧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지도자 상) 과는 반대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도자는 군주가 아니고 종이 되어야 한다. 목적은 섬기는 것이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섬김의 리더십의 개념은 섬김과 리더십의 잘못된 개념에 대한 강력한 교정이다. 섬김은 지위가 낮은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리더십은 타인에 대해 물질, 명예, 관리, 정치적 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을 개인적인 성공과 혼동하여 생각한다.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한다고 하지만 많은 경우 허영과 야심의 동기가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예수가 제자들을 꾸짖은 것은 그들을 비웃거나 좌절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간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에 대해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러나 가장 헌신적인 지도자조차도 허영과 야심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인류를 증오하고, 세상을 세상 방식으로 돌아가게 놓아두고, 우리만 우리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다면 이것도 잘못이다.  
   그 대신, 우리의 고질적인 자기중심적 경향에 대한 적절한 대처 방안은 우리의 동기에 대해 스스로 주의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약할 때도 그들에게 동정심을 보인 것처럼, 지도자들도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동정해야 한다. 그들도 자신들의 동기를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메시아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간성의 덧없음에 대한 적절한 조치는 리더십이나 행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정부 안에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의 장치를 세우는 것이다. 공동체가 신뢰할만한 기구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기희생에 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는 강력하고 감동적인 자기희생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값으로 내어주셨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섬김의 리더십과 자기희생적 사랑의 궁극적인 모범이 되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희생(self-sacrifice)이 자기부정(self-denial)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위해 희생한 것은 자아보다 더 고상한 무엇을 위한 것이었다. 복음 약속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통해, 더 숭고하고 온전한 자아가 드러남과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계속 확대된다는 것이다. 자기희생은 따라서 자기훼손이나 자기절멸이 아니다. 우리는 증발하라고 부름 받은 것은 아니다. 허영과 야욕뿐 아니라 겁냄과 나태도 악덕에 속한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눅 10:38-42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와 지난주 본문의 보상의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확장되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을 집중할 때, 우리는 자기중심적 자아를 잃고, 다른, 더 고상하고 더 온전한 자아를 얻게 된다. 이 새로운 자아가 예수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내 제자가 되라고 부를 때 응답할 수 있다.  

 주석적 관점 


▶ 이 본문은 마가가 세 번 반복하며 세 차례 같은 내용을 기술한 본문 중의 하나이다. 인자에 대한 거절과 옹호의 예언(8:31;9:31;10:33-34), 예수의 자기이해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 혹은 거부(8:32-33;9:32-34;10:35-41), 참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 실수들을 교정하는 것(8:34-9:1;9:35-40;10:42-45) 등이다.  


▶ 마가가 계속해서 강조한 메시야상과 제자도는 1)예수는 인자로서 인간에 의해 모욕받고 죽음 당한다는 것 2)그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사명과 이것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3)예수는 제자들의 오해를 명확한 가르침으로 도전을 주는데, 예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실제로 10:32-34에서 시작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서 세 번이나 예수는 이스라엘 당국에 의한 체포, 사형선고, 이방사람들에 의한 모욕과 살해, 3일만의 부활을 예언한다. 10:32-34는 구약(시22:6-7,사50:6)과 복음서 이야기(14:43-16:6)의 요약이다.  

▶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첫 번째 부른 제자들이다(1:19-20). 베드로와 안드레와 더불어 열 두 제자의 대표로 기술된다. 그들의 접근이 충격적인데, 예수의 마음에 들고자 다가가 특별대우를 요청한다. 그들의 속내를 들어내기 전 이미 예수께 알랑거린다. “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10:35). 이것은 헤롯왕의 자기 딸에 대한 경솔한 제안(6:22)을 상기 시킨다. 베드로가 예수의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 사탄과 연관된 것같이(8:33) 세베대의 아들들은 부지중에 자신들을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는
고관들과 자신들을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그들이 영광의 자리에 앉혀 달라는 청원은(10:37;시110:1) 아이로니가 가득하다. 그들의 요청은 방금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자리변동(10:31)은 염두에 없다. 나아가 이 복음서에서 인자의 영광은 고난과 얽혀있다(8:38-9:1;1324-27;14:61-65). 마가에서 예수의 오른쪽과 왼쪽을 차지한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였다. 예수가 말한 “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10:38a)라는 말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38b-40절의 말씀은 대화자들이 복잡한 메타포를 사용하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 효과는 제자들의 몰이해를 강조하면서도 예식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약에서 ‘ 잔’ 은 이중적인 이미지인데 기쁨과 구원(시23:5;116:13)이나 근심과 고난(시11:6;사51:17,22)을 의미한다.
제자들과의 유월절에서는 잔은 예수의 “ 많은 사람을 흘리는 피, 언약의 피” (14:23-24)을 상징한다. 예수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어보실 때 그들은 비록 이 말을 희망차게 들었지만 더 불길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14:36 요18:11과 비교).

마찬가지로 ‘ 세례’ 도 다의적이다. 세례가 회개와 죄의 용서와 연관되지만(1:4), 세례요한의 참수(6:14-29)와 예수의 십자가를 예고하기도 한다. 예수는 복음서 초기에 그의 셰례(1:9-11)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지만, 결론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었다(15:39). 10:39b-40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운명을 자신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갈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말하신다. 잔과 세례에 대한 이 언급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게 하는데, 광야에서 예비한 길과(1:2-8)과 마지막 만찬에서 그가 왕국으로 들어가기 전 인자를 위해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14:12-25). 여기에서 나머지 12제자들도 등장하는데 화를 내를 것으로 그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과 같이 둔감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10:41;14:27-31). 그들의 분노는 9:33-35을 생각나게 하는 진정한 제자도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가르침(10:42-44)을 촉발했다. “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 (9:35,37). “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10:43-44).

▶ 마가10장에서의 제자도에 대한 주요 메타포는 ‘ 섬기는 사람’ (diakonos 43,45)과 ‘ 종’ (doulos 44)이다. 그들이 나누고자 하는 중요한 생각들은  높은 자들의 봉사는  10:42-43에 나타난 이방인의 거들먹거리는 독재와 비교된다. 구약에서 이상적인 왕은 백성들을 섬기는 자이다(왕상12:7). 마가에서 인자의 특별한 봉사의 명확한 표현은 “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10:45)는 것이다. 본래 시장에서 재산의 양도와 해방에 요청되는 ‘ 몸값’ (ransom)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종교적 상징으로 나타나는데(출6:6;15:13;사43:1-7), 특별히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상징한다(롬3:23-25a’ 딤전2:5-6;벧전1:18-19). 중세의 속죄론(만족설)과 같은 이론을 마가에서 읽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죄의 포로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자유의지로 주신 것이다.(15:6-15). 
 
 목회적 관점
 
미국의 심리학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과 의사 열명 가운데 한 사람인 Donald Meichenbaum은 운전 중에 그의 차가 벼락에 맞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Meichenbaum은 집에 와서, 그가 겪은 위험을 그의 십대 아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아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 공감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의 아들은 그의 말을 가로채서는, “아빠, 로또 사세요. 번개에 맞을 확률이 로또에 당첨될 확률하고 비슷하대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면에서 Meichenbaum의 전형적인 십대 아들처럼 자기도취적이다.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정중하게 대답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은 대답하기를,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요청은 예수님이 세 번째로 자신의 고난을 예고하신(10:32-34) 직후에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제자들이 예수가 영광을 받으실 때 그의 옆에 앉기를 요청했다는 것은 놀랍다. 그들은 듣지도 못했다는 말인가? 사실 이 일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막 1:15) 온 것의 중요성에 관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애를 먹었던 일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새롭게 이해하도록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10:2-12),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재산이 많은 사람을 만나신 의미와,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그리고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두고 갈등했다.
마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야고보와 요한이 왕국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달라는 자기들의 요청을 가지고 예수에게 접근했을 때, 이야기는 우스꽝스럽게 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 두 사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신경하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에 관하여 궁금하게 여겨야만 한다. 웃었을까?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관한 예고를 듣자마자 이런 요청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불신앙에 놀랐을까?
아마 마태는 야고보와 요한의 오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그들을 위해 그런 요청을 했다고 한다(마 20:20). 그는 “ 밀어붙이는” 어머니를 비난하기로 결정한다. 누가복음은 전체 사건을 미화하면서, 이 일을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크냐에 대한 논쟁이라고 말한다(눅 22:24).
복음서들의 이런 차이들이 세베대의 아들들의 뻔뻔한 행동이 불편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믿을 수 없는 요청에 대해 웃어넘기지 않는다면, 이들 사랑받는 제자들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우리는 이렇게 별나고 무신경한 요청을 하는 자아도취적인 형제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갈망에 대하여 노골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이런 종류의 특권적인 지위를 얻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데 소비한다. 우리는 성장하는 지역에 있고 사례를 많이 주는 대형 교회를 원한다.
우리는 강력하고 신뢰할 만한 설교자라는 평판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반에서 일등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드러내서 인정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원한다.
우리는 정말로 이들 욕심 많은 세베대의 아들들과 다른가? 우리는 별난 요청을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으로는 종종 많은 사람들 가운데 최고, 가장 높은 자리,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위치를 탐낸다. 사실 이것이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한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여러 방식 가운데 최선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신학적으로 이것을 간단하게 창세기 3장의 타락으로 설명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것을 Maslow의 욕구단계, Erikson의 발달의 단계, Freud의 id 충동과 같은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다. 혹은 Jana Childers(San Francisco 신학교, Professor of Speech-Communication and Homiletics)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에 세베대의 DNA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우리가 세베대의 아들(혹은 딸)이 되려는 우리 자신의 경향성을 직면해야만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규정할 수 있고, 제자도라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Henri Nouwen은 “ 자신의 상처받은 상태를 직시하는 사람들만이 치유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Henri Nouwen, The Living Reminder, New York: Seabury, 1977, 21; 피현희 역,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11)고 썼다. 우리가 우리의 상태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정직할 때, 우리는 온전함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는 온전함의 모델이다. 그리고 그는 “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다룰 때나 우리를 탐욕과 갈망으로 이끄는 불안감을 극복할 때, 예수처럼 우리도, 언제나 섬김을 받는 게 아니라, 적어도 어떤 때는 섬기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종이 될 때 변화는 일어난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막 10:17)이 영생에 대하여 물었을 때, 예수는 그를 초대한다. “ 나를 따라라.” 종의 인생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킨다. 요한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금하도록 예수에게 요청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 (막 9:38-39) 비정통적인 방식으로라도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온전함으로 인도할 수 있다. 종이 되는 것은 은총을 위한 수단이다. 이 말씀의 빛에서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한 말은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 거룩하신 주님, /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설교적 관점 

-어느 면에서 이 본문은 비단 야고보와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예수는 자신의 수난에 대해 세 번씩이나 말했었다.
그러나 아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영광으로 들어갈 때 높은 자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 영광” (glory)이라는 아이러니칼한 자리가 십자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죄인들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 좌우의 사람들) 그의 오른편과 왼편에 “ 앉게” (sit)될 것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두 제자는 자신들의 요청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린 것 같다. 마치 졸린 어린아이가 부모가 주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보채는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수를 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실건가요?” 사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당혹스러워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이 요청을 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 20:20-22).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단지 야고보와 요한만은 아니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도 매한가지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난 후 나머지 제자들은 화를 냈고 예수는 위대하게 되는 것과 섬기는 일에 대해 가르치게 된다. 아무리봐도 이 장면은 마지막 수난예고에 대한 코믹한 대위법이다.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오늘날 교회들이 섬기는 종으로 살라는 예수의 요구에 응답하기 보다는 “큰 자” (biggest)나 “ 일등” (best)이 되기 위해 살라고 교인들을 경쟁시키는 것은 아닌지를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자는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을 한 동기를 살펴볼 수도 있다. 그 동기는 오늘날 회중의 요구와도 공감대가 있을지 모른다. 10장 32절에 “ (예수를)뒤따라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있을 수난에 대한 예수의 이
불길한 예언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 분명하게 이해되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있었던 것 같다. 두려움으로 야곱와 요한은 안전한 미래를 약속받을 것을 바라게 된다. 그들은 단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에 자연적으로 조용히 반응한 것일 수 있다.  두려움과 그로인해 안전함을 요청한 것이라는 인식은 오늘날 강단에서 설교학적인 성찰을 필요로 한다. 테러에 대한 두려움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고 선제공격등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실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류교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그 생존을 포함하여)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어려움을 택하기 보다는 (야고보와 요한같은)우리들 자신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단순히 코믹한게 아니고 비극적이면서 코믹한 것 (tragicomic)이고 우리들의 행동과도 같은 것이다. 설교자는 단순히 제자들의 몰이해를 비난하기 보다는 두려움이 안전을 간구하게 된 점을 깊고도 공감을 갖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와 성만찬을 십자가의 길과 연관시키고 있는 점은 이 주제를 설교함에 있어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임박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예수는 세례와 성만찬의 은유를 사용한다: “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8절)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것 즉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막 8:34)을 수반한다. 유사하게 식탁에서 잔을 나누는 것은 신앙공동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길로 초대받는 것이다. 교회에서 예전을 시행함에
있어 중요한 일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안전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교회를 예수의 길 곧 섬김의 길로 부르는(call) 일이다.  이 부름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한 가지 약속을 가져다준다:"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39절).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예수께서 위협이나 경고를 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 야고보와 요한아 너희도 나처럼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큰 틀에서 보면 예수의 말씀은 특별한 약속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너희는 두려움으로 인한
안전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도리어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신실한 제자가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교회를 향한 위대한 약속이 있다. 우리는 늘 두려움에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안전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예수의 약속을 가지고 그를 따르기를 추구할 만큼 신실한 제자로 살 수있고 또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머뭇거리고 갈팡질팡하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약속이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교회의 제자됨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교회를 월터 윙크(Walter Wink)가 말한 지배체제 (Domination System)에 대한 대안적 방식을 구현하는 도구로 부르신다. 열두제자에 대한 그의 마지막 가르침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2절)라고 하며 그 이방사람들 (the Gentiles)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예수는 십자가의 길이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길이라고 단언한다. 지배체제는 다른 사람을 힘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며 사회구성에 있어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지배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 승자와 패자, 내부인과 외부인, 명예로운 것과 부끄러운 것등으로 구분하여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본문에서 십자가는 우선적으로 개인적인 죄사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들에게 인생의 짐을 견디라든지 금욕적인 자기부정의 훈련을 하라든지 혹은 폭력이나 그릇된 것을 참고 받아들이라는 요청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신앙공동체를 향하여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적 길을 보여주고 나아가 그 결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고난을 견디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배체제에 저항하여 우리를 그 체제로부터 자유하게 했듯이(구원했듯이, ransoms us, 45절) 우리도 신실한 제자가 되어서 그가 걸었던 저항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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