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당신이 70년경에 갈릴리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전쟁 중이다. 일부 급진주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예루살렘은 포위당했다. 도시의 상황이 나쁘다는 보고가 들린다. 사람들은 나누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성지에서 쫓아내기 위해 지도자들을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평화와 안전의 방도로 로마에 항복할 것을 촉구한다. 모두가 중무장한 군인들의 분노와 극단적인 게릴라에 대한 공포 사이에 끼어 불안해하고 있다. 또한, 네로 황제는 작년에 사망했고, 로마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네 명이 황제를 참칭했지만 암살당했다. 이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장군인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이것이 전쟁의 추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유가가 급등한다 - 올리브기름 가격을 말한다. 세계는 혼란에 빠져 있다. 미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당신이 사는 마을 주민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으며 그들 간에 높은 긴장이 있다. 주민들은 서로를 두려워한다. 가족도 인종적 관계로 분열되었다. 약 40년 전 반란죄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라는 갈릴리 출신의 랍비를 추종하는 한 작은 종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여 싸우기를 거부한다. 로마 충성파는 그들이 창시자의 노선을 계승하여 계속 반란적 행동을 한다고 의심한다. 랍비들은 그들을 이단이라고 부르며, 열심당 반란군은 그 창시자가 로마의 압제에 대한 저항 운동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이스라엘과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의 상징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마음이 끌린다. 당신이 묻는다.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예언자인가? 그분의 처형이 어떻게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가? 누군가 두루마리를 건네준다. 거기에는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의 시작"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제목은 도발적이다. "좋은 소식"은 무엇보다도 예수에 관한 이야기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유대인의 묵시론적 전통을 반영하며, 하나님 나라에 맞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세상을 뒤흔들어 고쳐 회복하는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희망이 그 내용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로마의 동전 황제 초상 옆에 새겨진 divi filius라는 문구의 주장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기존 정치 질서에 도전하고 이방 압제자들을 반대하며 이스라엘 편을 드는 이야기라고 기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현재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독자가 곤경에 처한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마가는 예수에 관한 선포를 한다. 그러나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이스라엘의 성서를 돌아본다. 실제로, 우리는 그 신앙의 유대교적 뿌리를 이해하지 않고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의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한 이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하신 모든 일과 조화가 돼야 한다.
마가는 복음의 시작은 이사야가 말한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사야가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을 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마가는 이사야 40장 3절과 "광야"에서의 요한의 설교(4절)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한다. 이사야는 세례 요한을 이해하는 틀이 된다. 이사야 40장 3절은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간섭을 바라본다. 마가가 볼 때 세례 요한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사 40:1)를 알리는 목소리와 같다. 비록 1세기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아니지만 외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다. 마치 고국에서 바벨론 포로 경험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어서 이사야 40장은 회복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적절한 유비로 여겨진다.
성서는 곤한 영혼들에게 희망을, 자만한 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한다.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혹은 자신의 편견이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성서를 읽는 인간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우리는 성서를 자기비판의 방도로 읽어, 성서가 우리를 교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위스 개혁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성서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마가는 이스라엘 선지자들에게 돌아간다. 마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개입을 고대하는 것을 묘사한다. 마가가 그들과 나란히 서서 그들이 바라보는 것을 볼 때, 그는 세례 요한을 그들과 유사한 인물로 여긴다. 마가는 요한이 예수를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조정한다.(7-8절). 그리하여 <하나님을 회개와 신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언자들>을 통해 훈련된 눈으로 마가는 예수를 바라본다. 마가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이스라엘과 로마 그리고 그들 자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도록 권유한다.
우리는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예언자 요한의 말을 경청하는 무리와 같다. 우리는 만사를 바로 잡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대한다.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를 보여준다. 예수는 오래전에 오셨고, 또 우리를 위해 곧 오신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우리에게 실제로 올 때 우리는 모두 당황할 것이고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 누구인지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세례 요한을 따라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더 강한 자의 오심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소서 주 예수님.
주석적 관점
예언자적 시작: 마가복음서는 마태복음서처럼 예수의 탄생이나 누가복음서처럼 세례 요한의 탄생이야기 또는 요한복음서처럼 시간의 시작으로 이야기를 열지 않는다. 오히려 마가복음서는 예언자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마가복음의 서문의 시작이며 이 서문이 8, 11, 13절로 끝나는가 아니면 15절까지인가에 대한 논쟁이 많지만 막1:1-8은 막1:9-15절의 예수에 관한 부분과 병행하여 세례 요한에 대한 별도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에 대한 많은 인용과 함께, 마가복음서의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한다. 이 구절은 1-3절, 4-6절, 그리고 7-8절의 세 부분으로 간략하게 나누어진다.
되돌아보기(1:1-3): 청중이 듣고 읽고자 하는 것은 복음(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첫 시작 구절이 주는 효과를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시작하는 1절에 혼란스러워하지 말기 바란다. 이 1세기 그리스도인 청중들은 복음을 로마와의 유대전쟁 중 또는 직후의 수년 동안 살아남고자 싸울 때 좋은 소식으로 접했다. 어떤 이에게는 단지 책 제목일 뿐이고, 혹은 어떤 이들에게는 가르침이 되는 이야기의 제목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1절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으로 외쳐질 때, 이 복음서가 예수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다는 것의 신학적인 의미부여와 더불어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세례 요한의 등장(1:4-6): 복음서의 저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한 사람으로 세례 요한을 등장시킴으로써 예언의 성취를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세례요한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부르는 설교가이자 세례를 주는 이로 묘사된다. 어떤 학자들은 세례가 이 당시에 종교적 예식으로 확정되었던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례는 요한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개종에 관계된 것이거나 쿰란 공동체의 세례 예식과 관련된 것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이 무엇이건, 요한의 죄로부터 회개에 대한 설교와 세례는 성공적인 것이었다. 설교자로써의 성공했다는 것은 "모든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는 말로 알 수 있다. 요한의 옷차림과 식습관에 관한 서술이 뒤따르며 엘리야의 이미지(왕하 1:8)가 당시와 현대의 독자/청자들의 생각 속에 곧바로 떠오른다. 엘리야의 현현으로서 요한의 이미지는,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다시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메시야가 도래할 때까지 멈춰진 엘리야의 예언들에 대한 생각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묵시적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미래를 바라보기(1:7-8): 7절과 8절은 요한이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뒤에 올 이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며 관심을 미래로 향하도록 한다. 세 공관복음서의 세례 요한의 설교를 비교해 보면, 마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요한의 설교에는 어떠한 위협도 없다는 점은 중요하다. 마태복음(3:7-10)과 누가복음(3:7-9)에 나오는 요한의 비판적인 역할과는 다르게 마가복음에서 요한의 주요한 역할은 예수의 사자(使者)로서의 역할이다. 8절은 요한의 부분(1:2-8)에서 예수가 나오는 부분(1:9-15)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부분에서 예수와 요한 사이의 가장 강력한 비교를 보여준다. 요한은 그에게서 예수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예수가 더욱 강한 분이시고, 세례 요한은 그를 섬기는 존재이다. 세례 요한은 이 복음서 안에서 빠르게 배후에 등장해서는 1:14, 9:13, 11:30, 6:14-29(요한의 죽음) 부분의 간접적인 언급을 제외하고는 1:10 이후부터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말씀: 오늘 이 복음서의 가르침은 다른 성서정과 말씀들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이사야 40:1-11은 마가복음서 저자가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며 시작 부분에 인용한 구절에서 이사야의 부분을 담고 있다. 이사야가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해방이 온다고 선포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은 1세기 재림의 지연의 문제를 직면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3:8-15a의 독서도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서정과의 말씀들이 읽혀질 때 우리 또한 21세기의 청중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한다. 우리 시대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찾아야 하는 시대이다.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이사야서의 말씀을 그 자신의 해석틀에 적용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말씀하신다. 마가복음서의 세례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 누가 그 사자 역할을 할 것인가?
분명하게 이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의 탄생이야기가 아니다. 이 복음서에는 말구유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이 마가복음서의 시작부분에서 우리는 또 다른 "탄생 이야기"를 읽는다. 대림절 두번째 주일, 새로운 시작, 하나님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우리 시대로 뛰어들어오신 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시기이다. 아마도 예상한대로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꼭 그 때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 분은 오신다.
우리 대부분은 신용을 얻고 싶어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어 낸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 비지니스 리더들이라면 신문 1면에 “그건 나에 관한 얘기가 아니에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보다 앞서 온 메신저가 있었고, 사실은 그가 길을 준비했어요”라고 말하는 기사가 실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그들이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난 일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출현이 시간 자체의 시작을 표시하는 장면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의 문화는 모든 새로운 것을 사랑하고 우리가 역사에 대하여 진 빚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리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변화의 달인으로 묘사한다. 지도력에 대한 오늘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지도자들이 그곳에 와서 그 조직의 전반적인 무능력을 돌려놓기 전에는 아무런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종종 그러한 지도자들은 “구세주”라고 불린다. 그래서 진정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겸손하셨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예수가 등장하기 전에, 그가 오는 것을 준비해 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이야기를 이사야가 한 말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사야는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고 말했다. 주님이라도 길을 준비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를 위해 길을 마련했다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구원자에 관한 문화로 둘러싸인 교회들은 목사에게 그녀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들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대림절 두 번째 일요일은 우리,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우리 앞 세대를 기리는 겸손함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예수께서 그것을 인정하실 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도록 길을 준비한 선구자들이 있다.
이사야의 예언 후에,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세례자 요한이 거창하게 등장한다. 이제 요한은 그 자신이 그 이야기의 끝, 즉 알파와 오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정말로 그 일을 해낼 사람을 상상했다.
요한이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요한의 추종자들이 보였을 반응을 상상해 보라. 누군가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들이 따르기에 합당한 사람을 따르고 있고, 그들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원한다. 누가 다른 사람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을 따르기 원하겠는가? 경영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은 적어도 그의 추종자들이 순조로운 전환 계획에 동의할 때까지는 더 나은, 그리고 미래에 오실 구원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마음속에 담아두어야만 했다.
저런 괴짜들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세상이 던져 주는 명성을 사들이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선포를 신뢰하는 괴짜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요한이 그 길을 준비하지 않고 세상의 명성을 받아들였다면, 대림절은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라 가장 나중에 등장한 선생에 의해 성취된 것에 관한 잘못된 신앙의 절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천년 후에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짧은 절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부터 요한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경건한 인물들은 등장하고 사라졌다. 사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있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 자신을 준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구세주는 오직 한 분뿐이다. 그리고 대림절에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은 겸손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계가 우리의 일정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림으로써, 우리는 그가 아직 여기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그가 아직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구세주가 우리 중 하나일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보장한다.
요한은 말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우리의 대림절 기도이다. 우리가 준비하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것을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고, 그가 마침내 여기 오실 것을 믿을 수 있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한 마지막 참가자들이 경쟁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그들은 변덕스러운 청중에 의해 하나씩 하나씩 투표로 탈락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우승자는 자기가 마지막까지 남은 출연자라는 것을 좀처럼 믿지 못한다.
그녀가 우승자의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한 것이고, 사실 그녀는 이미 산꼭대기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마지막 참가자가 서 있는 것은 임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단지 다음 시즌의 우승자를 준비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가 아이돌이 되는 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단지 아이돌일 뿐인 이유이다. 아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린다.
설교적 관점
-마가는 예기치 않았던 것을 선포하려고 달려오는 숨가쁜 메신저처럼 복음서를 시작한다.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태나 누가처럼 아기 예수를 우리들에게 기다리라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또한 마가는 요한복음 서두처럼 [예수를]고상하고 높은 어떤 분으로 [서술하며] 시작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마가는 간결한 선포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1:1). 그리고 나서 또 다른 메신저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데 그 또한 복음을 말할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설교자는 “복음의 시작”이 마가에게 있어 무엇을 말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편으로 ‘그 시작’은 이스라엘의 이야기 특히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이야기이다.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사야를 인용함으로써 즉 요한을 엘리야와 동일시하고 우리로 하여금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도록 함으로써 구속사 속에 자리잡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작’은 요한 자신과 더불어 있다. 즉 이 독특한 캐릭터인 요한은 매 순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가 이 전환기의 인물임을 이해시킨다. 그래서 요한의 말을 따르면 ‘그 시작’은 요한 자신이 아니고 또한 그 보다 앞서 있었던 예언자들도 아니다. ‘그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이 마가복음의 서언은 요한복음의 서언과 매우 흡사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요 1:1a)
-세례 요한은 준비란 회개와 고백을 담고있다고 선포하였다. 설교자는 이것이 처음에는 약속된 “좋은 소식” (복음,good news)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개와 고백 (repentance and confession)은 우리자신에 관한 진실을 대면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일들을 원하겠는가? 그래서 복음은 적어도 처음에는 종종 나쁜 소식처럼(bad news) 들린다. 회개와 고백 둘 다 과거에 대한 정직한 성찰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지름길이 없다. 앞 날과 오실 그 분을 계속해서 말하던 요한은 또한 회개를 위한 요청에서 과거를 되돌아볼 것을 말한다. 요한 그 자신이 입은 옷이 과거를 상징하고 있다. 요한의 낙타털옷은 수백 년 전 의상으로 예언자 엘리야가 입었던 종류의 옷이다. 이 옛 의상과 그 옷이 생각나게 하는 예언자 [엘리야]등 이 모두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어떤 운동도 처음에는 과거를- 그 과거가 개인의 역사이건 하나님 백성의 구원사이건 간에-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요한이 주장하는 이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은 항수 (nostalgia)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설교자는 회개와 고백을 촉구하는 요한의 외침을 수용하는데 거리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그것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거리낌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설교는 이어 나오는 복음을 제대로 듣게하는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요한의 말은 듣는 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비슷하게 다가오는데 그 이유는 우리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분명한 기다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말씀을 듣기위해 그 먼 길을 왔는가를 보여주고있고, 또 사람들은 성취를 기다리며 인간 내면에 거주하는 하나님을 향한 설명하기 어려운 열망을 보여주는 설교자의 말을 듣기 위해 오늘날도 먼 길을 여행할 것이다. 대림절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기다림에서 시작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본문은 우리들로 하여금 미래를 향하여 마가복음에만 독특하게 있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첫째로 성인 요한이 성인 예수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시작하면서 마가는 예수가 이미 성장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구유 곁에서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는 일이 유혹이 되는 시기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알리미 역할을 한다. 둘째로 본문의 마지막 말은 심지어 예수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은 교회력이 시작되는 때에도 기다려야 할 선물인데 그 이유는 성령이 이 모든 이야기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예수 이후에 오실 한 존재-여기에서는 성령을-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스라엘 옛 역사의 자취들을 모아서 시작하고 현재 이 순간으로 도달하게 함으로 결론짓고 있다.
사회적 관점
이번 주부터 그동안 진행해왔던 성서정과본문에 대한 신학적 관점, 주석적 관점, 목회적 관점, 그리고 설교적 관점에서의 해석에 “사회적 관점”을 보태고자 한다. 지난 일주일간의 시사적인 문제나 사회적 문제들을 가지고 말씀과 대비시켜 보는 것이다. 이는 칼 바르트의 명언이라 일려진 “한손에는 성경, 한손에는 신문”이란 말에 그 의미가 잘 담겨져 있다고 본다. 말씀이 세상 속에 임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를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관점이라고 여겨진다. 그동안 우리 FOW(말씀의 잔치)모임에서 시도하려 했지만 네 가지 관점에 대한 번역자를 더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이태훈목사님의 참여로 가능하게 되었다. 사회적 관점을 위한 텍스트는 시사주간지 <시사IN>이다. 진보적 정론지로서 정평이 나 있는 잡지여서 이를 토대로 하고, 간혹 세계적 시사에 대한 보충을 위해 주간 <Economist>지도 참고할 것이다(미국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공부할 때 신학대학원이 속해 있는 대학에서 국제경제학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그때 교수는 그 학기 동안 이코노미스트 지를 구독하도록 했다. 기본 텍스트는 따로 있었지만 경제시사 문제는 거기에서 몇 가지 관련된 기사들을 뽑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는 「2등 정규직 -주요은행 직급별·성별 인사 데이터 분석」이다. 커버사진도 페미니즘 소설이라 일컫어지는 <82년생 김지영>에서 따온 김지영이란 이름표를 단 여성행원의 얼굴 없는 사진이다. 그래서 대림절의 기다림이란 주제 속에 온전한 일자리에서의 양성평등을 바라는 이 땅의 절반인 여성들의 염원으로 정리해 보았다. 기본적인 내용은 <시사IN>이 심상정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이다. “주요 은행 5곳의 성비는 비슷하거나 여성이 더 많다. 그런데 고임금 고위직을 남성이 독식하고 저임금 창구업무에 여성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요은행 5곳은 KB국민·신한·우리·KEB하나·IBK기업 등으로 직급별·성별 채용 및 승진 등 현황자료를 기조로 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비교적 은행은 여성들의 취업률이 높았다. 은행 전체 고용 성비는 5대5이거나 오히려 여성 비중이 조금 더 높게 나타났다. 그런데 ‘하위 직군의 여성화’의 경향이 뚜렷하다. 하위직군은 대리·행원 같은 일반 정규직보다 연봉이 낮고 주로 단순 업무를 처리하는데 심상정의원은 이 직군을 ‘2등 정규직’이라 불렀다. 이 하위직군은 거의 여성으로 채워진다. 은행 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평균 80-90% 정도이다. 그러기에 전체 고용성비 5대5는 거의 착시에 가깝다. 여성들이 처우와 승진 가능성이 낮은 직군에 집중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2017년 9월 현재 임직원 성비 현황을 보면 상위 직급으로 갈수록 남성이 주도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고임금 고위직을 남성이 독식하고, 저임금 창구업무에 여성이 집중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른바 고위직으로 분류되는 지점장(부장)급 이상 직원에서 여성의 비율은 역시 은행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10% 미만 수준이다. 여성들이 이렇게 고위직에 오르기 힘든 것은 육아휴직 때문이다. 고위직에 오른 여성 들 중에 상당히 많은 경우가 육아를 포기했거나 미혼이다. 여성 승진을 막는 또다른 구조적 조건은 업무 배분이다. 예금 등 수신 업무는 여성에게, 기업금융 등 여신 업무는 남성에게 맡기는 관행이 은행 안에 뿌리깊다. 여신 업무가 은행 수익에 직결되고 승진하는 데 요구되는 영업 능력에도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여성문제를 또 다른 기사는 「가해자는 남고 피해자는 떠난다」이다. 주된 내용이 직장 내 성폭력은 대부분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직급이 높다는 것이다. 피해가가 회사에서 당할 불이익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진정 건수 556건 중 형사처벌 대상 사건은 29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기소된 경우는 단 1건이었다. 기소 건수가 극히 적은 이유는 피해자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회사로부터 회유나 입막음을 당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결국 대다수 직장에서 성폭력 가해자는 회사에 남고 피해자는 회사를 떠난다. 서울여성노동자회 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발생 후 피해자의 72%가 퇴사했다. 한샘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ㄱ씨도 11월23일 퇴사했다.
이렇게 하늘의 절반인 여성들이 가진 불평등의 문제만이 아니라 최근에 음료 제조업체 공장에서 현장 실습중이던 ‘고3’ 이민호군이 제품적재기 프레스에 눌려 열흘 만에 사망한 사건을 통해 특성화고 학생·졸업생 들의 죽음에 배경에 있는 현장실습제도에 대해 고발하는 기사 「죽음이 도사린 현장실습제도」도 어린 학생들의 인권과 관련하여 주목할 기사이다. 이민호군은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의 음료 제조업체 ㅈ공장에서 압착기에 눌려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간 지 열흘만인 11월19일 숨졌다. 생수병을 포장하는 라인에서 혼자 작업을 하던 그는 압축포장기가 작동하지 않자 이를 확인하러 기계에 들었다가 나오는 순간 다시 작동된 압착기에 눌러 다친 것이다. 이 작은 공장에 설비 고장도 잦았고 현장실습생인 그에게 작동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현장실습생 이군은 장시간 노동에도 시달렸다. 본래 7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는 실습생의 노동시간과는 달리 11시-12시간 일했고 주말에도 일했다. 회사의 연장근무 지시에 “또 야근합니까”라는 그의 카톡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다행인 것은 지난 1일 김상곤교육부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에서 직업계고 현장실습제도를 내년부터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학생을 노동력 제공 수단으로 활용하는 조기 취업 형태의 현장실습을 내년부터 폐지하고, 학습중심 현장실습으로 전면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호에서는 기다림의 절기 대림절에 사회적 불평등을 감수하며 그 피해를 받고 있는 여성과 청소년(현장실습생)에 관해 생각하는 기사들을 보았다. 대림절은 그래도 이 땅에 가장 약한 자들에게 주시는 희망을 계절이라는 점 때문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4장 26 ~ 34 절 (0) | 2022.08.02 |
---|---|
마가복음 1장 4 ~ 11절 (0) | 2022.07.30 |
마태복음 25장 31 ~ 46절 (0) | 2022.07.23 |
마태복음 25장 14 ~ 30절 (0) | 2022.07.23 |
마태복음 25장 1 ~13절 (0) | 2022.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