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4장 13 ~ 21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0.
728x90
반응형
SMALL

신학적 관점 

  겉으로 볼 때, 이것은 악마를 기쁘게 하는 기적이다. 빵을 이용한 속임수, 끝없는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 영적 능력을 보여주는 행위다. 황량한 광야에 내 버려진 굶주린 군중이 다른 수단이 아니고 예수 때문에 배불리 먹게 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중은 자신들의 생애 주기 중 그 순간에 예수를 알게 되었고, 그의 말씀, 그의 접촉, 그의 존재를 갈망하였기에 광야에서 허기에 고통당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예수는 군중들을 위한 음식을 마련했다.

  이 분이 얼마 전 본인이 허기에 고통당할 때, 비슷한 방법으로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던 동일한 분이 아닌가?( 4:2-4) 그러던 그가 이제 마귀에게 굴복하여 마침내 돌을 빵으로 바꾼 것인가?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태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사상에서 광야/사막은 방황 및 불확실성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이집트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해 준 하나님>께 거역했던 반란의 장소이다.( 9:7) 마태의 독자들에게 광야는 또한 유혹의 장소, 예수의 공생애 개시를 위한 시험의 장이기도 하다.( 4:1-11) 광야는 인간의 의미, 정체성, 안전과 지속성 등의 근거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제기하는 장소다. 광야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인간의 상황에 맞춰 필요한 것을 제공하신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도전한다. 시편 78편을 보면(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됨) 반역적이고 불신앙적인 영혼들이 "하나님이 광야에서 상을 차려 주실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대든다.( 78:10)

  여러 면에서 이 기적은 마태복음에서 반복되는 주제와 잘 연결된다: 예수님의 행동은 연민(compasssion)에서 나온다(14). 오늘 본문을 비롯한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건강, 진리, 음식, 마음의 평화-을 아시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다. 예수는 그들이 "목자 없이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해 보여서"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셨다.( 9:36)

  예수는 호세아 6 6절의 "나는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한다"라는 말씀을 좋아했으며, 이 말씀을 종교적 비난으로부터 본인의 사역을 변호하고 정의(定義)하는 데 한 번 이상 사용했다.( 9:13; 12:7) 연민이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자신의 사역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보인다. 늦은 저녁, 패스트 푸드점이나 가게가 없는 상황에서 자비는 빵의 형태로 나타났다.

  성경은 기적 자체의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처음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는 얘기를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제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였다) 듣는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도 많이 남을 정도로 음식이 많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파솔리니의 명작 영화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기쁨이 충만한 순간으로 (폭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요소로 가득 찬 부활의 장면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그린다. 예수가 제자들이 준비한 빈약한 음식에 대해 감사기도를 하자, 경고나 설명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 갑자기 바구니에 음식이 가득 찼다.

  마태가 자세하게 기록하는 내용은 기적 자체의 작동과정(이것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것뿐이다.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보신다.(19) 이것은 믿음과 겸손이 신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하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며(눅 1:32, 35, 6:35) 모든 생명과 모든 선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거처이다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처럼(마 4:1)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렸다. (그것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셨다)

  예수가 광야에서 받은 첫 번째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선언, 즉 자신의 자치권 주장에 관한 것이었다. 성경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심적인 죄이며 중요 반란 행위이다. 예수는 그에 대해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예수는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4:4;  8:3) 인간 실존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예수는 빵을 축복하셨다.(19) 이것은 빵에다 이전에 없던 성분을 집어넣는 일종의 마술적 의식이 아니다. 빵에 축복한 것은 "땅으로부터 음식을 제공하는"( 104:14)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표현이다. 여기에 축복을 받는 대상은 빵이 아니라 빵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이다. 예수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축복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표현이다. 그는 이미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제 그는 굶주린 5,000명을 대신하여 그 기도를 드리고 있다. 예수는 우리가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빵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4세기의 신학자인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이 기적에 담겨있는 예수의 의도 중 하나가 "마르시온(Marcion)의 입을 막는 것," , 마르시온과 다른 영지주의자들이 거부하는 <물질 세계의 선함>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또한 <무신론적 유물론과 허황된 소비주의가 부인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존재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르시온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 맘몬 숭배자들 모두에게는 기적과 같은 것이다. 광야에서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온 것에 대해 시편 78:25 "사람이 천사의 음식을 먹었다"라고 기술한다. 모든 빵이 하늘의 빵이라는 말은 진리다. 예수는 "빵은 땅의 열매로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빵은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1995, 167.)는 사실을 증거한다.

 주석적 관점

금방 보아서는 오천 명을 먹인 사건과 다른 두 사건 - 예수의 나사렛 방문(13:53-38)과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요한을 죽인 사건(14:1-12)- 과의 관련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사건들은 오늘의 성서본문과 같이 장소와 관련이 있다.

 첫째 사건에서 예수는 그의 고향, 또는 고향 땅(patris)에 오신다. 예수는 비록 지혜와 권능이 있었지만, 목수의 아들로서 그의 사회적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은 행동을 했기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러기에 예수가 자신의 행동을 선지자와 비유하고, 그러한 활동에 대한 분노는 선지자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유되자, 그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대안적 고향을 선택해야만 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는 헤롯 안티파스의 학정에 대한 대안적 장소를 고른다. 이 잔혹한 세계는 로마제국의 영향력에서 오는데, 그곳에서는 로마의 통치가 총독(폰티우스 빌라도), 분봉왕(client king, 헤롯 안티파스), 그리고 지역 귀족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행해졌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제국 질서 속에서는 헤롯과 같은 통치자는 로마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파직되었다. 그는 또한 백성들을 안정되게 통치하지 못하면 또한 파직 당한다. 14:5절은 분명히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했으나 그를 예언자로 여기는 민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살로메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을 때(14:8), 그녀는 헤롯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처형이 소요를 일으켜 그가 유지하기 원하는 질서를 깨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가 한적한 곳으로 갔을 때 로마의 촉수(통치)를 벗어난 곳을 선택한 것이다군중들도 그를 따라 그곳으로 갔다(14:13). 그들은 현상유지에 의해 통치와지역부역자들의 협력으로 제국에 의한 통치가 시행되고 있던 자신들의 마을을 버렸다세례요한 또한 헤롯에 의해 대표되는 로마의 통치의 대안적 장소로서 광야를 선택했다세례요한의 경우와 같이 예수의 대안적 선택 또한 결론적으로 로마와의 충돌을 야기했다(21-27).

 예수는 군중들에게 사랑이 사회적 지위를 극복하는, 그리고 제국의 잔인성과 확연히 대조되는 대안적 세계를 제시했다. 헤롯의 궁정 잔치는 선지자를 죽이는 결과를 낳은 반면, 나사렛 예수는 일상생활에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들을 먹이셨다. 마태는 예수의 대안적 행동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다(14). 비록 NRSV(공동번역)에서는 ‘병자를 고쳐주셨다’로 번역했지만, 그 말은 또한 목수의 아들과 같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돌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이것은 고대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사회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물물 교환에 있어서 일반 사회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patron/client)가 적용되는데, 그것은 주인인 엘리트들과 종인 농민들 사이의 평등하지 않은 상호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흉년에 종들이 주인들에게 곡식을 요청하게 되면, 그 보상으로 종들이 주인들을 위해 일하거나 다른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광야와 같은 대안적 장소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평등하지 않은 상호관계의 가능성이 없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음식을 나누어 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관계의 동기는 필요와 사랑이다.

 더군다나. 로마는 자신들을 식량의 공급자(bread basket)로 인식했다. 로마의 동전 한쪽에는 네로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농업의 여신 세레스(Ceres)가 새겨져 있는데, 그 단어는 “황제의 일 년 추수”라는 뜻이다. 이것은 로마종교의 관점에서 식량의 공급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담겨있다. 황제는 식량을 제공하는 세례스의 대행자라는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인 것도 신학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 활동을 보여주는(12:28) 행등을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다가 왔음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가 하늘을 바라보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실 때, 그는 사랑에 근거하여 약한 자를 돌보고,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신 것이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필요에 근거하여 굶주린 자를 먹임으로 하나님의 통치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에 대한 해석은 보통 엄청난 숫자를 강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학적 해석이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마지막 통치에 대한 전통적 예상은 대단히 보편적이고 포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상에 반해서, 예수가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이 소수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태13장의 배경에서는 그러한 행동이 신학적으로 정당하다.

 마13장에서 예수는 비유를 사용하여 두 가지 선언을 하신다. 하나는 군중들에 대한 대중적 선언이고(13:2),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만 주어진 선언이다(13:36). 13장의 전반부 끝에 작은 시작과 관계되는 두 비유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여 나중에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13:31-32).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여인의 누룩에 비유하여 밀가루가 넣었더니 나중에 부풀에 올랐다고 말했다(13:33).

 이 관점에서 보면예수의 대안적 세계는 한적한 곳으로서 그곳에서 약한 자를 섬기며그의 제자들에게 필요와 사랑에 근거하여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오병이어와 같은 작은 양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다이것을 크게 자라는 겨자씨나 크게 부풀어 오르는 누룩으로 비유한 것이다필요와 사랑에 근거해서 약한 자를 섬기고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마태복음 14:13~21에서 오천 명을 먹이는 이야기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것은 예수와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잔인한 죽음에 대해 알게 되고 절망적인 군중들의 큰 무리와 긴 하루를 보낸 직후에 일어난다. 제자들은 당연히 도망가려고 했다. 그들은 비탄에 잠겼다. 그래서 제자들은 군중들을 보내자고 한다. 우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연민을 가지셨고, 많은 사람들을 먹도록 초대했다고 읽는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조각덩어리 다섯 개만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는 수천 명의 군중을 먹게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고, 모두가 충분히 먹었을 뿐만 아니라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 제자들은 그날 저녁, 종종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의 능력에 놀랐다.

이것은 네 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단 하나의 기적 이야기다. 그것은 분명히 초기 교회에 매우 중요했다. 어떤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식에서 이 말씀을 정기적으로 읽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하늘에서 제공하신 만나와 병행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5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초대교회가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의 핵심을 가르쳤고 또 엄청난 편견에 맞서 하나님께 신실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희망과 영감의 깊은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러 곳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빵과 물고기 이야기가 가진 부활의 힘을 본다. 그것은 위대한 능력의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보여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 핵심은 현실은 예수가 연민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그의 으뜸가는 동기였다. 그것은 추상적인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연민이다. 오늘의 사건에서 그것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식량이다. 이 이야기는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예수의 기본적인 지향이 “가난한 자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우주의 궁극적인 힘이신 하나님은 세상의 평화, 굶주림의 종말, 가정의 복지, 모든 민족을 위한 영적인 온전함을 이루려고 하신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우는 두 번째 교훈은 제자가 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위대한 책임에 관한 것이다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지 않았다그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그 손과 발이 되도록 위탁하셨다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고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예수를 따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와 긍휼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마태가 우리에게 형제자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들가난하고목마르고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통해 예수를 만나게 된다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셋째, 이 복음 이야기는, 가장 필요한 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에서 선을 위해 일할 힘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천 명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너무 많았고 가진 것은 너무 적었다. 우리도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일하고 예수를 따르니까,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향한 일치와 신실함으로 하나가 될 때에만 제자들이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성령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약속은 우리가 일치와 신실함으로 하나 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갈등과 고통이 없을 거라는 약속이 아니라-예수도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세상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은 수백만의 사람들과 지구 자체를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악의 힘에 사로잡힌 세상을 향해 “충만한 삶”을 제공하면서 예수와 하나 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되기를 꿈꾼다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약속이다. 우리는 그것이 주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언덕에 계셨고,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과 계속 함께 하셨으며,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그 메시지는 언제나 새롭다 :

-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며 “충만한 삶”에 대한 약속은 모든 피조물과 창조 그 자체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 하나님이 우리를 오늘 우리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제자로 부르신다.

- 우리가 우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추구하는 신실한 제자로 하나 될 때 가장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관철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이천 년 전에 갈릴리의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날 함께 있었던 오천 명의 사람들에게 기적이었다. 그러나 더 깊은 메시지는 오늘날 지구상의 60억 인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이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는 기적이다.

설교적 관점

 -이 이야기는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군중들의 수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에 관한 것일 수도있다. 이야기의 포인트가 무엇이건간에 복음서 기자들은 이 이야기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있는 유일한 예수의 기적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설교도 없고 어떤 비유도 없다. 이것은 행동으로 가득 찬 이야기이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의 규모와 범위에 주목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 사역에 있어 많은 장면들은 지방에 있는 극장에서 몇몇 배우들로 쉽게 공연할 수 있지만, 이 장면은 너무 커서 작은 무대에 담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5천명의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 그리고 어린이가 있다. 게다가 활동적이다! 예수를 묘사하는데 사용된 동사를 주목해보라. 예수는 보았다(saw); 그는 긍휼히 여겼다 (had compassion); 그는 명했다 (ordered); 그는 취했다 (took);  그는 우러러 보았고 축복하였고 또 떼어서 주었다 (looked, blessed, broke, and gave). 이 이야기는 활동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홀로 조용한 시간을 찾으려는 예수와 더불어 시작한다. 

 -예수는 마태복음에 자주 나오듯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마친 후에도 그는 다시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쉬려고 할 때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문자그대로 그를 뒤에서 따라가고 있다. 군중들은 걸어서 그를 뒤따라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멀리 왔음에 틀림없는데 그것은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길래 식사시간이 지날 정도로 먼 길을 오면서 음식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는가?  아마도 영혼의 갈급함이 있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 후에도 예수를 계속 따라왔을 수 있다. 제자들은 때가 늦었고 군중들이 음식을 사먹으러 보내는 것에 주목하였지만, 군중들이 배고픈 것에 대해 불평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것으로 자신들을 채워주는 분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데 만족한 것 같아보인다.

-제자들은 식사에 대해 진심어린 걱정을 한 것 같지만 “무리를 헤쳐 보내어” (15)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깊이 개입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여기에는 어떤 갈등이 있다: 먹을 것이 필요한 큰 무리들이 제자들을 압도하는 것.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 만일 6명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면 그 때 어떤 제자는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먹을 것이 필요한 큰 무리들은 제자들을 압도하였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는 먹을 것이 필요했던 대규모 군중들 앞에서 무력함을 고백하는 한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의 응답은 행동을 요구한다. 그는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라고 말한다. 비록 제자들에게 있어 배고픈 사람들의 규모가 그들을 주눅들게 할지라도 이들을 먹일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 그들의 주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될수록 가까이 가는 반면에 제자들은 그들이 떠나가기를 아주 여러번 바라고 있다.   -대부분의 성경은 이 이야기의 제목을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이라고 붙이고 있다. 실제로는  예수께서 음식을 단지 제자들에게 주었을 뿐이고 그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먹인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먹인 것은 분명히 예수의 기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종하는 경건에로의 부름에 응답하는 제자도가 약화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향한 요청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적극적인 사역이다. 예수는 열두제자에게 음식을 준다:  열두제자들은 오천명에게 음식을 준다. 설교자에게 있어 이것은 분명한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우리는 축복된 돌봄을 받아왔으며 또 그것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데 왜 실패하였는가?” 먼저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에 응답하지 않고 기적이 일어난 후에 그들이 받은 것을 군중들에게 준다. 

-여기서 제자들이 왜 행동하는데 머뭇거렸는지에 대한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분명히 생각했다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을 때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외에는 없습니다.” (17밑줄은 필자의 강조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 얼마 안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없다” (nothing)라고 표현했다일반적으로 이 본문에 대한 설교는 어떻게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것이 예수의 손에서 풍성해지는가를 강조할 것이다이것은 분명히 옳다하지만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첫 번째 명령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였다물론 예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게 드린 것을 (humble offerings)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것으로 바꾸신다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보다 큰 꿈을 갖기를 요청하시는 것도 사실이다예수께서는 “나에게 물고기와 빵을 달라 그러면 내가 그들을 먹이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그의 첫 번째 요청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이 지닌 권능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 “없다”라고 여기는 제자들에게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적다. 만일 제자 중 어느 하나가 “하늘을 우러러 축복기도를 하고 그 빵을 쪼개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을 들었고 우리의 무기력함으로 인해 그것을 외면했는가? 만일 우리가 바구니에 “아무 것도 없다”고(nothing) 생각한다면, 실제로 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있더라도 예수에게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일 것이 “아무것도 없는”(nothing) 것이 된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취하고 축복기도를 하고 떼어서 주는 것은 성만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행동을 요청하는 사회복음에 강조점이 주어져왔지만 이 이야기는 또한 거룩한 신비와 깊이 연관되어있음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 이야기를 성만찬의 전조로 이해하는 일은 예수는 단지 음식을 공급한 분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적, 교훈이야기와 더불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드라마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화해를 이루어 나가고 있고 예수의 사역은 언제나 이 거대한 구원이야기 안에 역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