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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3장 24 ~ 30절, 36 ~ 43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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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지난주 본문(13:1-9, 18-23)에 나오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씨가 여기에서도 중심적 상징이다. 지난주 비유에서는 모든 씨가 좋은 파종자에 의해 뿌려졌지만, 오늘의 비유에서는 두 종류의 파종자가 뿌린 대조되는 성격의 씨가 소개된다. 또한, 오늘 비유에서는 씨가 믿음과 제자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도만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의 제자가 되느냐 악한 자의 제자가 되느냐 하는 선택만이 주어진다. 복음을 심고 전파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반응은 수용이나 핍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또 한가지 이슈가 등장하는데 믿음의 공동체 안에 악의 제자라는 씨를 뿌린 악한 적이다. 오늘 비유를 해석하는 데 우리는 동시에 교회론과 인간론의 관점을 적용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마태가 제안하는 교회론과 인간론이 적절한 것인지에 관해서도 평가를 해야 한다.

  본문에는 지상 교회의 본질에 관한 두 가지 교회론적 주장이 담겨있다: (1) 교회는 두 종류의 제자가 섞여 있는 공동체다; (2) 제자의 진정한 정체와 운명은 종말시 심판의 순간까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비유는 <역사 속에 구현된 천상 교회라 할 수 있는> 지상 교회가 늘 겪게 되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이해하게 하는 두 가지 틀, 즉 기술적(descriptive) 관점과 규범적(normative) 관점을 제시한다. 예수 공동체는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따르고, 이 세상에 예수의 얼굴을 보여주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한순간이라도 순수한 공동체였던 적은 없다. 사실 교회는 절대 순수하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분을 굳이 거론하지 않고도, 우리는 지상의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기구로서 교회는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WWJD, What Would Jesus Do)”라는 질문의 정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주어진 한순간에 교회 안에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비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구성원들이 있다. 교회는 항상 여러 요소가 혼합된 구성체로 존재해 왔었다.

  이상이 기술적 교회론에 해당한다면, 규범적 측면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다른 종류의 제자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다뤄진다. 답은 이것이다: 솎아내는 것은 세상 끝날 하나님께 맡겨라. 마태의 공동체의 경우, 밀과 가라지를 그대로 놔두라는 것이 교회 리더십이 어떤 종류의 징계(discipline)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다.( 18:15-17 참고) 그러나 이승의(temporal) 심판은 종말론적 심판과는 구별된다.

  히포의 어거스틴은 교회가 혼합적 구성체라는 것(corpus permixtum)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Manicheans:선과 악의 본질), 펠라기우스(Pelagians:구원이 행위와 은총과 갖는 관계), 도나투스(Donatists:사제와 비숍의 순수성과 그들의 성직의 관련성; 특히 배신한 사제에 의해 행해진 성례의 유효성에 관해) 등에 대한 논쟁에 관여했었다. 어거스틴은 가라지처럼 자라나는 죄의 상황을 보고 교회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잘못을 범한 교회 지도자들은 죄질에 따라 경징계에서 중징계(파문)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교회 지도자로서의 경험과 신앙인으로서의 개인적 체험을 근거로> 가시적 교회가 완벽하게 거룩한 외양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몇몇 구성원에 의한 부정한 행동이 미래 교회의 완전한 거룩의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최소한 오늘 비유는 교회론과 종말론의 구분을 폐기하고 지상 교회를 천상 교회로 신성화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가 혼합적 구성체라는 사실이 아래 목록에 나오는 교리나 은유,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 환자를 위한 병원노아의 방주(방주 밖에 폭풍이 있으므로 방주 안의 악취를 견딜 수 있음); 성도의 교제구원의 과정에 있는 공동체; A corpus permixtum;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상징성례징계와 연민의 필요성하나의거룩하고보편적이고사도적인개혁되었고 개혁하는 (reformed and reforming); 교회 구성원과 세계에 은총을 전달하는 자.

  오늘 비유와 관련하여 생각해 봐야 할 또 다른 주제는 인간론이다. 신학적 인간학은 모든 교리 속에 그리고 진정한 공동체의 본성에 관한 논의 속에 내포되어 있다. 마태의 신학적 인간학은 (오늘 비유와 25장의 최후의 심판 시 양과 염소의 비유 등에서 보는 것처럼) 고대 세계에서 통용되던 인간론과 공통점이 있다: 인간을 어떤 한 종류에 속한다.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사탄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이거나 악한 자의 제자이다.

  프로이트 이후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인간의 종류를 그렇게 칼로 두부를 썰 듯이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양한 동기, 고상하고 저속한 생각들이 혼합되어 있다. 최근의 뇌과학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파충류의 뇌(싸워야 할지, 도망가야 할지 판단하는 본능이 핵심) 단계에서 발전하여 정신적 충격(trauma)을 저장하는 편도체(amygdala)를 거쳐, 대뇌 피질(cerebral cortex) 안의 “God Spot”에 이르기까지 진화해 왔다고 한다. 우리는 기독교인 개개인도 혼합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는 밀의 요소와 가라지의 요소, 거룩함과 속됨, 풍성한 결실의 가능성과 파괴의 가능성이 혼재해 있다. 이런 인간론적인 측면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종말에 모든 것을 분리해 주실 것이라는 [숙명론적] 태도로부터 공동체와 개인의 거룩의 가능성을 점차 높여 가는 쪽으로 노력하는 것을 장려하는 관점으로 서서히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주석적 관점

  예루살렘 함락 이후 초기 기독교공동체 안에서 커지는 근심에 대해 걱정하면서, 마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함께 가라지의 비유를 제시한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는 왜 복음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크게 다른지, 그리고 자주 비생산적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관심이 외부문제에서 내부문제로 초점을 바꾼다.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던 시기 작은 무리로서 그들의 선생 둘레에 모여 있던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의 역설적 본질과 그 안에 작동하는 모순적 힘과 씨름해 왔다.

 그러기에 가라지의 비유(24-30)는 마태에 유일하게 나와 있지만, 비유가 말하는 상황은 그렇지 않다. 만약에 마태복음이 예수의 목격자에 의해 씌여진 것이 아니라 1세기 말(기원후80-90) 안디옥 교회공동체 내부의 누군가가 썼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지금 이 비유가 포함하는 근거는 더욱 명백해 진다. 안디옥교회는 초기 예루살렘 박해 이후에 디아스포라 유대기독교인들의 교회로 시작되었다. 도시 교회로서 큰 도시들에 일반적인 인종의 다양성을 반영한다. 특히 예루살렘 파괴이후의 인구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도심의 문화적 구성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종교적 다양성으로 인한 갈등이 심해졌다.

그들의 기본구성이 바뀌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끝에서 예상되었던 그러한 성장과 함께최근 생겨난 교회의 질문이 “처음에는 우리와 같은 것으로 보였지만시간이 갈수록 믿음과 행동의 표현에 있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것으로 되었다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우리 구성원 중에 어떤 사람들은 가라지와 같이 가치가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언제 우리가 그들을 우리 가운데서 제거할 것인가?”이다.

 교회지도자들이 분명히 다른 씨앗인 사람들을 판독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복음의 본질에 대한 참된 숙고이거나 또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남아 있는 것으로 교회의 힘이나 증언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것이 아닌가? 마태가 말하듯, 비유는 어떠한 종류의 믿음의 공동체와 교회가 되어 살아남고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가라는 질문과 대답을 더 제기하고 있다.

 만약에 비유가 마태가 묘사하는 상황에서 예수가 직접 말한 것이라면 – 예수는 자신의 재판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고 그의 제자들은 곡식과 가라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 그렇다면 부활 이후에 그것을 같은 제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자 하는 관심에서 얘기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 판단을 내리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를 인지하면서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변덕과 배반을 생각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이 비유는 종말론적이고. 기다림과 심판, 모임과 분리, 보호와 파괴의 주제를 말하고 있다. 비유는 외부의 적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도리어 초점은 선과 혼합된 죄악에 대한 두 가지 잠재적 반응을 보여준다. 처음의 것은 만약에 주인이 무심코 잘못된 씨를 뿌렸다면 가라지를 제거할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종의 반응으로부터(이어지는 알레고리컬한 설명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온다. 다른 반응은 주인의 반응이다. 기다리고 하나님의 마지막에 해결할 때 까지 모순덩어리와 함께 살자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배경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비록 36-43에서 설명이 주어졌지만, 질문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무엇이 또는 누가 곡식밭에 가라지를 뿌렸는가? 좋은 씨가 가라지 사이에 떨어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좋은 씨앗을 뿌린 밭으로 시작한다. 밭은 믿음의 공동체 자체일 수 있는가?

 이 비유에서 밝혀진 상상의 눈으로 밭은 새롭게 싹트는 하나님나라로서의 믿음의 공동체를 묘사한다. 만약에 주인이 나쁜 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누가 뿌렸는가? 해설에서 ‘악한 자’ 또는 ‘마귀’로 설명된 적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직접 접근하여 직접 공격한 것인가? 그러기에 이야기 된 특정한 문제는 세상에서의 악의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가라지”나 총체적 악의 실제적 존재이다.

 가라지 비유의 해설에 대해서는 몇몇 학자들은 36-43절의 해석을 예수께 돌리는 것은 복음서 저자의 창작이거나 아마도 후대 교회지도자들이나 서기관들에 의한 편집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것도 가능하지만, 이 주장은 해석이 적어도 지혜 교사들이 적용한 가르침의 패턴에 맞는 그 원칙에 있어서 예수의 것과 진짜 비슷하다 라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하지 못한다.

 성서정과 본문은 34-35을 빠뜨렸는데 거기에서 마태는 예수가 비유로서 가르치는 것이 예언의 성취라는 예수의 방법론임을 말한다. 비록 어떤 고대 원고들은 35절에서 말한 이사야의 인용과 같은데, 가장 그럴듯한 자료는 시 78:2이다. 원고의 강한 증거에 따라, NRSV는 이사야의 본문을 생략한다. 이 두 절을 가지고 마태는 하나님 나라 비유의 공적 선언과 하나님 나라 비밀에 대한 개인적 가르침을 구별하고 있다. 비밀 또는 “숨겨진 것”은 세상 시작부터 평범하게 보아서는 숨겨져 있다.

 14-16에서 요약했듯이하나님 나라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왔고 계속해서 필요한 것은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고볼 수 있는 눈이고들을 수 있는 귀이다. 36절에서 예수는 군중으로부터 물러나 집안으로 들어가 충고한다“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것은 고발이자 도전이요 제안이다.            

 목회적 관점

독보리는 잡초의 악마다. 그것은 잡초란 “그 장점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식물”이라는 Emerson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라지”라고 알려진 독보리는 아무런 장점이 없다. 그 뿌리는 좋은 작물의 뿌리를 둘러싸고 귀중한 영양분과 부족한 물을 빨아들여서, 좋은 작물을 손상시키지 않고서 뿌리를 뻗는 건 불가능하다. 땅 위에서 독보리는 씨앗을 가질 때까지 밀과 똑같아 보인다. 그 씨앗은 환각에서 죽음까지 모든 것을 일으킬 수 있다.

예수께서 이 해로운 “속이는 잡초”를 사용하여 악마의 성육신을 설명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독보리는 가짜 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미 경고한 “양의 탈을 쓴 굶주린 이리”의 식물판이다( 7:15). 더욱이 예수는 악이 의도적이라고 말한다. 앞서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는 달리, 이것은 좋은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는 땅에 떨어지는 우연에 관한 비유가 아니다. 여기서 원수는 의도적으로 좋은 밀밭에 속이는 잡초를 뿌린다.

역설적이게도 단호하게 악마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비유에 목회적인 권위를 제공한다. 예수는 악의 현실을 분명히 시인한다. 그의 비유는 악마의 파괴적인 본성을 보여 주며, 박멸의 필요성과 또한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우리 교회에, 예수님이 무엇에 관하여 말씀하셨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삶은 농부의 훼손된 밭을 닮았으며, 잡초와 밀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서 얽혀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7:15). AA 또는 Alanon(알콜중독자 자주치료협회) 회원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는 술에 대하여 무력하며 우리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네 번째 단계는 밀을 잡초에서 분류하는 “두려움 없이 우리 자신에 대한 도덕적 검토를 하는” 것이다.

우리를 방해하는 수많은 방해물들과 마찬가지로, 원수가 씨를 뿌리는 일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좀 더 미묘할 수 있다. e-메일, 전화 및 끝없는 회의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단순히 우리 자신의 영혼이 분열된 증상일 수 있다.

때때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성한 잡초이거나 악한 자의 공격 아래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비유에 나오는 종들처럼 우리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밀에서 잡초를 구별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어쩌면 회사의 큰 수익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그 수익의 뒷면에 있는 장부조작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중간 관리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학생들을 창의적으로 돌보는 것을 비웃는 부모의 편파성에 직면한 선생일 수도 있다. 아마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 다른 방법을 찾도록 요구받는 변호사일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은 1세기 갈릴리 농부가 아니지만 매일 악과 마주한다예수도 그랬다그가 이 비유를 말하기 바로 전에바리새인들은 그를 속이려고 했고 그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시작했다그들은 진정한 지도자처럼 보이지만예수와 관련해서는 독보리처럼 거짓되고 치명적이다.

예수와 마태복음의 저자는 또한 악이 공동체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안다. 예수님은 복음서 다른 곳에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으며 충실하고 동정심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이 길을 벗어나도록 인도하며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거짓 메시아들과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 경고한다(24:24, 7:22). 스데반 사역의 창설자인 케네스 호크(Kenneth Haugk)는 그러한 사람들을 “교회 안에 있는 적대자”라고 설명한다. 적대자, 잡초, 늑대, 거짓 예언자, 가짜 밀 등등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현실이다. 예수의 비유는 믿기 힘든 진실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의 비유는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대해 확실히 신중하다.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식물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를 항상 처음부터 말할 수는 없다. 숙련된 정원사인 나의 할머니가 한 번은 그녀의 정원에서 우리의 앞마당으로 꽃들을 옮겨 심었다. 이틀 후에, 그녀는 다시 와서, 미친 듯이 그 꽃들을 파냈다. “내가 실수했어.” 그녀는 80세가 된 얼굴에서 땀을 흘렸다. “이건 잡초야. 이걸 심으려고 했던 게 아닌데. 서두르자. 엄마가 오기 전에 도와줘!”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악한 자가 전혀 아니지만, 이 이야기는 악한 것에서 선한 것을, 잡초에서 밀을, 이단으로부터 충성스러운 반대를, 파괴적인 대립에서 건강한 갈등을 구별해내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준다.

그래서 주인은 하인들에게 참고 추수 때, 열매를 보고 차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인내는 행동하지 않거나 갈등을 피하려는 핑계가 아니다. 마태복음에서 나중에 예수는 공동체에 유해한 행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18:15-17). 그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수확기에 밀에서 잡초를 분리하는 것처럼 공동체와 분리하여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한다.

그렇게 분리하는 것이 가혹하고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는 악한 자의 간계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악을 처리하는 데 실패하면, 해로운 독보리의 씨앗들이 번식하고 다른 밭에도 퍼지는 것처럼, 악이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유를 해석하면서 예수는 추수꾼을 “세상 끝 날”에 오는 천사라고 한다. 이렇게 종말론적으로 뒤트는 것은 최종적인 목회적 진리를 제공한다. 사실, 잡초는 종종이 세상에서 승리한다. 예수는 그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도 그렇다.

비유의 결말은 잡초를 뿌리는 적보다 강하고 현명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하나님은 악에서 선을 구별하실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관용적이고 계몽된 귀에 이 말은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이런 추수 때의 심판은 직장에서 벌어지는 부패를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혹은 억압의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복음이다. 이 비유는 증오와 불의의 씨가 매일 뿌려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책임을 지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옛 찬송가가 말했듯이, “잘못된 것은 너무도 강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자시다.

 설교적 관점

 -이 비유는 안에 있는 자 (who is in)와 밖에 있는 자 (who is out)를 구분해야 한다는 우리들의 선입견에 도전을 하고 있다. 농사를 예로하는 이야기는 토마스 롱 (Thomas G. Long)이 언급한 것처럼 “예수 자신의 사역에, 교회생활에 그리고 마지막 날의 심판에” 모두 적용이 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이야기는 먼저 잡초같은 예수의 적대자들을 잘 알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의 사역 중에 드러난 그들의 끊임없는 비난, 도전 그리고 적대감은 예수의 메시지가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의 적인 마귀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28)라고 하여 밭에 있는 잡초의 존재를 언급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비유를 교회생활에 놀라운 통찰력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좋은 밀과 해로운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처럼 교회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밭에서 위험한 잡초를 제거하려는 주인의 하인들처럼 우리들 역시 매 시대에 걸쳐 잡초역할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의심하곤 한다. 사람들의 태도나 성서적, 신학적 경향이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이들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누구를 공동체 내로 들어오게 하고 누구를 내보내야 하는가? 하나님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이고 그 이유는? 이러한 질문들을 함으로써 우리는 종종 교회가 환영해야 할 사람의 범주에 대해 규정을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하곤 한다. 실제로 얼마나 넓게 그 범위를 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교회일까?  

-하인들이 밀과 잡초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려는 태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머지않아 추수를 할 것이고 잡초를 태워서 누가 내부자이고 외부자인지에 대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태가 이야기 하듯 이 비유의 주인은 보다 심원한 지혜를 보여준다: “안된다” (No)라고 하면서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29-30)라고 말한다.

-이러한 제동을 거는 말 속에는 성급한 구분을 하려는 것을 피하고 거룩하고 목적이 있는 애매모호함 (holy and purposeful ambiguity)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려는 뜻이 있다.[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애매함을 말하는 듯함-역자 주]  이 애매함은 막연하고 근거도 없는 그런 애매함이 아리고 현명하고 의도적인 애매함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종종 오래 참지 못하고 문제를 머리로만 의논하여 그들이  우리 편인지 아닌 지를 결정하려고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하나님은 우리가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로 사랑하기를 혹은 적어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추수 때까지 잡초와 밀이 함께 섞여서 자라는 이 복된 장면은 단지 오늘날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신앙공동체의 모습뿐만이 아니고 훗날 종말의 때의 모습이기도 한다. 그것에 대해 본문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이 혼합되어있는 세상을 용납하지 않고 마지막에 하나님 만의 선한 시간에 세상을 심판하고 또 구원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에 완성될 것이고 그 온전함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있다. 그 동안에  이 나라는 우리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해서 우리주변에 그리고 때로는 기적적으로 우리를 통하여 확장되어 나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것” (30)을 기뻐하신다.  

-뛰어난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패트릭 윌슨 (Patrick J. Willson)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그 나라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견고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예수는 그 나라가 거대한 기계같아서 무언가를 투입하여 산출물을 얻어내고 산출물은 투입물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지 않았다그는 그 나라가 작은 씨로부터 자라난 커다란 나무 같다고 말했다아주 크게 자라서 공중의 모든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서 쉴 수 있고 심지어 여러분과 나같은 이상한 녀석들조차도 쉴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또 하나님은 가루 서말에 누룩조각을 넣어 반죽을 온전히 부풀리게하는 가정주부와 같다고 말했다이것이 바로 그 나라는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한 모든 것으로 자라나는 방식이다세상의 기초를 놓을 때 즉 창조의 첫 순간부터 그 나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왔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가 자라듯 무한히 인내하고 계신다.

-우리가 끊임없이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세상 속에서 행동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누가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고 밖에 있는 가를 결정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과제는 누구나 이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상상하면서, 우리가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고 목적이 있는 애매모호함 (holy and purposeful ambiguity)을 포용할 수 있도록 애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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