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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3장 1 ~9절, 18 ~ 23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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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의 본문은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사이에 끼어있다. 11-12장에는 예수의 사역에 관한 오해와 반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3장은 예수가 고향에서 배척받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복음이 어떤 환경에서는 성장하는데 다른 환경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이 비유가 배척/반대의 이야기 사이에 위치해있다는 데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을 뒤집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제자도의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가 된다. 마태는 <복음을 들은 사람에 비해 이해한 사람이 적고, 심어진 나무에 비해 열매 맺는 나무는 적은가, 그리고 열매 맺는 제자도의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에 관해 실제적인 신학적 설명을 제공한다.

 마태는 독자에게 적어도 3가지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설교자는 이 중에 어떤 관점을 택할 것인가가 아니고, 모든 관점을 고려함으로 이 비유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씨뿌리는 자, 네 가지 토양, 그리고 기적적인 결실에 관한 비유이다.

씨부리는 자: 씨뿌리는 자는 복음을 퍼트리는 자로 설교자, 교사, 복음선포자, 선교사, 예수, 혹은 하나님이 될 수도 있다. 오늘의 복음 전도 방식은 밭을 가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인구조사, 전도 대상 분석, 대상에 적합한 소통 전략 구상 등. 이런 전략들이 정말로 씨가 뿌려질 토양의 성격을 밝혀주나? 그렇지 않다. 씨 뿌리는 자는 밭의 표면 아래 어떤 토양이 있는지 미리 알 수 없다. 교회나 설교자도 씨를 뿌리기 전에 토양의 상태를 짐작할 수 없다. 씨뿌리는 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씨를 뿌리는 것 자체이다.

네 가지 토양: 파종의 결실은 제자이다. 마태가 비유를 해석한 것을 보면, 한 군데에서는 씨가 복음이라고 했고(19), 그 외에는 씨를 “발아된 제자”와 연결한다. 네 가지 토양은 풍성한 결실을 맺는 제자도의 필수적 조건에 관해 설명해준다. 제자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해(깨달음, understanding)”가 필수적이다.

 마태복음에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해가 없이 말씀은 심어지지 못한다. 비유 속의 새와 같이 가까이 있는 사악한 자가 믿음의 가능성 자체를 낚아채 갈 것이다. 이해를 기반으로 다른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해는 단순히 지식을 획득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는 긴박하게 행동하는 통찰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해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지식이다.

 철길에 서 있는 데 기차가 바로 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상황을 이해하는 순간 급하게 행동을 취할 것이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는 청자들에게 제자도의 근본적인 필수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원했다.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제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된다. 마태복음 전체는 우리가 그와 동일한 이해를 하기 원한다. 교회도 그와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이해는 필수 조건이지만 풍성한 결실을 맺는 제자도를 위한 충분 조건은 아니다. 이해와 함께 집중(attentiveness, 경청)과 인내(perseverance)도 필요하다. 마태는 제자는 악한 자들의 강력한 반대를 견뎌내야 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런 반대는 우선 핍박의 형태로 온다. 복음을 처음에는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말씀 때문에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것이다.(21)

 제자는 핍박(외적인 반대) 뿐 아니라 유혹(내적인 반대)에도 대비를 해야 한다. 세상의 염려(6:25-32)와 재물의 유혹(22)이 그것이다. 다른 곳에서( 19:16-22) 마태는 세상의 걱정이나 부의 미끼에 빠지는 제자의 예를 들었다.  6:33에서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고 강조했다.

기적적 결실: 예수 공동체에는 뿌려진 밭의 토양을 바꿀 수 없는 수동적인 씨앗 뿐 아니고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을 옥토로 바꿀 수 있는 씨앗도 있다그러나 제자들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이해의 문제이다믿음처럼 이해도 선물이다.

 복음에 반대하는 세력이 그렇게 많은 것-악한 자, 굳어진 마음, 박해,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등-을 생각할 때 제자들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자란다는 것이 기적처럼 보일 수 있다. 결실은 기적적이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성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반대 세력이 씨앗의 3/4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은 씨앗은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제자도를 시작하게 하는 믿음은 선물이다. 제자가 맺는 풍성한 결실도 선물이다. 바울로부터 종교개혁자들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이 인간이 구원의 과정에서 하는 역할에 관해 많은 견해를 제시했지만, 변하지 않은 진리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제자가 맺는 결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은 믿음을 선물받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제자가 되는지 추측할 수 있지만, 그 이유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또 먼저 믿은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이 모든 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적 교훈은 반대와 유혹을 이겨내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제자를 많이 만들기 위해 씨를 충분히 많이 뿌리라는 것이다. 아마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2장과 짝이 되어 읽힘으로 교회가 선교에 관해 희망과 겸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주석적 관점

  마태13장은 최근에 학계에서 지지받고 있는 마태복음의 문단 구조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때 중간부분에 속한다. 가장 많이 주장되고 있는 것은 마태가 모세5경을 따라서 다섯 가지 문단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통적 학설이다. 킹스베리(J. D. Kinbury)는 좀 더 단순하게 세 부분의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예수의 공생애로 인도하는 자료, 공생애 자체, 그리고 고난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위더링턴은(Ben Witherington III) 여섯 가지 구조적 패턴을 제시했다. 이러한 구조적 형식에서 마태는 예수를 지혜 전통에서의 현자로 묘사한다. 마태가 어떤 패턴을 따랐든지, 이 장은 그의 사역에 대한 군중의 반응에 대한 예수의 개인적 평가를 담고 있다. 수 세대를 걸쳐 이러한 비유들은 교회의 사역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에 대해 교회자체의 평가에도 도움이 되었다.

 13장에 있는 8가지 비유를 통해서 마태는 예수가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그 시대에 침투해 들어왔으며, 하나님께서 완성에 적합한 시기가 되었다고 결정할 때까지 이 나라가 계속 자라난다고 이해했다고 보았다. 첫 번째 비유와 이에 대한 해석이 이번 주 복음서의 본문이다. 이번 주 성서일과에 빠진 부분(10-17)에서 예수는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오직 그의 제자들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듣기는 해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은유적 연설의 형태로서의 비유는 짤막한 문구에서 긴 이야기까지 가능하다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알려진 오늘 본문은 이야기 형태를 따른다비록 마태가 예수는 비유를 그의 초기 사역에서 사용했다고 말했지만(5:14-16;7:24-27;그리고 아마도9:15-17;11:16-17;12:43-45) 이 담론에 모아진 가르침은 비유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비유로 가르치는 이유를 담은 부분과제자들에게 두 비유에 대한 개인적 설명을 해준 것과비유를 들음에 있어 일반적 충고 등이다.

 예수의 비유에서 설파 된 두드러진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도드(C.H.Dodd)의 견해인 비유의 목적이 “마음을 졸라 행동적 사고로 인도하기”라는 것이 만약에 맞다면, 묘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13장의 담론은 나아가 12장에서 말한 가족 이슈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더 조명한다. 가르치기 위한 랍비나 현자의 지혜가 중요한 자리에 앉아서(1), 복과 하나님나라의 율법이 제시된 산상담화(설교)의 자리와 공명하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선한 가르침을 나누기 시작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혈육으로서의 친족이 아니라 그가 말한 것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서 볼 수 있는(4:3-9;8:5-8) 여섯 가지 비유중의 하나인데,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충고로 시작하고 끝난다. 이어지는 해석은 단순한 들음에서(listening) 경청으로(hearing) 옮겨간다. 비록 이 부분의 진본성(authenticity)은 계속해서 논란중이지만, 비유 자체의 진본성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마가나 마태의 해석은 복음서 기자나 후대 교회지도자의 편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비유 그 자체에 주어진 설명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 자신의 자기 이해와 잘 맞고, 비유에서 제시된 제자들의 배움의 흐름과도 일치하는 주제들을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는 비유에서 묘사된 씨 뿌리는 자의 활동은 시대의 맥락에서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이 씨뿌리는 자의 의도는 박토에 씨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곳이든지 바라는 수확을 생산할 수 있는 곳에 씨를 뿌리는 것이다. 씨가 얼마나 좋은가, 씨뿌리는 사람이 얼마나 관심을 갖는가에 관계없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의 땅에 그런식으로 뿌려진 씨들은 성장하지 않거나 빈약하게 성장하거나 불완전하게 성장하게 된다. 수확의 결과가 풍성한 수확인가 또는 단순히 보통 수확보다 조금 더 높은 것을 말한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문적 논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씨뿌리는 자와 씨앗은 변함없는데, 왜 네 가지 타입의 밭의 결과는 바뀌는가에 대해서는 비유의 목적이 왜 나누어진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계속해서 엄청나게 다른가를 이해하게 해줌으로 제자들과 예수 자신에게도 도움을 준다. 씨뿌리는 자와 밭은 좋다. 어떤 밭이 나쁘다고 규정되는 것은 그들의 선택 때문도 아니고, 좋은 땅이 좋다고 하는 것도 더 많이 열매를 거두었다는 것 때문은 아니다.

 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는 은유를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상황이 확증하는 것 이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좋은 땅이 좋은 것은 단순히 그것의 본질이 씨앗이 충분히 자라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엄청난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수확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

 성서정과에서 빠진 10-17절은 제자들이 예수에게 왜 비유로 가르치는 가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11) 대답했다. 이 선물은 새로운 축복이고 지복이다(16,17). 그들에게는 깨달음을 주셨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어느 시대의 제자들이든지 초점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노력이 아니라 맺은 풍성한 열매를 축하하는 것에 맞추어야 한다.

 목회적 관점

 이 구절은 종종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하며, 때로는 토양의 비유라고도 한다. 어쩌면 백배의 추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추수가 겨우 30배였어도 이 이야기는 기적으로 끝났을 것이다. 일곱 배는 농부에게 좋은 해를 의미했으며, 열 배는 진정한 풍요를 의미했다. 30배는 1년 동안 마을 사람들을 먹이고 100배는 농부가 갈릴리 바다 옆 별장으로 은퇴하게 한다.

이 비유는 풍성한 수확에 관한 이야기이다. 확실히, 예수는 현실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군중 속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가 전통적인 1세기 농사의 어려움을 묘사할 때 고개를 끄덕인다. 조심스럽게 산성과 알칼리의 균형을 유지하고 씨앗을 땅에 주입하는 현대의 미국 농부와는 달리, 예수 시대의 농민들은 씨앗을 뿌리고 나서 쟁기질을 한다. 이런 식으로 씨앗을 흩뿌리면, 일부가 단단한 토양에 떨어지거나 좋은 열매를 맺기에는 돌이 너무 많은 땅에 떨어지고, 또는 가시와 잡초 사이에 떨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이 실제 생활이며, 예수를 포함하여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농사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예수 자신의 사역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의 씨앗은 바위가 널린 곳과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앞선 장에서, 제자들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신앙을 잃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질식시키고 싶어 한다. 예수는 곧 그의 고향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그를 거부하는 딱딱한 흙을 경험할 것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말로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비유를  살았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기독교인이 되기 힘든 시간과 장소다. 빈곤과 박해로 인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 지역 밖으로 이주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반대자와 거짓 선지자가 있다. 이 비유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마태는 그의 공동체에게,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거부가 그 메시지가 잘못되었거나 그들의 노력이 어리석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농사에 있어서도, 또는 신앙에 있어서도 그것은 단지 살면서 경험하는 현실일 뿐이다.

예수처럼 설교자들은, 비유의 씨 뿌리는 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땅에 안착하리라는 보장이 없어도 널리 복음을 전한다. 일요일 아침에 우리는 온갖 종류의 이유로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을 바라본다. 새로 온 사람들 중에는 “쇼핑하듯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또는 기독교인이 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기에 처한 사람도 있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오는 가족이 있지만 아이들의 축구 시즌이 시작되면 단번에 중단한다.

그런 사람들 앞에 설교자가 있다. 설교자는 마음과 영혼을 설교에 부어넣었다. 뿌리를 내리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확률이 씨 뿌리는 사람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해서 설교했는데,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오늘 말씀은 나에게 와 닿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거나 “이발하신 게 마음에 드는데요?”라고 상관없는 말을 할 뿐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다음 일요일에 다시 강단에 올라가서 다음번 설교를 했는가?

그것이 우리의 일이며 우리의 소명이다.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바위가 많거나 건조하거나 잡초가 많은 땅에 떨어지면 상심하게 된다. 그러한 소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 비유의 어려운 진리를 아는 우리 교인들과 연대한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10대 자녀를 가진 부모는 단단한 땅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고 직원에게 먹고 살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사업가는 더 저렴한 상품으로 이동하는 고객을 보면서 얕은 뿌리를 잘 이해하게 된다. 이 비유는 우리가 그런 때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 이야기를 맨 처음 들었던 군중들에게 일깨워주었던 것처럼.

비유는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일깨워준다내 자신의 사역에서 나는 종종 나의 자원들-시간에너지희망–을 유혹하고회유하는 일에그리고 불친절한 장소와 사람들을 토대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쓰고 싶어 한다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절망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씨 뿌리는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그는 어떤 씨앗은꽤 많은 분량이나쁜 땅에 떨어지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씨 뿌리기를 계속한다마태복음의 다음 15개 장이 보여주는 것처럼예수께서는 아무리 건조하고바위가 많고잡초가 많은 곳에서도 그 말씀을 뿌리신다그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나 예수처럼 우리도 이 비유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부르심을 가지고 있다. 많은 설교가 좋지 않은 땅의 이야기로 끝나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좋은 토양에서 정상적인 추수로 끝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백배를 추수하는 기적으로 끝난다. 그 가능성을 신뢰하고 설교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비유의 결말은 가장 큰 도전이다. 예수는 청중들에게 거절에 직면할 때 "계속하라"고 격려하는 것보다 더 나아간다. 대신에, 그의 비유는 그들에게–그리고 우리에게-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믿으라고 도전한다.

비유가 좋은 땅에서 일곱 배를 추수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유대인 형제자매들의 말처럼,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면 격려와 희망의 좋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비유는 단순하게 실용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거부와 현실에 직면하여 그 약속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 소설가 Bebe Moore Campbe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 일부는 비어있는 통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걷는 것. 공기가 부족하고 물이 충분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기. 누군가가 너를 오해할 것을 예상하기.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다."[Bebe Moore Campbell, Singing in the Comeback Choir (New York : Putnam, 1998), 131.]

이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이 세상이 고생이라는 것을 아신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길을 알고 있다. 우리가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풍성하심 또한 믿기를 바란다.

설교적 관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우리는 모든 곳 심지어는 싹이 날 것 같지 않은 곳에도 씨를 뿌린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가장 좋은 땅은 차치하고라도 새가 먹을 수 있는 길 가, 자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돌짝 밭, 또는 자랄 기운을 막아버리게 될 가시덤불 사이에 씨를 뿌리는 이 사람에게는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을까?  

-우리는 이 씨뿌리는 사람이 바보처럼 씨를 포함한 소중한 자원을 낭비한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당연히 씨뿌리기에 적합한 곳은 좋은 땅이다우리가 농부는 아니지만 여기서의 가르침을 우리는 우리 상황에서 쉽게 적용한다만일 당신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고 한다면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고 사람이 많이 올 장소에서 시작하라만일 당신이 새로운 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정한다면좋은 결과가 기대되는 곳을 선택하라만일 교인이 2배로 성장하는 것을 원한다면 새로 올 교인들을 위해 메시지를 잘 다듬고충분히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라.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햄버거 가게나 주유소편의점을 시작할 때처럼 특별히 장소에 대해 숙고하고 최상의 결과를 얻을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라좋은 땅을 찾아서 그 위에 씨를 뿌려라!  

-이 본문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은 좋은 경영자는 분명히 아닌 것 같다. 그는 단지 씨를 아무데나 뿌리려는 것 같다. 왜 그는 이렇게 할까? 아마도 그는 우리에게 복음은 훌륭한 경영전략보다 더 크고 좋은 땅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비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씨뿌리는 사람이 뿌리는 씨가 떨어지는 “어느 곳” (anywhere)이라도 하나님의 돌봄과 구원행위가 펼쳐지는 곳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씨뿌리는 사람은 씨를 좋은 땅 뿐만 아니라 돌이 많고 척박한 곳에도 뿌리는 데 그 이유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때떄로 이해하기 어렵고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도 이루어짐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언젠가 나는 그러한 곳에서 하나님과 그 분의 자비하심을 얼핏 보았던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시 지도자들 그룹-변호사, 정치인, 재단 관계자, 언론인들-에 속하여 우리 시의 범죄 관리체계를 담당하는 몇몇 기관을 시찰하고 있었다. 그 날 시찰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는 청소년 법정과 소년원을 방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은 큰 자물쇠와 철조망이 쳐진 정문등으로 인해 우리들 마음이 불편하였다. 우리가 들어가고 문이 철커덕 닫힐 때 나는 이 청소년들이 이렇게 여기에 들어왔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았다. 우리는 각 층마다 시찰을 하였고,  여기서 일하고 있는 한 특별한 젊은 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신입재소자가 들어오게 되는 작은 방들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또 계속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교실도 보여주었다. 이어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도 보여주었다.      

-시찰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녀는 우리를 나이 어린 범죄자들이 있는 감옥을 체험하게 해주려고 어두운 복도로 인도하였다. 각 방은 철제 문으로 되어있고 밑에서 2/3되는 지점에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좁은 일자형 창문이(slot) 있었는데 그곳을 통하여 여러 눈동자가 우리가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중범죄자로 기소되었고 몇몇은 재범자가 되어 다시 들어왔다. 우리가 듣기로는 그들 대부분이 짧은 인생기간에 그들을 보살펴줄 부모들, 가족, 이웃, 교회로부터 거의 돌봄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 좁은 창으로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눈빛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중 한 문 앞에서서 그 눈을 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눈은 많은 감동을 받은 것 같지 않아보였다. 때로 나는 무슨 변화가 생겼다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그 속삭임은 새들이 먹는 길 위에 떨어진 것일까? 기운을 가로막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일까?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시찰이 계속되면서 이 힘든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누적되어가자 시찰그룹 중 한명이 마침내 복도 끝에서 멈추어서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도하던 그 판사가 이것을 보고 설명을 멈추더니 그 사람 뒤로 가서 팔로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도 울면서 “알아요 그 마음 나도 알아요”라고 말했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재판을 받게 된다면, 나는 저 분과 같은 재판관에게 받으면 좋겠다”라고. 그 때 나에게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나에게는 진실로 저 분과 같은 재판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지복의 재판관은[하나님오늘 본문에서 씨 뿌리는 사람과 같다이 비유는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알고있는 그 만큼을 감추어 두고 있는 수수께끼와 같다그래서 이 이야기는 처음 독자들과 청중들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궁극적으로 이 비유는 좋은 땅에(good soil)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좋은 씨 뿌리는 사람에(a good sower) 관한 것이다여기서 씨 뿌리는 사람은 자라 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좋은 땅만을 골라서 뿌릴 정도로 주의 깊거나 계획적이지 않다아니 오히려 이 씨 뿌리는 사람은 실패가능성이 높은데 그 이유는 모든 곳이 좋은 땅일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곳에 거리낌없이 씨를 뿌리기 때문이다돌 위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딱딱한 길 위에도 혹은 아마도 감옥 안에도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씨앗이 싹을 내거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장소,나 환경이 있는 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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