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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0장 40 ~42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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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몇 절 안 되는 짧은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환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환영할 때 보이시는 환대의 깊은 차원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환대를 행하고 나서이다. 오늘 본문의 신학적 초점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서의 연민 어린 환영 (혹은 환대)이다. 본문의 목록을 보면 이 환영은 항상 행해져야 하며, <성자가 될만한 특별한 인물에 의해 행해진 거창한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로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간단하고 기본적인 친절>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부이다. 우리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하고 무엇인가 행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연민이 가득한 환영을 하도록 장려한다. 이런 환영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하고,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과 나누고, 그들을 조종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는 삶>을 살도록 권유한다. 또한, 우리는 지난주 마태복음 본문에서 묘사된 것처럼, 우리가 연민에 근거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온갖 요소가 있다는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진실로 우리의 연민적 환영은 <친밀하고, 따뜻하고, 깊고, 지속적인 인간관계> <거리감 있는 인간관계>가 병존하는 역설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보살핌의 관계를 맺으려는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만, 우리가 자신의 수단에만 의존하려고 할 때, 우리는 너무 자주 <진정한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부분>에서 실패한다. 자만심, 이기주의, 자기 희의 등이 우리가 아무 이해관계 없이 다른 사람과 연결하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역설적 상황 속에서 <믿는 대로 행하고 서로에게 연민을 갖고 환영하며 진정한 환대를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이 짧은 네 구절에서 예수는 <잘못된 의존관계와 비합리적인 기대와 근거가 희박한 희망>을 통해 타인과 자신을 왜곡시키는 경향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연민의 환영은 하나님을 통해 타인에게 가까이 감을 의미한다. 참된 인간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보이는 은총으로 가득한 환대를 우리의 삶과 인간관계의 중심에 위치시킬 때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환대는 우리에게 <친밀하고, 사랑하고, 지속적인 관계> <소원하고, 간헐적이고, 껄끄러운 관계>와의 관련 속에서 그 가치가 드러남을 깨우쳐 준다. 예수가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는 환영은 생생하고, 때로는 골치 아프게 만드는 역학관계가 포함된 환영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환영을 보이면서 살 때 우리는 제자에게 주는 풍성한 보상을 하나님 안에서 받을 것이다.

  설교자가 오늘 본문을 회중의 삶과 연결하게 하려면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오늘 세계에서 환대를 통한 연민적 환영 (compassionate welcome through hospitality)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작동할 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우리가 억압자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 우리가 억압받는 사람들이 추진하는 사회개혁에 어떻게 더 동조하고 지원할 수 있나? 어떻게 교회 안내위원의 인사와 목사의 악수가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향해 근본적인 변화를 한다는 표시가 될 수 있나?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형식적인 환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환영을 베푸는 사람은 종종 계속 안락한 집 안에서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살고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억압받는 자들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만든 세계에 편입되기를 강요한다. 오늘 본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주인이 절대적인 선택권이 있는 상황에서 관계의 상호성에 주목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고압적인 자세로 원조를 베푸는 것과 진정한 환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런 높은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환대뿐 아니라 회개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타인을 환영하지 않는 생활방식에서 벋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제시된 새로운 생활방식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회개를 통해 우리의 특권적 지위는 상실된다. 편하게 집 안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도 도덕적 해이로 비판을 받게 된다.

  예수가 오늘 본문에서 상에 관한 언급을 하였지만, 우리가 보상을 바라고 연민적 환영을 행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사랑이 항상 사랑의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길에는 고난과 핍박이 있으리라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어떨 때는 사랑에 대해 십자가 처형의 응답이 오기도 한다. 우리는 증오의 한 복판에서도- 심지어 증오가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사랑을 행하기로 부름 받았다.

  연민은 따라서 사랑이 핍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역설 위에서 행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증오로 가득 찬 상황에서도 계속 작동했음을, 십자가 후에는 부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위험한 사랑을 행하도록 부르신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행할 때 우리의 삶과 타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연민을 구현하는 삶을 살 때 그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통한 환대는 이 세상에 더욱 충만해지는 것이다.

  연민적 환영에 뿌리를 둔 환대는 실천적이고 영적인 훈련이다. 이 훈련을 통해 우리는 환대가 새롭고, 낯설고, 모르는 타인을 우리 삶 속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이 어떤 능력이 있고, 어떤 취약점이 있는지, 주거지와 생계 수단과 관련하여 어떤 필요가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이나 관점, 더 나가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열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환대를 실천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체험하고 믿음의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게 됨으로 우리 자신의 관점이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신학적, 영적 상상력이 자극을 받아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상이 아닐까?

 주석적 관점

 이 본문은 마태복음의 선교 강화(Missionary Discourse)의 결론 부분이다. Q 선교강화의 끝 부분(10:1-16)과 병행구이지만 마가의 선교강화에는 없다(6:7-13). 박해와 고통에 대한 위험들의 경고를 포함하여 선교를 위해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지침을 준 뒤에, 마태의 예수는 그들에게 보상과 받을 상(misthos, 41)에 대해 제시한다. 10:40은 눅10:16과 거의 비슷한 병행구인데, 그것은 Q의 선교강화 전통에는 공관복음 전 단계에서 결론적으로 보상의 말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18:5은 막9:37에서 온 것인데, 10:40과 언어적 유사성을 보여주지만, 아마도 다른 자료에서 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랑설교자가 아니라 작은 아이들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막9:37 자체는 마10:40과 같이 처음에는 제자들에 관해 언급한 것을 나중에 작은 아이들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수정한 것이다.

 제자들이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된다는 주제는 선교강화의 핵심 부분(10:11-15)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 선교신학의(10:24-25 참조) 가장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인, 예수 닮기(imitation Christi) 원칙과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바로 전 본문과는 달리, 여기에서 보상에 대한 약속은 종말론적 언어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본문의 문학적 맥락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현재 본문도 의도된 청중들에 의해 종말론적 감각으로 잘 해석되어질 수 있다. 10:40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해 말하지만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거부한 것이고, 그것은 예수를 보낸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이점은 툭10:16 Q 선교강화에서 명확하게 한 것이다.

 40절은 전체 본문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보냄 받은 사람은 보내신 이를 충분히 대표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의 shaliah의 원리를 반영하는데(그리이스어의 apostolos와 동의어) m. Ber. 5:5에서 말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특사는 그 사람과 같다”고 후대에도 말하고 있다. 같은 원리가 b. Qidd. 41b b. Sanh. 110a에 인용되고 있다. 이 두 본문 다 shaliah의 원리를 개인이 아니라 회중에 의해 보내어졌다는 것에 논의하고 있다.

 인용된 원리 자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보내진 어떤 사람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격언의 형태로 되어 있기에, 인용된 shaliah에서 kemoto(그와 같은)라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정할 수 없다. 그 맥락에서 40절은 그러한 원리를 이 사명의 특사로 보내진 예수의 제자들의 받아들임에 대한 보상(거부함에 대한 벌도 의미한다)의 구체적 사례에 적용한 것이다.

 41절은 공관복음에는 병행구가 없는데 원자료는 알려지지 않았다. 언급한 예언자가 누구인지, 옳은 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디다케(Didache)에서는 사도와 예언자가 방랑선교사들에 대한 언급으로서(11:4-6) 교차해서 사용된다. 비록 두 문서 간에 직접적 문학적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와 디다케한 서로 공유하고 있는유대기독교적 배경에서, 예언자와 사도들이 아마도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특별히 그들이 방랑 선교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경우에 그러하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이 절에서 “옳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른 선교사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42절은 마가의 선교강화의 일부가 아닌 막9:41에 기초하고 있다. 마태는 막9:41 2인칭 복수형(hymas)를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mikron)로 바꾸었다. 마태는 이 용어를 마18:6에 남아있는 막9:42에서 뽑아서 방랑선교사들로서의 예수의 제자들을 기술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마태의 편집적 노력은 초기 기독교 방랑선교사들이 견뎌야 만 했던 배고픔과 갈증을 포함한 여러 가지 어려움 등을 포함하여 조금 더 적대적인 상황을 반영한 듯이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서 마태의 예수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마태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같지만 않지만 비슷한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elachiston)(25:40,45)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때때로 이러한 연관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이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구절의 의미가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는 합리적 추론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언어학적 관련성은 양과 염소의 비유 해석에서 의미론적으로 제한된 요소로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도리어 그것은 일반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진실로 “작은 자”로서, 그들이 어디에서부터 왔든지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을 이 세상의 작은 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또한 이 세계의 다른 자들을 섬기려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현재 본문은 우선적으로는 예수가 보낸 방랑선교사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의 약속이다.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초기 기독교공동체에서 보냄을 받은 방랑선교사들이 비록 그들이 직면할 반대, 박해, 고통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 보상이 클 것이므로 결코 낙심하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만약에 방랑선교사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받을 보상이 크다면,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에서 방랑선교사들이 받을 보상은 얼마나 크겠는가!        

 목회적 관점

나와 예일대 동문인 아일랜드의 예배신학자 Siobhan Garrigan은 그녀의 책 실제적인 평화를 위한 과정 의 자료 조사를 위하여 아일랜드 여행을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북 아일랜드에 있는 어떤 장로교회에 도착한 Siobhan은 두 명의 여성 교인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대화에 초대되는 것처럼 보였다. Siobhan은 이 여성들이 일종의 안내자로, 교회 문 앞에 서서 새 신자가 오면 인터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와 또 아침 예배에 참석하러 온 다른 손님들의 이름을 조용히 물었다.

그때 Siobhan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 그들의 이름을 듣고서 안내자들은 그들 각각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프로테스탄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따뜻하게 환영을 받으며 자리로 안내되었다. 명백히 가톨릭적인 이름을 가진 사람들, 마리아와 캐서린 그리고 패트릭 같은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잘못 찾아왔다고 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Siobhan이 수십 년 전에 끝난 연구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교회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소망은 즉시 깨져버렸다. Siobhan은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이것은 나 같은 북미인들에게는 외국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우리와 전혀 다르며 아직도 개신교와 가톨릭이 싸우고 있는, 멀리 있는 아일랜드 장로교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그런 일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차별적인 행동은 지나갔다. 우리는 마침내 아프리카계 미국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모든 벽과 경계를 무너뜨렸다. 우리 예배 공동체에서는 모든 사람이 환영받는다.

아일랜드의 언덕에 있는 개신교 교회처럼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즉시 복음과 대치되는 그러한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인정하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익숙하다. 문을 닫아거는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는 암암리에 낯선 사람의 이름을 물어서 그들을 찾아내서 그들이 속한 곳으로 보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면, 경계선을 다르게 정의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리고 더 미묘하게 경계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교육수준과 직업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교회가 그러는 것처럼,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공동체가 더 따뜻하게 대할 것이다. 아무도 가버리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혼잣말을 할 것이다. 그러한 질문이 가진 의미는 모두에게 분명하다. 방문자의 이름이 개신교인지 가톨릭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다른 지역 사회에서도, 이웃이 가진 클럽 회원권이나 다니는 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을 한다. 이 모든 것은 예의 바른 대화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어쨌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로 우리 교회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될까? 덜 부유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될까? 정말 가입할 필요가 있는 지배적 인 사회적 또는 정치적 관점이 있고, 그것이 공동체가 신참들에게 더 개방적이 되게 할까? 교회의 문이 활짝 열리기 전에 정말로 확립되어야 하는 성 정체성이나 가족 모델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는가?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제공하는 환영의 질에 관한 질문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름이 우리 이름과 비슷하거나, 교육 수준이 우리와 비슷하거나, 은행 잔고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얻는 보상도 있겠지만, 배타적인 행동 때문에 교회가 너무 오래 너무 많은 것을 인내해야 한다는 비용도 감당해야 한다.

예수는 이 문제를 가장 개인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랑, 우리가 부모와 자녀를 보살펴주는 부드러움을 묘사한다. 그 부드러움과 연민은 우리 삶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방인을 환영 할 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환영할 뿐, 다른 어떤 것도 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몹시 불안한 뉴스처럼 들릴 수 있다.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입구에서 안내하는 사람들은 불신의 문화로부터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들이 문을 닫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작은 교구가 안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정하는 것보다 그들과 더 닮았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장 가까운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확장하고, 더 멀리 더 멀리 확장하라. 낯선 사람을 환영하라. 당신이 그의 인생을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환영하라.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라. 그들 또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복음이라고 담대하게 설교하는가? 이전에 쫓겨났던 사람들, 과거에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우리가 부르는 신앙의 노래에 여전히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이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전에 닫혔던 교회의 문에 접근하는 위험을 감수하려는 방문자를 위해 약간의 은혜 이상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아니, 진짜 복음은 이전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의 문지기가 아니라고 단언하신다. 우리는 그 일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환영하고, 포옹을 요청받을 때 포옹을 하고,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 컵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을 보상은 참으로 충만 할 것이라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설교적 관점 

-이 구절은 제자도와 선교에 관한 추가담화의 결론이다. 강조점은 보냄을 받은 자들이 겪을 시련 (10:16-39)으로부터 그들을 맞이할 사람들의 책임 (40-42)으로 바뀌고 있다. 내용 전개상 이 구절은 보냄을 받기 전의 열두제자 (the Twelve)에게 주어진다: 예수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연대해있고 그들이 받는 대접을 그대로 받게 된다(40). 우리 독자들은 이 담화를 격려와 약속으로 “바로 옆에서 듣고 있다”(overhear). 만일 우리가 이 예수가 보낸 이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환영한다면” (welcome, 환대를 보여준다면, hospitality)  우리는 그들이 받을 상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이런 “방랑 설교자들” (itinerants)을 예언자, 의로운 사람, 작은 자 (41-42)라고 표현한 것은 문체상 강조일 수도 있고 혹은 마태복음의 첫 번째 독자들이 알고있는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 선교사일수도 있다.  

-간결하지만 반복적인 이 성서정과 본문은 오늘날 회중과 연관시킬만한 뚜렷한 공유점을 찾기가 쉽지않아 설교에 어려움이 있다. 한 방법은 환대 (hospitality)에 관한 주제설교로 활용하는 것이다. 방랑 선교사들 (itinerant missionaries)을 환대하라는 이 명령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보다 광범위한 성서적 태도와 연결시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창 18:1-8;  19:33-34;  24:29;  12:13;  13:2을 보라)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시행했던 이 환대는(hospitality) 오늘날 낯선 이들 (strangers)에게 보통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환대를 인식하는 우리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집을 편안한 곳으로 여기는데 주안점을 두는 문화에 살고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맞아들이는 기독교의 환대를 오늘날 문화에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어보인다.  낯선 이, 이민자, 노숙자등에 대한 두려움이 이러한 환대를 공적 담화나 정책으로 다루기에 너무 가까이 있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아마 보다 대담한 접근은 이 본문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는 것이다. 먼저 이 성서정과가 강조하는 환대는 선교사들 곧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오늘날 상황에서는 실현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성서학자들은 마태에게 있어 “작은 자들”(little ones)은 일반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아니고 여행하는 복음전도자들 (travelling evangelists)이라고 밝히고 있다. 얼마나 자주 회중들은 먼 데서 오는 여행으로 인해 피곤한 선교사를 그 믿음을 공유하기 위해 집에 들어오게 하여야 하는가? 만일 이러한 사람이 마을에 지금 그리고 후에 또 다시 온다면, 환대는 편리한 호텔에 좋은 방을 잡아주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회중들이 다양한 목회과정에서 만날 수도 있는 많은 “방랑 설교자들” (itinerants)에 대하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작은 이들”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선교사로 이해하는 선택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환대를 필요로 하는 노숙자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들고 순회하며 전하는 배고픈 선교사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즉각적인 우리의 반응은 우리 도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믿음을 위해 무언가 공유할 것이 있는 사람들을 분명히 구분하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기관의 도움없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사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소비지향적 사회에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해서 우리에게 오는 많은 사람들은 깊고 내적인 신앙을 지녔거나 혹은 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다. 중앙 아메리카에서 의료선교부터 식량, 쉼터제공 사역에 이르기까지 나는 우리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보여준 생기넘치는 신앙으로 인해 종종 놀랐었다. 가진 것이 제한되어있고 부서지기 쉬운 상황 속에서 그들은 복음을 대할 때 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간증할 때 얼마나 확신에 차있고 우리들 마음에 느껴지게 하던지! 

-이 행사를 주관한 우리들이 “전대에 돈이 없고” (10:9), 지갑에 건강보험 카드도 없는 이 “작은 자들”로 인해 신앙이 강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우리에게 신뢰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안정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물 한 잔을 드리는 것이 하나의 기회임을 알게 하였다(8:20; 10:4042; 25:40).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준 작은 자들의 단호한 신앙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이렇게 어렵게 발견한 우리의 순전한 신앙은 계속 유지될 수 없음을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만일 그렇다면 환대를 실천함으로써 우리들 또한 우리의 상을 잃지 않게 됨을(42) 깨닫게 될 것이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아마 부담없이 가장 잘 다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이 매력적으로 그러면서도 실천가능하게 제공된다면, 교회가 사랑을 담은 실천을 하는데 있어서 대안적 실천 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목표는 사람들에게 이 본문이 진실로(really)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확신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 보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새로운 믿음의 눈으로 보도록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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