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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1장 16 -19절, 25 -30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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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내가 어릴 때 좋아하던 찬송가 중의 하나가 Judson W. Van DeVenter 1896년에 작사한 “I Surrender All(“내게 있는 모든 것을,” 찬송가 50)”이다. 나는 특히 후렴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 후렴은 오늘의 본문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I surrender all, I surrender all,

  All to Thee, my blessed Savior, I surrender all.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내가 상상하기로는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마11:28-30에서 우리를 제자도로 초대하신 후 듣기 원하시는 반응이다.

 그 초대가 있기 전에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그 결과에 의해 입증될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19)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고, 그 관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가 오늘 본문 결론부에서 제안하는 제자도로의 초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제자도로의 초대의 특징은 우리의 목회적(평신도와 성직자 모두의 목회) 상황과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믿음, 사랑, 소망,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상황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신앙과 매일의 삶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통합적인 관심을 깨닫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이 변혁적 제자도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만, 필수적이고, 때로는 매우 고독한 길이다.

 제자의 길을 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융단을 짜듯이 우리의 존재를 직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고, 또 우리가 받은 은총과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삶을 살면서 제자도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한계에 주목하지 않고 가능성에 주목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요구에 “네”라고 대답하는 삶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점점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연민을 베풀고, 용납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제자로 사는 것은 우리가 정직하고 하나님께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찾음으로 우리의 자아관이 바로 서게 되면 우리는 삶의 대소사와 관련하여 깊은 신학적 통찰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안식만 얻는 것이 아니고 핍박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할 새로운 존재 양식과 우리가 전해야 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확신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제자도는 또한 우리가 더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이런 고민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에 관한 구절들(16-19, 29)과 연결된다. 16-19절과 관련하여 우리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추방당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내용이 예수의 멍에를 지고 그에게서 배우라는 29절의 말씀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성찰하다 보면 깊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도에 관해 배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의 공동체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는 모범은 연못의 잔물결처럼, 혹은 지진 후의 큰 파도처럼 주위로 확산된다. 마지막으로, 제자도 신학이 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공유될 수 있는가를 명확히 하려면 본 훼퍼의 책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더 찾아보는 것이 좋다.  

 주석적 관점

 마태복음의 주요 문학적 구성 요소는 다섯 개의 긴 강화인데, 각 강화마다 이야기들이 따른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는 것에 관한(9:35-11:1) 두 번째 강화에 따르는 이야기 중의 일부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선교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는 예수의 모티브나, 이스라엘의 고을(10:23)들의 반응 또는 무반응이 여전히 전체 문학적 구조에서는 본문의 배경이다.

 자료에 관해서는, 마태11:16-30 전체가 Q자료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세 문단 각각은 누가복음에 있는 Q자료와 병행구인데, 그것은 마11:16-19와 눅7:31-35, 11:20-24와 눅10:12-15, 그리고 마11:25-27와 눅10:21-22이다. 11:28-30은 공관복음에서 병행구가 없다. 그것은 마태의 특별한 전승이나 마태 자신의 창작으로 볼 수 있다.

 가능성은 적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추측은 마태는 Q로부터 “내게로 오라”는 초청을 택했지만 누가는 삭제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찰은 원자료의 범위와 공관복음 전단계 Q의 본문에 담겨져 있는 말씀들의 순서에 대한 자료비평적 질문들을 금방 제기하게 한다. 그러한 질문들은 보통 해결하기 어려운데, 하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반적으로 누가복음보다는 마태복음이 더 많은 수정들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첫 번째 문단 16-19절 앞에는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가 “오실 그 분”(11:2-3)인지를 묻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하고, 그들이 돌아간 뒤 군중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해 짧은 연설을 하는데 16-19절은 그것의 일부분이다. 16절은 앞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말의 연결되는 의미보다는 반대되는 의미로 시작한다.

 이러한 언어적 연결은 이 본문의 우화적 말씀들의 궁극적 의미를 밝혀준다. 그것은 진실로 이 세대(16)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본래의 참고는 예수 시대이지만, 삼투성의 편집적 모티브에 따라 마태의 세대나 또는 우리의 세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비유 자체는(16b-17) 여기에 나온 인물이 실제 누구인지에 관해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이 비유가 일반적으로 사람들, 특별히 세례요한과 예수의 적들은 전혀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인용구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해석하는 부분(18-19)에서는 풍자적으로 세례요한과 예수를 그들의 생활스타일과 받은 비난으로 비교하는데, 한데 요점은 비교가 아니라 그들 각자를 향해 모략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이다.

 이 부분은 격언으로 끝난다.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9절의 “일”이란 신학적 의미가 있는 단어인데, 이는 2절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상기시킨다. 이는 또한 예수가 한 여러 가지 일(11:5)들을 가리키기도 한데 이는 예수가 선언한 복음의 핵심을 보여준다.

 두 본문 사이에 오는 본문(20-24)에서 청중은 같지만 주제는 바뀐다. 여기에서 예수는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도시에 대한 예언자적 심판을 선언하는데, 이들은 16절에서 예수가 말한 것이나 행한 것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16절에 언급한 “이 세대”의 다수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주제는 2-24절의 전 부분에 걸친 주제이다.

 두 번째 단락인 25-30절은 부정적 강화에서 긍정적 강화로 바뀌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양식으로는 기도(25-26), 선언(27), 그리고 충고(28-30)이다. 앞에 부분과 비교하여, 예수의 기도는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그룹으로 예수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따른 소수의 사람을 보여준다.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지혜있고 똑똑한 사람”으로 성격지움으로 예수의 이 말은 주되게는 교육받은 이스라엘지도자인 그의 적들의 범위를 좁힌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사람을 아이로 규정한다. 이 비유는 일반적으로 겸손한 자를 지칭하지만, 그러나 또한 제자이든 군중이든지 특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25절 예수의 기도에서 기원은 주기도문과 비슷한데, 하지만 예수의 유일성을 표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버지에게 기원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유대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방법이다. 예수가 독특한 것은 기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간의 상호이해의 독점적 성격과 또한 아들을 계시의 유일한 중개자로(27) 지정하고 있다. 이 기도는 눅10:22과 말 그대로 병행구이다.

 배타적 계시의 그러한 주장은 종종 종파주의의 표시인데, 보통 변방의 초기공동체로서 그가 속한 큰 사회의 주류에 대항하여 정통성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Q공동체나 마태공동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데, 하지만 이것은 누가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은 토론중이다. 그러므로 28-30절의 결론적 권고는 70년 이후 유대교의 소수자운동으로서 마태공동체의 곤궁함이란 배경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목회적 관점

성서정과의 이 기묘한 복음서 말씀은 7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 주간에 나온다. 미국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는 이런 맥락에서 이 말씀을 읽을 수밖에 없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민족, 국가, 모든 세대가 다 다양해서 목회적으로 일관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 본문은 신앙을 지닌 어느 한 민족을[미국] 위한 축하의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려고 할 때도 있지만,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전적으로 무시하기가 어렵다.  

이 구절은 자기들의 노래를 사람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들이 기쁜 노래를 부를 때,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다; 장송곡을 불렀을 때,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보다 더 잘 이해받지 못했으며, 예수보다 더 잘 이해받지 못했다.

예수는 개인이 응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부르고 있는 노래에 대해 사회 전체, 실제로는 전체 세대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는 애국적인 축제 일주일 동안 춤추는 이유와 우는 이유를 우리 세대가 이해하는 방식이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문화의 또 다른 노래와 목소리에 너무나 자주 그리고 쉽게 무감각해진다. 우리는 중요한 순간을 놓칠 뿐만 아니라, 짐이 무거운 세상과 안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애도해야 할 때 빼먹지 않고 춤을 춘다.

예수께서 모여 있는 사람들을 떠나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우리는 예수의 초점이늘상 우리의 관심을 끄는 강하고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멀리 있는 “어린아이들”(25)에게 얼마나 확실하게 집중되어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한다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찾으며 일생을 보내는데지금은 그것들이 예수님이 거부하는 바로 그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하느님의 영역에서는우리의 인간적인 관심을 끄는 것들은 거의 주목되지 않는다더욱이 하나님의 축복은 이 세상의 지혜와 계략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감추어져 있다대신어떻게든 하나님의 방법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이 세상의 순수하고 순진한 어린아이들이다.

이것은 성공한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에서, 혹은 적어도 세상에 사는 동안 성공하기를 갈망하는 회중에게 설교하기에는 어려운 말이다. 사람들의 힘과 결단을 더 잘 기념하고 겸손의 미덕까지 고려하는 국경일의 주말에 설교하는 것은 여전히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포가 이 땅의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목청을 높인 첫 번째 목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정의가 항상 “위협받는 무고한 사람들,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와 외계인들에게 호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항상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시고, 그들의 편에만 서신다: 높은 자들에게 맞서시고 낮은 자들을 대신하신다; 이미 권력과 특권을 향유하고 있는 자들에게 맞서시고 그것을 거부당하고 박탈당한 자들을 대신하신다. 수십 년 동안 해방 신학은 성경의 명령을 확장하여, 그리스도의 급진적인 말씀을 많은 민족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일치시켰고, 구원하시는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힘없는 사람들,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경험 한복판에 있을 때 가장 잘 이해된다고 주장해 왔다. 여러 새로운 교회의 모델들이 예배와 공동체 건설에 대한 낡은 모델을 거부하고, 물질적 재산이나 확립된 권력에 구애받지 않고, 주변부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법을 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많이 인용되는 위로의 말을 하기 전에, 중요한 참여와 사회 분석으로 초대한다. 그것이 이 본문을 읽는 목회적 열쇠가 될 것이다: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이 말씀은 무어라고 하는가? 우리는 심각하게 투쟁하고 있고 궁핍에 압도된 사람들과 어떻게 교제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정말로 그의 축복이 강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비천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주장한다면, 지금은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우리 사회의 변두리와 우리 삶의 변두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곤경과 일치시켜야 할 때이다.

예수가 풍족한 시대보다 곤경에 처한 시대에 더 많이 계시고, 확신의 시대보다 절망의 시대에 더 많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가 깨닫게 되기 전에는 목회적 확신의 말씀으로 너무 빨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안식은 가장 강하고 가장 힘 센 사람에게 제공되지 않는다. 안식은 불의가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지쳐 버린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멍에는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하늘의 권능으로 편하게 만들어진다.

요컨대, 지적인 용맹이나 개인적인 매력을 통해, 군사력이나 정치권력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의 위안을 받을 필요가 없다. 예수는 하늘의 은사로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인생의 부담을 덜어주고, 외로운 영혼을 위해 안식을 제공하여, 풍성한 위로로 찾아오신다.

설교적 관점

-마태복음 11장은 예수와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 소식에 대한 다양한 응답들을 보여주고 있고 그를 영접하고 편안히 쉬라는 새로운 초대로 결론짓고 있다. 이번 주 성서정과는 세 가지 분명하고 설교하기에 좋은 영역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요한과 예수 (John and Jesus)

-이 둘은 다른 점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만, 요한은 메뚜기를 먹는 광야의 예언자이고 예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좋은 음식 먹기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털옷을 입었고 예수는 가끔 결혼피로연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하나님의 힘을 부탁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요한은 그의 청중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했고 예수는 마태복음에서 주제설교를 할 때 그들에게 복이있다는 말로 시작했다 (5:1-11). 그들은 후에 서로 다르게 나아갔고, 한 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요한은 이제 어두운 감옥에서의 조심스러운 질문 (11:2-6)을 한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1:7-15). 그런 다음 그는 자신과 요한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한 비유와 그리고 둘 다 거부당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백성들을 경기규칙을 바꾸는 변덕스런 어린아이들에 비유한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는데 (18) 사람들은 그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요한은 옛날 스타일로 너무 엄격하고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피리를 불면서 “이봐 요한 좀 가볍게 해. 지옥불만 이야기하지 말고 피리소리에 맞춰 춤이나 추자구”라고 말했다. 그 후 예수가 왔고 그는 춤을-이들이 결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출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때 그들은 예수와 함께있던 무리들을 향하여 통곡했고 예수를  “마구 먹어대는 자요”(glutton) 또 포도주를 마시는 자(drunkard)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들에게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기도 하고  또 동시에 너무 “보수적” (conservative)이거나 너무 “진보적” (liberal)일 수 있다. 우리는 결단의 때가 우리 모두에게 왔으므로 마음을 성찰하고 가라지를 불태우고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요한의 정제되지 않은 주장에 마음이 힘들 수가 있다. 그렇지만 예수도 또한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고민하게 할 수 있다. 그는 [요한과는 달리] 이해하기 어려운 포용을 말해서, 우리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친구들을 잘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을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요한은 너무나 엄격, 예수는 너무 포용적]  

 -이 둘의 메시지는 어렵게 얻은 우리들의 자유함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요한의 숨막히는 요구들과 예수의  놀라운 포용성 사이에서 중간지점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상을 위해 계획한 특별한 미래에 집중하기보다는, 적당함을(moderation) 견지하면서 (이것이 평범함일까?) 오늘의 우리자신을 안정되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맞추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Jesus, Knowing God)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많은 좋은 것들이 최선을 다한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생명을 구하는 의학기술에 필요한 이론발전부터 뛰어난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노력이 거둔 성과는 뛰어나다. 이러한 지식을 얻거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게 그 일을 추구해야한다. 무엇엔가 달인이 되기를 원하면,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집중하고 오래 있으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되지 않는 일 (가장 중요한 일을 포함하여)도 있다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그렇게 얻어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어떤 것처럼 우리가 다가가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잡을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적게 얻게 된다적어도 예수께서도 이렇게 이해한 것 같다하나님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 같고심지어 모든 지식을 이해하는데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데 뛰어나 보인다 (25-26).  

-물론 하나님에 대해 어느 누구도 예수보다 더 잘 이해하지 못한다 (27). 그렇기 때문에 예수와 그의 선교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도 그는 감사의 기도 (25)를 드렸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 서 있을 때, 박해 (10)와 거부(11)가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계획된 대로 진행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들은 영적으로는 “어린아이들” (25, infants)이고 신학적으로는 덜 현학적이며, 자신들의 이해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다. 또 예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가 보여주는 하나님께 (27)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알고 있다.  

  예수의 멍에 (The Yoke of Jesus)

-성서정과의 마지막 구절은 (28-30) 설교하기에 가장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익숙한 언급은 예수를 따르는 일은 쉬운데 그 이유는 그는 바리새인처럼 우리가 사는 방식에 관해 규정짓지 않고 있기때문이다라고 널리 이해되었다. 예수를 이렇게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antinomian) 이해하는 일은 보다 엄격한 윤리적 삶을 서술하는 산상수훈 (5:17-20)과 부합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약속하는 “편한 멍에” (easy yoke, 30) 10장에 배치된 엄격한 요구와 11장에 나오는 거부당하는 일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 예수께서는 많은 것을 요청하면서 쉬게 해주겠다고 제안할까?

-예수께서 제안하는 것은 사역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과중한 일로부터의 자유이다. 마음에 병이 들 정도로 지치고 피곤함은 모든 일을 하는 과정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잘 안 맞는 일, 억지로 하거나 두려워서 하는 일 혹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수행하는 일들로부터 나온다. 편한 멍에는 일을 함에 있어 무언가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적인데 (purpose)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고 최선을 다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는 열망으로 추구하는 사역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분명한 미래를 향해 일하는 것을 뜻한다. 부드럽고 겸손한 주님의 멍에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혼을 쉬게하는 가치있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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