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0장 24 ~39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19.
728x90
반응형
SMALL

신학적 관점

 이번 주와 다음 두 주 본문에서 다루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제자도이다.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잠시 멈춰 자신이 지금까지 제자도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나의 삶과 사역에서 내가 생각하는 제자도를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나? 내 교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제자도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나?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이곳에서 몇 주에 걸쳐 다루는 제자도에 관한 논의와는 다른 측면을 배우게 될 수도 있다.

  우선 제자(disciple)는 학습자(learner)라는 사실을 유념하라. 믿음에 관해 배울 때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설교를 듣는 회중이 믿음에 관해 배우려고 할 때 그들이 내면적으로나 외양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례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잘 배우기 위한 사적, 공적 자질은 무엇일까?

  수많은 중요한 질문이 던져진다. 본문 34-39절 중 유명한 구절(“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은 관심을 제자도-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과정-에 두고 해석한다면 회중이나 설교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제자도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부름 받아 파송되는 사도나 복음 선포자의 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자도는 여행과 같다.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봐야 할 내용은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 지이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잠시 멈춰야 한다. 그리고 예수로부터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멈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도의 중요한 한 측면, 즉 순종을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하다.

 순종의 본질을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은 권력(power)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조정, 규제, 통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은 승복에 근거한 독재적 순종의 모델을 낳게 한다. 여기에서는 상호관계가 결여된 고립된 존재들이 전제된다. 권력은 각각 분리된 존재의 속성이 되고, 다른 존재에 대한 지배와 동일시 된다. 이런 권력은 “상처받지 않는 능력”( invulnerability)의 개념을 전제로 하여 이해된다.

  어떤 사람은 34-36절의 예수의 말씀에서 위와 같은 권력관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유혹을 거부하라! 권력이 “상처받지 않는 능력”이라는 생각을 접고, 주위 구절들을 검토해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의 신비를 선명하고 정확하게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아주 좁은 사적인 시각에서 판단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대신, 제자는 알고 경험하게 된 것을 많은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

  담대한 증언은 독재적 제자도 모델과 거리가 멀다. 그 모델에서 순종은 힘의 불균형이 전제된 자아/타자의 배타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우세한 지위에 있는 자에 대한 순종의 주된 동기는 두려움이다. 32절에서 예수는 막강한 중재자로 소개되고, 28-30절에서 하나님은 세심한 배려를 통해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 간에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34절 이후에 설명되는 놀라운 권위를 예수에게 주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제자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면허로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한, 제자는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 로봇과 같다는 생각도 거부해야 한다. 후자는 행동의 기술일 뿐 신실한 증언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독재적 순종의 세계관은 질서를 강조하고 지속적 변화를 거부한다그러나 성서적 세계관은 목표를 향한 운동을 강조한다순종의 독재적 모델은 신실한 제자도의 요소로 적합하지 않다왜냐하면그 모델은 질서의 유지에 관심이 있고미래를 의심과 공포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순종은 그보다 본질적으로 높은 차원의 신적 인도에 초점을 맞추는데,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눈을 감고, 정해진 법칙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제자도나 복음증언은 우리가 더 깊은 신앙의 경지로 가는 길의 안내의 역할을 하기 보다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이 적용될 때 권력자는 중요한 이미지를 쉽게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춰, 우리도 그런 유혹에 빠져 성경, 전통, 경험을 성장과 인도가 아니고 억압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오늘 본문 전체에서 순종은 책임을 포함한다. 제자는 우선 예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듣고, 그다음 적절한 응답에 관한 결정을 하는 자이다. 이 응답에 관한 옳은 결정을 하는 사람은 제자가 되어 신앙 안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역량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 상황이나 하나님의 뜻에 관해 선입관이나 관습적 견해를 갖고 접근하면 우리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 참여할 때, 예수는 우리에게 분별력 있는 순종(discerning obedience)을 요구하신다. 이것이 예수께서 34-39에서 선포하는 이 세상의 질서이다.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은 소위 “선교강화”(Missionary Discourse)로서 마태에 나오는 중요한 다섯 강화 중 두 번째 것이다. 마태는 두 가지 다른 선교전통들(6:6b-13 Q10:1-20)을 융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Q의 다른 자료를 더 첨가했다. 강화의 후반부에 위치한 오늘의 인용구들은 제자들이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려 할 때 당면했을 문제들에 대한 반응(10:16-33)과 제자도의 원리(10:34-39)를 말하고 있다.

 선교강화는 예수가 그의 갈릴리 선교 기간 동안 특정한 시점에서 제자들을 사명을 감당하도록 파송했을 때 그들에게 준 가르침으로서 마태의 이야기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한데, 여기에는 현재의 인용구를 포함한 말씀들이 담겨져 있는데, 분명히 역사적 예수 시대보다 후대에 적용하기 더 좋은 것들이다. 마태에 아주 일반적인 “투명성”(transparency)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종종, 어떤 것은 복음서가 씌여진 때나 혹은 그 이전 시대의, 마태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의 컨텍스트는 예수운동을 따르는 제자들의 경험한 어려움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유대당국에 의해 그들의 사역에 대한 부정적 대응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인용구 바로 앞에 예수의 문제되는 발언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이스라엘 고을들을 다 돌면서 설교하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다(10:23). 이 말은 신약 성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데, 그래서 원자료나 본문의 진위 여부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또한 마태가 이 말을 취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확답하기 어렵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의 역사는 다양하다. 어느 한쪽 편에 속하는 학자들은 이 구절이 역사적 예수가 한 것으로 마태도, 그가 예수와 같은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인자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로서 묵시적 종말론을 가진 것으로 믿었다. 다른 쪽의 스펙트럼을 가진 학자들은 “투명성”에 의존하여, 이 구절이 예수의 재림이 대단히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이던 때인 1세기 말의 회당에서 마태공동체가 경험했던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유대인 선교에 대한 효용성을 계속 주장하는 것에 대한 교정의 표시로서 임박한 재림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해석을 취하든, 그것은 불가피하게 현재 본문의 해석에 영향을 주는데, 왜냐하면 10:23이 이 본문의 서문처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 나오는 방랑설교자와 치유자들로서의 제자들을 위한 강화에서 특정한 가르침을 포함하여 이 본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얼마나 취약하며 보호할 수단이 없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스승이 바엘세블로서 모함받고 처형되었다면그의 제자들도 그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24절은 일반적 격언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사역 때문에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주는 특정한 윤리적 권고이다.

 이것은 1세기 말 도시지역에서 삶의 공동체로서의 마태교회의 사회문화적 현실을 뿐만 아니라,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그들의 종말론적 긴급성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집과 가족을 떠난(35-37)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선교자들로 특징지워지는 팔레스틴 시골지역의 초기 예수운동 또한 반영하고 있다. 전통적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마태이전의 자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에 이러한 전통의 빛 안에서 보는 특정한 형태의 선교는 마태공동체에게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이 강화 속에 통합함으로써, 마태는 예수를 위해 소유와 가족을 급진적으로 포기하는 기풍을 보존하고 있다.

 주된 권고는(26-31)는 같은 구절 즉 “두려워하지 말라”는(26,31) 되돌이 구성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중심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종말론적으로 심판하시는(28)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궁극적인 권고가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위협은 하나님께서 비록 참새와 같은 작은 것이라도(29,31) 돌보신다는 말로 균형을 취한다. 두 가지 다른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같은 패턴으로, 32절은 종말론적 심판정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옹호자로 또는 심문자로서 예수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는 선언(34)으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Q(12:51참조)에서 가져왔는데, 도마서 16장과 거의 비슷하다. “내가 무엇을 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라는 구절은 마5:17과 같은데, 이것은 복음서 기자 자신에게서 온 것임을 제시한다. 종말론적 전쟁의 주제(topos)는 여러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의 전형적인 묵시적 이미지들에 의해 입증된다. 이 강화에 마태가 적용한 것을 해석자들이 너무 쉽게 마태본문을 실현된 종말론으로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지만 마태의 경우에는 종말론적 평화의 궁극적 완성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문의 마지막 절(39)은 박해를 견디고 값비싼 제자됨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윤리적 권고의 절정이다. 여기의 맥락으로는 Q(17:33)에서 온 것인데, 하지만 막8:35과도 병행구를 이루기 때문에 마가와 Q가 겹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비슷한 구절인 요12:25이 있다는 것을 보면 이 구절은 복합적인 증거로 규정지을 수 있는데, 하지만 진위성에 너무 밀고가지 않아야 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따르기(imitatio Christi)의 원리에 근거하며, 그러기에 초대기독교공동체의 부활이후 경험으로부터 예수의 삶과 죽음을 회상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나의 장모 Connie는 가톨릭 미사에 매일 참석하는 은퇴한 신실한 기독교인인데, 오늘의 본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 말씀이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모아놓은 것일 뿐이라고 설명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는 믿음의 삶에는 갈등과 심지어 반대가 포함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결국 그녀는 충실한 가톨릭 평신도이다. 믿음의 길을 따르면 어떤 제자들은 예수가 고통을 겪은 것처럼 고통을 겪을 것이며, 신실한 사람들의 공동체는 공포의 순간에도 인내하려고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예수는 너무 멀리 간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녀가 아는 예수는 칼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 오는 분이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 만큼 교회 주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의 예수는 가족 가운데 그런 분열을 결코 장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37) 나의 장모는 머리를 흔들면서 읽는다. “어떻게 이것이 성경에 들어갔을까?

우리는 비평적인 해석이라는 상상의 옷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우리 주일 아침에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제인 Connie의 관심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뿌리 깊은 요구에 대해 목회적 감수성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며, 복음의 힘에 대해 말할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족의 불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가족의 기능 장애와 불일치에 대한 기묘한 초대로 읽히지 않도록 실제로 주의해야 한다.

이 본문은 성서의 단어가 겉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에 대한 좋은 예다. 열정적인 본문증거자가 이 구절을 가지고 가족을 갈라놓으려는 종교적 제의를 정당화하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말씀은 그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예수는 실제로 복음의 부르심으로 인해 갈등과 낙담, 심지어 육체적 안녕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기독교인으로 살려고 하는 신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다.

제자들은 설교와 치유의 사명을 가지고 파송되면서 반대와 갈등에 직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게 되었다. 복음을 전한 데 대한 응답으로 박해를 받을 때, 예수가 빵을 떼어 주시던 아늑한 시절은 아득히 먼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태는 삶의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견뎌낼 것이라고 선언한다. 두려움의 시기에도 복음은 진리일 것이다. 각각의 제자들은 어떨까? 그 문제에 있어서 개인과 가족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보다 관심을 덜 가져야 한다. 복음의 좋은 소식을 듣고 받아들일 때 개인 생활, 가족 구조 및 사회 전체가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몸을 죽일 자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혼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도, 사람의 죽음이나 참새의 죽음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결국에는 그것이 우리가 찾는 참되고 영원한 삶이 될 것이다.

제자들과 선교사들이 예상할 수 있는 갈등에 직면하고, 개인과 가족이 예상 할 수 있는 혼란에 빠졌을 때, 네 가지를 보게 될 것이라고 Tom Long은 말한다. 첫째, 성령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고통이 헛된 일이 아니라 믿음을 증명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셋째, 고난 속에 있다고 해도, 그 어떤 것도 복음을 근절하거나 신실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주의 깊은 돌보심을 파괴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의 분열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예수는 가족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예수에 대한 신실함이 충성의 위기를 초래하고 결정을 강요하는 때가 올 것이다. 복음은 가치를 높이고 우선순위를 재정리하며 목표를 재조정한다. Long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바치는 것은 생명을 자유롭고 거룩하고 선하게 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1) 이라고 한다.

이 본문을 가족이 불화해야 한다고 읽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이름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라면 나의 장모가 옳다하지만 본문은 그게 아니다예수는 박해 가운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을 인정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그들의 운명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는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면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될 수 있다. 어떤 힘도 그보다 더 크지 않으며, 그보다 더 확실한 보증은 없다. 사랑을 위하여 얼마나 놀라운 평화의 제물인가.

그러한 확신으로 무장한 신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십자가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십자가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불의와 불행에 대한 수동적 수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오히려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며,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힘이다. 신앙의 빛으로 사는 사람들은 모든 상처와 모든 도전에 대해 하나님의 방법이 승리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신자들이 가진 확신으로 이 세상의 악의 세력에게 도전한다.

설교적 관점

 -마태의 첫 번째 독자들과 함께 우리는 열두제자를 보내는 예수의 지침을 들으면서, 말과 행동을 통하여(10:7-8)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파하는 우리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사회질서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행동인) 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설교함에 있어 어려운 점은 그 개념이 복잡한 게 아니고 본문이 보여주는 세상의 두려움과 우리가 살고있는 “안전한” (safe)세상 사이에는 단절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러한 “안전함” (safety)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타협을 해왔는가?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마태의 첫 번째 독자들이 직면했던 상황에 비해서는 보다 복합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이러한 도전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용기있는 응답이 이 본문을 접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설교자의 과제이다, 본문의 요구를 오늘날의 상황과 조율하면서 설교자는 몇 가지 주제들과 씨름하게 될 것이다.

예수처럼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What Does It Mean to Be Like Jesus?)

-본문은 제자들이 스승처럼 되어야한다는 (25)말로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스승은 무엇과 같은가? 이 상황에서 주어진 답은 분명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선한 박애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쉬운 자신의 역할을 반전시키는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칼을 주려고 왔다” (34). 진정한 평화의 왕이 요구하는 것은 우선순위에 있어 덜 중요한 것을 잘라내는 칼이라는 느낌이 들 수있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가 종종 상상하듯 깨어있고 긍정적인 분이라면, 왜 우리를 이런 곤경에 빠뜨려야만 하는가? 왜 몰려든 군중들은 그를 그런 악한 이름으로 (25, 평화의 왕이 아닌 악마들의 왕, 바알제불) 불렀을까? 왜 그를 따르는 일이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것인가 (35-36)? 어떻게 해서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일생을 마쳤는가 (38)?

-그 답은 그의 적대자들이 이상하고 불안정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랬기 때문이다일반적인 견해와 베스트 셀러가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예수의 추종자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나님 나라를 향한 사역은 드러난 것처럼 관습적인 친절함보다 더 논쟁적이고 체제전복적이다만일 그 스승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노를 유발하게 한다면그 제자들은 어떻겠는가 (25)? [체제 전복적이므로 적대자들이 스승에 대해 분노물론 분노유발이 믿음의 분명한 표지는 아니다진정한 제자도는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고 그 나라를 추구하는 것 (6:33)이고 음식 부스러기를 있어야 할 곳에 두는 것이다[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게하며 늘 생명을 살리며 살아가는 교회는 이것이 교회가 주님으로 공경하는 진정한 예수의 길인지를 물을 수도 있다.

 -두려워할 것 혹은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것? (To Be Afraid, or Not to Be Afraid?)

이 주제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두 마음이 있다. 중심적인 주제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26, 28a, 31) ‘두려워하지 않는 것’(fearlessness)이다.  이것은 천진난만하게 자신을 돌보지 않는 상태가 아니고 위험성을 충분히 감지한 상태에서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 지키는 강한 마음을 지닌 용기를 뜻한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17-18) 양성하는데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본문은 두려움이 그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양성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이 본문은 강한 종말론을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은 벗어날 가능성 (26-27)과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 (28) 모두 포함하고 있다. 마태는 우리들에게 신학적 긴장상태에서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참새의 운명에도 관여하고 우리 머리카락 숫자도 세는 하나님(29-31)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친근한 관심은 우리에게 있어 편안함이자(a comfort) 동시에 요청으로(a claim) 다가온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요청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편안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있어 직면하게 되는 진정한 위험요소는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궁극적 관심으로 인하여 흐려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 편에 서야하는 상황에서(28)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와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서는 것을 망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33) 박탈당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이런 두려움은 세상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음‘같은 인간의  일로 항상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가족에 대해 가진 입장은?(What Does Jesus Have Against Families?)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해 (35-37)언급한 예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약간 공정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이 본문의 첫 번째 독자들 역시 우리들도 상상하기 어려운 예수와 그의 주장에 대해 거부해야 한다는 가족내부의 압력을 직면했다. 마태복음 35절의 이 내용은 미가서 7:6에 나오는 것인데 그 구절은 가족관계가 이미 불타버리고 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예수는 가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분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예수가 그 자신의 가족과 갈등관계에 있음을 또 그를 가족갈등의 사례로 묘사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가장 우위에 두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 우선순위의 이러한 전환은 하나님의 나라 성취 과정에서 제외된 많은 그룹[가족같은]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본문은 제자도의 삶에 있어 철저한 선택에 관해 말하고 있다우선순위에 있어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일은 새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의 상실이 될 수 있다이 선택게임에 가장 알맞은 형태는 십자가와 그것이 약속하는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이다 (38-39).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