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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4장 12 - 23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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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주현절 후 3째 주일은 평주일(Ordinary Time) 3째 주일이기도 하다. 평주일이란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이 특별한 절기와 직접 연관되지 않은 교회력 기간을 말한다. 개신교는 주현절 이후의 평주일을 주현절의 절기로 지키는 전통을 갖는다. 카톨릭 교회는 이 기간을 평주일의 시작으로만 취급하려는 경향을 유지한다. 다양한 교단의 관점을 포함해야 하는 공동성서정과에 특징에 따라서 우리는 이 기간이 갖고 있는 의미를 주현절과 평주일 두 주제와 연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평주일(Ordinary Time)” (Ordinary)”이라는 단어는 서수(序數, ordinal, 순서를 나타내는 수)라는 단어와 관련 있고, 숫자를 센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평범한,”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이라는 뜻과 연관하여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평주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일상적인 기간이다. 우선, 평주일은 그것이 주현절, 성탄절, 사순절, 부활절과 같은 특별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이다. 이 기간은 교회가 직접적으로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을 기념하거나 이를 준비하는 기간은 아니다. , 평주일은 교회력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일상적이다. 매해 33주나 34주가 평주일에 속한다. 이 기간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기간이다. 신비스런 별의 출현이나,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왕의 탄생을 경배할 기대 등에 의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나를 따라오너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기간이다.

성탄절 및 주현절과 사순절 및 부활절 사이의 기간 중, 이번 주일에 예수가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명령하고 앞으로 6주에 걸쳐 예수의 산상수훈을 접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배열에는 성탄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지나가면서 이런 특별한 절기를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매일 매일 예수를 따르는 어려운 삶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예수를 따르게 하는가? 교회력을 잠깐 살펴봄으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교회력을 원형의 파이로 생각하고, 파이 조각의 크기와 색깔을 각 절기에 맞춰 그려본다고 상상해보자. 맨 위에, 시계로 치면 12시부터 시계 오른쪽 방향으로 대림절이 4주에 걸쳐 보라색으로 표시된다. 그 뒤에 흰색의 성탄절기가 작은 조각으로 표시된다. 그 후 주현절이 녹색으로 좀 큰 크기로 표시되고, 그 후 사순절이 보라색의 큰 조각으로 표시되며, 그 뒤에는 부활절이 더 큰 크기의 흰색 조각으로 표시된다. 그 다음에 오는 아주 작은 붉은 조각은 성령강림절이다. 6시를 조금 지나서 12시까지를 포함하는 큰 조각은 녹색으로 표시되는 평주일이다.

이 그림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한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주현절 기간의 녹색 조각은 보라색과 흰색 조각에 의해 다른 평주일 녹색 조각과 분리되어 있다. 혹은 대림절에서 사순절로 연결되는 보라색을 주현절의 녹색 조각이 분리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대림절·성탄절과 사순절·부활절 사이의 단절의 느낌을 최소화 하려고 이 주현절 후 기간을 주현절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삼는다.

평주일의 첫 부분이 되기도 하며 주현절 이후 주일로 지키는 이 기간은 신학적으로 볼 때 대림절을 통해 기대하고 성탄절을 통해 축하했던 성육신의 의미를 더 깊게 성찰하는 기회가 된다. 아기 예수 탄생의 측면에 너무 집중할 때 성탄은 성육신의 진정한 경이를 모호하게 할 위험이 있다. 성육신의 경이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 현재(顯在,manifest)하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가 핵심이다.

동방교회 주현절의 원래 전통에서는 예수의 탄생, 세례, 기적 등의 주제를 주현절 한 날에 모두 포함함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였고, 그렇게 함으로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신학적 준비를 하였다. 개신교에서 주현절 기간을 특별한 절기로 취급하는 것은 동방교회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신학적 통찰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주현절을 기념함으로 예수가 성육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제, 이 기간이 평주일의 첫 부분이라는 사실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봐야 할 순서이다. 도미니칸 신학자 Herbert McCabe는 이 주제에 대해 도움이 되는 설명을 했다. 성육신의 의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기 위해 역사적인 탐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듣고, 그분은 우리와 소통하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그분과의 교감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특별한 실존적 차원을 바라보게 된다... 바로 예수라는 인격과의 접촉을 통해서, 예수라는 인격과 우리의 인격 사이의 인격적인 소통을 통해서 그의 인성 안에서 그의 신성이 계시된다.

 

평주일이기도 하고 주현절 기간이기도 한 이 녹색 기간 동안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예수를 따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회개하라는 명령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를 듣는다. 신비한 별이 보이지 않고, 지진과 같은 것도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음성이 우리의 귓전을 울릴 뿐이다.

     

주석적 관점

 

-지난 두 주간의 본문에서의 초점은 세례요한과 예수사이의 상호작용에 있었다. 두 주전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지난주 요한복음 본문에서는 세례와 제자들의 부르심에 관한 세례요한의 증언이 있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부분에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의 세례(3:1-17)와 시험(4:1-11) 이후에 마태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작들을 둘러싼 배경들의 핵심적인 요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중 어느 부분은 이 복음서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처음에서 우리는 예수의 선포의 시작이 요한의 공적 활동이 끝나는 바로 그 시점에 시작됨을 알 수 있다. 12절에서 마태는 세례요한이 체포되었다고 말한다. 왜 체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그것이 그의 선포와 세례활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NRSV에서 체포라고 번역한 헬라어 paradiadomi는 일반적으로 다른 데에서는 넘겨주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실제로 마태는 끊임없이 예수의 고난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단지 단순한 체포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향한 의도적 행진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17:22;20:18;26:2). 마태는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는 장면을 분사형으로 묘사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26:25,46,48;27:3). 결론적으로 마태는 예수의 사역이 요한의 사역과는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의 세례와 요한의 체포 이후로 둘이 접촉한 기사는 없고, 그 시점 이후로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 요한의 체포(넘겨줌)는 예수의 초기 사역이 무슨 목적으로 진행되는 가를 조용히 예고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뜻대로 하나님의 나라 메시지와 사역을 이제 시작하는 것이다

 

-요한의 체포 이후에 마태는 독특하게 예수가 나사렛에서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계속해서 이것은 예언의 성취로(9:1-2을 마4:15-16에서 인용) 기록하며 그가 쓴 복음서의 앞의 장들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16)는 앗시리아에 유배당한 자를 말한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었다. 예수의 움직임과 함께 이제는 가버나움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받게 되었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전 세계가 예수 안에서 빛을 받게 되었다.

 

-마태는 예수에 의한(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하나님나라 메시지-요한의 선언과 비슷하고 그것을 확장한-를 선언함으로써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의 시작을 시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안내하는 것이 예수가 온 목적이다. 예수가 이 땅에 죽으러 왔다고 말하는 것은 틀렸고, 보다 더 정확하게는 먼저 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죄인들을 그곳으로 초청하며 선포하고 요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결국에는 죽임을 당했다. 비록 일부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에서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으로 직접 넘어가지만, 그가 산 이유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예수의 죽음은 그가 살았고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해서만 중요성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 대한 마태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제자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18-22). 제자들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묘사된다. 비록 설명이 모순되지는 않지만 어떻게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어느 제자들이, 어떤 순서로 부름 받았는지 그리고 그 때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조금씩 다르다. 요한은 전체적으로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1:35-51), 어떤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서 예수의 제자로 옮겨 갔는지를 기록하고 부름 받은 제자들을 안드레와 무명의 제자, 시몬, 빌립 그리고 나다나엘의 순서로 기록했다. 누가는 제자들의 부르심의 이야기의 일부로 기적적인 고기잡이(5:1-11)를 기록하고 있고, 시몬 야고보 요한을 동시에 부른 것으로 기록한다. 마가는 짧게 설명하면서 단순히 예수가 갈릴리 호수를 지나가면서 시몬 야고보 요한을 부른 것으로 기록한다(1:16-20). 

 

-마태의 설명은 마가와 같이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시기 전에 한 예비적 일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 설명이 없는 것이 그 사실자체가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주석가 더글라스 헤어(Douglas Hare)가 지적했듯이 여기에서 부르심의 이야기는 최소한의 요소들만으로 축약되어 있다. 예수가 거부할 수 없는 권위로 부르시고, 제자들은 이에 대해 철저한(radical) 복종으로 응답한 것이다.” 마태가 장래 제자들의 복종에 대한 묘사가 급진적이라는 것은 세 가지 이유이다. 첫째로, 그들은 즉시”(20,22) 따랐는데 자격을 따지지도 어떤 질문도 없었다. 둘째로, 그들은 수익이 좋은 어부의 직업을 예수를 따르기 위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그리고 더 좋은 자리로 올라갈지에 대한 약속도 없다. 마지막으로, 명백하게 서술되진 않았지만, 그들의 가족을 떠났다는 것이 또한 급진적인 반응이라는 이유이다. 이 부름은 마태가 표현했듯 예수가 요구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이 한 것이다.

 

-급진적 복종으로의 예수의 부름은 오늘 이 시대에도 바뀌지 않았다. 요구가 축소되지도 않았다. 예수는 많은 유대젊은이들이 랍비공부를 할 때처럼 그의 밑에서 배우려는 희망을 갖고 지원하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랍비 예수는 그러한 관계의 자격을 가진 것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흔쾌히 따르는 제자, 배우는 자, 도제를 찾았던 것이다. 대단한 부름이다. 대단한 사명이다. 대단한 구세주이다.

  

목회적 관점

 

내가 자랄 때, 우리 집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한 가지 규칙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TV를 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매주 일요일 저녁에 깨졌다. 왜냐하면 아빠가 동물의 왕국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에게는 각 에피소드가 자연 세계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상상력의 경이로움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신학적 여행이었다. 케냐의 사바나에서부터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 산호초, 보르네오의 정글까지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진행자가 새로운 생물들과 그가 열어주는 새로운 세상에 빠졌다.

내가 기억하는 한 편의 에피소드는 아르헨티나의 코끼리 물범이었다. 방송은 어머니와 갓 태어난 물범 새끼에 초점을 맞춘다. 아기를 출산 한 직후, 굶주린 어미는 바닷가에 새끼를 내버려둔 채 바닷가를 떠나 깊은 물로 가서 먹이를 먹었다. 먹이를 먹은 후, 어미는 해변의 다른 곳으로 돌아와 아기를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다른 어미들도 똑같은 일을 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모두 돌아왔다. 나는 그들이 결코 서로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카메라는 어미를 따라가며 새끼를 부르는 것과 응답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로의 소리와 냄새를 따라 어미와 새끼는 곧 다시 만났다. 진행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새끼의 소리와 냄새는 어미의 기억에 각인되고 어미의 소리와 냄새는 새끼의 기억에 각인된다고 설명했다. 아빠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방법이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억에 각인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단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발견 할 것이다.”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의 공공 사역의 시작을 설명한다. 마태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걸으면서 맨 처음 네 제자를 부르셨다고 설명한다. 예수가 따라오라고 부른 사람들은 모두 어부였다. 마태는 그들이 즉시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갔다고 말한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그들이 하던 일을 버려두고 즉시 따랐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마치 예수를 따르고 복종하라고 강요받은 것처럼, 마치 그들이 그 음성을 듣고 그 부르심을 받을 것을 평생 기다려 온 것처럼, 예수가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을 즉시 내려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의 첫 번째 책을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 마음은 쉴 수가 없다는 기도와 선언으로 연다. 실제로, 이미 가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이들 네 명도 불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모든 것을 버려두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태어날 때 이미 영혼에 각인되어있는 것, 즉 하나님의 음성에 관한 지식에 단순히 반응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뿐이었을 것이다.

나도 분별하는 일이 그렇게 쉬웠으면 좋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이건 너무 복잡하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들이 너무 많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 가운데 마지막 절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오늘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본문은 네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제자가 될 때, 예수께서 하기 시작한 것을 상기시킨다. 예수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23) 우리가 듣고 있는 음성이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기 위해, 우리는 목소리 뒤에 있는 사람을 반드시 살펴보아서, 그 사람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작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청소년 회의에 연사로 참여했을 때, 심하게 혼란에 빠진 한 젊은이를 만났다. 나는 그날 밤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해 설교했다. 이 청년이 속한 그룹의 성인 지도자 중 한 명이 그를 데리고 와서 그와 이야기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나는 성인 지도자에게 우리와 함께 있기를 요청했고 그 청년에게도 허락을 요청했다.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청년은 종종 삶을 끝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고 했다. 그가 죽으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붙잡고 함께 기도했다. 몇 분 후, 나는 그에게 목숨을 끊으라고 말하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청년은 내가 확신하는지 물었다. 나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리자 그는 내가 어떻게 확신하는지를 나에게 물었고 나는 시편 139편에 그가 두렵고 놀랍게 만들어졌다고 설명되어 있고, 예수님 자신이 요한복음 10:10에서 그가 온 것은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해주었다.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당신을 놀랍고 멋지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 나는 청년이 음성을 들었다고 믿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음성이가 아니라고 다시 말했다.

하나님의 인격을 잘 알아서 우리를 부르는 많은 목소리 가운데서 어떤 음성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외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계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지탱하시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설교적 관점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시작하는 일들은 편안함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그 일들이 규칙적이고 또 거기에서 익숙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전례라는 익숙한 방식 밖에서의 시작은 희망과 도전이라는 두 가지가 다 오게 된다. 이번 주 복음서는 예수의 초기사역에 나타난 사건으로부터 새로운 상황 - 곧 우리 교인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예수의 부름과 그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의 전환에 대해 설교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요한의 체포 후에 예수는 하늘나라 (the kingdom of heaven)가 가까이 오고있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많은 크리스찬들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늘나라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있고, 이들의 그릇된 이해는 이번 주 성서정과에 나타난 부름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서 또 마태복음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예수의 언급은 성공회 감독이자 성서학자인 톰 라이트 (N.T. Wright)가 지적하듯이 어떻게 하늘나라에 가느냐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께서 언급한 것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탈출이 아니고 이 땅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관한 것이다. 우리 교인들은 이번 주 성서정과에서 예수의 부름은 미래의 구원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오늘의 행동을 말하는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주현절 후 셋째주일은 그래서 전도 (evangelism) 에 관한 설교를 할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 주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와 보라” (come and see)는 말씀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이번 주에 그는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follow me)라고 용기를 주면서 직접 제자들을 부른다. 교인들은 사람을 낚는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전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오늘날의 이야기 혹은 보다 생동감있게 비교할 그 무엇이 있을까? 여러분 교인들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일상적 삶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봉사로 나아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 나라에서[미국] 시민권운동 (civil rights) 시기의 몇몇 사례들이 적합할 수도 있다. 당시의 사회사를 다룬 Taylor Branch의 기념비적인 3권으로 된 작품들 (Parting the Waters, Pillar of Fire, At Canaan’s Edge)은 교인들에게 부름과 응답이라는 주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 흑인 소작인들, 대학생들, 북부 사제와 목사들은 모두 자신들이 누리던 자리에서 떠나서 시민권운동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꼈다. 지역 공동체가 참여한 이야기들 또한 여러분의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더 큰 무언가에 참여하는 이 제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보다 도움을 줄 것이다

 

- Joseph Campbell은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일을 모험에로의 부름이라고(Call to Adventure) 말했다.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던 때 그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볼 수 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17). Campbell은 그 순간이 운명이 그 영웅을[예수] 불렀고 그의 영적 중력의 중심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겼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공동체에서는 무슨 일이 꿈틀거리고 있는가? 여러분의 공동체는 중요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는 중인가? 공동체 안에 씨앗을 뿌려놓고 이제 그 싹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개인혹은 더 큰 공동체가 들어야 할 특별한 요청이 있는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교인들에게 빛처럼 다가오는 새로운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 구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라: 모험으로의 부름에 대해 그들이 신앙적으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많은 이야기들은 모험으로의 부름에서(a Call to Adventure) 시작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영화 매트릭스(Matrix)에서 Neo (Keanu Reeves ) Morpheus (Laurence Fishburne)가 찾는 사람인데 그는 Neo에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또 소설이자 영화인 반지의 제왕(The Fellowship of the Ring)[The Lord of the Ring: The Fellowship of the Ring이 원제]에서 Frodo Baggins에게 마법사 Gandalf가 안락한 현실을 뒤로하고 찾기 위해서 떠나라고 요청한다. 둘 다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바꿀 한 부름에 직면해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어떻게 부름에 응답할 것인가 또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후에 야고보와 요한은 이 부름에 곧바로 응답했다고 알려져있다. 헬라어eutheos 는 직접적인 응답을 뜻한다. 이 어부들은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가족들과도 의논하지 않았고 은행잔고도 고려하지 않았다. 예수는 불렀고 그들은 응답했다

 

-무엇을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가? 어떤 크리스찬들은 우리가 믿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교인이 되기위해 그렇다고 하고 또 봉사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Dietrich Bonhoeffer 나를 따라오너라는 부름은 절대적인 제자됨”(absolute discipleship)으로의 부름이며, 오직 우리자신을 예수의 명령에 따라 포기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커다란 기쁨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의 철저한 부름과(radical call) 첫 제자들의 철저한 응답을 적용하여 여러분 교인들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그 무언가를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부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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