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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3장 13 ~ 17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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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주님의 수세일에는 예수의 세례는 물론 우리 자신의 세례의 의미도 살피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다. 이 두 신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육신의 뜻에 관한 성찰에서 시작해야 한다. 1세기나 오늘의 기독교인 모두에게 예수와 우리의 세례의 의미는 성육신의 빛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세례의 물을 통해 새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그 물을 창조하시고, 그 속에 들어가시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해된다. 예수의 세례에 대한 고찰은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인간이 되어야 했는지에 관한 고찰과 연결된다. 간단히 말해서, 세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체적·물리적으로 인간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는 성경에 근거하여 인간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 특성을 갖고, 구체적이고, 감각할 수 있고, 감각되는 것을 말한다고 명확히 표현한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과는 다른 육체에 잠시 갇혀 있는 영적 존재가 아니다. 그런 주장은 영지주의적이다. 위의 신조를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육체는 인간됨의 필수적인 조건임을 믿는다. 우리는 육체의 가능성과 제한성의 범위 안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 육체가 부활하고 새롭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하나님이 창조한 우리의 모습)보다 무엇이 결여된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창조의 새롭게 됨을 기대한다. 우리의 희망은 완전하고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비물질적이고 물질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신적이며 동시에 물질적인 요소를 통해 이루어진다. 세례의 경우, 물질적 요소는 물이다. 마태는 예수의 세례를 묘사하면서 창세기의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창세기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고, 그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였다. 그 말씀이 창조한 것은 좋았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혼돈을 질서로 바꾸셨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죄로 인한 혼란을 잠잠하게 하심이 묘사된다. 창세기는 말씀에 창조적 가능성이 가득함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은 피조물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 속으로 들어감으로 인해 그런 가능성이 새롭게 되었음을 그린다. 창세기와 마태의 유사점을 통해 세례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창조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물은 창조에서 필수적 요소이다. 물이 생명의 창조자는 아니지만, 물은 생명의 한 부분이고 필수적이다. 물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생명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부분이다. 물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말씀에 의해 거룩하게 됨으로 물은 우리가 매장되고, (적어도 대리적으로는) 죽는 경험을 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물은 어둠과 죽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죄를 깨끗하게 씻은 수단이 된다. 물은 우리를 씻고, 거듭나게 한다. 세례의 물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미리 맛본 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물론 물이 그 자체로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그의 소요리문답에서 세례의 효과를 물 속에, 물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in and with the water)”으로 표현했다. 루터는 우리의 세례의 효과가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서 이 글을 썼지만, 예수의 세례의 의미도 설명했다. 물 자체로가 아니고, 물 속에 물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마태가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나사렛 예수가 요단강의 물 속에, 물과 함께 있는 것> 외에 무엇인가? 예수가 이 물 속에 들어감으로 예수는 자신의 회개를 이루지 않으셨다. 그는 회개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요한의 부름에 대한 답으로 그 자신을 바쳤다.

따라서 예수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하여 육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예수는 영원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셨다. 그의 세례를 통해 예수는 물의 원래의 역할을 회복시켰고, 생명에 물이 꼭 필요한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세례의 물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수적이다.

루터가 이런 관점을 제시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니다. Gregory of Nyssa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 가는 여정에 다양한 피조물의 요소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성찰했다. 그는 예수의 세례가 인간과 신의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Augustine에서 Bede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의 세례를 그의 십자가 처형의 전조로 보아 왔다. 십자가형은 궁극적인 세례라는 것이다. Cyril of Alexandria는 예수가 새로운 아담이라는 바울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예수가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완전하게 경험해야 했었다고 주장했다.

초대교회부터 있어온 이런 다양한 견해들은 현대 성육 신학 (contemporary incarnational theology: 선교신학에 반대하여 성육신-특히 토착 문화의 관점에서 본-을 신학의 핵심 주제로 여기는 신학적 운동을 말하는 것 같음. 아프리카 신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볼 수 있음. 역자주)과 잘 연결된다. 예수를 우리 모두를 위한 모델이나 보편적 대표자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동시에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살았던 한 인간 개인이었다. 구체적인 인간이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어떻게 인간이 되는지 뿐 아니라, 어떻게 구체적인 한 남자, 한 여자가 되는지를 보여주셨다. 타락 이전의 인간의 모습을 삶으로 보여줌으로,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창조하셨는지 깨닫게 한다. 죄로 타락한 세상으로 태어나셔서 예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시고 그들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지셨다. 성육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 보게 되며, 세례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에 부여된 가능성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주석적 관점

 

-오늘 요한복음서 서문은 심오하리만큼 어렵다. 익숙하긴 해도 해석하기도 어렵도 설교는 말할 것도 없다. 요한 만이 복음서를 찬송의 선언으로 시작하고 예수를 선재한 로고스의 성육신으로 해석했다. 그런 맥락에서 서문은 예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복음서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첫 설명이다. 독자로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만, 예수에 관해 보면 볼수록 그가 누구인지 이해하기를 쉽지 않다.

-이 서언은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말씀과 하나님(1-2), 말씀과 창조(3-5), 말씀과 요한(6-8), 말씀과 세계(9-13), 그리고 말씀과 공동체(14-18)이다. 만약 이 선언이 적어도 요한에 관한(6-8, 15)고대 찬송에 기초한다면, 12b, 13, 17절은 나중에 첨가된 것일 것이다. 서언은 또한 교차구조로 볼 수 있는데 12c에서 전환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로고스는 신의 지혜와 같이(8:22-36), 창조의 도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중에 시내산에서 계시되지만, 어떤 사람은 율법이 하나님과 선재했다고 생각했다. 지혜서의 다른 구절들 특히 시락24장과 솔로몬의 지혜10장을 보라. 로고스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를 하고 있는 한 분이다. 그러기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물위를 걸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죽은 자를 살렸던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했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1:1),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이다(10:30,14:28). 그러기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으로라고 기도했다.

-로고스는 그 안에 생명이 있는 분이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부활의 약속과 구분되어,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현재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11:25-57;14:23). 영생은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결론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5:24).

-세례요한은 예수의 증언자이다. 다른 복음서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에선 세례요한의 회개에 대한 설교가 없다. 요한은 예수를 빛으로 선포하고(1:6-8),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선포한다(1:15). 요한은 또한 예수에게 성령이 머무는 것을 선포하고(1:32), 또한 예수를 신랑으로 하지만 자신은 그의 친구일 뿐이라고 선포한다(3:27-30).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예수를 두고 한 말은 모두 참되다(10:40-41).

-요한복음은 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고(1:9) 아무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14:6)라고 확인한다. 복음서의 근본적은 역설은 로고스가 그의 백성에게 왔지만 정작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언의 전체 구조는 12절에서 전환된다. 예수는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위를 준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권위를 준다.”(필자사역) 니고데모와 같이 그들은 육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위의 것으로 태어난다(3:3,5).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생수를 마시고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통해 예수는 흩어졌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신다(11:52). 그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생명을 가진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그들의 사명은 고기잡는 것(21:1-14), 양을 먹이는 것(21:15-19), 그리고 참된 증언을 하는 것이다(21:20-25).

-복음의 신비는 로고스가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이다(1:14).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는 예수의 말을 처음으로 따르는데 참여한다. 영광은 예수의 참된 정체성의 표시이지만 처음 제자들에게 금방 분명하지는 않았다(2:22;12:16). 서언은 처음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중에 이해한 것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표적은 믿는 사람들에게 그의 참된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대신에 어둠을 사랑했다(3:19-21). 예수의 영광은 아버지의 아들에게 특이한 것이다. 아들로서, 예수는 아버지와 같고 성령이 거하는 사람들을 특징짓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는 우리에게 율법을 준 모세의 사역을 완성했는데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생겨났기 때문이다(1:17).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예수의 사역은 그의 사역과 말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아버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서언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오로지 예수의 정체성 즉 로고스의 성육신, 아버지를 계시하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사명만을 보여준다. 우리가 찬송이나 복음성가를 통해 우리의 신학을 노래하듯이, 요한은 그의 믿음의 핵심요소들을 이 찬송의 서언에 모아놓았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계시하는 것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것은 창조 즉 빛과 생명을 가져 온다. 또한 예수가 인간의 얼굴에 준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 준다. 예수의 참된 정체성을 본 사람들에게는 다른 증언을 가져 온다. 그것은 또한 예수가 우리 안에 사는 함께하는 삶과, 예수의 참된 정체성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반응을 가져 온다. 그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기억하며 성령에 이끌리는 예배공동체를 가져 온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를 준다. 그것은 새로운 지위 즉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새로운 관계성을 가져 온다.

    

목회적 관점

 

카일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나는 그를 보려고 했다. 오순절에 그가 세례 받은 후 몇 주간 동안 그는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세례 교육을 함께 받은 다른 학생들도 그에 대하여 물었고, 그의 멘토 역시 그랬다. 카일과 그의 가족들은 카일이 5학년 때 교회에 왔다. 그들은 드문드문 출석했고,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세례 교육을 받도록 권했을 때 그러겠다고 해서 좀 놀랐다. 카일과 그의 부모는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해서, 두 번의 수련회, 선교 활동, 멘토와의 협력, 주중에 학습과 탐구를 위한 수업에 참석하겠다는 계약에 동의했다. 카일은 진지하게 참석했고, 수업이나 행사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금방 그룹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전에 거의 알지 못했던 동급생들과 좋은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카일은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세례 받은 사람과 그 가족들과 그들의 멘토들에게 대단한 잔치였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카일과 그의 가족들에게 전화하자,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전화해서 그들을 살피는 것에 대해 놀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한 말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나는 카일이 다 끝낸 줄 알았는데요?” 그게 문제였다. 우리의 최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가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했던 모든 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유아세례나 청년 혹은 성인 세례가 신앙의 정점에 달한 행동이고, 그래서 세례를 받고 나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마태가 예수의 세례를 기술하는 것은 그와 반대이다.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예수의 세례는 그의 사역의 끝이 아니다.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예수의 세례는 그의 사역의 시작이다. 그것은 그의 출발이다. 이것은 그가 창조되고 부름받은 목적인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위임이다. 확실히 예수의 세례는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정체성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정체성이 성장하고 깊어지듯이, 예수의 정체성 역시 그의 공적 사역을 통해 그렇게 되었다. 그의 정체성은 인격에 관한 것만큼이나 목적에 관한 것이다.

과거에 몇몇 기독교 전통에서는 어린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성찬 준비반을 만들고 이 수업을 마치기 전까지는 성찬을 주지 않았다. 차츰 여러 전통들에서 이에 따른 문제들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많은 우리 아이들이 이미 세례를 받았고,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찬준비반이라는 이름이 바뀌었다.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확인 confirmation”이라고 부른다. 어린이들을 대신하여 부모와 회중이 유아세례에서 서약한 내용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 용어 역시 문제가 있다. 카일과 그의 부모 같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예수에게처럼 여행의 시작이 아니라 여행의 끝이라고 잘못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점점 더 많은 교회들이 확인과 위임이라는 제목을 채택하고 있다. 이 이름은 이것이 단순히 여행의 끝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형태의 사역과 신실한 존재가 되는 새로운 길로 우리를 보내는 중요한 표지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한 마디이지만 세례 받을 때 규정된 정체성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중요한 생각을 전달한다.

예수는 확실히 세례 받을 때 확인되었다. 그는 그의 사촌 요한에 의해 와야 할 분으로 지목되었다.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가 그에게로 내려오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기쁨을 간직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지명하면서 예수의 정체성은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 확인은 그의 사역의 절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를 십자가와 그 이후로 인도하는 주목할 만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세례를 넘어서고 확인을 넘어서는 것은 필수적이다; 슬프게도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는다.이것이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확인을 마지막 행동으로 경험하고, 우리는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확인한 후에 교회를 떠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이유이다. 확인은 반드시 위임과 짝을 이루어야 바르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부름받은 사역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카일과 그의 부모님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것을 설명하고 왜 내가 전화를 했는지, 그리고 카일뿐 아니라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가족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모두 깊이 이해하고 사과했다. "아무튼 우리가 이것을 빠뜨린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당신과 카일에게 이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또한 카일과 그의 세례교육 교사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스승은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그와 계속 연락을 하기를 희망한다고 설명했다. 카일의 부모는 모두 이것에 감명을 받았고 감사를 표했다. "카일의 세례는 단순히 신앙 고백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좀 더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라는 이해가자라는 데 대한 것이다.“

다음 일요일, 카일과 그의 가족은 교회에 와서 따뜻하게 환영 받았다. 그들은 여행이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은 안심하는 것 같았다.

  

설교적 관점

 

-여러 전통의 예전에서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은 세례를 위해 따로 준비하는 주일 중 하나이다. 만일 세례가 당신이 설교하는 예배 중에 시행된다면 그 세례는 설교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설교자는 이 세례예식이 있는 주일에 설교할 때 주된 관심이 세례예식에 있는 회중들에게 설교할 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세례식의 증인으로 참석한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도 있다[세례가 중요한 예전이므로 타교회 교인들도 축하하기 위해 참석]. 이 새로운 청중들에게 신앙에 관한 핵심진리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또 오랫동안 교회에 나온 교인들과도 마찬가지로)으로 인해 이 주일 설교가 풍성한 약속과 도전이 될 수가 있다.

-신약학자 Raymond Brown은 마태복음이 교회의 근본적인 문서로서의 역할을 해왔다라고 하면서 마태복음의 이 세례 이야기를 기독교 세례이해에 있어 규범이 되는 본문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본문은 설교자의 회중이 지닌 관심과 필요에 따라 여러 면으로 열려있다고 덧붙인다. 이 관점은 이번 주일 교회 회중들이 보게 될 세례에 대한 여러 신학적 입장들을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크리소스톰 (Chrysostom)은 비록 요한의 세례가 회개” (repentance)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는 자신의 죄를 회개할 필요가 분명히 없었다고 썼다. 요한의 세례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기위해 11절에 쓰여진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단순한 죄에 대한 회개를 뜻하기보다는 변화(transformation)나 방향전환 (turni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종 번역되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을 때 나오는 세례는 어떤 종류의 변화- 아마도 예수의 통과의식에서 조차도-를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의 여러 성례전 전통에서, 교회의 거룩한 성례전들은 (sacraments) 여기에 참예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변화나 통과의식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러분이 속한 전통은 세례 성례전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방향전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 움직임은[변화]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 향하는가?

 

-세례는 종종 태어남과 새롭게 태어남’(birth and rebirth)과 관련한 원형적인 의식이고 물은 그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적 시각으로 보는 이야기나 문화적 사례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성서의 이야기는 물을 통과한 후 새롭게 태어난다는 몇 가지 알려진 이야기들을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이집트에서 빠져나올 때 모세를 위해 물이 갈라진 사건 그리고 병행구절로 이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여호수아를 위해 물이 갈라진 사건등이 그러하다. 각각의 경우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물이 거듭남(rebirth)의 상징으로 사용될 때 사람들은 그 물을 지나고 (노예나 방랑자들로서) 전적으로 다른 그 무엇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태복음 기자는 다른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이야기 형식을 사용한다: 그는 예수의 세례를 그의 사역 맨 처음에 배치한다. 이것은 후에 따라오게 될 것들에 대한 준비이다. [세례가 이후 있게 될 그 무엇을 위한 준비라면]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을 위한 준비인 세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세례받은 우리들 각자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예비하고 계시는가? 공동체를 위한 이 예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Stanley Hauerwas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기에 충분한 덕목들을(virtues) 지닌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어떻게 여러분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할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 여러분이 속한 전통에서 이 덕목들은(virtues) 무엇이 될것인가? 여러분의 교인들이 참여하는 세례예식과 세례식의 맹서에서 이 덕목들은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이러한 세례예식의 근간이 된 마태복음의 이어지는 장면에서 이 덕목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는 다음 두가지 방식 중 하나로 사람들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지닌 공동체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관용, 사랑, 용기를 지닌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 편견, 욕심을 지닌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 이 소설에 나오는 화자인 Scout Finch와 그녀의 남동생 Jem은 그들의 아버지 Atticus와 하녀 Calpurnia, 그리고 그들의 이웃 또 훌륭한 덕목들을(virtues) 지닌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기독교인의 덕목들 (Christian virtues)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닌 사람들로 변화되었다.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오늘날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형성하는데 있어 교인들이 할 역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만일 세례가 이번 설교를 할 때에 없다면 이번 성서정과본문은 교인들과 함께 공부할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마가와는 달리 마태의 세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요한과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례에서 삼위일체에 관련한 이 초기 언급은 마태복음 28:19과 병행구절을 이루는데 거기서는 예수의 새로운 추종자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본문을 삼위일체를 연구하는 길잡이로서 보았던 어거스틴을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설교를 할 기회가 별로 없다. 이 본문은 우리교회가 속한 전통이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설교시간에 가르쳐 줄 좋은 기회를 준다.

-마지막으로 이 장면은 하나님의 권세와 아름다움 소위 하나님의 현현 (theophany)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히브리 전통에서 하나님은 종종 중요한 자연환경에서 나타났다: , 샘물, . 성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여주었나?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운행하시는지를 인식함에 있어 종종 어려움을 겪지 않는가? 하나님은 오늘날 당신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나타나시는가-말씀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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