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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5장 1 ~ 12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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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Dale C. Allison The Sermon on the Mount: Inspiring the Moral Imagination(1999)이라는 책에서 산상수훈을 해석하는 두 가지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경향은 수도원적 해석(the monastic interpretation)”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세 이후 천주교에서 발전된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5:48)고 말씀한 것이 해석학적인 열쇠가 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등급의 기독교 신자들, 즉 특별한 종교적 소명을 받은 자들(신부, 수녀, 수도자 등)과 일반적인 신자들이 있다. 완전하라는 명령은 전자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경향은 루터주의와 관련된 개신교적 해석학에 근거한 불가능한 이상론(the theory of the impossible ideal)”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죄 때문에 인간이 산상수훈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상수훈의 목적은 은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경향은 모두 산상수훈의 교훈을 종말론적인 미래에 관한 가르침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보려고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최근의 일반적 방법론 중에는 (1) 사회과학적 방법과 (2) 문학적 방법이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회과학적 접근이 목표로 하는 것은 마태 공동체의 복원(종교·인종적 정체성과 유대교와의 관계)과 사회적 기억(마태 공동체의 정체성의 사회적 역학관계와 공동체 역사의 사회적 분석의 관계)의 복원이다. 우리가 이런 방식을 통해 마태복음을 분석할 때 특정한 본문은 (예를 들어 산상수훈) 사회적 배경,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 다양한 집단 간의 관계 등의 분석의 기초 위에서 이해된다.

문학적 접근은 특정한 본문을 그보다 더 큰 이야기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산상수훈의 예수(5-7)가 어떤 분인지를 1-4장에서 읽은 내용에 근거해서 안다. (족보:11-25; 권력자의 우려:21-25;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행하는 예수의 정체성:31-416;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선포:417-25) 이런 맥락에서 접근할 때 산상수훈은 예수가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제시한 대안적 공동체의 미래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과학적 접근과 문학적 접근을 통해서 우리가 본문의 맥락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한 다음에는 이에 근거하여 산상수훈에 관한 신학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 산상수훈은 누구에게 선포되었는지, 왜 이런 특별한 내용이 담겨있는지, 예수의 제자들이 어떻게 미래에 올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 등에 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의 맨 앞부분으로서 앞서 언급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신학적인 성찰을 하기에 매우 적절한 본문이다. 지복(至福, Beatitude, God’s blessings)라고 알려진 이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과학적이고 문학적인 맥락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제자들과 다른 사람들도 포함)에게 이 말씀을 선포했는데 그들이 처한 사회정치적 배경은 로마 제국이었고, 그들을 지배하던 종교적 맥락은 엘리트 유대교 체제였다. 예수는 지복에서 이 두 체제를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성격은 예수가 어떤 사람들에게 축복을 선언하는가에 의해 명확해진다. 지복은 하나님이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성취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선택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약한 자, 잊힌 자, 경멸당하는 자, 의를 추구하는 자, 평화를 도모하는 자, 자신의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의 편에 서기로 정하셨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는지를 명확히 선언하신 것은 당시의 사회적·종교적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의 정치적 관심은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자가 고귀한 인간으로 회복되는 세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위험도 감수하면서  , 즉 의의 추구(the pursuit of righteousness)라는 목표에 집중되어 있다.” 5:1-12의 본문은 예수가 제자를 부르신 사건(4:18-22)과 예수의 선포와 그를 따르는 병든 무리를 고치시는 사건 (4:23-25)으로 연결되는 큰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오늘의 본문은 예수가 제자들이나 무리 중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지침(산상수훈)을 주기 전에 그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는 지복에서 제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성품)와 함께, 제자가 되면 현재의 사회정치적·종교적 체계 안에서와 미래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의 삶에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복의 신학적 핵심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변치 않는 사랑, 선함, 공의, 자비)의 토대 위에 서서 지복의 덕목을 구현하면서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제자의 길로의 초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은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 즉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

    

주석적 관점

 

-팔복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라 종말론적 축복이다. 비록 산상설교 후반부는 윤리적 명령이많지만, 팔복은 명령형이 아니라 서술형이다. 예수는 군중들에게 심령이 가난해지거나, 슬퍼하거나, 의를 위해 핍박당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박해받는 사람을 위로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4:23) 바로 그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통찰은 산상설교와 팔복을 읽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해 준다. 첫째는, 1절의 산을 시내산의 암시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는 새로운 모세이고 산상설교는 토라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에 올라가는 것도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의 암시가 된다(19:3,12;24:15,18;34:1-2,4). 이러한 읽기는 마태 전반부 장들의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이 출애굽 사건들의 거울이 된다는 평가에 의해 지지된다. 두 이야기 모두 아이들의 학살, 영웅의 귀환, 물로 지나감, 광야에서의 시험, 산위에서의 율법이 주어짐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더구나, 이어진 본문에서 예수 자신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17) 언급한다. 이렇게 읽는 것이 맞다면 우리는 팔복을 윤리적 명령이 아닌 종말론적 축복으로 읽어야만 한다. 산상설교가 새로운 율법이라고 한다면, 팔복의 서두는 십계명의 서문과 비슷하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의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20:2). 모세의 율법이 종살이에서 해방함으로 정당화되듯이, 예수의 계명은 약속의 땅의 윤리학이다.

-이것은 이 본문을 예언자 이사야와 연관시키는 두 번째 관점으로 인도한다. 만약 팔복을 모세와 출애굽을 언급하는 본문들에 끼워넣는다면, 팔복 자체는 이사야61장의 여러 간접적 인용이 되는데, 그 본문들은 제2이사야(40-55)와 희년에 관한 본문(25)들과 연관하여 예민한 눈으로 읽어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의 사역에서 이사야본문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대답하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했고(11:2-6), 나사렛 회당의 설교에서도 언급했다(4:14-22). 팔복 또한 이러한 중요성을 반영한다. 이사야서는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61:1;5:3),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61:2;5:4), 마음이 상한 자에게 치유를(61:1;5:8) 선포한다. 더구나 70인역은 히브리어 anawim(61:1) praeis로 즉 땅을 차지할 온유한 사람’(5:5)로 번역한다. 의로운 사람에 대한 생각(5:6,10)은 이사야61:3,8,11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억압받는 자, 마음이 상한 자, 그들의 도시가 파괴된 것을 슬퍼하는 유배된 사람들에게 약속된 종말론적 사건들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에게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해진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산상설교의 윤리는 일반적 윤리가 아니고, 팔복은 진공상태에서 선포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설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은 특정한 정치적 상황, 즉 유배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제국의 포로가 되어 있고, 군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강도와 범법행위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

-설교 후반부의 윤리적 명령은 예수 당시의 각 종파들 즉 젤롯당,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들 사이에 뜨거웠던 신학적 정치적 논쟁에 예수도 참여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들의 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예수의 대답은 팔복에 표현된 것과 같이 독특한 관점으로 제시되었는데,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고 선포만 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갔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그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팔복의 세 번째 관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팔복을 그리스도적 관점(a christological perspective)으로 읽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다. 첫째로, 이사야61장을 그의 사역을 특징짓는 것으로 본다면, 예수는 이사야 본문에서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의 역할을 자신이 담당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61:1) 마태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증언자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면서(1:18,20 ;3:16,17 ;4:1-11, 17,23-25)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마태는 예수를 종말론적 대리인으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11:29,21:5), 자비한 사람(9:27,15:22,20:3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과 같은 팔복에서 말하고 있는 특징들을 구현하고 있는 사람으로 지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명확하진 않지만, 복음서의 정신에서 본다면 종말론적 미래가 그리스도의 현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온유하고 핍박받는 사람이 땅을 유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데, 왜냐하면 그는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26:64)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산상설교는 하나님의 통치의 종말론적 선언이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약속이 된다.

  

목회적 관점

 

작가인 Madeleine L'Engle 불합리한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사순절에 관한 책을 썼다. 그녀는 어려움에 빠진 교회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맥락을 감안할 때, 그녀는 이런 제목으로 책을 썼을 것이다 : 불합리한 가르침 : 팔복에 대한 고찰. 우리가 팔복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그 시적 아름다움에 놀라고,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비현실적인 인식에 압도당한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감탄하지만 그 말을 실천에 옮기기는 두려워한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 때로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성공한 사람을 축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령이 가난하고, 평화롭고, 자비롭고, 온유하게 되면 경쟁과 두려움에 바탕을 둔 문화 속에서 있을 곳이 없다. 아마도 이것이 팔복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이 예수가 문자 그대로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켰다고 암시하는 이유일 것이다. 누가 팔복의 정신을 따라 살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은 그 실천불가능성이 아니라 실용성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팔복이 평범한 삶에서는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여긴다. 가장 위대한 성자들만이 그 일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틴 루터 킹, 도로시 데이, 데스몬드 투투와 같은 예외적인 인물들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기를 기다린다. 그 동안 세계는 더 나아지지 않으며, 우리는 희미하게 그리스도 제자도를 보여주면서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사실은 팔복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목표가 우리 시대에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매일 팔복의 정신으로 생활하는 것은 그것들을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를 함께 보는 것이다. 각각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은 서로의 위에 세워진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계속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팔복에 접근하면, 그것들이 우리를 세상에서 그것들을 각각 실천하며 살도록 인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팔복의 정신에 따라 생활하는 데는 단순함, 희망 및 연민이라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이 세 가지 원칙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것에 의해 완전히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예수의 가르침에 응답할 때, 단순함은 정교하지 못한 것과는 관련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대로 듣지 않고, 말씀 그대로를 들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편견과 주관에 따라 듣지 말고, 오히려 가르침 그대로 단순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팔복이 실천 불가능하다고 이미 결정하는 것 역시 편견이다.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복음의 의미를 외면하려고 어려운 텍스트를 가져 와서 순화시키지 말라고 한다. 팔복에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은 단어를 명확하게, 편견 없이 듣고, 그 말이 우리에게 직접 말해주는 것을 듣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두려움보다 용기를 얻는다. "겸손을 나타내고, 평화를 가져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주며, 우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 때마다 우리 삶에 복이 있다.“ 단순하게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팔복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이다.

우리 세계에서 희망이 없다는 데는 의견이 거의 다르지 않다. 저명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교회를 위해 울리는 조종(弔鐘)은 전체적인 태도가 분노에서 냉소로 변할 때라고 말했다. 냉소는 분노와 다르다. 냉소주의는 결과에 관계없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만트라의 주문은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바로 사물의 방식이다. 점점 익숙해 질 것이라고 한다. 팔복은 우리를 반대의 관점으로 초대한다. 그것은 희망이다. 우리는 희망 없는 자에게 희망을 주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희망을 두었다. 그래서 외적인 상황이 다른 것을 가리킬 때도 우리는 희망의 정신으로 세계에 접근 할 수 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자비, 겸손, 평화, 사랑이 그것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표현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신하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팔복의 삶의 세 번째 원칙은 연민이다. 연민은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나 동정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더 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을 안됐다고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정이란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통찰력있게 설명한다. 연민은 당신의 이웃이 당신과 당신의 인간성을 공유하는 내적인 인식을 증진시킨다. 이 파트너십은 여러분을 계속 고립시킬 수 있는 모든 벽을 차단한다. 지역과 언어, 부와 빈곤, 지식과 무지의 모든 장벽을 넘어 우리는 같은 먼지로 만들어졌고, 같은 법칙에 복종하며, 같은 종말의 운명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나이다.” 우리는 각각 다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선물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족으로서 서로에게 속한다. 연민은 동반자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그/그녀의 신발을 신고 걸을 것을 요구한다.

교회 생활에 팔복을 적용하고자하는 목사는 연구, 공동기도, 공동 봉사를 통해 회중이 축복받은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할 것이다. 단순함, 희망, 연민에 대한 헌신으로 팔복의 정신에 따라 생활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것이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삶에 대한 유일하게 참된 합리적 접근 방식이다.

    

설교적 관점

 

-내가 지역교회 목사로서 일할 때 심방을 하곤했다. 그 때 종종 교인들 집에 이 팔복을(the Beatitudes) 벽에 걸어놓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어느 집은 번쩍거리는 액자에 또 어떤 집은 글자마다 수를 놓은 것도 있었다. 팔복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주제로 설교하는 일은 좀 부담이 될 수 있다. 이에대해 설교자는 6가지 중요한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설교자는 교인들이 팔복을(the Beatitudes)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 apocalyptic realm of God)라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마태에게 있어 역사는 두 시대로 나뉘어진다: 하나님이 곧 끝낼 현재의 악한 시대(the present evil era) 그리고 모든 것이 사랑과 정의라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진행될 다가오는 나라 (the coming realm). 하나님은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의 전환을 예수의 재림 곧 역사에 개입하는 종말론적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 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복을 언급하는 첫 마디 복이 있다” (Blessed)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복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행복한 것이 아니고 다가오는 나라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 개념은 마태의 회중에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외적, 내적 문제에 직면해있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이들은 전통적인 유대교 지도자들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내적으로는 구성원 서로 간에 갈등을 빚었고 일부는 공동체를 떠나고 있었다. 팔복을 통하여 마태는 공동체를 향하여 삶이 지금은 어려울지 모르나 신앙 안에서 인내하는 사람은 다가오는 그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확신시키고 있다. 설교자는 오늘날의 회중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의 갈등 혹은 공동체 내부의 갈등에 대해 탐구해 볼 수 있다. 팔복에 나타난 약속이 회중들의 신앙을 어떻게 격려할 수 있을까

 

-둘째로 설교자는 교인들이 팔복을 명령형이(imperative) 아닌 서술형(indicative)으로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팔복은 행동을 하고 또 마음이 가난하게 되고 슬퍼하고 온유하게 되라는 직접적인 요청이 아니다. 오히려 팔복은 약속이다. 물론 간접적으로 팔복은 다가오는 그 나라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팔복에 나타나 있는 덕목들과 태도를 보여줄 것임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설교자가 너무 성급하게 사람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또 자비롭고 마음이 순결하도록 등등으로 나아간다면 율법주의나 실천우선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셋째로 설교자는 교인들이 각각의 복이 담고있는 특별한 내용을 1세기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팔복을 21세기 일상적인 상황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옛 의미는 보다 신학적인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단순한 독자는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를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나타나는 슬픔에 연관시켜 이해하려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는 현재의 상황이 하나님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을 인식한 신앙인의 슬픔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들은 우상숭배, 불의, 착취, 그리고 폭력을 보면서 슬퍼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복은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이 그 나라가 오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복을 말할 때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오늘날 슬퍼함이 적절한 응답이 될 악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보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넷째로 설교자는 한 편의 설교에서 이 모든 복에 관하여 설교할건지 혹은 몇 개 그룹으로 대표적인 복을 묶어서 할 건지 아니면 하나의 복을 설교할 것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 설교자는 다가오는 그 나라를 향해 신앙적으로 사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다. 얼마 전 한 평신도가 나에게 말하기를 설교 한 편마다 각 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단편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얻을 수 있었지만 큰 그림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렇게 하나로 하는 설교는 그런 점을 극복할 수 있다.

설교자는 팔복이 그 나라를 향한 삶의 태도와 행동을 모두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한다. 팔복은 그 대표적인 덕목으로 9개의 특별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8개중 4번째가 의에 주린 자, 의에 목마른 자로 2-역자 주]. 설교자는 오늘날의 이슈들과 언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복을 만들어내도 좋을 것이다.

앞에 말한 것처럼 설교자는 복들을 그룹으로 묶거나 하나 하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설교자는 복(복들)이 교인들의 현재 상황에 매우 중요하게 다가갈 수 있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팔복이 설교를 하기에 상세한 형태나 양식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역할이나 분위기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문법적 용어로 팔복은 명령법이(imperatives, commands)아니라 서술적 진술 (indicative statement) 즉 이러저러하다는 서술이다(description). 이런 점에서 팔복은 설교를 위한 모델역할을 한다. 설교자는 사람들을 그 나라의 약속을 향해 (팔복의 방식으로) 촉구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나아가도록 할 수있다[설명함으로]. 사실 설교를 듣는 일 자체가 이 복을 경험하는 일이 될 수있다

  

-여섯째로 설교자는 교인들이 팔복이 특성상 유대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팔복 (그리고 산상수훈)을 유대교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종교사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아이로니하게도 교회는 그 나라를 기다리는 팔복을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대할 때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였다. 사실상 팔복과 산상수훈에 나타난 개념들은 근원에 있어서 유대적이다. 혁신적 요소는 신학적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사역을 그 나라와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한 데 있다. 설교자는 팔복의 핵심가치들이 거리에 있는 회당에서[유대교] 공유되는 것임을 회중들에게 확인하라고 말해주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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