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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4장 1 ~ 11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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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우리가 오직 예수와 그의 사명의 관점에서만 오늘의 본문을 고려한다면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된다. 왜냐하면, 본문은 교회에 대한 중요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매우 신랄한 신학적 비평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시험을 이기셨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사실, 교회는 너무 자주 (거의 본능적으로라고 할 정도로) 악마의 제안에 신속하게 굴복했다. 마치 그 제안이 교회 창시자의 지상명령( 28:19-20)과 완벽하게 일치라도 하는 것처럼.

세 개의 시험이 있었다기보다는, 동일한 기본 주제의 세 가지 변형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악마는 한 가지의 생각만 갖고 있다. 태초 때부터 악마는 권력을 차지하라는 유혹을 해왔다.("하나님처럼 되어서,"  4:5) 분명히 그는 자기모순과 자기 파괴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경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변형: 기적을 시도하라는 유혹. 첫 번째 유혹은 자연과 경험의 법칙을 제쳐놓고, 신적인 전능(혹은 기계에서 튀어나온 신,  Deus ex machina)을 공개적으로 과시함으로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라는 유혹이다. 돌이 근사하게 빵으로 변하는 그런 질서이다. , 히브리적 신앙의 핵심인 창조에 관한 신뢰("보시기에 좋았더라") "십자가 없이 주어지는 왕국의 구속 신학"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적을 행하라는 유혹이다. 그러나, 예수가 가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받는 사람을 해방하기 위해 신적인 연민을 통해 행했던 그런 기적이 아니라,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제시함으로, 믿는 자들이 자신이 속해있는 세상을 포기하거나 멸시와 학대를 하도록 조장하는 그런 기적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그런 시도는 수없이 있었다. 교회가 어리석게 기적을 교회 권위의 근거로 내세우거나, 좀 더 미묘하게 "이미(already)"를 강조하고 "아직(not yet)"을 무시할 때, 성 금요일이 없는 부활절 설교를 할 때마다, 혹은 최후통첩의 메시지를 인생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설교로 변형할 때마다 그런 시도가 있는 셈이다.

 

두 번째 변형: 장관(壯觀, Spectacle)의 유혹. 1 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세계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세계는 근사한 장관과 멋진 영웅을 갈망한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은 눈에 띄지 않고, 수십억 중에 묻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으면서 살고 있지만, 몇몇 영리한 인물들은 이와 같은 고대인의 갈망을 이용하여 성공적인 거대 사업을 일으켰다. 즉 유명인 숭배다. 오늘의 영웅은 높은 탑에서 뛰어내릴 필요도 없다. 그들은 단지 성적인 욕망을 부추기기만 하면 된다. 모든 미디어가 가장 노골적으로 노출적인 행태에 주목하고 있으므로 평범한 침묵의 다수는 어찌할 수 없다.

교회는 이런 종류의 유혹의 가져다주는 효과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깊은 탐구를 성공적으로 해왔다. 성인 숭배를 통해서, 초과학적인 치유나 다른 기적을 통해서, 혹은 대규모의 예술적 프로젝트의 성공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예수를 최고의 유명인으로 묘사함으로-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자신의 종교의 탁월함을 드러내려고 노력해 왔다.

 

세 번째 변형: 정치권력에 대한 유혹. 여기에서 세 가지 유혹 모두의 진정한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앞의 두 유혹에서는 조금 위장된 말로 설득을 하려 했다면, 세 번째 유혹에서는 모든 유혹의 핵심이 되는 제어(control)의 문제를 직접 다룬다.

아무리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유혹을 접하고 나서는 수백 년 동안 지속하였던 기독교왕국(Christendom)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용어 자체가 증명했듯이, 기독교왕국은 기독교 종교의 -"그리스도의"가 아니고- 궁극적 지배 (domination = dom)를 의미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는 그것을 항존하는 유혹으로 인식하였다: 신약성서는 사도들도 그런 유혹에 자주 빠졌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로 채택되면서, 정치적 권력에 가까이 감으로 (혹은 정치적 권력에 압력을 가함으로) 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는 개신교를 포함하여 서구 기독교의 지배적인 형태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 개인이든, 집단이든, 조직이든 - 권력 추구의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안다. 그것 이상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도 이와 같은 유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신실했던 제자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복음> <그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누릴 권력>을 연결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증언을 남겼다. 누구라도 사랑의 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능력의 그리스도를 갈망해 왔다. 그런 분이 와서 우리와 우리의 세계를 변혁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불할 수 없는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 우리의 인간성, 그리고 우리의 영적 존엄성을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더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더 열등한 존재가 될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으로 십자가의 도를 회피하는 방안을 채택하는 사람이나,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십자가를 피하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신비한 지식이 없다.”

이렇게 예수의 생애 초기에 예수를 시험한 자가 예수 최후의 순간에 똑같은 내용으로 유혹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수가 멸시와 버림을 받고 골고다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이 고개를 흔들면서 조롱하며 외쳤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27:40) (본문에서 마태는 속이는 자의 같은 시험을 세 가지 변형된 형태로 제시한 것이다.) 속이는 자는 오늘도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계속해서 유혹하는 제안을 속삭인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제안에 매력을 느낀다.

  

주석적 관점

 

광야에서의 예수의 시험에 대한 마태의 설명은 모든 시대의 여러 강단에서 선포된 기분 좋게 해주는, 번영과 성공의 복음에 저촉되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성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가 나타난 예수의 세례(3:13-17)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성령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여 엄격하게 시험받게 하신다. 분명히 쉽게 사는 것이 아들 됨의 삶은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가깝게 사는 것은 한 사람의 깊은 열정과 충성을 온통 드러내는 갈등과 투쟁을 포함한다. 예수가 직면한 각기의 시험의 중심되는 것은 단순한 질문이다: 어느 정도까지 그가 하나님과 자신됨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광야에서(1-2)

많은 사람들은 광야를 여가와 갱신의 장소로 보지만, 성경에서의 광야는 언제나 투쟁의 장소였다. 놀랍게도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홀로 광야에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 받으셨다. 이 의도적 문장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없는데, 마태는 예수의 의도적인 악마와의 대립을 유익하다고 보고 있다. 나중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시험받지 않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는데(6:13),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든 시험을 면제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비교16:24-26;18:7;26:39-41).

 

광야에서의 예수의 시험은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에 일어났다고 했는데(비교 막1:13;4:2), 마태공동체가 분명하게 유대 기독교인공동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40일 밤낮 홍수가 일어났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그들의 구원을 기다렸다(7:4, 12-16;9:8-16). 모세가 혼자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아 적었을 때 40일을 금식했다(34:27-28). 엘리야는 하나님의 강권을 따라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시내산)으로 피신 가서 40일 주야를 금식했다(왕상19:7-12). 40이란 숫자는 광야에서 밤낮으로(비교,13:21-22;16:2-21;24:18;8:1-20) 하나님께 충성하는 훈련을 하는 이스라엘백성에게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이제 예수도 광야에서 홀로 사십일 간 주야로 금식하고 그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이 악마에 의해 시험받게 되는 결정적 교차로에 놓이게 되었다.

 

전환점(3-10)

구약에서와 같이(16:4;8:3;1:6-12;2:1-6;3:5-6), 시험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행해지는데, 그것은 시험하는 자의 기본적 성격을 나타낸다. 악마의 배경, 성격, 또는 역할과 같은 신화적 강조는 생략되어 있다. 마태에게는 성령이 예수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장소와 시간에 악마에게 시험받도록 했고, 예수의 중심적 헌신이 시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악마라는 단어가 던지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dia ballo에서 나온 동사형명사임을 아는 것도 도움이 된다. 넓게 사용하여 이 명사는 공격하고, 호도하고, 속이고, 방향을 바꾸고, 신빙성을 없애고, 중상모략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마태복음에서 악마는 예수에게 아들됨의 의미와 하나님의 목적을 호도하려 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악마는 예수에게 돌로 떡을 만듬으로 육체적 배고픔을 해결하도록 했다. 악마의 조건적 문장은 예수의 정체성과 권능에 대한 의심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어쨌든 악마는 예수가 그의 권능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필요를 만족시키는데 사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사용하도록 호도했다. 예수는 정원에서 자신을 속이는 입맞춤을 알았듯이(26:48-50) 속임을 분명히 보고 거부한다. 성경을 인용하며(8:3), 예수는 음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25:34-40의 예)그 순간에는 음식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그의 권능을 개인의 물질적 이득을 위해 오용하지 않았다.

두 번째 시험은 예수의 취약점과 안전에 대한 필요에 초점이 있다. 악마는 예수가 상처받거나 죽지 않도록 안전으로 초대한다. 더구나 그는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동의하신다고 말한다. 예수는 속지 않았다. 악마는 성경을 맥락과 관계없이 사용했는데, 자기 확신을 위하여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은혜를 시험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성경을 인용하며(6:16) 반박했고, 상황에 충실하게 적용했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령이 충만했다(3:11,16-17). 예수는 자신의 권능을 자신이 안전하고 안심하는데 오용하지 않았다.

세 번째 시험은 예수를 지배와 위신으로 유혹했다. 악마는 예수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고, 예수가 자신에게 복종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예수는 헤매지 않았다. 그는 악마의 잘못된 방향을 거부하고 다시 성경을 인용했다.(6:13),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 예수는 그의 권능을 영향력과 존경을 모으는데 오용하지 않았다.

 

구원(11)

여기에서 악마는 떠나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에게 시중을 들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함으로 시험을 이겨냈다. 예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3:17) 아들이다. 분명히 시험은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피할 수 없다(비교, 18:7; 26:36-47;12:6).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쩔 수 없다. 진실로 물질주의, 안전 그리고 위신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시험이 어떤 형태이든지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비교 창22:1-14). 시험하는 자의 권력은 실제로 있지만, 제한된다. 예수와 같이,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승리는 시험 가운데 예수를 따르려는 많은 사람에게 속한다(2:14-18;4:15-16).

  

목회적 관점

 

악마가 연기한 가장 큰 속임수는 세상이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1995년에 제작된 네오-느와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전제로, 범죄를 기획해서 경찰을 응징했다는 혐의로 다섯 사람이 잘못된 심문을 받는 이야기이다. 그 일로 인해서 27명이 죽고, 9 1백만 달러 상당의 마약 대금이 사라지고, 두 개의 어두운 질문이 숨겨진 채 남았다: 이 범죄를 저지른 의문의 인물 카이저 소제 Keyser Söze 는 누구이며, 그는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들 다섯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이름 없는, 불길한 영향력을 가진 것일까?

이 영화에서 암흑의 핵심은 범죄나 죽음이 아니다. 암흑은 악을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악은 얼굴이 없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만 소제를 두려워했던 척 했던 사람 중 하나가 카이저 소제인 것으로 밝혀진다. 악마는 관객들 또는 연기자들이 알던 것보다 더 가까이에 숨어있었다.

영화관에서, 소설에서 또는 국가가 정치적 위험인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이름에서 악의 화신을 보는 것은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다. 오직 사람만이 악을 의인화하고 이름을 붙이고, 시각화하고, 비난하고, 전투에서 그것을 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악은 하와와 위대한 대제사장 아론, 욥과 다윗 왕,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시험한다. 거듭해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행동해야 하는 선택에 직면해야 한다. 우리가 유혹의 양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쉽다.

언뜻 보면 광야에서의 예수의 유혹은 부적당하고, 심지어 이단적으로 보인다. 예수가 유혹받을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그가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십자가의 필연성과 마찬가지로 예수와의 만남에서 마귀의 패배는 필연적이다. 예수는 이겨낼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세례와 사역 사이에서 마태복음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거룩함을 가장한 악의 실체를 폭로한다.

예수님은 굶주림에 대하여 빵의 유혹을 받는다. 그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끝으로 그는 악마가 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지라는 유혹을 받는다. 유혹을 거부할 때마다 예수는 십자가를 이해하는 길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분명히 하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 분명히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은 죄에 대한 유혹을 거부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교훈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제공하시고 유혹을 거절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C. S. Lewis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저자는 웜우드라는, 훈련 중인 어린 악마와 그의 스승인 스크루테이프 삼촌의 이야기를 한다. 어린 웜우드의 임무는 그의 "환자"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웜우드는 마침내 그를 지옥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어린 수습 악마는 자기 환자가 계속 자기 생각에 빠지고 자만하게 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게 한다.

그를 영적이지만 실천적이지 않게 하라고 스크루테이프는 조언한다. 실제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데려 오는 것은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를 실제적인 것, 그가 바라는 목적을 위해 기도하게 하라. 그래서 그의 기도가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게 하는 것이 되도록 하라. 환자가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 그의 어머니에게조차 과민반응을 하게 하라. 그가 무의식적으로 기도하게 하여 조종하기 쉽게 하라. 그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라. 용기를 얻기 위해 기도할 때 미묘한 갈등을 일으키라. 자랑스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라. 마지막 편지에서 환자는 죽어서 천국에 가면서 웜우드에게는 실패를 남기고 스크루테이프는 분노의 악순환에 버려둔다.

이야기의 매혹적인 부분은 스크루테이프와 웜우드가 무자비한 살인자들의 군대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기심과 불성실, 옹졸함과 자부심, 공포와 이 세상의 것들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특징으로 하는 세대를 창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유혹이다. 우리는 사십일을 금식한 사람에게 빵을 제공하는 악마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매달리는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확실히 세상의 모든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스크루테이프와 웜우드가 주는 유혹을 이해한다: 자만심, 허영심, 이기심, 무관심. 이것들은 예수가 받은 유혹만큼이나 어둡고, 어쩌면 그보다 더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무시무시한 카이저 소제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오기 때문이다.

유혹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가진 게 충분한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될 때 찾아온다. 유혹은 낯선 사람이나 친구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판단하려고 할 때 찾아온다. 유혹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빈곤, 기아, 질병에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한다. 유혹은 우리의 성격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게 하거나, , 권력, 타인에 대한 영향, 허영심 또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지나치게 알려고 할 때 화를 낸다. 유혹은 우리가 작은 거짓말, 작은 죄의 정당화에 가담할 때 우리를 넘어뜨린다: 인종 차별적 농담, 더 큰 이익을 위한 의심스러운 사업 관행, 배우자나 동업자가 옆에 없을 때 비난하는 것. 유혹은 우리가 삶의 상처에 너무 빠져들어서 삶 자체를 놓치게 될 때 우리를 넘어뜨린다. 이런 것들이 세상에서 우리 삶과 우리 영혼의 휴식 공간에 숨어있는 얼굴 없는 악의 순간이다.

사순절의 회개는 우리 삶의 어두운 부분을 직면하고, 그것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것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죄책감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것이고. 삶을 바로잡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설교적 관점

-예수의 시험이야기는 전통적인 복음서의 교훈이기는 하지만 사순절 첫째 주일 설교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그 이유는] 예수의 사십일은 끝이 났고 이제 우리의 사십일이 이제 시작되었다. 사순절은 우리가 부활절의 신비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또 훈련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마태의 시험이야기는 그런 현실적인 적용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단지 예수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이런 마태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마태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설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마태는 시험이야기를 2개의 자료 곧 마가의 자료 그리고 누가와 공유하는 자료로부터 가지고 왔고 여기에다 마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예를 들어] 2개 자료의 사십일” (forty days,  1:13,  4:2)에 마태는 그리고 40일 밤”(...and forty nights]을 추가하여 밤낮 사십일로 바꾼다.  밤낮 사십일은 노아와 아라랏산의 기억( 7:14,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  7:12)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성서에서 이것은 주로 시내산에서의 모세를 가리키고 있다. “모세는 거기서 주님과 함께 밤낮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 34:28, 24:18,  9:9, 11,18, 25: 10:10) 마태의 예수는 모세를 생각나게 하는 신명기의 세 가지 교훈을 인용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 8:3);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 6:16); 그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 6:13). 이 세가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방식을 보여줄 것이다.

 

-마태는 예수를 많은 타이틀과 더불어 소개하고 있다. 그는 메시아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 (1:1)이고; 하나님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3:17)라고 선언한다. “다윗의 자손은 다윗 왕조를 떠올리게 하고 유대왕국의 재현에 대한 소망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삼위일체적 용어나 예수의 신성을 가리키는 전거로 이해할지 모르나 마태의 청중은 그것을 또 다른 왕의 타이틀로 인식했을 것이다. 시편 2:7-8에서 주님께서는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이것은 세 번째 유혹의 약속이다. 오직 다윗왕조에 대한 기억과 이상적인 왕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새로운 타이틀을 환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캐릭터는 무엇인가

 

-마태는 예수를 모세와 같은 왕으로 설교하고 있다. 우리는 모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1세기 유대인들은 분명히 그를 하나님의 왕족으로 그리고 해악을 끼쳤던 역사적 왕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윗왕조에 속한 왕들은 자신들만을 위함으로 악명이 높았으나, 이 왕은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겸손해지는 교훈을 배웠고 ( 8:1-2)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겸허하게 받는다. 다윗왕조의 왕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했지만 이 왕은 맛사의 교훈을( 6:14-17, 므리바, 샘물이 나온 사건)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웠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제국을 통한 야망과 계략이 끝이 없었지만,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 ( 4:8)으로도 그의 신실한 순종을 막지못한다. 모세는 이것을 배웠고 이것을 가르쳤다; 이 광야에서 그 걸음을 시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이것을 배웠고 그대로 살 것이다

 

-마태의 시험이야기는 도덕적 권면이나 영적 교훈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에 관한 것이다: 그가 누구이고 그가 어떤 캐릭터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험은 예수에 관한 것이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을 빵이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중명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서 우리가 인정하고 좋아하는 류의 성공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마 그는 견고하게 하나님의 것으로 남아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태가 예수에 대해 설교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설교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마태의] 예수는 자신을 알리지 않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지도 않는다. 이사야가 말했듯이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 53:2). 심지어 몇 구절 뒤로 가서 예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를 때에도 단순히 나를 따라오너라” (4:19)라고 하여 따라오든 따라오지 않든지 너희들이 결정하라고 말한다

 

-마태는 전통적인 타이틀을 (메시아,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사용하는 것 외에도 시험이야기를 통해 인성을 지닌 예수를 드러내는 복음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설교자는 단순히 예수를 설교하는 마태의 방식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를 알아야 하는 교회의 갈급함이 있다. 만일 마커스 보그의(Marcus Borg)  Meeting Jesus Again for the First Time 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오늘날도 마태복음이 예수의 인성을 소개해야 할 상황과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인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기록되었다는 의미-역자 주]. 이미 예수를 주님으로 ( 7:21, 25:11, 37, 44) 불렀던 유대 기독교 회중들에게 설교할 때 보그의 책 제목이 마태의 청중에게 어울릴 것이다: “처음으로 예수를 새롭게 만나기” (Meeting Jesus Again for the First Time).

 

-마태의 회중들은 예수를 알고 있고 또 그를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있지만 예수의 겸손함은 모르고 있다. 그들은 그가 행한 놀라운 일들은 알고 있지만 그 의미는 모르고 있다. 그들은 그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기뻐하지만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기에는( 25:31-46) 아직은 부족하다. 우리들처럼 그들도 예수를 알고 예수에 관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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