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대림절은 전통적으로 준비의 절기이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는 그 해의 일상적인 일들을 젖혀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깊은 의미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예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을 때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기쁨은 우리를 혼란스럽게만 할 것이다.
교회의 전통적인 대림절 관습은 현대 문화와 긴장 관계 속에 있다. 세속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사회의 리듬은 교회의 절기를 대치했다. 그런 사회에서 크리스마스를 위한 준비는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전등을 달고, 흥을 돋우는 명절 음악을 듣고, 사고 싶은 수많은 상품들을 응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통해 마음속에서 마술과 같고 유아적인 경이와 선의가 솟구쳐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세운 이상과 소망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한 것과 얼마나 다른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게끔 한다.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명절 분위기에 취해있지 말고, 자신을 살펴보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물질적인 어떤 것을 주거나 받는데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낙타 털 옷을 입은 요한은 거의 코미디 속 인물 같지만, 그의 메시지는 신랄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는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그것이 우리의 잘못에 대해 후회하는 것인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에 노력하는 것과 관련되나? 우리의 삶이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 뒤에 숨겨져 있어도 우리가 여전히 회개를 해야 하는가? 어떤 신자들에게 회개에 관련된 표현은 죄책감과 자괴감을 각인시키고, 밀과 쭉정이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공포를 환기시킨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분노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것이라는 게 과연 확실한가>라는 질문이 절박하게 제기된다.
세례 요한과 대림절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회개는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맞춰 다시 올곧게 해주시기 원한다는 사실>과 관계된다는 점이다. 회개는 우리의 죄의식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변화시킬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요한의 이상한 옷과 거친 말들은 복음의 충만한 의미를 소통케 하는 필수적 요소이다. 성탄절과 관련된 따뜻하고 환상적 느낌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으면서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에 관한 깊은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마태는 우리의 시야를 확장하기 위해 몇몇 중요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그중 하나는 광야이다. 요한은 광야에서 가르치며 광야에서 외친다. 광야는 동시에 기쁨과 고통으로 점철된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속박에서 해방해 광야로 이끌었으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기서 죽도록 그들을 데려왔다며 두려워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항해 죄를 지었고 배반했으나 또한 거기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교회에서 대림절 절기를 지킬 때도 이와 유사한 역동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각각을 속박으로부터 건지셨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기억하며 그것을 확인할 것이다. 신자의 삶에서도 방황의 시간이 있기에 광야 시절의 망설임과 반항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앞서서 갈 길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마태의 두 번째 중요 이미지는 세례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죄를 고백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요한이 말하듯이 이 세례는 앞으로 있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한 더 완전한 세례를 지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세례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우리의 결단에 관한 상징>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 전체의 주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대림절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세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을 기억하고 확인하면서 회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부활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 다른 중요 이미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를 환기시킨다. 도끼는 나무뿌리에 놓여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든 나무는 불에 던져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곡물을 타작할 키를 가지고 있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강조한다. 그 세계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운행되지 않는다. 인간의 이상과 갈망은 그 핵심부터 뒤집힐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약속과 필수적으로 관련지어져 있다. 낡은 것은 지나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것이 온다. 이와 비슷하게 대림절 기간에 교회는 <이 세상이 더 이상 최종적 권위를 갖지 못하며,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소망으로 산다는 것을 믿고 확인하면서> 깊은 회개를 한다.
대림절이 교회에 요구하는 준비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준비는 자정(自淨)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우리와 세상을 정화하신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함으로 이런 신뢰가 자라고, 이 세상을 위한 신실한 섬김을 통해 그것이 확증된다.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억하고 확증하게 해 주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특별한 기간이다.
대림절의 본래의 뜻을 되새기는 것은, 대림절 찬송과 크리스마스 캐럴의 차이가 무엇인지 배우거나, 오래된 대림절 금식의 전통을 되살리거나, 심판과 정화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대림절 성서정과에 따라 기도하는 등의 작은 실천에서도 시작된다. 이런 대림절의 신앙 훈련은 우리로 마침내 그 날이 왔을 때, 성탄절의 기쁨과 환희(크리스마스 전등, 음악, 선물을 포함하여!)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대림절 기간의 준비에는 다른 것도 포함된다. 그것은 성탄에서 비롯된 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코앞에 다가왔다고 확신하며 사는 인생>을 미리 연습하게 한다.
주석적 관점
-대림절은 새로운 시작일 뿐만 아니라 변화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대림절 둘째주일에 여기에 초점을 두었다. 세례요한은 한 발은 끝을 맺는 구시대에 올려 두고, 다른 한 발은 새로 탄생하는 새 시대에 올려 두었다.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도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한 시대와 다른 시대를 잇는 역할을 했다. 세례요한에 관한 마태복음의 자료는 마가복음과 Q자료(마태와 누가에서 발견되는 말씀자료들)에서 온 것이다. 마태 설화의 원자료들을 일별해 보는 것이 그의 문단 구성을 밝혀줄 것이다. 1-2, 4-6, 그리고 11절은 마가복음에서 온 것이고, 3,7-10, 그리고 12절은 Q자료에서 온 것이다.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세례요한의 예언자적 증언과 광야생활(1-6절) 2)기득권적 구세대에 대한 심판 선언(7-10) 3) 예수에게서 오는 새로운 희망(11-12). 각 부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6절에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고대세계에선 권력이 신전과 궁전이 있는 중앙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중앙도시에는 공물과 다른 직접 간접세를 거두어들이는 관료체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갖길 원하거나 하길 원할 때 중앙도시로 여행하게 된다. 변방에서 중앙으로 오지 중앙에서 변방으로 가지는 않는다.
- 광야와 변방의 모호한 선지자를 묘사함에 있어 세례요한은 변방에 남아있고. 중앙에서 그를 찾아 온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중앙도시)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예루살렘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왔다고 했다. 물론 ‘온’유대라는 것은 과장법이지만, 요한의 놀라운 영향력의 범위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변방인 유대광야에서 로마제국이나 속국인 헤롯안티파스의 왕국과는 근본적으로 다fms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광야(eremia)는 유대역사에서 율법이 주어진 갱신의 장소요, 강퍅한 세대가 믿음이 없어 멸망하는 심판의 자리이다. 이사야40:3은 마태가 제2이사야에 깊이 새겨진 새창조와 새탈출의 주제를 원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마태에게도 광야는 심판과 구원의 자리가 되었다.
-세레요한은 예언자의 목소리와 예언자의 상징적 행동을-세례-수행하는 예언자로서 분명하게 묘사된다. 그는 광야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누군가의 필요성을 선포하는 제2이사야의 전통에 서있다. 요한의 말은 그의 상징적 행동만큼 중요하다. 이사야서를 인용한 바로 뒤에 요한을 엘리야와 같이 묘사한 것(4, 왕하1:8참조)에 주목하자. 요한은 이사야와 같이 중앙과 연계되어 있는 예언자가 아니었고 변방에 살았다. 그의 음식은 가난한 자의 음식이었고(들꿀은 그의 발견한 꿀이었다), 그의 옷은 베두인들이 입는 낙타털옷이었다.
-이 강한 금욕적 예언자는 칭송받았고, 복음서 전통에 따르면 그의 세례는 하늘에서 온 것으로 여겨졌다(마21:23-37). 변방에 산다고 요한이 변방화 되지는 않았다. 도리어 당시의 현실 이슈에서 예언자적 거리두기를 제공했다. 아마도 요한은 그의 선포와 세례줌을 통해 “경계”를 만들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리가 그의 예언자적 증언이 중심인 예루살렘과 유대성전에서 온 권력자들에게 어떤 도전을 주었는지는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요한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것은 보통 대제사장과 제사장 직분자들이 지배하는 성전과 제사제도에게 맡겨진 구원적 행위였다.
-7-10절에서 우리는 만약에 변방의 예언자가 중심으로 오지 않으면 중심에서 변방으로 그 도전의 심각성과 제기하는 위험을 평가하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것이 전치사(epi)의 의미에 달려 있는데, 세례를 받으러(for)오거나 또는 세례에 반대하여(against) 오거나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후자의 의미로 읽는 것이 전자보다 문맥에 맞을 것이다. 바리새파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결문제에 대해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으로 자신들을 지배계급(평신도와 사제계급 공히)의 한 분파로 세움으로써 그들의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비록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크게 달랐지만 요한이 그들의 이해에 위협이 된다는 것에는 인식을 같이 했는데 특히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함으로써(마21:25-26) 성전의 영향력 범위를 줄이려는 시도에 대해서 그러했다.
-그들의 반대는 또한 그들이 나타났을 때 요한이 즉각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여줌을 잘 설명해 준다. 요한은 그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말로 공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했다. 이미지는 매우 강하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뱀은 부정한 동물인데 요한은 여기에 상처 주는 모욕까지 더했다. 요한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는 특별한 지위에 호소하려는 것을 또한 공격했다. 그 호소는 내부자(아브라함 자손과 계약공동체의 엘리트)와 외부자(요한의 광야공동체)를 규정하려는 시도였고, 이 본문에서는 그들이 내부자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심판의 여러 복합적 이미지로(도끼로 찍고, 쭉정이 키질, 불속에 때울 것, 10,12), 희망으로(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한다.11-12) 대응한다. 불은 심판과 희망과 연관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본문은 대전환을 바라보고 있다: 광야를 통해 길을 찾음으로서만 도달할 수 있고 심판을 통해 희망을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의 기다림이다.
목회적 관점
여기 우리 교회 생활에서, 특히 대림절에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정죄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향수를 느끼기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림절에 정죄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목회자로 사역했던 모든 교회는 기독교의 정죄에서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모였다. 이혼하고 재혼한 기독교 배우자는 마가복음 10:11~12절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교회로부터 회복되고 있다. 동성애 기독교인들은 고린도전서 6:9에 대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을 하는 교회로부터 회복하고 있다. 바울은 malakoi와 arsenokoita가 이 왕국을 물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무도 이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묻기를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은 디모데후서 3: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을 바울이 성경을 축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근거로 여기는 교회들로부터 회복되고 있다. 사실은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문자 그대로” 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함을 느낄 만한 교회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나타났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예수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요한이 이렇게 정죄했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만 염두에 두었을 거라고 바라겠지만, 이 장의 더 큰 맥락이나 마태복음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긴장해야만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요한이나 그가 소개하는 예수는 받아들임과 경고의 가장 믿기 힘든 결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대림절에 우리 자신으로서 소중히 여겨질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대림절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시다면, 하나님이 실제로 나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환영할 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William Muehl은 대림절 이야기에서 이 점을 적절하게 강조한다;
12월 어느 날 오후 한 무리의 부모들이 보육원의 로비에서 크리스마스전 학기 마지막 날 수업이 끝나고 자녀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사물함에서 달려오는데, 각각 그들의 손에 몇 주 동안 정성들여 만든 “깜짝 선물”을 멋지게 포장해서 들고 있었다. 어떤 꼬마가 외투를 입고 부모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졌다. “깜짝 선물”은 그의 손에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고 도자기임에 틀림없는 그것은 깨지고 말았다.
그 아이는…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고를 최소화하려고 애쓰면서 소년을 위로했다. 소년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속삭였다. “자, 괜찮아. 별 일 아니야.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하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 좀 더 지혜롭게, 아이를 품에 안고 말했다. “오, 큰일났네. 정말 큰일났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울었다.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대림절 예배, 대림절 찬송, 대림절에 기대하는 것들, 그리고 대림절의 위로는 세례요한이 그렇게 분명하게 했던 것들을 기억하게 한다. 그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중요하다.
아마 교회는 정죄를 포기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대림절에 향수를 느끼기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향수를 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니다. 그들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오 베들레헴 작은 골”과 “고요한 밤”을 부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우리는 대림절의 마지막 촛불을 밝히기 전에 아직 “곧 오소서 임마누엘”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작년과 같이, 그리고 62년전과 같이, 아마도 King James 성경에 있는 것과 같이 크리스마스 행진을 하기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거룩한 절기를 위해 전통적인 포인세티아를 포기하고 붉은 국화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셨다. 왜냐하면 대림절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되돌아보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진다.
“대림절은 무엇이 오고 있는지를 기대하면서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우리는 기도하고 설교하고 가르친다. 세례요한은 옛날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는 옷을 입고 이사야가 한 말을 직접 인용하여 말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세례요한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밑지는 장사를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돌이켜보아야만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가 앞으로 오시기를 기다리는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과거에 계획되어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망하고 있지 않을 지도 모른다. 지나간 대림절을 돌아보면서 그들은 오늘의 대림절을 신뢰하고 다가오는 대림절을 기다릴 용기를 얻는다. 스크루지가 미래를 보기 전에 과거를 돌아보도록 만든 유령들은 설득력이 있다. 향수를 느끼는 것은 균형을 잃은 감정으로 걸러진 기억이다. 믿음은 적절한 감사를 통해 걸러진 기억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예전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설교와 심지어 우리의 목회적 돌봄을 사람들과의 가상의 놀이를 하기 위해 이용한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 그리고 과거는 없다고 믿어라.” “예수가 오심을 기다려라. 그리고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당신이 이미 알고 있지 않은 척하라. 그래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찬양할 때 감사할 뿐 아니라 깜짝 놀라는 것처럼 하라.”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고 구유에 오는 것은 거짓 경건을 실천하는 것이고,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는 이사야의 말을 헨델과 교회가 그 약속으로부터 만든 것을 모르는 척 하면서 읽는 것은 거짓된 정확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어쩌면 대림절 동안 우리는 향수를 느끼는 것을 포기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기억은 포기할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주에는 계속해서 “오 베들레헴 작은 골”을 노래하자.
설교적 관점
-세례요한은 거칠고 직선적이며 독선적인 설교가로서 즉각적인 주목을 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요한은 에딘버러에 있던 Free St. George’s Church 설교자였던 Alexander Whyte (1836–1921)를 떠올리게 한다. Whyte는 너무 직설적이고 마음을 꿰뚫어서 그의 설교를 들을 때면 듣는 이의 삶이 그의 손에 있는 듯 했다고 한다. 광야로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나간 사람들이 사전에 알건 알지 못했던 요한은 이와같은 설교를 했다.
-광야라는 이미지는 요한 자신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고, 또 비단 요한의 설교뿐만 아니라 우리가 설교하는 자리로서 광야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설교와 교회생활이 얼마나 또 어느정도로 광야같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모든 현명하고 신중한 교인들은 온화하고 친절하며 또 넓은 마음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또 사람들을 집처럼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예배는 항상 무언가 광야같은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생각하고 알 수없고 또 두려운 모든 일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확실하다고 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해 두 번, 세 번의 체크를 한다. 예배당이 얼마나 아름답건 간에 사람들이 두려움, 근심,해야할 일등의 마음을 지닌 채 앉아있고 나머지 모든 곳은 일종의 광야같은 곳으로 거기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커다란 바람소리, 가시밭 그리고 외로운 빈 자리를 대면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자리이고 설교하는 자리이다.
-본문 5절, 6절은 가장 거친 광야는 듣는 이들 속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마태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요한에게 갔다고 말한다. 이 주제는 보다 “교회적”(churchy)이고 종교적이다. 그래서 이 주제가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은 그것을 주제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설교자들은 죄에 관한 주제가 도덕적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피할 수도 있다. 마태의 본문은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본문들은 설교자들이 우려하는 그 자리에서 [죄에 관한 설교가]더 필요함을 보여준다. 우리 설교자 앞의 교인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죄에 관한 교리를 알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경험이 있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도 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관계나 일 속에서 그것[죄]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가장 악한 적이라는 것 또 제거하기가 쉽지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떤 문제로 고민하던 간에 이들이 예배에 올 때에는 이 문제를 안고 온다.
-오늘날 이런 광야같은 세상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설교가 필요한가? 요한의 방식은 광야설교를 함에 있어 적당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만일 그에게 신학적 라벨을 붙이려 한다면 그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라고(liberal evangelical)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두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시의 보수주의를 그 잔학함과 자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개념이나 신학을 사용하지 않고 그 전통의 핵심 즉 죄, 심판, 회개등을 도입한다.
-요한의 광야설교는 자신보다 앞에 있었던 사람들을 언급한다. 그가 회중 가운데 특별한 사람들을 볼 때 (여기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들을 기쁘게하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를 손질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향해 할 말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주일에 앞에 앉은 회중을 고려하여 핵심적인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하고 있는가?
Marilynne Robinson의 작품 Gilead에서 주인공인 John Ames는 한 때 그를 기쁘게 했던 반전설교를 폐기한 것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 이유를 그것을 듣기위해 모인 이들이 이미 자신과 같은 입장의 얼마 안되는 힘없는 노인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Mirabelle Mercer는 “본디오 빌라도가 아니었고 그녀는 Woodrow Wilson도 아니었다”라고 결론짓는다. John Ames처럼 세례요한은 멀리있는 사람들이 아닌 앞에 [자신과 다른 입장으로]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한의 광야설교는 대부분 현재시제이다. 다루는 이슈는 거의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현재 하고 계시는 일 혹은 하려고 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진실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말한다. 설교를 하는 우리들은 본문을 보고 역사와 주제 그리고 내적인 역동성을 좋아할지 모른다. 사실 옛 이야기들은 우리의 신학과 설교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하는 설교는 흥미롭고 다르게 들릴 가장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려면 옛 설교를 꺼내어 동사를 과거에서 현재로 바꾸면 된다. 이러한 단순한 변화가 그냥 평범할 뻔한 일에 생명과 감동 그리고 흥미를 이끌어 내는 가를 관찰해보라.
-요한의 설교는 그를 넘어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의 메시지가 어느 방향으로 가던 간에 우리 자신에게 고정되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메시지가 아니다. 교회자체가 복음이 아니다. 신앙공동체는 구세주가 아니다. 가치있는 설교는 언제나 예수를 향하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모든 설교에서 예수의 이름이 드높여져야하고 설교자나 심지어 교회도 감추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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