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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2장 13~23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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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동방박사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이어지는 사건을 기술한다. 이는 또한 성탄이라는 특별한 날로부터 <매주 한주씩 전개되는 복음서 이야기의 전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분은 하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천사의 명령, 헤롯의 명령, 다시 천사의 명령. 각 부분은 또한 구약성서를 인용함으로 마무리된다.

마태의 이야기를 효과적인 설교로 변환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 중에서 마태가 갖고 있는 신학적 관심의 특이성과 이런 특이한 신학적 관심이 작은 단위의 본문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모티브가 활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에서 강조되는 새로운 모세로서의 예수, 즉 새롭고 최종적인 율법의 수여자로서의 예수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마태의 교훈적인 관심이 드러난다. 둘째로, 마태는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기 위해서 구약성서 본문을 사용한다. 마태는 기독교적 미드라시 형식으로 구약성서를 인용한다. (미드라시는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 유대인의 주석으로, 율법을 상술하고, 또 실례를 들어가면서 도덕적 교훈을 끌어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마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미드라시식 주석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마태는 문학적 유형론(typology)의 구조에 관심을 둔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나?”보다는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왜 미드라시 방식과 유형론이 중요한가? 교인들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가 세부적인 내용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본문의 지리적인 세부 사항 같은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마태의 신학적 의도와 같은 큰 질문에 관심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마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예언서를 미드라시적으로 변형한다.

유형론적인 접근을 통해 마태는 예수의 삶과 이스라엘의 과거·미래를 알레고리식으로 엄격하게 일대 일로 대응시키지 않고 유연하게 해석한다. 마태의 거시적 접근 방식을 이해함으로 설교자는 본문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함으로 마태의 신학적 의도를 왜곡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본문에 접근할 때 본문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도움된다. 첫째로, 본문의 중요 관점은 하나님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을 촉발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천사를 보냄, 요셉과 그 가족의 행동, 헤롯의 결정 등이 포함된다. 둘째로, 마태의 유형론은 모세와 예수, 이집트로의 피난·복귀(역설적으로 예수는 구원자인 동시에 구원받는 자가 된다)와 출애굽을 연결하는 틀을 상정한다. 여기에서 마태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는 이 세상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교회가 <예수의 생애 초기로부터 하나님이 구원에 관한 예언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원한다.

이렇게 본문을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설교를 작성할 때 우리는 어떤 점에 유념해야 하는가? 첫째로, 마태가 구약성서를 인용하는 방식에 관해 주목해야 한다. 마태의 구약 인용은 다양한 교리적 해석의 가능성과 모호성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인용은 구약성서의 여러 부분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는 나사렛 사람(Nazorean)이라 불릴 것이다”(23)라는 인용의 경우, 구약성서 어디를 인용한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것이 예수의 족보에 관한 것인지, 특정한 유대인 가문에 관한 것인지, 나사렛(Nazareth:구약성서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지명임)과 유사한 발음을 가진 그리스어를 상기시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본문에 대해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설교적 접근이 가능하다. 본문이 보여주는 난해하지만 정교한 신학적 틀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설교를 구성하는 것을 제안한다.

하나님의 부르심(God’s Call): 본문의 첫 단락에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이방 땅으로 피신하여 가족의 목숨을 구하라고 명령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과 여러 점에서 연결된다. 설교자는 인간의 계획을 변경시키는 하나님의 개입, 탈출 전문가(escape artist:탈출 묘기를 보여주는 마술사)로서의 하나님, 예수가 메시아인 이유 (출애굽의 주제를 활용하여) 등에 관해 말함으로 다음 두 관점에 관한 기초를 놓을 수 있다.

하나님의 정치학(God’s Politics): 두 번째 단락에서 하나님이 정치학이라는 주제가 이스라엘과 헤롯의 복수극이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헤롯이 내린 명령을 보니 그가 동방박사의 점성학적 예언에 집착해 있음이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요셉의 가족을 피난시킨 신적 계획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신다. 교회사 속에서 이 사건은 무고한 아기(Holy Innocents)를 추모하는 전통으로 연결된다. 이 부분은 타협할 수 없는 신학적 과제를 다룬다. 왜냐하면, 무고한 자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탄생은 죽음과 비참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설교자는 우리의 구원자, 메시아가 강림한 세상은 죄의 결과 폭력으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이라는 것을 강조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God’s Provision): 세 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온 곳은 베들레헴이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예수가 공적으로 등장하기까지 몇십 년간 예수를 외지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셨다는 취지로 설교할 수 있다. 갈릴리는 하나님이 마련한 소년 예수를 위한 준비, 보호의 시공간이었다. 성경은 예수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기간에 대해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장기적인 돌봄, 성인이 되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는 자로 사는 삶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의 중요성 등에 대해 설교할 수 있다.

 

주석적 관점

-오늘 복음서 본문은 세 가지로 흐름으로 나타난다. A)이집트로 피신하다(13-15) B)어린아이들이 죽이다(16-18) A’)이집트에서 돌아오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탄생이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려고 모세와의 유사성을 계속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섯 가지 꿈이 행동을 하게했는데(1:20;2:12,13,19,22), 꿈이 종종 하나님의 계시나 인도의 수단으로 생각되어졌던 것과 같은 것이다. 구약에서 이름이 비슷한 요셉과 같이, 요셉은 꿈꾸는 자였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유대 땅에서 피신하라고 경고한 것은 섭리와 신정론(神正論: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로 봄)의 문제를 제기한다. 왜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있는 다른 부모들에게는 경고하지 않았을까? 비록 복음서가 이 이슈에 관해서는 민감하지 않지만, 계시는 아마도 그것을 이해할 기회가 없었을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특정하게 연관된 맥락에서만 주어진다. 요셉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임을 알았고, 동방박사들은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어떤 다른 베들레헴의 부모들도 임박한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대헤롯(주전37-4년 재위)은 유대인인 아니라 이두메인으로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싸웠기 때문에(주전40-37) 언제나 위협을 느꼈다. 그는 친위군대를 두었고, 예루살렘, 세바스테, 가이사랴, 마카루스, 헤로디움, 마사다 그리고 다른 곳에 요새를 지었고, 곳곳에 피할 곳을 만들어 두었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후계자들을 살해했기에 그에게 대항자는 없었다. 그의 가족 중에서도 음모를 의심하여 미리암 왕비와 아들 하나도 살해했다. 그가 죽기 전에 명령을 내려 그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정치범들을 사형시켜 온 나라에 애도가 있게 하라고 했다. 베들레헴에서 유아들을 살해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것은 헤롯이 저질렀던 행동과 일관된다.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살해되었는지 모르지만,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여서 그 숫자가 20명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헤롯은 주전 4년에 죽었기에, 예수도 아마 주전 6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다. 주후 연도는 주후533년까지는 산정되지 않았고,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 6세기의 유명한 교회법학자, 그리스도교력의 창안자로 여겨지는 인물. Denis the Little. 그가 새로 만든 부활절 계산표가 사용되면서 그의 그리스도교력이 널리 보급되었다)가 로마가 세워진 때로부터 예수의 탄생을 계산했다.

-이집트로의 피신 기사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예수가 헤롯의 분노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의 이스라엘 역사의 재현이다(11:1참조). 두 가지 꿈이 마태1-2장의 꿈들을 마치게 한다. 첫 번째 꿈은 헤롯이 죽었고 그의 가족에게 위험이 사라져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요셉에게 알려준 것이다. 땅의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어서 20,21절에 반복된다. 하지만 그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 잔인하여 나중에 로마로부터 왕위를 찬탈당한 아켈라오가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꿈에서 요셉은 가족들을 데리고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로 가도록 지시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나사렛으로 가서 살았고, 그래서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란 말씀이 이루어졌다. 인용한 성서를 밝히지 않았지만, 23절은 이사야4:3과 사사기16:17의 합성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이집트로의 피신은 복음서 전통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나사렛에서 자랐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요셉과 마리아가 인구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여행한 것으로 기술한다. 마태가 예수의 가족들이 어떻게 베들레헴에서 나사렛으로 왔는가를 설명한다면, 누가는 나사렛에서 사는 가족들이 어떻게 베들레헴에서 아이를 낳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과 유아시절에 대한 마태의 설명은 역사적 사건과 실제적 지명, 이스라엘 역사 그리고 성경말씀의 성취라는 것에 근거하기에 우리가 그런 것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풍부한 암시의 천을 잘 짬으로써 마태는 효과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모세와 같은(18:15,18) 예언자로 지정하고 있다. 하지만 마태의 예수탄생이야기에는 센티멘탈한 것은 없다. 그것은 폭력적 역사의 불안정성과 공포 속에 설정되어 있다. 폭군은 아이들을 죽이고 가족들은 한밤중에 피신한다. 목자들이 이상한 일을 보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고, 하늘에서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평화로다”(2:14) 같은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섭리의 하나님께서 전체적으로 헌신적이고 사랑하고 꿈을 꾸며 신뢰하는 아버지를 인도하여 아이가 그의 백성과 오는 세대의 구세주가 되도록 자라도록 역사 하신다.

-그러기에 마태는 예수의 탄생을 지키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새롭게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비록 섭리의 하나님을 믿을 만한 명백한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 삶과 설교, 죽음과 부활만으로 충분한 표지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폭력적 힘은 마치 권력이 모세를 죽이려 했던 것과 같이 그를 죽이려 했다. 그가 태어날 때의 폭력적 권력은 나중에 그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진 것과 같이 헤롯의 죽이려는 음모에서 살아났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는 궁극적으로 죽음 그 자체를 이기는 구원을 가져왔다. 마태는 가장 나쁜 상황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확증한다. 올해 성탄절의 진정한 기쁨을 선언하자. 그 무엇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길 수 없다. 그러기에 이 땅의 평화를 축하 할 수 없을 때에라도 사랑의 하나님과 평화의 약속 때문에 우리는 임마누엘을 축하할 수 있다.

 

목회적 관점

 

불확실한 시기에 하나님의 보호. 2008년 국제 경제 위기의 여파로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데 동의 할 수 있다. 1930년대와 대공황 이후 우리는 그러한 사회 경제적 격변을 보지 못했다: 대규모 정리 해고와 실업의 증가, 문을 닫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기업들의 도산, 주식 시장의 혼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러 해 모아 온 돈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더 많은 불확실성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모든 일들 한복판에서 가족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USA 투데이의 한 기사에 따르면, 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이 시기의 재정적 스트레스가 사람들과 가족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말한다 : "경제적인 어려움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불안, 우울증, 수면 장애, 돈으로 인한 갈등과 같은 정신 건강을 해치고 있다." 기사는 뉴욕의 심리학자 조이 브라운 Joy Browne 이 라디오 네트워크 토크쇼에서 한 말을 인용하여 "노동계급의 청취자들로부터, 그들이 집에서 해고와 충동으로 인해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중상층 사람들조차 그들의 복지에 타격을 입고 있다. 브라운은 "그들은 은퇴해야 하지만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손주들의 교육을 돌봐달라고 요청받고 있다. 그들은 집을 가지고 있지만, 팔 수 없고 여행할 수 없다.” 사람들은 더 동요하고 불안하며 분노한다. 정리 해고, 직업 불안정, 대학 경비, 청구서들은 지불 할 수 없다: 기사는 불면증이 급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밤새 깨어서 걱정한다.”

오늘날은 불확실한 시대이지만, 우리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불확실한 시대에 보호해 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불확실한 때에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살핌을 보여주신다. 압도적인 잔인함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메시야인 자녀를 보호하는 방법에서 좀 더 희망적인 비전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 각자를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마태복음 2:13~23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세상에서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음을 알리는 별을 따라 동방에서 온 동방 박사들로부터 소식을 듣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들에게 아이를 찾으면 돌아와서 알려 주어서 자기도 경배하게 해달라고 지시했다. 꿈에서,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그들의 나라로 돌아 가야한다는 계시를 받았다. 헤롯이 그들에게 속았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화가 났으며, 질투로 인한 분노로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서 요셉에게 나타나서 요셉에게 헤롯이 그 아이를 죽이려하고 있으니 이집트로 가서 다른 지시를 받을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라고 지시했다. 로마 통치 아래 있던 이집트는 헤롯의 관할권 밖에 있었고 아이는 그곳에서 안전했을 것이다. 헤롯은 자신의 악마적인 계획을 추진했고, 베들레헴 전역에서 우는 어머니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여인들은 슬픔이 너무 커서 위로받기를 거부했다. 어떤 주석가는 어머니의 울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피신한 것은 축복과 희망이었으며 메시야가 피신했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시야가 피신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 심지어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도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메시아는 언젠가는 통치할 것이고, 거기는 그런 살인과 폭력이 없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텍스트 몇몇 부분에 주석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마태가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언급한 부분들이다. 본문에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한 부분이 네 곳 있다. 첫째,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한 것이 구약의 성취라고 한다(2:5-6). 두 번째로, 예수가 이집트에서 돌아온 것이 출애굽과 관련된 구약의 말씀을 성취했다고 한다(2:15). 셋째,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의 울음은 예레미야에서 라마에서 자녀들을 위해 울고 있는 라헬에 대한 언급을 성취한다. 끝으로, 특별히 이에 해당하는 본문이 있는 건 아니어도, 예수가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은 예언자들을 시켜 말씀하신 바가 성취된 것이다(2:23). 예언의 성취에 대한 학술적 논평은 방대하다. 하지만 마태는 주로 유대인 청중에게 글을 쓰고 있으며 따라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구약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구약의 예언은 메시아인 아이를 정당화하는 보증서이다.

아이를 죽이기를 원했지만, 헤롯이 죽었다. 헤롯이 죽자 주님의 천사가 다시 나타나서, 요셉에게 아이를 죽이려는 자가 죽었으니까 아이를 고향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요셉은 헤롯의 아들이 헤롯 대신에 헤롯의 영토를 다스린다고 들었다. 그래서, 또 다른 꿈에 따라, 갈릴리로 물러나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살았다. 나사렛은 멸시받는 곳이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메시야가 멸시받을 것을 예언했다( 22:6-8, 13; 69:8;  49:7; 53:2-3, 8;  9:26). 요점은 하나님이 상처, 손상, 위험으로부터, 가장 멸시받는 곳에서 가장 비열한 사람들에게서도 메시야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불확실한 시기에 하나님의 보살핌과 권세를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셨듯이, 실업, 나쁜 소식, 주가 하락, 그리고 전례 없는 사회적 경제적 불확실성에서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면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밀한 곳에 우리를 숨기실 것이다. 메시아는 보살핌을 받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고, 위험하고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도 양육 받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졌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똑같이 하실 것이다.

 

  

설교적 관점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 요셉이 꾸었던 세가지 꿈은 좋은 꿈이었나 아니면 나쁜 꿈이었나? 첫 번째 꿈은 좋은 꿈으로 해석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한 천사가 요셉에게 긴급한 소식을 알려주려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꿈은 악몽이다: 헤롯이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죽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과 수단을 지니고 있고 더욱이 아무 제재없이 그렇게 한다. 그런 꿈은 어느 누구에게나 식은 땀을 흘리게하고 격렬하게 가슴이 뛰게하며 숨쉬기조차 함들게 만드는 악몽이어서 여기서 깨어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예수] 동방박사들로부터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그가 태어난 의미, 그의 삶에 대한 약속등은 밝고 빛나는 희망으로 가득차 보였다. 그런데 이제 요셉의 악몽으로 인해 약속에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된다.

-이 악몽은 요셉이 깨어났을 때 끝나지 않는다. 급히 서둘러 해야하는 일이 뒤따른다: 가지고 있는 짐을 허겁지겁 싸서 밖으로 나가 가능한 한 빨리 이집트로 가는 큰 길로 나가야 한다. 아이는 울고 엄마는 기진맥진하고 요셉의 심장은 군인들을 볼 때마다 쿵쾅거린다. 이 악몽은 그들이 피난처에 이르렀을 때도 끝나지 않는다. 요셉과 그 가족이 떠난 후 그 자리에 온 땅을 어둡게 하는 어린아이들의 피가 흘렀고 슬픔에 우는 그 어머니들의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우는 소리” (18)가 그 땅을 뒤덮었다.

-한 독재자가 자신의 힘과 권위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 때문에 벌인 이 일로 인해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선물을 받은 땅이 어린아이의 피로 물드는 것을 보며 이들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멀리 이동해왔는가? 마태의 압축된 이야기 곧 18절이라는 간단한 구절들에 나타난 동방박사로부터 영아 살해에 이르는 이야기는 인간의 상황을 진실되게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물[the gift of God, 아기 예수]에 대해 우리가 드릴 선물을 찾고 또 찬양하고 아낌없이 드리려는 우리의 열심을[동방박사의 선물처럼] 보여주는 반면에 이런 은혜를 거부하는 것들 곧 인간의 마음에서 뿐만아니라 폭력을 동원하여 고상하고 거룩한 염원을 짓누르는 군사적, 정치적 시스템을[영아 살해]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두 번째 꿈은 희망과 악몽이라는 반복되는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 꿈은 안도의 꿈이다(a dream of relief): 헤롯이 죽어서 이 여정에서 직접적인 두려움이 제거되었다. 요셉의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고향! 비록 불법이민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언어, 음식, 문화가 다른 곳에서 난민(refugee)이 되어 애매모호한 자격으로 살던 것을 정리하고 이제 이들은 고향 즉 멀리 떠나서 살면서 더욱 소중함을 알게 된 고향의 음식, 언어, 이웃이 있는 그 곳으로 수 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이전의 악몽을 다시 꾸게 된다. 이번에는 요셉이 그 꿈을 꿀 이유도 없었다. 헤롯은 죽었고 아버지의 잔인함을 이어받은 그 아들 아켈라오 (Archelaus)가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다. 아마도 헤롯과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요셉은 곧 불안해졌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22) 그의 두려움은 세 번째 꿈으로 나타나서 그와 그의 가족은 갈릴리 북쪽 먼 곳으로 방향을 정했다[고향 유대가 아닌].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 옛 이웃들에게로 가는 일은 포기하게 되었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어린시절을 난민(a refugee)으로 시작한다: 유대에서 도망하여 이집트로 그런다음 다시 이집트에서 유대로 그리고 마침내 유대에서 갈릴리로. 예수의 유년시절은 마태가 후에 예수 스스로 말하게 하는 내용에 요약되어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 8:20) 어린 예수는 그가 태어난 날부터 머리 둘 곳도 없었다. 이 거룩한 가족은(The Holy Family) 난민 가족이다.

-대부분 집이나 교회에서 말구유 장면을 설치해놓고[평화로운 아기예수 탄생 장면] 성탄절이 지나면 그것들을 모아서 내년 성탄절 시즌이 돌아올 때까지 보관해두곤 한다. 거룩한 가족이 고난을 당한 것에 관한 마태의 기록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 자리에[말구유 장면 대신] 목자들을 설치하는 게(누가복음) 나을지 모르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들판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고향이 있었다는 것을 뜻함]. 또 동방박사를 두어야 할지 모르는데 그들 역시 멀리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 마리아, 요셉은 그러지 못했다. 이 세명은 모두 외로웠고 잔인한 폭군으로 인한 공포에 직면하고 있었다. 방문자도 없었고 쉴 만한 외양간도 없었다. [목자들처럼]귀여운 양이나 다정한 소도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가족을 우리 집이나 교회의 다른 곳으로 옮겨드려야 한다. 아마도 드넓은 세상이 보이는 큰 창문으로 안내하는 것도 좋겠다. 이 창문에서 보이는 세상에는 여전히 폭력과 억압과 공포가 있고 안전을 위해 도망가는 난민들이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난민 예수 (Jesus the refugee)에 관한 설교나 혹은 이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하는 것을 생각해본다. 설교자는 난민에 관한 교단간 대화기록이나 인터넷이나 뉴스자료를 가지고 마태의 이야기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설교는 말구유 장면을 배제할 수 있다. 이 설교는 거룩한 가족과 그들이 겪은 위험한 상황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셉이 꾼 악몽을 다시 돌아보면서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요셉이 도망가는 대신에 난민가족이 환영받고 안전하게 되는 세상을 위해 그들이 바라는 꿈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해도 좋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꿈이 현실로 되게 한다면 크리스마스 캐롤이 어떻게 들릴 것인가를 상상해보라. 아기 예수가 결코 난민 예수가 다시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없이 어떻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우리 마음에 다가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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