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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장 18-2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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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바젤에서 여러 해 동안 가르친 신학자 로흐만(Jan Milic Lochman, 1922-2004)은 동구 공산주의와 서구 자본주의가 모두 실재에 대한 “1차원적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진실(truth)은 사실(fact)로 축소되고, 사실은 <생산과 소비를 중요시하고, 이에 근거한 실재의 평가와 제어를 가능케 하는> 지배적인 경제체제 안에서만 의미가 있게 된다. 로흐만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그런 맥빠진 인식, 아니 오히려 인식의 결여로부터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적 설교는 실재를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근거로 평가하도록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준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를 생명을 주는 진리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자가 이 세상의 지배적 질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kosmos)에 포로가 되어 기존 질서를 비판하기보다는 그 안에 안주하라고 설교하지 않는 한에서 그러하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잘 알려진 성탄의 본문은 설교자가 이런 관점에서 자신을 살펴보고, 그 후 회중이 이와 비슷한 성찰을 하도록 도울 기회를 제공한다. 로흐만이 사도신경의 관련 구절-“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 낳으시고”-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우리의 일차원적인 사고에 맞게 축소하면서 본문을 읽을 때 중요한 의미는 잃게 된다고 말한다.

지난 세기 북미에서 있었던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은 아마도 이런 과정의 최악의 사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영향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일반 대중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의 본문이 예수의 부모에 관한 사실적 진술, 생물학적/역사적 진술이라고 보는 것 같다. 예수에게는 인간인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없었다. 마리아는 하나님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수태되었다. 따라서 이 아이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는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이런 주장이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혹은 핵심적인- 부분이 되는가>, 아니면 <기독교 초기 전승에 편입된 전설-중요하지 않고, 기껏해야 해가 없는-과 같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 탄생과 관련된 특별한 주장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의 부모를 평범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기에 성육신을 부정하는 입장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인정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그것도 성육신을 부정하는 주장과 연결된다. 적어도 교회가 정교하게 규정해온 성육신의 의미를 고려할 때 그렇다. 한 부모는 신성을, 다른 부모는 인성을 갖고 있다는 표현은 일차원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현대인에게는 혼혈(hybrid, 혼종)이나 반신반인(demigod)을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교회가 칼케톤 공의회 이후 계속해서 고백해왔던 예수 안에서 드러난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의 공재>가 아니다.

칼케톤 문서는 예수의 신적이고 인적인 기원을 우리가 DNA에 관한 질문을 할 때 생각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신성에 관하여서 그는 태초에 아버지로부터 나셨다. 인성에 관하여서는 바로 그 동일한 분이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어머니인 처녀 마리아(the Virgin Mary, the Mother of God)에게서 종말의 시대에 나셨다.” “아버지로부터의 나심,” “처녀 마리아로부터 나심이라고 번역된 부분이 원문에서는 모두 같은 동사, gennethenta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자의 영원한 나심과 성자의 성육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성자를 낳은 것이 인간의 시간으로 예수의 탄생 얼마 전에 일어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성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고유한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본문이 예수의 수태와 탄생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성부가 아니고 성령으로 언급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마리아는 성령으로부터 아이를 갖게 되었음을 고지받았다.(18). 요셉은 마리아가 수태하게 된 것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들었다.(20) 이렇게 말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본문을 어떻게 읽는 것이 신학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깨달을 수 있다. 즉 어떻게 1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의 충만한 지평으로 나와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야기를 그리스 신화와 비슷하게 취급하는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신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영은 새로운 것을 위한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성령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르면) “주님이고, 삶의 증여자이시다. 마리아의 아이가 성령으로부터 생긴다는 표현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고, 그것이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셉의 수태와의 비관련성은 -요셉을 통하여 예수의 고결한 혈통을 세우려는 의도가 있는 마태복음 첫 장의 17절에 이르는 그 주의 깊게 구성된 족보를 신랄하게 제외시키는-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어떤 인간-그 지위나 자격이 어떠하든지-도 그 공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글의 지금까지의 성찰은 처녀 탄생을 해석적 도그마(nterpretative dogma)”로 여겨야 한다는 로흐만의 제안을 따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신조(article of faith)가 아니다. 처녀 탄생의 문제가 지난 세기에 큰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은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보기 위해 인간이 눈을 떠야 한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다. 처녀 탄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더 중심적이고 진실된 선언, 즉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선언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과 기다림의 계절 대림절에 담겨있는 은혜가 가득 찬 신비이다.

 

 

주석적 관점

-1:1-16에 나오는 긴 족보는 끝에 문제가 된다. 1절은 이어진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보여주려 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요셉에 이르러서,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어색하게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16)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25절은 이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려는 것이다. 마리아의 기적적 임신은 설명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

실이 드러났다”(18) 요셉은 그의 임신의 이유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녀가 외도한 것으로 여겼다. 약혼도 결혼과 같은 것이기에 외도는 간통으로 여겨졌다. 결혼은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옴으로 이루어진다. 그동안에 신부는 친정에 머물고 이때 성적인 관계는 허용되지 않는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된다. 이것은 그가 외도한 아내와 반드시 이혼해야 하고, 율법은 이에 대해 용서하거나 간과할 수 없도록 한다. 그런데 그의 의로움은 율법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요셉은 마리아의 간통을 공개하는 공개 이혼으로 모욕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사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는데 족보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예수가 오직 요셉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데, 하지만 요셉은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다. 이 문제는 21절에서 천사에 의해 해결된다: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요셉은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다. 사실상 요셉은 예수를 입양하여 법적으로 다윗의 족보에 들어오게 했다.

-이 장에서 마태는 두 번이나 예수에 관해 genesis라는 말을 사용했다. 1절은 족보의 제목 또는 1-2장의 탄생설화의 제목이 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관한 책. 이 단어는 18절에 반복된다.“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태어나심에는 다른 단어가 가능하기에 우리는 마태가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를 생각하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마태는 예수의 역할을 새로운 창조라고 암시하고 있다(고후5:17).

-마태의 21절의 단어놀이는 이방독자들에게는 놓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유대이름 여호수아(Joshua)의 헬라어 이름이다. 히브리와 아람어의 이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상기시킨다. 마태는 두 번이나 예수를 그리스도라 했다(1,18). 그리스도가 이방의 적들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리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마태는 그의 예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예수가 다른 종류의 구원을 가져온다고 말함으로 시작한다. 이 주제는 20:28“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26:28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에 다시 나타난다. “그의 백성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을 말하는데, 하지만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메시야의 백성이 된다고 바꾸었다(11:17을 보라). 22-23절에서 우리는 마태의 빈번한 공식적 인용을 접하는데 성서를 언급함으로 어떤 사실의 진실이나 중요성을 확증하고 있다. 여기에선 마리아의 기적적 임신을 이사야 7:14으로 지지 받는다. 이절의 히브리어 번역본에서 almah는 결혼이든 미혼이든 젊은 여인을 말한다. 이사야의 맥락은 기적적 임심을 제시하진 않는다. 이사야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때, 유대인 번역자들은 parthenos라는 말을 선택했는데 이는 처녀라는 의미이다. 왜 그들은 이렇게 번역했을까? 도움이 되는 단서는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처녀라고 사용되는 예언서의 구절들이다(37:22; 14:17;18:13;31:4,21 1:15;2:13; 5:2). 우리는 이 절이 마태에게 특별히 중요하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헬라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를 증명하는 본문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여기에서 처녀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미래시재)을 본다. 이러한 메시야 희망은 처녀의 아들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본문의 진술을 강화시킨다. 이 본문을 마리아에게 적용함으로써 마태는 예수가 성령의 아들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마리아가 처녀 이스라엘의 본질로 제시하고 있다.

-임마누엘을 이해하는 () 기독론 ()기독론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사야서에는 태어날 아기가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힌트가 없다. 사실 어떤 역할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단지 호세아가 그의 세 아들(1:4-8)에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단순한 상징이다. 임마누엘이라 이름은 하나님이 국제적 위기 속에서 그 민족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의 약속이다. 만약에 알렉산드리아의 번역가가 이것을 메시야 본문으로 생각하면 그들도 의심할 것 없이 임마누엘이란 것을 하나님이 메시야와 함께 한다는 것과 그에게 힘을 준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는 신적 인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도 역시 마태의 견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는데 그런데 이것이 언제나 신의 아들란 뜻은 아니다. 삼하7:14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아들이라고 말했다:“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서에는 기독론의 증거가 있다. 하지만 부활 뒤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를 경배했고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들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고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28:17-20), 결론적으로 마태에게 임마누엘은 아마도 예수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미국의 문화와 미디어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족이 화목해지고 즐거운 잔치를 한다는 잘못된 기대를 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미지와 기대는 홀마크 (Holmark)와 쇼핑몰 카탈로그가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규정하게 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몇 주 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 같은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과 가족들 때문에 그들이 누려야 한다고 믿는 성탄절을 누리지 못해서 공허하고 슬프다.

오늘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종종 안락한 사회의 기대와 관습을 뒤집어 놓는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완벽한 연출과 약속에 따라 정교하게 준비되어 제작된 것이 아니다. 확실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처녀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중들 대부분은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이 실제로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지를 잊고 있다. 예쁜 출생 장면 뒤에는 충격과 추문이 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완벽한 크리스마스"라는 개념에 도달하도록 살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이 살아 온 것보다 더 우아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권해보라.

오늘의 본문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이 전통적인 것이었지 적절한 것은 아니었음을 상기시켜준다. 본문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요셉은 곧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임신한 것을 알았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은 그 아이가 성령의 아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요셉에게 이 임신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습과 윤리를 위반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관습과 법에 따라 선택하는 것보다 인도적으로,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결심한다. 아마도 친절 때문이거나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는데, 그는 이 일이 계획한 대로 또는 관습대로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때때로 요셉과 같다. 우리가 하는 일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 우리는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소란을 일으키기 원하지 않는다. 아마도 본문은 우리가 요란하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조용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 이야기에 비추어, 해야 하는 신실한 일과 해야 하는 신실한 방법이 때때로 사회적 관습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것은 배우기 어려운 진리이다. 요셉은 정치적으로 반항적이거나 혹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 알려고 관습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관습을 위반했고 마리아에게 신실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속에서 천사를 보냈다. 천사는 나는 이것이 당신이 기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요셉. 하지만 다 괜찮아질 것이다. 유대인의 관습과 율법에 따르면 당신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상황에 처해있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신다.”

이것이 이 본문의 메시지이다. 예상치 못한 일들, 관습에서 벗어난 일들은 종종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놀라운 표징이 될 수 있다. 그림처럼 완벽하지 못한 크리스마스들, 우리가 보기에 완벽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트리, 우리가 원하는 만큼 완벽하지 않은 삶 한 가운데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신다.

어쨌든 요셉은 이 이상한 소식을 신뢰해야 했다. 이 아이가 성령으로 말미암았고, 그는 이미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구유에 있는 아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예수가 정확하게 어떻게 죄 사함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구원에 대해서 너무 신학적으로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을 시작하는 것은 어떻게든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줄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사랑이나 개입을 통해 그들이 후회하는 일로부터 구원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지혜나 사랑이 우리의 행동을 형성했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구원에 관해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려고 해보라.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어떤 전통의 선포에서 나오는 교만함 대신 겸손함으로.

이 소식은 요셉이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셉은 예수를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전에서 십자가로 그리고 빈 무덤으로 데려가는 여행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 요셉이 이 모든 일들을 듣게 된다면, 그 소식은 그가 받아 온 소식들보다 훨씬 더 그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여러 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시고,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신뢰하고 따르라고 손짓하신다.

우리의 목회 가운데 그런 시간들이 온다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낯설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하도록 부르실 때 그들 자신의 삶의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고 초대하자. 시인 David Whyte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대부분에게 부르심은 당신이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성서적으로 오지 않고 친밀하게 찾아올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작은 발걸음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향해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실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전부는 놀라운 일이 약속되었고,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갈 것인지, 또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세우신 길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일어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라고 요청한다.

    

설교적 관점

 

-우리 교인들은 이번 대림절 넷째주일에 우리가 구세주가(the savior) 가까이 오고있다는 복음을 설교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임마누엘이 가까이 오고있다는 을 이미 알고 있다하더라도 과연 그들은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을까? 오늘날 신자들은 여전히 구세주가 필요한가? 구세주가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하는가? 구세주가 우리를 무엇을 위해 구하는가? 아마 오늘 설교는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설교는 요셉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어린 신부 마리아를 통해 놀라운 답을 줄 것이라는 그의 깊은 신뢰를 중심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올바른 질문하기 (Asking the Right Questions)

아마도 여러분은 늘 질문을 무시하는 교사나 교수를 만났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녀/그는 학생들이 요청하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긴 대답을 늘어놓는다. 그 대답들은 종종 재미있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을 지적하지는 못해서 별로 도움이 안될 때가 많다. 설교자들 역시 교인들이 요청하지도 않는 질문을 하고 답을 할 때가 많다.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우리도 신자들이 정말로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지를 생각하도록 돕는 질문을 주기보다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구세주가 가까이 오고있습니다라고 선포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이사야 당시의 사람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구원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마다 신자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천사는 이 백성들이 구원을 위해 외쳤을 그 어두운 시간들을 기억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유배되었던 바로 그 시기였다. 우리는 이런 옛 사람들의 얼굴들이 저녁 TV뉴스에 나오는 오늘날의 유배자들”(contemporary exiles)의 고난 속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가정이나 안전과는 거리가 먼 작은 천막 속에 살면서 5명의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난민 여성의 얼굴을 흔히 본다. 때로 뉴스에 나오는 얼굴들은 노숙인 쉼터에서 자는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의 노숙인들 얼굴들이다. TV에 나오는 이들 유배자들의 얼굴을 보았을 때 우리는 바벨론에 살고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복음서는 이사야가 유배된 이 백성들을 위해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마누엘을 보낼 것이다. Dianne Bergant는 임마누엘(Immanuel)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with us is God)는 개인적 이름이라기 보다는 타이틀이라고 말한다. 믿음의 조상들은 왕들은 인간형태를 지닌 신들이거나 적어도 신들의 세계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었다고 믿었다. 그들의 세계 속에서는 언제나 많은 임마누엘들 (immanuels)이 있었다. 교회는 아하스왕에게 처음으로 내려진 이 고대예언이 우리의 상상 그 너머에 있는 임마누엘(Immanuel)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구세주가 필요한가? (Do We Still Need a Savior?)

특정한 정치적 유배자들에게[바벨론 포로기] 그리고 그 다음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특정한 그룹에게 주어진 임마누엘이라는 옛 약속이 오늘날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 옛 약속은 만일 오늘날 신자들이 오늘이 유배상황임을 인식하게 될 때 상관이 있을 것이다. 이사야 당시 백성들의 고난 그리고 오늘날 유배자들의 모습들은 우리들 대다수가 유배의 시간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사실을 나는 정말로 행복한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 인생에서 채워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믿으며 행복해하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넉넉한 수입이 있고 가족들을 사랑하며 대체로 생을 즐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는가: “나는 왜 창조되었나?”“이 땅에서 내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생이 다한 후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보다 무언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가장 만족한다는 휴머니스트가 내 인생은 진실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그녀는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지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다

-일단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위험부담이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올바른 질문은 보통 우리가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어느 라디오 토크 쇼에서 회복 중에 있는 마약중독자가 그가 회복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던 날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어느 호텔에서 평상시처럼 600불 어치의 마약을 가지고 문을 걸어 잠갔다. 이 때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는데 그것은 자신이 행복감을 얻기 위해 약물에 의존할 때마다 자신이 혼자라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죄가 우리의 삶에 비쳐지는 강한 모습이다. 죄는 구세주가 우리를 다스리도록 맡기기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다스리려는 선택이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킴으로서 신적 도움을 거부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약물에 의존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기를 선택하고 또 누군가는 돈 벌기, 쇼핑, 도박, 일 중독 혹은 단순히 홀로 있음으로해서 그렇게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우리가 이러나 방식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하고있지는 않은지 질문하도록 한다. 이것은 위험부담이 있는 질문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안에 있는 빈 자리를 예수께서 채울 수 있으리라고 신뢰하고 있는가?

 

신뢰로의 초대 (The Call to Trust )

요셉은 오늘 복음서에서 깊은 신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가 깨어 기도할 때 요셉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불타는 가시덤불(모세)이나 산 위에서 구름등 어떤 분명한 것도 없다. 단지 꿈만 있다. 우리는 꿈을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잠에서 깬 후 잠깐 기억하지만 곧 잊어버리지 않는가? 하지만 요셉에게는 꿈으로 족했다. 그는 마리아에게 무엇을 해야하나?” “율법은 무어라 요구하는가?” “내 마음 속에서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등의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 꿈은 이 중대한 질문에 대답을 주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 성탄절 전 마지막 주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중대한 질문을 하도록 도와주기를 기대해본다. 만일 우리가 답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를 답으로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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