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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28:1 –10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아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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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1 10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아

(2017.04.16. 메디월병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예수님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이 부활주일에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이적을 많이 체험하고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려 했던 무리들은 고난을 맞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옛 직업인 어부의 생업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며,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발각될까봐 두려워 묵고 있는 집의 문을 꽁꽁 걸어 닫고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사건은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과 변화를 안겨주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항상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지켜봤던 제자들의 믿음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자리마다 있었던 제자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마다 함께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 많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주님 앞에서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했었고,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열을 올리며 다짐했었던 그 제자조차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들은 이전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린 채 예수님을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갔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십자가 현장에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예수님을 장사지내려는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아는 여자와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만이 예수님을 위해 눈물 흘렸고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능력과 이적을 행하실 때 그를 따라다니며 환호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셨을 때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따라갔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십자가의 고난의 행렬에 묻혀서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던 자들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싸늘한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실망치 않는 위대한 힘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만을 사랑했던 많은 무리들 중 하나가 아니라 주님의 인격, 주님의 사랑. 주님의 가르침을 사랑했던 자들입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기대하여 기다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지금 내 상황에 없는 것 같아 낙심하고 절망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닌, 담대하게 주님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고난 가운데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열 마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빛이 납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

모두가 무서워 떠난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제대로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안쓰러워 무덤을 찾았습니다.

이들이 무덤을 찾아온 것은 부활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한때 자신들이 의지했던 예수님에 대한 정성으로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찾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너무나 빚진 것이 많았기에, 예수님의 시체를 향하여, 무덤을 향하여, 그냥 눈물 흘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넋 빠진 채 앉아 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고 기다림이 있었다면 어떤 삶에 변화가 있었을까요?

 

여인들은 십자가의 증인들로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 여인들은 분명히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에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뇌리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흉악범들이 당하는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사람들에게 너무나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능력한 자신들을 보면서 여인들은 너무나 슬퍼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싸늘한 시체로 변한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2761무덤을 향하여 앉았던 여인들로택함 받은 제자들도, 아리마대 요셉도 다 떠났는데 사랑하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 무덤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십자가의 비밀을 다 알고 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믿었던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 표현이 성경 어디에도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도, 아무런 능력과 기적이 없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님의 시체만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의 마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어거스틴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여도 이 여인들처럼 주님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이다말했습니다.

반면 주님의 고난 앞에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은 나중에서야 여인들의 증언을 듣고 놀랍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한 이는 당시에 일급 시민으로 여겨졌던 남자들이 아니라 이급 시민으로 여겨졌던 여자들이며, 예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열두 제자들이 아니라 자의로 따라 다녔던 여인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예수의 고난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놀라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인류 역사의 최고의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고, 모든 예배자들의 효시가 되는 영예가 바로 그 여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큰 놀라움입니다.

 

오늘 누가 이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은밀하고 소박한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큰일을 한다. 요란을 떨기보다, 무슨 책임을 맡았다 우쭐대는 행위는 그 다음 얘기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는 바로 이런 관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정말 열렬히 주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자기 착각 속에 빠져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고자 발버둥 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일이 있으면 열심을 냅니다.

일이 없으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를 주면 열심히 합니다.

자리를 주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입장을 세워 주면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입장을 세워주지 않으면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주님을 따르는 참된 신앙은 우리 힘으로 소유할 수 없고, 신앙의 삶 또한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힘으로 주를 믿고 따르기에 주를 위해서 뭔가 해야 된다 착각합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열심히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며, 이만한 일을 하는 자신은 괜찮은 신앙이라 내세웁니다.

 

내가 하는 일의 분량에 따라 신앙이 있고 없음의 척도로 삼고, 뭔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신앙은 자라간다 착각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그래서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원합니다.

좀 더 많은 일을, 좀 더 성과 있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요.

하지만 이들은 주님의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내세우는 일이 목적이기에 능력을 구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구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자기 착각 속에 빠져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참 모습이 아닐런지요?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부활은 천국이 우리의 능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징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단지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며 모든 소망과 힘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주님이 말씀하신 부활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각종 향품과 향유를 사용하여 장례를 멋있게 치러 주길 원하셨나요?

예수님의 장례는 전혀 쓸데없는 행위입니다.

부활하실 예수님을 장사지낸다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무리들이 말씀을 기억하며 부활을 기다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숨었고, 아리마대 요셉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습니다.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불신앙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27:63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뿔뿔이 달아난 상황에서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정작 믿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요, 여인들도 아니었고, 자기의 새무덤에 장례를 치룬 아리마대 요셉도 아니고, 기타 주변의 사람들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신경 써 기억하고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잠 못 이루었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입니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교리에 대해 여러분보다 이단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제자들처럼 어리석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울타리 안에 있기에 예민하게 깨닫지 못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대한 특별 경계를 부탁했던 것이죠.

 

저가 살아 있을 때에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라

물론 이들은 그 가능성을 믿지는 않았지요.

오히려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 시신을 훔쳐다가 사람들을 혼동시킬 것을 염려하여 무덤에 대한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억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아니 나는, 어떤가요?

말씀도 읽고 예배도 자주 드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기대를 갖고 살고는 있습니까?

고난과 역경 앞에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옛 삶의 회귀로 내 삶속에서 예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워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예수의 향기를 풍기기는커녕 예수의 작은 흉내라도 내기는 한가요?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가지고 섬기며 따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신앙의 능력이라는 것에 매력을 갖고 흐느적거리나요?

그것은 남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돋보이는 인물이 되어보겠다는 욕심 아닙니까?

오늘 우리들이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것이 남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행위이지,

주님처럼 겸손한 마음과 심정으로 희생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길 꺼려합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사람들의 종교적인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이 없는, 헌신이 없는, 열심만 있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의해서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 관심을 두면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도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하기에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이 불쾌할 수밖에 없고, 단지 몸이 죽어서 다시 산다는 그 부활만이 마음에 들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힘이요 소망이요 기쁨이 되나요?

오늘 이 시간에 확실히 하여야 합니다.

 

전혀 부담감이 없는 부활, 전혀 거부감이 없는 부활, 이런 부활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부활은 기독교의 상징을 말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자가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일입니다.

 

5,6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의 생각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지 부활하신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식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기에 결국 그들이 찾은 곳은 무덤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도 여인들처럼 오늘도 무덤에 가서 주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곳에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상식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열정만 가지고는 부활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듣고 마음 판에 새겨 그 말씀을 기억하며 삶 속에 나타내는 자가 부활을 온전히 아는 자요, 기대하는 자입니다.

이런 믿음이 주님의 부활을 올바로 믿는 참 믿음이요.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올바른 신앙입니다.

 

결코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상식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발견한다면 부활의 주가 아니라 다른 예수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 상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지 않고 단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 찾아간 여인들의 수준밖에 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열심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상식은 자신의 정성이고 자신의 열정입니다.

여인들이 죽어서 무덤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도 주님의 부활을 돕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열정으로 찾아간 무덤에는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곳은 무덤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열정으로 일하는 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실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그 곳이 아닙니다.

7에 보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십니다.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이방으로 취급했고 멸시와 천대를 하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된 중심지로 진정한 부활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웅장한 예배당이 아니요, 인간들의 열정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임의 장소도 아니며, 자신을 낮고 천한 자로 인식하며 겸손하게 섬기는 그 마음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이 세상에 예수님의 영원한 부활의 세계가 임했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망의 권세에 매이지 않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이 참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세속적인 것이 휩쓸리지 않는, 오직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내 자신을 죽이며 사는 희생과 헌신의 삶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활이 혹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밀려옵니까?

구원의 은혜는 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운명적이고 비참하고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긴 따르되 갖은 인상을 쓰고 괴로워하며 따라갑니다.

내면에 두려움과 슬픔이 많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 같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슬픔과 운명을 극복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최초로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살아계신 주님을 친히 만나는 놀라운 경험,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경험하였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최초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경배하는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시체를 지키고 있었을 뿐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던 이 여인들에게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만약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부활하실 주님을 고대하고 기다려서 부활의 주님을 뵈었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컸고 영광스러웠을까요?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는 것도 그리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신앙의 용기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들 가졌던 신앙의 용기와 사랑에 주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더해져 진정한 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용기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주시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입니다.

부활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가 있기에 부활이 있고 부활이 있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은 죽는 자입니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사람을 이기고, 거짓을 이기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합니다.

부활은 내 생명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 놓는 귀한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약속받은 존재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합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이며 승리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흘려들어 과오를 범치 말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영광의 주로 오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주님을 맞이함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믿음의 심령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듣지 않고 세상 삶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해 낙심하여 방황하며 살아감을 용서하옵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여인들이 보여준 변함없는 사랑에 부활을 기대하는 진정한 믿음 갖게 하옵소서. 온 세상의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주로 오신 주님! 찬양과 경배 드립니다.

모든 것에 승리하신 주님을 본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낙심과 실망하여 쓰러져 포기하지 않도록 힘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을 믿고 기대하며 사는 믿음주옵소서. 어떤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모든 것에 주인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물드립니다 받으시고 모든 영광이 주님께 있게 하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혜가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세상 끝날까지 살기로 다짐하는 심령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길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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