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25-32 기쁨을 상실한 큰아들( 집안의 탕자)
2001년 3월 28일 동부교회 수요설교
지난번에도 말씀하였던 인기 드라마 온달왕자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 장미라는 병원원장의 작은 딸이 나옵니다. 그는 부모와 같이 살고 있지만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 부모와 같은 입장이 되지 못함을 봅니다.
한 집안에 그것도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살면서도 마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모를 너무나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기에 다른 행동을 하면서 부모와의 갈등이 생기고 집안에는 웃음과 기쁨이 없어졌습니다. 끝내는 집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봅니다.
드라마 속의 장미와 너무나도 흡사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해 기쁨을 상실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재산 분배를 받아 자유를 찾아 아버지의 품을 떠났습니다. 구속이 싫었습니다. 주체적인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자유를 찾았습니다.
과연 작은 아들은 새로운 관계에서 정말 자유를 찾았을까요? 아닙니다. 주체적이 되기는커녕 돈과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린 결코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사는 노예가 되고 맙니다. 처음엔 일시적인 쾌락을 누리지만 곧이어 공허함과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14절을 보면 “저가 비로소 궁핍한” 상태에 도달합니다. 스스로가 개척하여 일어서고 싶지만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피조물이기에 홀로 서기를 할 수 없는 존재임 알려줍니다.
반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재산 분배를 받아 아버지의 품을 떠날 때 큰아들은 아버지의 재산도 축내지도 않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밤낮으로 땀을 흘리며 수고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세상으로 나갔던 작은 아들이 거지의 꼴로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아버지가 보고 달려나가 책망은커녕 끌어 앉고 기뻐합니다.
아버지는 너무나도 기쁘기에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기쁨을 여러 사람들과 나눕니다.
그 때 큰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의 집에서 들리는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합니다.
그는 종을 보내어 그 까닭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지만 집으로 들어가 축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에 버럭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집 나간 작은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봤던 큰아들인데 작은 아들이 돌아왔다는 말에 자신의 모든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고 맙니다.
동생 생각으로 노심초사하며 걱정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익히 아는 큰아들인데 작은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되찾게 되자 큰아들은 동생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저는 이 시간 기쁨을 잃어버린 집안의 탕자인 큰아들의 모습을 생각코져 합니다.
큰아들은 자기의 의무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실했기에 작은 아들이 돌아온 날에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결코 큰 죄를 범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아버지 곁에서 떠나지 않으며 아버지를 보필한 효자 중에 효자입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살았기에 자신의 모든 모습이 아버지 눈에 당연히 받아들여진다고 여기며 살아온 아들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흠이 없는 아들이었지만, 그러나 이 큰아들은 너무나도 큰 잘못을 아버지께 범했고 기쁨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이를 알지 못한 불쌍한 자입니다.
왜! 그렇까요?
무엇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기쁨을 잃었을까요?
나는 아버지 집에 거하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상태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큰아들이 기쁨을 잃어버린 이유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그는 비극적인 위치에 있던 자입니다. 인간의 사고 속에는 자기 일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집을 떠나 “밭에”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밭에 있었지만 구원의 집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이 있고 살았던 자이지만 아버지 일에 관하여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밭에서 부지런히 일했고 밭의 일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신앙의 밭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며 생활한 자입니다. 예배에 출석하고 기도하며 이야기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행위들이 아버지의 집에 있던 것들이 아니라 밭에서 행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주를 섬기는 헌신이 아니라 나의 안녕과 축복을 위한 단계로, 의무감에서 행한 일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오직 밭에서 일어나는 일만 알뿐입니다.
지난 과거의 모든 일들을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축하잔치를 보았을 때 즐거워하기보다는 의문에 가득 차서 반문했을 뿐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잔치 소리가 어인 일인가 하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딤후 3;5절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두 번째로 아버지에 대한 거절입니다. 28절에 보면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을 달랬으나, 아버지의 간청을 응하지 않고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큰아들은 돌아온 작은 아들 때문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를 이해하지 못했고, 부도덕하고 더럽고 추했던 한 사람이 얼마나 놀랍게 변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를 잘못 알고 있던 자입니다.
아버지가 어느 아들에게나 은혜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니 알고 있는데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작은 동생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받을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공연히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는 배가 아파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독점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시기심을 발동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손수 나와 큰아들을 간청하는 모습은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시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이 어떤 사랑보다 더 큰 사랑임을 알지 못합니다.
큰아들은 이미 신앙의 밭에 있었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아버지 집, 구원의 집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반면에 작은 아들은 세상의 밭에 나가 있기에 교회와 복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쉽게 집에 들어가기가 쉽겠습니까?
그런데 큰아들은 마음속에 심한 질투와 시기로 들어가길 거절합니다.
셋째로 29절에 보면 독선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큰아들은 독선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고 아버지의 마음도 읽지도 못합니다.
오직 자신만이 거룩한 자임을 내세웁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은 종교인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증거하고 성경을 읽고 또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덕적이고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명을 어김이 없다”
그는 간음도, 눈에 보이는 공개적으로 어떠한 더럽고 추악한 행동을 한 적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도적질이나 속이거나 거짓말도 심지어는 남을 저주한 일도 없다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순종했고 그의 일을 책임성 있게 행했으며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성실하게 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하며,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어떤 것도 주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자신이 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것을 충분히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이 아들은 자기가 한 일이 아들의 당연한 의무인줄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함께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상속받을 재산을 위해 일해왔던 것뿐입니다. 아버지를 진정으로 존경하며 섬긴 것이 아니라 어떤 대가를 바라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생명의 근원으로 경외하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잇속 때문에 일했던 것입니다.
넷째로 큰아들은 형제를 몰랐습니다. 되돌아온 사람이 바로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될지언정 자신의 동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동생에 대한 멸시와 경멸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는 동생에 대한 어떤 애정이나 기쁨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까지 덧붙여서 힐난합니다.
30절에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 그러나 앞장 말씀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창기에게 사용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기쁨을 상실한 자는 자꾸만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거짓으로 덧붙이는 자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도 어떤 행위도 덧붙이는 잘못을 해서는 안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은 하나님의 참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있었던 부도덕한 삶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영광스런 재회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믿는 자는 과거를 말해서도 아니 됩니다.
몇 년 전에 TV 프로그램 중 개그 코너에서 “왕년에 내가 누군데”라는 코미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코미디가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나간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과거는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 중요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큰아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 하나님의 위대한 기쁨을 무시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말씀합니다. 그는 “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너의 동생”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큰아들은 자신의 형편을 몰랐습니다. 31절의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의 형편을 모르고 자연히 동생이 받는 은혜를 시기합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예배와 말씀과 약속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그에게 늘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집”에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런 그가 해야 할 일이란 시기하고 불평하기보다는 회개하고 종교적인 밭에 머무는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쁨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헌신"입니다. "겸손"입니다. "충성"입니다.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쁨을 상실했고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참 자유롭게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웃, 가족, 친구... 모든 관계에는 분명히 구속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구속을 구속으로 느끼지 않는 것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를 얻는 비결?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가치를 제대로만 깨닫는다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쉽게 상처받고, 쉽게 우시는 연약한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조건 없이 집나간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또한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모르는 아들을 향해 안타깝게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는 짓은 하지 맙시다.
혹 현재 내 모습이 탕자와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속히 일어나서 주저말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혹 집 안에 있는 탕자로 기쁨을 상실한 나라고 스스로 깨달으신 분 있습니까?
봉사하는 일이 그저 의무감으로 다가오고, 하나님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십니까?
남들이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나는 아닙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잖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아들의 특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잃었던 기쁨을 다시 찾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
너무나도 어리석고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가 아버지 곁에 머문다고 아버지를 잘 아는 것으로 여기며 살던 저희들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읽을 줄도 모르고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갈려고도 하지 않았던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가 잃어버렸던 기쁨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의무감에서 관습대로 살던 저희들의 모습을 벗겨주시고 주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셔서 항상 기쁨을 갖고 주님과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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