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왕따 예수 누가복음 19:1-10
동부교회 2001년 5월 9일 수요설교
어려분은 왕따를 아십니까?
언제부터인가 학생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로서 부각되더니, 요즈음에는 직장에서의 왕따, 대학에서의 왕따, 각종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이들 말에 따르면 왕따말고도 이름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전따"는 전교에서 따돌림받는 아이를 말하고, "우따"는 우주에서 따돌림받는 아이를 가리키고, "은따"는 은근히 따돌림을 받는 아이를 말한답니다.
이런 말이 생긴 것을 보면, 따돌림 현상이 이제는 재미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따돌림을 시킨 아이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재미로 따돌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힘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을 재미로 따돌리고,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정의 일원 중, 친구들의 은근한 따돌림 때문에 속상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재미로든 혹은 정당한 이유로든지, 어떤 친구를 따돌림 시키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따돌림이 무서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비겁하게 사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2천년 전에 지독한 왕따를 당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에게 위로와 용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나사렛에 살았던 유대 청년 예수로,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그가 진정한 왕따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반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했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왕따였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하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당시로서는 왕따들 이었습니다.
힘있는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였습니다.
종교인들은 그들을 차별하여 자신들은 "하늘의 사람들"이요, 그들은 "땅의 사람들"이라고 무시합니다.
그 종교인들 중 대표적인 자들은 "바리새파"입니다. 본래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하다"는 말로 부정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실제로 힘없고 약한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는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지만 당시의 종교인들의 관습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들과 함께 무리들을 따돌리고, 스스로 의로운 체 하면서 살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오히려 과감하게 왕따 들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귀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이적의 은혜를 입었으며,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라"는 확인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왕따 들이 예수를 얼마나 열렬하게 따랐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도 잘 아시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누구입니까?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치하에서 세리장은 말 그대로 매국노였습니다.
로마 정부의 시녀가 되어, 동족을 착취하고, 그 대가로 배불리는 사람들이 세리요,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세리들을 왕따 시켰고 털끝 만한 정도 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가 정말 악해서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먹고살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삭개오는 따돌림을 당하면 당할수록 돈을 의지하게 되었고, 후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외로움은 더해 갔고,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혹시나 그에게 무슨 해답이 없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올 줄,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같은 왕따에게 다가오실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 방문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온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기에 그 은혜에 삭개오는 감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뜯어 고쳤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혹시 그 동안에 다른 사람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삶의 가치관이 예수님를 만남으로써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는 이제 왕따가 되기를 그쳤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요, 그의 새로운 삶을 통하여 많은 친구가 생기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이런 식이기에, 당시의 많은 왕따들이 예수님를 열렬하게 환영하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를 진정한 왕따라고 하는가, 라고 묻고 싶겠죠?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원래 왕따라는 것은 힘있는 사람들이 그 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따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도 역시 왕따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들은 예수님를 지독히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왜 싫어했을까요?
우선, 주님은 그들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달랐고, 인간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달랐습니다.
주님은 생각에서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 생각대로 과감하게 살아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갔는데, 왜 그들이 예수를 거부했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은 그들이 잘못 가르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하여 자신이 부정적으로 평가될 때, 그를 미워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은 그들의 가르침과 행동에 대조가 되어 그들이 얼마나 잘못 살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을 그대로 숨기려 했으며 잘못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신들의 삶을 뜯어고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극은 인류 역사에서 자주 벌어진 비극입니다.
아니, 거창하게 인류 역사를 운운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특별한 신념에 따라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면, 사회적인 음모를 꾸며 그를 제거합니다.
바보처럼 튀는 것은 즐겁게 바라봅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튀지는 못하게 합니다.
자신들의 삶과 비교되면, 결국 자신들이 옳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와 똑 같은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달리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하여 정직했고, 그 믿는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삶이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은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지도자들로부터 지독한 왕따가 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그를 제거하기로 모의를 했고, 그 모의대로 주님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 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은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사는 삶을 증언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죽음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어떻게 그분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충실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왕따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신념대로 살기를 겁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큰 용기로 다가옵니다.
혹은 신념대로 행동함으로써 이미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혹은, 별 신념 없이,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매우 강한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주님의 삶과 죽음은 왕따를 두려워하지 말고, 결연한 의지로 자신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자신의 길이 옳은 길이어야 합니다. 그 길이 옳은 길이고, 그 삶의 방법이 옳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실, 오늘의 사회는 이런 용기 있는 젊은이들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이가 젊다고 당연히 젊은이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용기가 젊은이답게 만들어 줍니다.
마치 살아있는 연어가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정신이 젊어 있어야만, 이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필연코 왕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왕따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잘못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으려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갈릴리의 왕따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환호했을 때, 뒤에 있는 지도자들은 주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한 저항과 따돌림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굳세게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신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가치관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바르지 않은 가치관을 신념으로 알고 고집 부린다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긴 따돌림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이것처럼 애석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신념을 가지고 버텨 볼 수도 있고, 그래야 거룩한 왕따가 되는 기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아, 나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구나"라는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념대로 사는 모습을 가르쳐 주기도 하셨지만, 바른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분을 만나 알면, 진리가 보이고, 그 진리대로 살면,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진정한 청년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진리가 우리에게 청년 정신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그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그분을 배우십시오.
인간이 참으로 살아야 하는 길을 배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신념을 굳세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길을 가십시오. 많은 장애물들이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사회는 우리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족도 그것을 막을 수 있고, 우리의 친구들도 우리를 따돌리며 막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원하신 왕따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오늘도 거룩한 영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찬송가 359장 3절에 보면 “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 불의한 일을 버리고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우리의 찬송에도 있듯이, 세상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영원한 친구이신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두려울 것 없습니다.
그러니 그 반대가 되면 참으로 딱한 인생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친구들이 나와 한 편인데, 예수님만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과 함께 청년답게 여러분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살아가면, 그 사람의 눈에는 권력자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왕따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처럼 신념을 따라 살다가 왕따가 된 사람들이 보입니다.
또한 사회적인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따가 되어 그늘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왕따가 되어 보지 않는 한, 우리의 눈에는 결코 왕따가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높으면, 낮은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와 같은 왕따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스스로 왕따가 되어 살다보니, 왕따들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었고, 그들에게 스승이 되어주셨습니다.
왕따들이 함께 모여, 이 세상을 왕따 시켰습니다.
제 스스로 의롭다고 자고하던, 소위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왕따 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왕따가 되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일단 왕따가 되면, 우리의 눈에는 다른 왕따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들과 연대하시기 바랍니다.
왕따들이 함께하여 불의한 이 세상을 왕따 시키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역전입니까? 왕따들이 모여 세상을 왕따 시키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왕따 시키는 것을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왕따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세상은 그 왕따들을 하나씩 제거해 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거한 것처럼 그들은 승리에 도취하고, 그들이 옳다고 자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정신이 들게 하기 위해서는 왕따들이 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왕따들이 보기 좋게 이 세상을 왕따 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거룩한 왕따들을 두려워할 것이고, 그들의 존재로 인하여 불의한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조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은 조금이나마 의로운 세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서 어떻게 확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성인임을 어떻게 확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정한 신앙인임을 어떻게 확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과연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사는가, 그리고 그 신념을 얼마나 실천하면서 사는가?
바로 이것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의 기준이 아닙니까?
바른 신념을 가지고 의연하게 살고 있다면, 그는 진정한 젊은이요, 진정한 지성인이요, 진정한 신앙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혹은 두려움으로, 혹은 그런 것에 대한 의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젊은이도, 지성인도, 신앙인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왕따 예수! 그분은 우리의 삶의 표상입니다.
그분을 배웁시다. 그리고 그 분처럼 거룩한 왕따가 되는 일에 앞장섭시다.
거룩한 왕따가 되는 그 신비한 기쁨을 맛보며 사시는 심령이 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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