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십자가 직전에 일어난 일들과 연관된다. 본문의 서두에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라는 예수의 말이 나온다. 주석가들은 이 본문을 삼위일체의 근거로 해석하기도 했다. Hilary of Poitiers는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 이 영광은 아들 밖에서 온 것이 아니고 아들 안에서 나온 것이다. 아들이 원래 갖고 있었던 영광을 다시 돌려줌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 안에서 영화롭게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4세기 기독교 신학으로 요한의 본문을 해석하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에서 “이제(Now)”라는 단어를 통해 그 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과 바로 앞 장에서 예수가 말씀했던 모든 내용들이 곧 완성될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는 당신이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그 증거로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린다”(10:15)고 말했고, 예수는 다가오는 죽음을 영화(glorification)로 (아버지의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 즉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이 밝히 드러나는 순간) 이해했다.
예수는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33절)라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이 죽은 후 버려진 고아와 같은 상실감에 빠질 제자들을 걱정하면서 자상하게 그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한다. 요14:18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예수가 떠날 때 제자들이 받을 충격과 두려움은 매우 클 것임은 확실하다. 예수가 34절에서 주는 새로운 계명은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명백하게 드러나 보이는 예수의 자상함>과 <밑에 깔려있는 고난의 징조>가 다 담겨있다. 예수는 앞으로 제자들이 서로 간에 인내하라고 당부한다.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위를 통해 이 명령을 간절한 간청의 형태로 전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예수를 처형하는 사람을 용서할 것처럼,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제자들이 서로 돌보고, 서로 용서하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3:13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군대식의 명령이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와 같은 방식의 삶과 사랑에 거할 것>에 대한 간청이자 희망이다.
예수가 주신 사랑의 계명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이는 이 계명을 유대인의 계명과는 다른 영적인 종류의 계명으로서 이해한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제자들이니 새로운 종류의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키릴(Cyril of Alexander)은 다른 수준(degree)을 강조했다:
“모세의 율법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분이 인간과 같은 수치스러운 단계로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육체의 죽음을 경험할 필요도 없었다.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고 조롱받을 필요가 없었다... 사랑이 갈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한 사랑이었다.” (Commentary of John 9, in John:11-21, 114)
그 이후의 신학자들은 요한의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마태의 으뜸 가는 계명 (매태 22:34-40), 누가복음의 사마리아인의 사랑 사이의 긴장에 대해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단에 관한 논쟁의 전통과 다양한 선택론 신학(election theology)의 형태에서 이 주제가 다루어 졌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만(선택받은 자)을 위해 죽었는지 모든 인류(이방인, 이웃 포함)를 위해 죽었는지,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데서 더 나아가 세상 사람을 모두 사랑해야 하는지 등의 주제가 다루어 졌었다.
오늘 본문을 갖고 설교를 하려면 공동의 두려움 – 공동의 불안, 위협받는 느낌 등 – 에 대해 생각하며 두려움이 어떻게 공동체를 위협하고 공동의 선을 포기하도록 작용하는지에 대해 탐구해 보아야 한다. 공동체는 두 사람의 모임이 될 수도 있고, 국가와 같은 규모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탐구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보여주시는 부드럽고 연민에 찬 당부의 깊은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적 관점
- 기독교사상에서 이 구절을 과대평가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제자들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의 명령은 예수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인들의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구절로 인해 기독교윤리는 사랑의 윤리라고 일반적으로 말해진다. 대부분의 요한복음 독자 또한 복음서의 구조와 신학에서 이 구절을 핵심으로 여긴다. 본문의 의미는 문맥적 배경이 중요하다. 예수의 공생애에서 제자들과의 고별담화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본문은 예수공동체의 정체성과 성격에 근본적인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요한의 독특한 ‘영광과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특징 지워진다. 본문의 직접적인 상황은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이다. 배신의 역동성이 영광과 사랑의 성격을 바꾼다.
- 유다가 밤에 나간 뒤에 예수는 하나님과 인자의 영광을 선언한다. 원어에서는 누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영광을 받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예수의 사건들에서 있어서 하나님과 인자가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명백하다. 비록 한 번도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영광이라는 개념은 요한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어근에서 보면 영광은 명성을 의미하고,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평판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광은 하늘의 영광이나 하나님의 왕국의 경이의 측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하나님과 예수의 영광을 언급할 때는, 아마도 세상에 의한 그들의 적절한 하늘에서의 지위를 선언하고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런데 요한복음에서의 영광이라는 개념은 굉장한 역설이 있는데, 왜냐하면 예수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신하려고 밤에 떠난 유다나, 예수를 위해 그의 목숨을 던지겠다고 하고 그를 부인할 베드로의 이야기가 예수의 영광의 이야기에 부적당한, 관계없는 첨부가 아니다. 죽음과 배신은 예수의 영광의 핵심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영광을 받으리라는 선포 바로 다음에 예수의 떠남이 즉각적으로 선언된 것은 맞는 것이다.
- 이 짧은 구절은 또한 복음서 전체의 중심적인 신학적 주제, 이슈, 그리고 질문들과 결부된다. 복음서에서 많은 기독론적 노력이 하나님 존재의 본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가 “하나님”을 그의 신비와 타자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낸다. 예수 자신도 계속해서 그를 쫓는 사람들의 파악과 이해를 넘어선다. 현존과 부재의 끊임없는 교차가 여기에서도 영광이 고난으로, 떠남이 도착으로 나타나는 역설로 일어나고 있다.
- 사랑의 명령은 가장 많은 반응을 일으키고, 당연히 기독교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본문의 배경은 독자들에게 오랜 계약의식을 상기시킨다. 본문에는 예수의 떠남에 대한 선포와 함께, 새로운 계명을 주고 있고, 또한 이러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새로운 공동체의 공적 표시라고 말하고 있고, 여기에 공관복음에서는 주님의 만찬에 위치시킨 새로운 계약의 요한판을 포함시키고 있다. 사랑의 명령은 예수공동체를 조직하는 힘이자 표시이다.
- 이러한 계약 배경이 아마도 예수가 이 명령을 “새롭다”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사랑의 명령이 이전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공동체가 그것의 주어짐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는 새로운 것이다. 계약의 콘텍스트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아마도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인들은 언제나 이 명령을 보편적으로 이해했는데, 예를 들어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마5:44)과 연결한다. 말하자면 사랑은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에 스스로를 제한시키지 않는다.
- 사랑의 내용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단순히 예수가 모델이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수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 나사로에 대한 통곡,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대한 안전을 위한 헌신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명령은 그러한 예들을 넘어선다. 예수가 15:13에 말한 대로,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는 바로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친구를 위해서 내놓았다. 예수를 모델로 삼음으로 모든 한계를 넘어섰다. 주어진 상황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은 모든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오랫동안 사랑의 명령의 심리학적 불일치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랑이 명령될 수 있는가? 사랑은 복종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선물이요 사건이다. 그래서 요한의 신학에서는 사람들의 사랑이 하나님의 현존에 속한 것이다. 계약의 용어로 말하면, 예수는 제자들의 사랑을 통해 살아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예수 안에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 안에 산다는 것이다(15:1-11).
목회적 관점
유다가 나갔다고 복음서는 말한다. 때가 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배신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졌고, 이제는 멈출 수 없다.
유다는 나갔고, 예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제자들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제자들은 싸우고, 저항하고, 그리고 결국 도망갈 것이다. 그래서 이번이 예수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말할 마지막 기회이다. 제자들에게 학생에게 하듯이 말하는 대신, 예수는 그들에게 그의 인생에서 특별한 이 순간의 통렬함을 전해주려고 친밀하게 이야기한다. “어린 자녀들아,” 예수는 다 큰 어른들에게 말한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가 올 수 없는 곳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사랑했지만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집중적인 대화를 했던 기억. 그것은 우리 나머지 인생 동안 참으로 신성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요점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평소에 말하던 비유와 역설이 아니라, 단순하게 명령한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바로 이것이다.
어떤 현대 신약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 새로운 계명은 유아가 기억하고 깨닫기에 충분할 만큼 단순하고, 가장 성숙한 신자들이 이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느끼며 되풀이해서 당황하기에 충분할 만큼 심오하다.[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Leicester, England: APOLLOS, 1991), 48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35절).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우리들 대부분이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게 해서 이 계명을 쉬운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가; 여전히 우리는 진정한 신자를 식별하는 다른 많은 방법들을 발견했고, 종종 이 계명을 우리 가정생활에 적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수는 성경의 중요성이라든지 신중하게 구성된 신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죽은 후 두 세대가 될 때까지 기록되지 않았고, 니케아신조는 그 후 350년 동안 전투적인 신학자들에 의하여 고안되었다. 성경과 신조는 수년 간 인류에게 너무나도 중요하게 되겠지만, 예수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정통과 씨름하면서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전쟁까지 했지만, 우리가 알기를 예수가 바랐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예수의 방법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나 지적인 설교자의 방법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방법이었다.
“어린 자녀들아,” 예수는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의 계명은 당신이 믿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이슬람에 관한 그녀의 첫 번째 책을 썼을 때 특히 그녀의 가슴에 와 닿았다. 그녀가 이해하기로, 무슬림들은 복합적인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그들은 메카 순례와 라마단과 같이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제의적인 행동을 수행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복종을 의미하는 행위로 하루에 여러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면서 엎드려야 한다. 무슬림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관대하게 베풀기 원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관용의 영을 배양하는 방법으로, 그들 중에 있는 더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한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Armstrong은 이런 반복적인 행동이 개인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요점은 이것이다. 이것은 신앙 체계가 아니라 과정이다. 종교 생활은… 사람을 자신을 영원히 변화시킬 수도 있는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Karen Armstrong, 281.]
물론 기독교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실천과 제의들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종종 신앙에 있어서 누가 정통이고 누가 수정주의인가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관심은 자기 삶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내는 사람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만약 너희가 바른 것을 믿는다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Isak Dinesen의 책 Out of Africa에 Kitau라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Kitau는 어느 날 집안일을 하는 하인의 일자리를 구하려고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그녀는 그를 고용하지만, 삼 개월 후 그가 그녀에게 인근 마을에 사는 Sheik Ali bin Salim이라는 무슬림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요청하자 놀랐다. Dinesen은 Kitau를 붙잡으려고 임금을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Kitau는 기독교인이 될지 아니면 무슬림이 될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가 Dinesen을 위해 일했던 목적은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는 Dinesen을 위해 일하면서 기독교인의 방식을 보았으니, Sheik Ali에게 가서 무슬림의 행동을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가 결정할 것이다. 저자는 Kitau가 그녀에게 오기 전에 그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고 기억한다.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이것이 예수가 그의 관점을 제자들에게 전해 줄 마지막 기회였다. 더 이상 비유와 역설은 없다. 오직 단순한 계명 뿐: “어린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설교적 관점
-영광과 명예 (glory and fame)는 현 미국 대중문화의 키워드이다. 이 성서정과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에 나는 여러분들이 여가활용과 스포츠에 있어 가장 인기있는 최신 잡지를 구입하기를 권장한다. 온라인 상에서 대중에게 인기있는 웹사이트를 접속해보라. 가장 인기가 있는 유명 텔레비전 쇼를 시청해보라. 오늘날 영웅이나 스타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라. 영광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은 사람을 대중들이 좋아하는 일은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오랜 일이다. 이런 열정은 비록 미디어가 그들을 띄워줄지라도 단지 미디어의 역할로 인한 것은 아니다. 2천년전 지중해 유역의 대중적 문화에서도 사람들은 누군가 영광과 빼어남으로 등장할 때 주목하였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그런 높은 대중적 인기의 시간을 만났다. 이번 주일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선행구절에서 바리새파가 이같이 말한다: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요 12:19b) [인기를 얻었음을 바리새파가 인정]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낸 이런 종류의 영광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비단 세상뿐만은 아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 조차도 처음에 당황하고 이해를 하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장면 이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려 할 때 당황한 베드로가 이렇게 외친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13:8). 베드로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떻게 하나님이 겸손함과 희생적인 행동을 통해 영광을 얻게되는가 둘 다를 함께 수용할 수가 없었다.
-요한복음이 두 가지 다른 층으로 곧 예수 사역의 이야기라는 한 층과 그리고 요한공동체의 삶과 관심들이라는 또 다른 층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요한복음을 읽는 일은 당시 교회가 이 예수의 영광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에 대해 어떻게 고민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이라는 세계적인 경제와 군사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여전히 변방의 운동이다. 요한 공동체는 황제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지가 곳곳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이 교환하는 동전에는 황제의 머리가 새겨져있고 황제의 규율은 주둔하고 있는 군대나 황제를 대신한 통치자나 총독을 통해 시행된다. 이런 상황에 살면서 또 이런 경제적, 문화적 압력을 느끼면서, 교회는 (예수께서 배신을 당하고 고통과 죽음으로 가는 그 시점에서 말한)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13:31)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로마제국 이래로 예수가 말한 영광에 대한 다른 이해가 일반적인 어법에 들어있는지를 보려고 오늘날의 미국 사전 하나를 펼쳐본다. 그 사전은 8개의 정의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각각의 정의는 첫 번째 정의의 변형된 형태이다: “높임을 받은 명예, 칭찬, 혹은 일반적인 동의를 수반하는 탁월함; 명성 [William Morris, ed.,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Boston: Houghton Mifflin Co., 1976), 561.] 이 사전은 그리스도가 보여준 영광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조금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광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이해했을까? 우리가 이천년 전 로마제국에 살고 있든 아니면 오늘날 미국 대중문화에 살고있든 그 대답은 분명히 [영광이라는] 단어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영광이라는 의미는 명예(honor), 칭찬(praise), 탁월함(renown)로 쓰인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사람들과 영광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논쟁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이유이다:“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3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깊이 뿌리내려서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 모두를 풍성하게 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영광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어떻게 보여주셨는지를 세상에 설명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용어에 대한 논쟁이 아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숨쉬게 될 때 그 영광이 이루어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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