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의 본문은 예수와 <예수를 반대하는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의 배경 속에서 전개된다. 그들은 “성전 봉헌절” 기간 중 솔로몬의 주랑을 걷고 있었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을 밝히면서 축제 분위기에서 기쁘게 지키는 절기이다. 그러나 주랑을 걷는 예수는 전혀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다. 요한복음을 여기까지 충실하게 읽은 독자들은 <축제 기간에 기대되는 기쁨>과 <예수의 대적자들의 공격>이 대조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로고스요, 지혜요, 세상의 빛인 분이 솔로몬의 주랑을 걷고 있는데 대적자들은 그를 몰라본다는 것이 역설이다. 그 다음에 전개되는 장면에서는 요한의 신학의 핵심적 주제가 등장한다.
유대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가 메시아인지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평상시에도 이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질문이지만, <기원전 167년에 셀레우코즈 제국에 맞서 승리한 마카베오 혁명을 기념하는 축제> 기간에는 특별히 더 그러하다. 그에 대해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25절)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그의 대적자들이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26절) <예수가 행한 일이 증거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예수의 대답은 수수께끼 같다. 첫째, 예수는 그가 하는 일은 그가 메시아라는 명백한 공적인 증거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곧바로 양의 비유를 통해 왜 그들이 그 증거를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지를 설명한다.
예수의 대답이 담고 있는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집단 기억에는 “목자”가 매우 강력한 메시아의 이미지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사악한 목자와 대조적으로 예수는 선한 목자, 즉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저들은 사악한 목자, 사악한 지도자를 따르기 때문에 이 명백한 진리를 보지 못한다.
예수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를 따른다.”(27절)라고 말한다. 들음과 행함의 결합을 통해 예수의 양떼들과 예수가 결합된다. 이 결합 속에서, 제자들과 예수의 관계는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와 유사해진다. 예수는 그들이 믿음을 통해 영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28절) 마케베오의 순교자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것처럼 – 성전 봉헌절 축제가 증명하듯이 –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에 대한 헌신 때문에 영원히 살 것이다.
28-30절에서 예수는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절정의 순간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는 당신의 양들이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 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못 박힌 상처가 있는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이미지>는 매우 특별하다. 예수는 당신도 아버지께 의존함을 밝히신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29절)
이 구절에서 제한된 속죄론(limited atonement: 예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고 선택된 사람들만 구원한다는 입장)의 근거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보다 더 핵심적인 요한의 신학적 논지는, 첫째, 예수와 아버지는 동일한 목적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것과, 둘째로, 그들은 예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 즉 예수의 권능 안에 있기 때문에 – 제자들은 계속 예수를 믿고 그분의 일을 행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결론은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목적이 일치한다는 선언이다.
O’Day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말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교회는 오랫동안 그런 해석에 집착했었다. 물론 그는 삼위일체나 성육신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본문을 그런 교리로 환원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본문의 내용 중 설교자에게 고민이 되는 부분은 반유대주의(anti-Judaism)적 표현이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유대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두드러진다.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를 죽인 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 뿐 아니라, 오랜 교회사의 역사에 관통하는 <성육신과 삼위일체 교리 안에 담겨있는 대체주의(supersessionism)적 요소>도 반유대주의적이다.
이번 주일에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해 묵상하면서 예수의 손이라는 이미지에 생각을 모아 보는 것도 좋겠다. 부활이 예수가 <황제의 손이나 죽음의 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최종적 증거가 되는 것처럼, 부활절을 지키면서 우리가 예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확신과 신뢰에 근거하여 삶으로, 이 세상을 위한 예수의 손이 된다. 우리가 예수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를 우리의 손에 잡을 것인가?
* 솔로몬의 주랑(행각): 헤롯 대왕이 새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 뜰 동쪽에 있는, 지붕과 기둥만으로 된 방(요10:23; 행3:11; 5:12). 그곳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고,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고받을 때 쓰던 공간이다.
* 수전절, 성전 봉헌절; 요10:22)은 주전 165년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을 다시 봉헌한 사건을 기념하여 해마다 8일 동안 지키는 절기이다(1마카4:59; 2마카1:9 참조).
주석적 관점
- 이 구절은 다른 요한복음의 많은 구절과 같이 복음서 곳곳에서 취급하고 있는 신학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어떤 면에서는 이 구절을 읽기 위해서 요한복음 전체를 읽어야만 한다. 이 구절의 구성주제인 예수가 그리스도인가라는 물음은 또한 복음서 전체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 구절의 명백한 주제들인 성전봉헌절의 역할, 양의 이미지, 영생에 대한 약속, 예정론의 이슈,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등은 복음서 의 더 큰 논쟁점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실, 전반적인 상호교환은 요한복음 7장과도 밀접하게 병행한다. 복음서의 다른 부분과의 깊은 상호관련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특별한 역할을 가진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을 새로운 방식으로 도입하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뒤에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논쟁들을 야기한다.
- 배경은 성전봉헌절이다. 이 축제는 기원전 164년에 안티오구스 4세가 성전에 제우스상을 세움으로써 신성모독을 한 다음 마카비가 성전을 재봉헌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 축제는 히브리말로 하누카(Hanukkah 봉헌이라는 의미)라고 불려 졌는데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축제를 지키고 있다. 5장부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연속해서 참여한 축제들의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사역을 이러한 절기축제의 맥락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예수의 지위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 축제들의 지속적 효력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메시야가 오심으로 생긴 종교적 전통과의 갈등은 요한복음 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들의 주제이다. 만약에 메시야가 오셨다면 하나님의 행동과 하나님의 정의의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함은 성전에서 메시야와 그의 사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 또한 요한복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다양한 이미지와 신학적 전략을 가져온다. 예수는 처음에 그의 사역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예수의 정체성 이슈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답변이다. 요한복음에서 전체적으로 예수와 아버지의 하나됨은 우선 말씀과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는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을 말하고, 그가 하신 일을 행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우선적 논증은 예수의 행위의 특징에 관한 것이다.
- 그런데 요한복음의 신학적 논리에서는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 그 어느 것도 그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없다. 믿음이란 예수의 행동의 데이타에서 부가되지만, 데이터 그 자체는 믿음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 점을 주장하기 위해 예수는 이 장을 여는 이미지로 돌아온다. 3-16절에서 말한 것처럼, 양들은 그들의 목자와 문지기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가 그들의 목자가 아니고, 그들은 예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믿음을 단순하게 인간의 행위로 보고 있지 않다. 믿음은 하나님의 행동을 포함한다. 요한의 유명한 예정론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양으로서 하나님께 선택받는 것에 달려있다.
- 예정은 특정한 사람들은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준다. 28절에서 영생과 적으로부터의 안전의 확인은 17장에 있는 예수의 기도를 예고한다. 요한복음의 신학에서는 영생과 안전은 단순히 약속이 아니다. 예수의 양떼 속에 양이 되는 것은 이미 영생을 가지는 것이요,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현재시제로) 지금 영생을 준다. 이 확증은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는 29절의 확증으로 나아간다. 고대의 문헌에서는 실제로 이 문장에 관한 다섯 가지의 버전이 있다. 그런데 NIV의 “그들을 나에게 주신, 만유보다 더 크신 아버지”라는 덜 수수께끼 같은 버전을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 한 버전은 양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른 버전은 하나님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 이 모든 것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30)라는 유명한 주장으로 정점에 이른다. 그리이스어에서 “하나”라는 형용사는 남성형이 아니라 중성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이러한 주장이 아버지와 아들은 한 인격이라고 선언하려는 신학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리이스어로는 이를 실제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통적인 삼위일체적 한 인격론이 부정확하다거나 지지받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이 본문이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본문에서 확증한 일치는 행위의 일치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한다.
목회적 관점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24절).” 이 말이 정치적인 반대파들에게 대한 조롱이든, 아니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기독교인에게, 그 고난이 별거 아니라는 믿음을 그 말에 담아서 하는 것이든, 우리 모두는 “분명하게 말하는 지도자”의 매력에 익숙해져 있다. 물론 본질적으로 복잡한 것 혹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청중을 잘못 인도하고 토론의 주제를 손상시킨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할 때 겪는 어려움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표시이다. 우리의 마음이 이해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를 파악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신앙의 영역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욕심은 성경공부 참석자들이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는데 열중하는 성경공부에서 나타난다. 이런 성경공부에서는, 성경이 우리를 다양한 의미를 가진 풍성한 이야기를 경험하고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끈기가 있고 하나님께 대해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해독할 수 있는 암호화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의 명백한 의미”를 분별하려고 하는 사람은 불타는 덤불에서 말씀하시고 “나는 나다”라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 것도 분명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분명하게 말하는 침례교 설교자인 Will Campbell은 만약 모세가 이 경험을 자기 가족과 친구에게 말해주었다면, 그들은 “약 먹을 시간이야”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에서 예수는 그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이미 분명하게 말해주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예수가 그들에게 말해주는 방식이 그의 사역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할과 정체성은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양과 목자의 유비에서 분명해진다. 양은 목자를 알고 신뢰하는데, 이성적으로나 지적으로 분별해서가 아니라, 목자와 그의 “사역”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아이는 논리가 아닌 경험으로 엄마를 알고 신뢰한다.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막 10:15; 눅 18:17)”라고 말씀하신 것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확실히 기독교 변증론의 역할은 항상 있을 것이다. 결국,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마 22:37; 막 12:30과 눅 10:27에는 “네 힘을 다하고”가 추가됨)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올바로 분별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하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성을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우선적인 기능으로 여기고, 그래서 과도하게 지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데카르트의 유령(“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쫓아내려고 하고 있다. 자칭 무신론자 저자가 쓴 우리 시대의 베스트셀러들은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들에서 저자가 찾아낸 지적인 착오들을 드러내는데 전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생각과 개념 너머에 계신다고 믿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그 저자들의 많은 주장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관해 정당한 것을 믿는 사람들이 싸울 때, 신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대신 하나님에 관한 말들에 얽혀 있는 것을 본다.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목사들은 아마도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하나님 경험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에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하게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게 되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초대교회는 극적으로 성장했는데, 대중들이 신조와 교리의 진실을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계신 주님과 어리석은 자가 지혜롭게 되는(고전 1:27) 새로운 삶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우리는 너무 우리 머리에만 집착해 왔다.
사람들은 자주 그들의 목사와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분명하게 말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자기 신앙과 여행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놀라운 은사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여행을 하게 만들고 그들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고무하고 지원하는 일일 것이다. DeMello가 그의 우화에서 말한 것처럼, 안락의자 탐험가에게 지도를 그려주는 것은, 지도를 아무리 분명하고 명확하게 그려준다고 해도, 무익한 일일 수 있다.
설교적 관점
-네-아니오 대답을 선호하고 미묘하거나 암시적인 것보다 평범한 의미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을 읽는 일이 불만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단순함이 아닌 깊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 요한복음이 지닌 애매모호함이나 미묘함은 예수가 누구인지 또 그들의 삶에 예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그들의 노력에 잘 대응을 하게 될 것이다.
-각각의 번역에 대해 논쟁이 있지만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이 구절보다 앞에 있는 두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가 말한 것과 행동한 것에 관하여 “유대 사람들 가운데 분열이 일어났다”(v.19)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이 두 가지 관점 모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몇몇 사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할 명백한 이유를 찾기위해 질문을 하고 예수가 거기에 걸맞는 대답을 해주길 원하고 있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은 예수와 그의 종교적 질문자들간에 다소 복잡한 관계를 연출한다. 의심이나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에 있는 회중들에게 이러한 두 관점을 보여주는 설교는 환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수의 첫 번째 대답은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 애매모호함(ambiguities)이 있다. 그는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v.25a)라고 말한다. 사실 이 점에 대해 말한다면, 요한복음에서 그를 메시아라고 직접적으로 인정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인데 바로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다 (4:26).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지금 질문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 예수는 완곡하게 답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소경을 치유한 일도 알고 있고 선한목자라는 예수의 선언도 알고 있지만 그가 메시아라는 결론적인 선언을 아직 듣지 못했다.[이렇게 완곡하게 예수는 말하고 있다]대신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이 했던 일을 정체성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10:25b). 하지만 예수에 대해 질문하는 이들은 그 사역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do not belong). [요한복음의]이런 방식의 서술은 오늘날 합리적인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아닌 요한을 향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아주 공정해보이지 않는다:그리스도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사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해 묻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거나 믿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가 단지 그의 양무리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방식의 서술은 공정하지 않으므로 반발을 불러일이킬 수 있다]. 신실하고 은혜로운 설교는 이런 점들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반유대주의나 반 분파주의에 기초하여 무력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신학적 사고의 틀을 종종 지지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을 보다 공감하면서 읽는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있다. 요한은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먼저 시작하셨다는 분이라는 기본적인 믿음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오래전부터 우리를 찾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의 양으로 만드신다; 우리는 그를 우리의 목자로 삼지 않는다. 비록 기독교적 용어로 바뀌어져 있지만 이 하나님의 우선권과 주권은(initiative and sovereignty of God) 히브리 성경 안에 오랜 뿌리를 두고 있는데 특히 시편에 나타난 위대한 목자의 모습에 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시 23:1-2) 그리고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시100:3)에서이다.
-요한복음을 읽고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요한공동체 안에 있었던 갈등을 우리도 가져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신 설교 안에서 우리는 과거의 갈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혜를 요청할 수 있다. 우리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둘 다 인정했던 것 곧 하나님의 우선권과 주권을 새롭게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영생에 대해, 미래가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잡고 있고 어느 것도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음에 대한 감사를 분명하게 확언할 수 있다 (vv.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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